소설리스트

2화 (2/37)

2.

“형! 가방 왜 싸?”

짐을 챙기는 문성하의 곁에서 12세짜리 동생은 열심히도 말을 걸었다. 보지도 않고 백팩 지퍼를 죽 올린 문성하가 답했다.

“어디 좀 다녀올 거야.”

“여행?”

“비슷한 거.”

“나도 같이 가.”

“안 돼.”

“왜?”

동생이 벌떡 일어났다. 새까만 눈동자에 우울이 어려 있었다. 예상한 결과였다. 문성하는 동생의 거울이었다. 문성하가 밥을 먹으면 동생도 밥을 먹었고, 문성하가 목욕을 하면 동생도 목욕을 했다. 문성하가 공부할 때 동생도 공부를 하고, 문성하가 TV를 켜면 동생도 거실에 나와 TV를 봤다.

신기한 일이었다. 동생과는 고작 일 년을 같이 살았다. 피도 절반밖에 섞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동생은 맹목적이며 강인한 유대로 문성하를 갈구했다. 그리고 문성하도 그게 싫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 유대를 끊어야 한다.

“혜성이는 아버지를 돌봐야 하잖아.”

“아버지는 어른이잖아. 내가 아버지를 어떻게 돌봐.”

동생이 입을 삐죽거렸다. 눈망울에서 보일 듯 말 듯 물기가 비쳤다. 그러나 눈 자체가 너무도 깊어 얼핏 봐서는 우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문성하만이 알아볼 뿐이다. 참으로 기척도 없이 운다. 동생은.

그건 문성하와 꽤 닮은 부분이었다. 일 년을 함께 지내며 ‘형제가 참 안 닮았다’는 이야기를 밥 먹듯 들어 왔는데, 이상하게도 몇 가지 습관은 빼다 박은 것처럼 같았다. 우는 방식은 특히 그랬다. 문성하도 주혜성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우는 법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울 때 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혜성아.”

다 챙긴 백팩을 밀며 문성하가 한숨을 쉬었다. 눈물을 삼킨 동생이 빤히 문성하를 올려다봤다. 기다랗고 진한 눈시울이 제법 건조하다. 그러나 문성하는 안다. 동생은 아주 많이 울고 있다는 걸.

“곧 데리러 올게.”

진중한 한 마디에 동생의 울걱거림이 잦아졌다. 가만히 눈동자를 굴린 동생이 물었다.

“언제?”

“아버지가 아플 때.”

“아버지는 엄청나게 건강한데.”

“언젠가는 아플 때가 와.”

“그럼 그 전에 형은 안 와?”

동생이 화들짝했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속눈썹이 전율하고 있었다. 미적거린 문성하가 팔을 뻗었다. 자신보다 작은 동생을 끌어안고는, 조심조심 다독였다. 동생의 등을 타고 손이 미끄러졌다. 문성하는 고개를 숙인 채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빨리 떠올려야 한다. 뭐라도.

동생을 안심시킬 수 있는 최고의 핑계를.

“오긴 올 텐데, 그 전에 형 만나고 싶으면 저거 쓰면 돼.”

얼굴을 든 문성하가 데스크 위를 가리켰다. 그 무렵 생긴 동생의 개인용 PC였다. 동생이 칭얼거렸다.

“저거하고 무슨 상관이야?”

“네가 저거 쓸 때마다 형이 지켜보고 있다는 얘기야. 형이 프로그램 깔아 놨어. 혜성이가 컴퓨터 할 때마다 감시하는 프로그램.”

“거짓말.”

“진짜야. 너 어제 총 쏘는 게임 했지? 다음에는 게임 동영상 보고. 그리고 형 학교 게시판에 무슨 글 올라왔나 검색하고.”

문성하가 또박또박 말했다. 동생이 흠칫했다.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이었다. 문성하는 속으로 웃었다. 이런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동생이 컴퓨터로 어떻게 노는지는 문성하가 더 잘 알았다. 동생이 잠든 새 이용 기록을 찾아보면 그만이었다. 심지어 동생은 패턴이 항상 거기서 거기였다.

동생은 또래에 비해 상황 판단이 더뎠다. 선천적인 ADHD를 타고난 영향으로 일반인과 다른 발달 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어떤 분야에서는 지나치게 똑똑했지만, 어떤 분야에서는 지나치게 어리숙했다. 이런 상식에 가까운 분야는 동생이 가장 취약한 영역이었다.

“진짜구나.”

동생이 입을 오므렸다. 제대로 문성하의 거짓말에 넘어간 모양이었다. 생각에 잠긴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동생이 대뜸 고개를 쳐올렸다. 눈빛이 제법 결연했다.

“그럼 형은 저걸로 나를 보면 그만이잖아. 나는? 내가 형 보고 싶을 때에는 어떻게 해?”

문성하는 잠자코 동생을 내려다봤다. 동생의 손가락 장난은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작은 마디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까지 났다. 초조할 때 나오는 동생의 버릇이었다. 그러면서도 눈에 문성하를 담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다른 피사체는 모두 포기해도, 제 형만큼은 잃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동생은 문성하만 봤다.

문성하의 눈이 길게 감겼다. 어둠에 잠겨 생각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동생이 나를 보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동생을 버리는 것처럼, 동생도 나를 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최소한 동생이 불행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눈을 떴을 때도 동생은 문성하를 주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는지 하얀 자위가 온통 붉었다. 동생은 종종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강한 집중력을 나타냈는데, 문성하가 얽혀 있을 때면 예외 없이 극에 달했다.

반쯤 들렸던 문성하의 눈꺼풀이 흘러내렸다. 마주 보이는 동생의 속눈썹이 자신의 심장을 겨누고, 사정없이 찔러 오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아프되 아프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은 아픔을 호소할 자격이 없다.

“메모장 프로그램 알지.”

문성하가 운을 뗐다. 동생이 갸웃했다.

“메모장? 파란 아이콘?”

“응.”

“그게 왜?”

“거기다 형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 그러면 형이 바로 답을 보낼 거야. 해킹 프로그램 같은 건데, 형이 혜성이 잘 때 몰래 깔았어.”

“이메일이나 전화 쓰면 되잖아.”

“그게 가장 빨라. 그걸로 연락하다 나중에 전화도 하고, 화상 통화도 하자.”

동생은 말이 없었다. 문성하가 조곤조곤 재촉했다.

“혜성아. 알았다고 해야지. 응?”

작은 입이 오물거렸다. 이리저리 흘러가던 시선이 마지못해 문성하에 걸렸다. 동생이 침울한 고갯짓을 했다.

“알았어.”

문성하의 입꼬리가 조금조금 내려갔다. 완전히 일자가 되려는 걸 억지로 참아 가며, 문성하는 양 입가에 힘을 줬다. 누가 봐도 인위적인 호선이 입매에 걸렸다. 그 얄팍하며 값싼 미소로 문성하는 이 잔인한 연극의 막을 내렸다.

“그러니 혜성아, 형 생각날 때마다 컴퓨터 열심히 해. 형 다음으로 좋아하잖아. 게임도 하고, 다른 것도 하고. 얼마든지. 그러다 보면 형하고 다시 만날 날이 올 거야. 그리 머지않은 시점에.”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

“아까 화단에서 담배 피웠지?”

안으로 들어선 주혜성이 다다른 곳은 식탁이 아니라 소파였다. 제집에라도 온 양 태연하게 앉는 그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문성하는 내내 신경 쓰였던 걸 물었다. 분명히 자신은 봤다. 최재율과 통화하기 직전, 화단에서 담배를 피우며 자신이 심은 나무의 잎을 뜯던 남자.

이 빌라에는 작은 공용 화단이 있는데, 워낙 관리가 되지 않은 탓에 황무지나 진배없었다. 문성하는 늘 베란다에서 바로 보이는 그것이 거슬렸다. 그러다 어느 날 아는 VC 대표에게 보낼 화분을 맞추러 화훼 시장에 갔다가 헐값에 파는 묘목 하나를 발견했다.

일단 키워나 보자 하고 사 왔는데, 베란다에 두면 제대로 자랄 것 같지 않아 경비실의 허락을 받고 화단에 심었다. 그것이 대추나무라는 건 가을이 돼서야 알았다. 특별히 공을 들이지도 않았는데 대추가 풍성하게 열려, 빌라 공용의 것인 줄 안 주민들이 심심치 않게 열매를 따 갔다. 문성하는 그 자체는 상관이 없었다.

대추나무 열매를 열매라는 이유로 건드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빌라 사람들도 그것을 아는지 아주 영리하게 열매만 거둬 갔다. 문성하는 종종 베란다를 통해 나무를 관찰했는데, 보이는 사람 족족 열매만 가져갔으므로 모두가 그런 줄로만 알았다.

잎을 건드린 사람은 처음이었다.

“담배 피우는 것 싫어해요?”

뜸을 들인 주혜성이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문성하가 대꾸했다.

“좋아할 이유는 없지. 보통 비흡연자는 흡연자를 반기지 않으니까.”

“그렇군요.”

주혜성이 의미심장하게 뇌까렸다. 곧 똑바로 문성하를 보며 입을 뗐다.

“아무튼 전 아니에요.”

“아까 그게 네가 아니었다고?”

“사실 저는 형이 정확히 뭘 얘기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주혜성이 자못 풀죽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검은 눈망울이 천연스레 반짝였다. 문성하는 절로 할 말을 잃었다. 사실 아까 전의 남자가 주혜성과 얼마나 닮은 인상착의를 지녔는지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일단 너무도 멀리서 봤다. 대충 키가 크고 훤칠한 느낌이라는 것, 그리고 이 빌라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만 인지했다. 한마디로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다.

무엇보다 저렇게 기죽은 낯을 하고 있으면, 이 이상 몰아세우는 게 어렵다.

“아니면 말고.”

문성하가 눈을 깔며 읊조렸다.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긴 했다. 주혜성이 소파 등받이에 기댄 목을 늘어뜨렸다. 다소 피곤해 보였다. 그런 와중에 문성하로부터 눈을 떼지는 않았다. 어릴 때의 습관이 남은 것인지, 그저 문성하를 관찰하고 싶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올해 스물둘이지?”

문성하가 질문했다. 주혜성이 주억거렸다.

“네.”

“대학은.”

“자퇴했어요.”

“자퇴? 그럼 고졸?”

“네.”

“어쩌다 자퇴를 했어.”

“그냥 좀…….”

뭉그적거린 주혜성이 다른 곳을 응시했다. 생각에 잠긴 듯 손가락을 꺼떡거리다, 도로 문성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별로인 대학이라서요. 그냥 나오는 게 낫겠더라고요.”

“공부 좀 잘하지 그랬어.”

“그러게요.”

주혜성이 실실거렸다. 딱히 중요한 화제가 아니라는 투였다. 바라보던 문성하가 골똘해졌다. 그러고 보니 ADHD가 있었다. 외관상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선천적 질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게 쉬울 리 없다. 어찌어찌 대학에 갔으나 적응하기 어려워 그만뒀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에서 여기까지 혼자서 오느라 힘들었겠다.”

나지막한 혼잣말이 샜다. 주혜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잘 왔어요. 형.”

“그…… 이젠 사람들하고 대화 잘 나누지?”

조심스러운 질문이 나왔다. 주춤한 주혜성이 멍해졌다. 별것도 아닌 얘기에 또 생각을 하고 있었다. 10년 전처럼, 즉각적인 반응이 오지 않는다. 문성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아직도야?”

“아, 그…….”

아물거린 주혜성이 제 이마를 감쌌다. 애꿎은 피부를 긁어 대며 뜸을 들이다, 곧 손을 거두며 눈길을 끌어 올렸다.

“쉽지는 않아요.”

“그래.”

문성하가 탄식했다. 양어깨가 절로 처졌다. 목에서 한탄이 들끓었다.

왜 동생은 이 모양이고, 왜 자신은 그 약점을 못내 외면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형. 괜찮아요?”

말이 없어진 문성하의 곁으로 주혜성이 다가왔다. 걱정하듯 기웃거리는 그가 밤 구름처럼 시야에서 나부꼈다. 가까스로 눈을 맞춘 문성하가 불렀다.

“혜성아.”

“네.”

“너 어릴 때 나하고 겪은 일들 기억해?”

“네.”

“얼마나.”

“대부분이요.”

“그러면 나한테 할 말 없어?”

“어떤 거요?”

주혜성의 말투가 짐짓 은근했다. 괜히 목덜미가 얼얼해지는 어조였다. 가볍게 입을 축이고 난 문성하가 설명했다.

“내가 너한테 거짓말했잖아. 집에서 나올 때.”

“기억 안 나요.”

“메모장 해킹 프로그램. 몰라?”

“정말 모르겠어요.”

주혜성이 정직한 도리질을 쳤다. 휘휘 머리가 돌아갈 때마다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문성하가 멋쩍게 제 볼을 만졌다. 하긴, 워낙 어릴 때 겪은 일이니 자연스레 잊었을 수 있겠다. 게다가 타고나길 보통 아이와 다르다. 워낙 산만한 구석이 있었으니 기억력도 남들 같지 않을 거다. 그 점은 참으로 다행이다.

그렇다 해 벌여 놓은 실수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밥은.”

복잡한 상념에 사로잡혀 허공만 응시하다, 다른 말을 꺼냈다. 주혜성이 반문했다.

“무슨 밥이요.”

“아까 밥 먹다 일어난 거잖아. 마저 먹어야지.”

“아. 전 괜찮아요.”

“밥 안 먹었다면서.”

문성하가 낯을 구겼다. 주혜성이 깜짝했다. 거실이 고요해졌다.

“아. 제가 그랬네요.”

주혜성이 배시시 웃었다. 하여간 정신없기는. 혀를 찬 문성하가 손을 뻗었다. 주혜성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일으키듯 당겼다.

“일어나. 밥부터 마저 먹자.”

“밥 다 먹으면 저 보내려고요?”

주혜성이 소매를 잡아 왔다. 문성하의 움직임이 멎었다. 등줄기를 타고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공허해진 머릿속에서 주혜성의 질문이 파도처럼 요동쳤다. 보내려고요? 말미에서 들은 적 없는 질문 하나가 커다란 해일이 되어 솟구쳤다. 그때처럼?

젠장. 아랫입술이 깨물렸다. 빠르게 외면한 문성하가 중얼거렸다.

“호텔 예약 취소할게.”

문성하의 손이 주머니로 들어갔다. 주혜성의 눈동자가 일렁인 끝에 자리를 잡았다. 맑은 망막에 문성하가 오롯이 담겼다. 마주 본 문성하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일단 오늘은 안 되겠다.

“당분간 여기서 머물러. 상황을 좀 보자.”

불안정하게 핸드폰 액정을 비비적거리던 손가락이 떨어졌다. 재차 눈을 감은 끝에 동공을 드러낸 문성하가 주혜성을 힐금거렸다. 자석처럼 시선을 엉킨 주혜성이 고저 없이 말했다.

“고마워요. 형.”

***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모니터 앞에 모여 웅성거리는 심사역 무리가 눈에 띄었다. 드문 광경도 아닌지라 언제나처럼 태연하게 복도를 밟았다. 활기찬 인사가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안녕하십니까! 출근했습니다.”

“어어, 성하씨. 왔어? 빨리 이거 봐 봐.”

한 여자 심사역이 손을 흔들었다. 고분고분 몸을 옮긴 문성하가 심사역들의 틈바구니에 꼈다. 새하얀 모니터를 빼곡하게 채운 어느 인터넷 뉴스 기사가 보였다.

「‘미국 표준 블록체인’ 베이스터, 국내서 첫 자체 플랫폼 사업」

“베이스터 공동 창업자가 한국인이라는 얘기는 있었는데, 대놓고 국내 진출할 줄은 몰랐네요. 이거 엄청 파격적인 뉴스 아닙니까. 블록체인 기업이야 널렸지만 베이스터는 얘기가 다르잖아요. TPS가 가장 높고 무엇보다 범용성이 다른 블록체인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은데. 미국에서는 확실히 블록체인의 표준이죠. 대형 기업 통틀어 베이스터 안 쓰는 곳이 없으니.”

한 심사역이 혀를 내둘렀다. 옆에 있던 심사역이 받아쳤다.

“그런데 국내에서 잘될지 모르겠네요. ICO2) 규제가 워낙 심해서. 해외 기업이 크립토3) 갖고 사업한다 하면 금융 당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솔직히 도박 아닌가요?”

말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심사역이 손사래를 쳤다. 다소 격양된 기색이었다.

“아니, 대현 씨. 그게 아니지. 지금 베이스터는 크립토로 국내 진출한다는 게 아니잖아. 베이스터 블록체인 기반으로 단독 플랫폼 사업을 하는 거라고. 이거 무조건 되는 장사야. 미국 사례가 증명을 하잖아.”

“미국하고 똑같이 보면 안 되죠. 그쪽 기업들은 베이스터 블록체인이 모듈성이며 범용성이 좋은 데다 빠르기까지 하니 냅다 가져와 자기들 플랫폼 만드는 데 쓴 거예요. 베이스터에서 특정한 공용 플랫폼을 제작해 기업들에 제공한 게 아니라. 문제는 그 플랫폼을…… 어떤 기업이 쓸지가…….”

시큰둥하게 말을 이어 가던 아까의 심사역이 조용해졌다. 상대방이 짝, 소리 나게 손뼉을 쳤다.

“바로 그거야. 미국 기업 상당수가 쓰고 있어. 기술적으로 충분한 검증이 됐어. 그런데 거기선 플랫폼을 따로 만들어야 하고, 우린 아니야. 베이스터에서 친히 플랫폼 만들어 떠먹여 주면 고대로 갖다 쓰면 돼.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는 나와 봐야 알겠지만 자기 기업에 필요하다 싶으면 무조건 쓸걸. 바보가 아니고서 왜 안 써? 아주 끝내주는 완성품이 매장 진열대에 떴는데.”

사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상황을 파악한 심사역들이 낮게 술렁였다. 문성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발을 뺐다. 기업의 기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게 대단하다는 건 알지만, 자신과는 별개의 영역이었다.

DF벤처스 심사역인 문성하는 아주 단순한 것만을 따진다. 자신이 투자할 수 있는 기업인지, 투자했을 때 3년 안에 높은 수익률을 안겨 줄 수 있는 기업인지. 그것이면 충분하다. 베이스터 같은 대형 기술 기업은 문성하가 감히 넘볼 수도 없고, 넘본다 해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다른 심사역과의 경쟁에서 밀려날 거다. 문성하는 지금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다. 타고난 자신의 역량을 고려했을 했을 때, 지금의 위치면 충분했다.

“성하 씨. 잠깐 대표실.”

자리로 향하는 문성하의 곁을 스쳐 가며 한 심사역이 귓속말을 했다. 문성하가 우뚝 멈춰 섰다. 약간의 생각을 마친 후,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쪽 기분은 어떻습니까.”

심사역이 고개를 저었다.

“최악.”

절로 눈가가 집혔다. 씨발.

***

“테이즌 왜 깠어?”

대표실에 들어서자마자 자욱한 담배 연기가 얼굴을 덮쳤다. 작게 기침한 문성하가 앞을 봤다. 의자에 기댄 채 목을 늘어뜨린 정장 차림의 남자가 보였다. 문성하는 가만히 그의 앞에 놓인 명패를 봤다. DF벤처스 대표 현주원.

국내 5대 기업 중 하나인 DF그룹 3세. 그 집안 3세들 중 가장 훤칠하며, 가장 질이 나쁜 인물. 그는 천민자본주의의 정점에 있었다. 돈만 벌어다 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게 그의 철칙이었다.

문성하가 VC 심사역임에도 기업의 기술력을 무시한다면, 현주원은 VC 대표임에도 창업 기업 육성이라는 암묵적 의무를 과감히 외면했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왜 말이 없어. 응?”

현주원이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박으며 빈정거렸다. 가볍게 눈을 감았다 뜬 문성하가 답했다.

“3년 안에 절대로 BEP 안 나오는 회사입니다. 저번에 실사 마친 후 같은 말씀 드렸습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그냥 거품 회사라 보시면 됩니다.”

“그럼 업계 1, 2위 VC는 병신인가. 둘 다 전부 포트폴리오에 테이즌에 넣었어. 거품 회사인 게 뭐가 중요해. 우리가 돈을 넣었을 때 수익이 나오는 게 중요하지. 아니야?”

턱을 괸 현주원이 따졌다. 희뿌연 실내 안에서 그의 미간에 금이 갔다. 문성하는 가까스로 기침을 참아 가며 숨을 골랐다. 너울대는 혀를 타고 각종 욕설이 들끓었다. 하고 싶은 말은 굴뚝같았지만, 언제나처럼 스스로를 달래는 데 그쳤다.

어차피 저 씨발 놈은 자신을 몰아세우고 싶을 뿐이다.

“테이즌에 넣어서 이듬해에 바로 엑시트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거품 회사이긴 하지만, 초단기로 잡으면 일단 이익은 봅니다.”

“그럼 그렇게 했어야지.”

“테이즌과 같은 업종에 있는 일리노이스라고 있습니다. 동일한 인풋 아래에서 저는 테이즌보다 일리노이스 수익률이 두 배 이상 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같은 자금을 가지고 일리노이스에 넣은 겁니다.

실제 일리노이스 수익률은 6개월 새 300% 이상 뛰었습니다. 내년에는 더 뛸 거고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일리노이스는 테이즌 같은 거품 회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내년 안에 분명한 BEP를 낼 수 있는 곳입니다.”

“문 심사역에게 허용된 투자 자금은 일리노이스에 넣으면 풀(Full)인 수준인가?”

현주원이 손을 까딱했다. 문성하가 차분히 설명했다.

“대표님. 심사역의 원칙은 포트폴리오의 다양화입니다. 동일한 업종에 무리하게 투자하지 않습니다.”

“어제 기분이 참 나쁘더라고. 주요 VC 대표들 정기 저녁 자리였는데, 알 만한 곳들은 전부 테이즌에 넣었거나 넣을 예정인 거야. 우리만 빼고.”

뜬금없는 소리를 한 현주원이 머리를 쓸었다.

“분명히 문 심사역이 테이즌을 심도 있게 검토한 적이 있었는데 말이지. 끝내 투자 집행은 안 했지만.”

“회사의 미래보다 본인 기분이 더 중요한 겁니까. 지금?”

문성하가 섟을 냈다. 현주원이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당연하지. 어차피 내 회사잖아?”

문성하가 치를 떨었다.

“그러면 제가 이제 와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주원이 제 턱을 매만졌다.

“총알 더 채워 줄 테니 지금이라도 테이즌에 넣어. 조만간 거기 시리즈C 들어가. 수익 나면 내 선물이라 생각하고.”

“지금 들어가면 위험합니다. 가격이 너무 비싸요.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회사에 왜 그런 도박을 합니까.”

“그래도 해. 어차피 망하면 문 심사역 책임…….”

비아냥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성하의 발이 나아갔다. 분연히 걸어 현주원이 앞에 다다라, 그의 넥타이를 챘다. 덜컥 고개를 든 현주원은 놀라지도 않았다. 능글맞게 휘어 가는 눈초리가 보였다.

“대표에게 아주 예의가 없네. 문 심사역.”

“이번 주 토요일 오후 8시. 장소는 강남 일대. 거기서 벗어나면 오후 9시로 변경. 일요일은 곤란해. 선약 있어.”

색색거린 문성하가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최근에 형 좀 안 맞춰 줬다고 이러는 모양인데, 이걸로 퉁 쳐. 아주 집까지 기어가게 만들어 줄 테니까.”

현주원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커다랗게 폭소하고 난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경직된 문성하가 물러났다. 그새 무표정이 된 현주원이 뇌까렸다.

“토요일 오후 8시 30분 DF가든 호텔. 속옷 입지 말고 와. 집에는 네가 기어가게 될 거야.”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대표실 문이 열렸다. 비서 여직원이 상냥하게 말했다. 대표님, 차 대기시켰습니다. 끄덕인 현주원이 답했다. 그래요, 갑시다.

심드렁하게 걸어간 현주원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공허해진 대표실에 문성하만 남았다. 잠자코 뒤꿈치를 지르밟다가, 그만 웃었다. 심히 자조적이며 허탈한 웃음이었다.

현주원. 미혼. 37세. 경력 미달이던 문성하를 DF벤처스에 꽂아 준 장본인.

게이에 섹스광.

“나나 저 새끼나 아주 잘하는 짓이다.”

퉤, 명패에 침을 뱉은 문성하가 몸을 틀었다. 서벅서벅 입구를 향해 가고 있자니 주머니가 근질거렸다. 핸드폰이 떨어 대고 있었다. 꺼내서 액정을 확인한 문성하가 눈을 찌푸렸다.

「동생.」

“무슨 일이야.”

통화 아이콘을 눌러 귓가에 가져갔다. 너머에서 뭔가가 깨지는 듯한 소음이 들렸다. 계단에서 구르기라도 했나. 저도 모르게 낯을 굳힌 문성하의 귀에 곧 헉헉대는 소리가 찾아들었다. 가쁜 숨을 몰아쉰 주혜성이 말을 건넸다.

[아니에요, 형. 잘못 눌렀어요. 죄송해요.]

“미안할 것까지야……. 그나저나 너 지금 어디야. 집이 아니야?”

[잠깐 밖에…….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서.]

“업무? 무슨 업무.”

부쩍 의아한 질문이 나왔다. 반대편에서 숨소리조차 사라졌다. 적지 않은 뜸을 들인 주혜성이 말했다.

[친구, 친구 업무. 도와주러 왔어요.]

“친구? 서울에 친구가 있었어?”

[나중에 설명드릴게요. 형은 회사죠?]

“당연히 회사지.”

[네, 형. 이따 들어가서 봐요.]

급하게 통화가 끊겼다. 점멸하는 액정을 바라보던 문성하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어린 시절 친구라곤 하나도 없던 아이에게 한국 친구가 생겼다는 게 희한했다. 아리송한 혼잣말이 나왔다.

“조금은 변했네.”

그렇다고 아예 달라졌다는 느낌이 드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

「나 골프 약속이 일찍 끝날 것 같은데. 시간 좀 앞당길 수 있어? 한 6시 정도로.

현주원 DF벤처스 대표」

무성의한 손가락이 옮겨졌다. 답신 창을 누르고, 빠르게 글자를 쳐 보냈다.

「안 돼. 무조건 8시 반.」

30초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누구 닮아서 그렇게 건방져?

현주원 DF벤처스 대표」

‘너’라는 글자를 만들었다가, 곧 지우고 액정을 껐다. 현주원과의 소모적인 대화에 일일이 신경을 쏟아 봤자 결국 문성하 자신만 손해다. 어차피 현주원에게는 뒤돌아서면 잊어버릴 대화다. 많은 자기중심적 인간이 그러하듯, 현주원은 필요에 따라 사람을 찾았고 이용 가치를 다했다 판단하면 새까맣게 기억을 지웠다. 그런 인간이니 문성하의 훌륭한 잠자리 파트너가 된 거다.

“어머. 핏이 너무 좋아요. 무슨 모델 같아.”

저편에서 감탄사가 들렸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문성하가 얼굴을 들었다. 문성하가 골라 준 옷을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나온 주혜성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매장 여직원 세 명은 전부 그쪽에 붙어 흥미진진한 드라마라도 보는 사람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

“한번 봐.”

성큼 걸어가 주혜성의 팔을 당겼다. 주혜성은 선뜻 문성하에게 정면을 보였다. 팔짱을 낀 채 살피던 문성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청바지 핏도 좋고, 셔츠는 어깨가 부족해 한 사이즈 큰 걸 찾아야 할 듯하지만 라인 자체가 주혜성의 다부진 몸을 보기 좋게 부각시켜 준다. 라이더 재킷은 좀 오버인가 싶은 감이 있었지만, 주혜성이 입으니 산뜻하고 세련된 느낌이다. 전혀 과하지 않다.

“친구분 센스가 탁월하시네요. 이 고객님처럼 옷걸이가 워낙 좋으면 보통 옷이 죽는데, 옷하고 고객님이 잘 어울리게 코디를 해 주셨어요. 진짜 사진 찍어서 어디다 올리고 싶다. 너무 예뻐요.”

여직원이 까르르 웃어 댔다. 라이더 재킷을 한번 만져 주고 난 문성하가 무표정으로 답했다.

“형입니다.”

“아. 같은 학교 다니세요?”

여직원이 당연하다는 투로 물었다. 문성하는 고개를 저었다.

“친형입니다.”

여직원 쪽이 조용해졌다. 문성하가 대수롭지 않게 주혜성의 등을 쳤다.

“재킷하고 바지는 됐으니까, 셔츠만 한 사이즈 큰 거 입어 보자. 내가 챙겨 줄 테니 탈의실 가서 벗고 있어.”

주혜성이 고분고분 탈의실로 향했다. 새 사이즈를 찾아 달라고 하기 위해 막 몸을 튼 문성하와 세 여직원의 눈이 딱 마주쳤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문성하는 확실히 들었다.

하나도 안 닮았어.

***

쇼핑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끝났다. 주혜성은 뭘 입혀도 중간 이상 갈 정도로 옷발이 좋았고, 문성하는 주혜성의 신체적 특징을 잘 파악해 가장 적합한 아이템만을 골라서 입혔다. 세 개의 매장을 돈 끝에 열 벌이 넘는 옷이 빠르게 구매됐다.

시계를 확인한 문성하가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생각보다 적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럴 줄 알았다면 현주원과의 약속 시간을 6시로 앞당길 걸 그랬나. 빨리 끝내고 빨리 귀가하게. 무심코 흘러가던 눈길이 멈칫했다. 저만치에서 뚫어져라 뭔가를 응시하는 주혜성이 보였다. 어느 순간 자신을 따라오는 걸 잊은 모양이다.

“혜성아.”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움칠한 주혜성이 문성하를 봤다.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듯했다. 어물거리던 주혜성이 대뜸 사과했다.

“미안해요. 형.”

“뭐가 미안해.”

“또 다른 데에 정신 팔아서…….”

‘또’라는 말이 묘하게 귀에 밟혔다. 주혜성의 몸에 얹어진 손가락이 느릿느릿 억눌렸다. 주혜성은 죄라도 지은 양 문성하를 살폈다. 문성하는 말없이 숨을 골랐다.

애초에 사과받을 일이 아니다. 때때로 궤도를 이탈해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는 것은 주혜성의 타고난 기질이다. 12세 때 지겹도록 봤는데, 10년이 지났다고 새삼 새로울 것도 없었다.

“뭐 보고 있었어?”

부쩍 다정하게 물으며 눈을 돌렸다. 주혜성이 보던 유리창 안쪽을 훑어보았다. 곳곳에서 반짝이는 게임 기기가 보였다. 이 백화점 지하에 자리 잡은 게임 센터인 모양이었다.

“아직도 게임 좋아하는구나.”

문성하가 실소했다. 주혜성이 난처한 듯 머무적거렸다.

“미안해요. 형. 그냥 눈에 들어와서…….”

“해도 돼. 형이 하는 것 봐 줄게.”

“형 게임 안 좋아하잖아요.”

“괜찮아. 오랜만인데 뭐.”

“그러면.”

주혜성이 뜸을 들였다. 문성하는 차분히 그와 눈을 맞췄다. 주혜성이 자못 결연히 말을 맺었다.

“저 총 게임 한 판만 할게요. 형.”

문성하는 그만 웃어 버렸다. 그게 그렇게까지 고민하며 할 말인가 싶었다.

***

정확히 37분이 걸렸다. 첫 번째 스테이지부터 두 번째, 세 번째 스테이지 등을 줄줄이 격파한 후 최종 단계인 열 번째 스테이지를 깼다. 이어 나오는 세 개의 보너스 스테이지까지 모조리 클리어했다.

주혜성은 보이는 대가리마다 신속하게 날려 버렸다. 연이어 터져 나가는 NPC 머리가 눈길을 끌었는지 게임 센터에 있던 어린아이며 중고등학생, 성인들마저 기웃거리며 구경을 했다. 나중에는 게임 센터 매니저까지 와 관람했다.

“동체 시력이었던가.”

단 1000원으로 37분을 즐긴 게임을 마치고, 인근에 있는 푸드 코트에서 식사를 주문했다. 문성하가 볶음밥을 시키는 걸 본 주혜성이 따라서 같은 걸 시켰다. 십여 분이 지난 후 전광판에 그들의 번호가 떴고, 주혜성은 일어나 음식을 가지러 갔다. 남은 문성하는 빈 테이블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주혜성은 뛰어난 몇 가지 분야가 있었다. 하나하나 상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떤 분야에서는 영재 교육 과정을 권유받은 일도 있다. 동체 시력, 한 마디로 움직이는 사물을 식별하는 능력이 뛰어난 건 지극히 작은 부분이다. 주혜성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재능을 갖고 있었다. 타고난 ADHD로 산만하고 조급한 특유의 성미가 발현하며 부각되지 않았을 뿐.

“그런데 또 뭐가 있었더라.”

곰곰이 뇌까리는 문성하의 앞에서 탁, 소리가 났다. 문성하와 자신의 트레이를 차례로 둔 주혜성이 맞은편에 착석했다. 문성하에게 주기 위해 볶음밥 접시를 들었는데, 다소 뜨거웠는지 덜컥 내려놓았다. 그러면서도 어서 문성하에게 주고 싶긴 한지, 뚫어져라 그릇을 보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생각을 마친 듯한 주혜성이 손을 옆으로 뺐다. 이어 테이블 위 티슈 박스에서 휴지를 몇 장 뽑았다. 휴지로 감싸 접시를 전달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절로 이마를 짚고 난 문성하가 그를 불렀다.

“혜성아.”

주혜성이 바로 응했다.

“네. 형.”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문성하의 손이 나아갔다. 접시가 올려져 있는 트레이를 통째로 들어, 자신의 앞에 가져왔다. 허망할 정도로 쉽게 해결된 고민 앞에서 주혜성이 아, 소리를 냈다. 너무도 천진해 가엽기까지 했다. 문성하가 한탄했다.

“미치겠다. 진짜.”

“미안해요. 형.”

“아니. 괜찮아. 너무나 너다웠어.”

피식거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뭉그적거리던 주혜성이 같은 것을 들었다. 이내 문성하의 동작을 하나하나 따라 했다. 문성하가 볶음밥을 뜨면 자신도 떴다. 문성하가 그것을 입에 넣으면 자신도 입에 넣었다. 문성하가 씹으면 자신도 씹었고, 문성하가 물을 마시면 자신도 마셨다. 마치 문성하라는 거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처럼, 맹목적인 그림자 연기를 했다.

“언제까지 존댓말 할 거야?”

불현듯 문성하가 물었다. 막 입 안에서 숟가락을 뺀 주혜성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문성하가 고갯짓을 했다.

“너 어릴 때 나한테 존댓말 했어?”

주혜성이 도리질을 쳤다.

“아니요.”

“그런데 왜 존댓말 해.”

“형이 싫어할 것 같아서…….”

“내가 왜.”

“그냥요.”

“혹시 내가 무서워?”

주혜성은 부정하지 않았다. 망설이듯 맞물리고 난 입술 틈에서 나직한 대답이 샜다.

“네.”

테이블이 고적해졌다. 문성하의 손목이 들썩였다. 허공에 뜬 숟가락이 서서히 내려왔다. 탁, 부딪히는 소리가 괜히 찼다. 무감각해진 손을 들어 얼굴을 짚었다. 움켜쥔 부위가 사포에 쓸린 듯 꾸물거렸다.

정말이지 신경 쓰인다. 저 표정.

“일단.”

짧지 않은 공백 끝에 운을 뗐다. 주혜성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얼굴에서 떨어진 문성하의 손이 테이블을 덮었다. 한껏 완고한 한 마디가 건네졌다.

“나한테 반말해.”

“형.”

“어서.”

부추기듯 명령했다. 주혜성의 눈이 어쩔 줄 몰라 굴러갔다. 문성하가 눈살을 구겼다.

“안 할 거야?”

주혜성은 입만 다물고 있었다. 탄식한 문성하가 대놓고 외면했다.

“나하고 대화하기 싫으면 그러든가.”

곁눈질로 본 주혜성이 소스라쳤다. 경직된 면상에서 겁이 넘실거렸다. 반쯤 열린 입이 띄엄띄엄 서슴거렸다. 문성하는 안 보는 척 기다렸다. 적막 틈바구니를 가르고 딩동, 하며 전광판에 누군가의 번호가 떴다. 세 번에서 네 번의 호출음이 그들을 스쳤을 때, 주혜성의 입이 트였다.

“할게.”

문성하의 눈썹이 까딱거렸다.

“반말로 나한테 할 말 없어?”

“어떤…….”

“아무거나 다 좋아.”

“그럼, 나.”

주혜성이 테이블을 긁었다. 문성하가 적당히 눈을 마주쳐 줬다. 꿀꺽이고 난 주혜성이 목을 가다듬었다.

“아르바이트하기로 했어.”

“어떤.”

“친구네 가게에서 일 도와주는 거.”

“뭐 하는 가게야?”

“그냥 뭐……. 컴퓨터하고 이런저런 부품 팔아.”

“사람 만나는 일이잖아. 잘 할 수 있겠어?”

“응.”

주혜성이 또박또박 답을 했다. 찌푸린 문성하가 턱을 괴었다. 탐탁지 않은 혼잣말이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 말까? 그럼.”

반색하는 질문이 들렸다. 문성하의 시선이 끌어 올려졌다. 주혜성이 안달했다.

“형 걱정시키지 말고 그냥 집에 있을까? 나.”

낚시용 찌가 던져진 것처럼 돌연 뇌리가 출렁였다. 얼떨떨하게 눈을 맞춘 문성하가 입을 말아 물었다. 묘한 의구심이 머릿속 수면 위로 떠올랐다.

왜 즐거워 보이지. 자신으로부터 챙겨 줘야 하는 애 취급을 받았는데.

“이야. 이게 누구야?”

저편에서 호쾌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문성하와 주혜성의 얼굴이 동시에 돌아갔다. 뚜벅뚜벅 걸어온 남자가 양팔을 펼쳤다.

“잘못 본 줄 알았네. 사람 많은 곳이라면 학을 떼는 새끼가 이런 곳에 올 리가 없는데, 하면서.”

문성하의 이가 질근 갈렸다. 타이밍 좆같네.

“혜성아.”

신속하게 눈길을 넘겼다. 주혜성이 순순히 답했다.

“응. 형.”

“저기에서 물 좀 떠 올래? 보니까 물도 없이 밥 먹고 있네. 우리.”

동시에 저편의 정수기를 가리켰다. 주혜성이 주춤주춤 일어섰다. 표정에서는 그 어떤 불쾌함이나 의아함도 비치지 않았다. 문성하는 속으로 안도했다. 다행이다. 이런 동생이라. 보통 사람이라면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주혜성은 그저 시키는 것에 따른다. 사고 체계가 일반인에 비해 절반 미만으로 단순하기 때문이리라.

등을 보인 주혜성이 정수기 쪽으로 발을 뻗었다. 그사이 다가온 남자가 뻔뻔하게 옆자리에 착석했다. 문성하가 눈을 부라렸다.

“죽고 싶어? 최재율.”

“왜 이래? 업계 동료끼리.”

최재율이 능구렁이처럼 어깨를 감아 왔다. 문성하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밖에서 아는 척하지 말랬지.”

“보이는데 어떻게 아는 척을 안 해?”

“알아서 눈알을 뽑아 버려. 다시는 그럴 일 없게.”

“피데스비 자회사 나눠 준 건 잘 먹었다.”

최재율이 대뜸 빙글거렸다.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낸 문성하가 손을 풀었다. 곧 휘 시선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나눠 준 것 아니야. 피데스비 김재훈 대표가 자기네 자회사도 투자 필요하다 하기에 형하고 연결해 줬을 뿐이지.”

“그게 나눠 준 거지. 이 요망하고 이기적인 문성하가 남에게 아량을 베푼 것 자체가 기록할 만한 일이기도 하고.”

최재율이 비아냥거렸다. 열이 받으라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성하는 별다른 자극을 받지 못했다.

“내가 박아 준 게 좋긴 했나 봐. 어?”

문성하의 어깨에서 내려온 손이 허리를 더듬어 왔다. 능숙하게 채서 밑으로 뺀 문성하가 그를 째려봤다.

“여긴 무슨 일이야.”

“감 대표 데이트.”

최재율이 어깨를 으쓱했다. 문성하가 뒤편을 힐끔거렸다. 아까 최재율이 있던 곳에서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대기 중인 젊은 여자가 보였다. 문성하는 알았다는 양 주억거렸다. 감혜연 대표. 최근 한창 떠오르는 핀테크 스타트업 ‘세일핀랩’ 창업자.

“형 세일핀랩은 이미 들어갔잖아. 형네 회사 지분만 20%는 되는 걸로 아는데.”

“투자 들어갔다고 끝난 것 아니야. A/S 차원에서 몇 번은 다방면으로 만족시켜 드려야지. 내 얼굴 보고 투자 계약서에 사인한 누님인데.”

“감 대표는 형이 남자한테만 발정하는 것 알아?”

“당연히 모르지. 사실이 아니니까.”

최재율이 부정했다. 곧 꼿꼿한 손가락질을 했다.

“표현이 잘못됐잖아. 남자, 여자 다야. 나는.”

“그만두자. 발정 난 걸레 새끼야.”

문성하가 고개를 젖혔다. 다시금 확인한 감혜연은 아주 너그럽게도 최재율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성하의 입에서 석연치 않은 호흡이 번졌다. 감혜연이 투자사 심사역과 자고 다니는 건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 애초에 최재율도 누울 자리를 알아보고 다리를 뻗은 것이다.

“저건 뭐야. 새 애인?”

최재율이 물었다.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꽤 긴 시간 기다린 끝에 정수기에서 물을 받는 주혜성이 있었다. 물을 따라오는 것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수시로 찾아오는 사람에게 양보하고, 또 양보하는 일을 반복하다 스스로 물 받을 타이밍을 놓친 모양이다. 지켜보던 문성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어리숙한 건 익히 안다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엔 그래도 저거보다 똑 부러졌던 것 같은데.

“형이 알아서 뭐 하게.”

궁금증을 묻어 둔 문성하가 쏘아붙였다. 최재율이 저소했다.

“문성하 취향 바뀌었네? 어린애는 싫다며.”

“그러니까 그걸 형이 그걸 알아서 뭐 하…….”

“훤칠하니 비주얼 훌륭하네. 힘도 좋아 보이고. 쟤랑 많이 했어? 저 새끼 좆 맛 못 잊어서 나 쌩깐 건 아니지?”

최재율이 약을 올렸다. 테이블 위에서 문성하의 손톱이 드르륵, 갈렸다. 입 안에 쓴 침이 고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좀 화가 났다. 주혜성은 애초에 ‘그런 후보’에 오를 대상이 아니었다.

“동생이야.”

“뭐?”

“친동생이라고, 새끼야.”

문성하가 버럭 했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최재율의 동공이 흔들렸다. 문성하가 말한 ‘동생’이 자신이 아는 그 ‘동생’과 동일한 의미의 언어인지를 헤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곧 어이가 없다는 양 따졌다.

“야. 대체 무슨 동생을 얘기하는 거야? 내가 아는 네 동생은 오래전에 네가…….”

반박하는 최재율의 앞에서 탁, 소리가 났다. 물컵 두 개를 챙겨 온 주혜성이 몸을 앉히고 있었다. 최재율을 일별한 주혜성이 상체를 굽었다. 이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성하 형 동생 주혜성입니다.”

“어, 뭐……. 나는 성하 직장……이 아니라 업계 동료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동네 형이기도 하고. 최재율이야.”

“반갑습니다.”

“그래. 반가워.”

영혼 없이 받아 주고 난 최재율이 다시 문성하를 봤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문성하는 무시한 채 주혜성을 주시했다. 짙게 물든 셔츠 소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정수기를 이용하다 흠뻑 젖은 걸로 보였다.

“손 줘.”

문성하가 팔을 내밀었다. 주혜성이 바로 자신의 소매를 내 줬다. 팔뚝에 손을 감은 문성하가 젖은 부위를 주물럭거리며 짜냈다. 후드득, 물방울이 떨어졌다.

“조심해야지.”

“미안.”

“미안하다는 말 그만. 그리고 정수기는 온 사람 순서대로 쓰는 거야. 굳이 다른 사람한테 양보할 필요 없어.”

“알았어.”

“형 얘기, 확실하게 알아들었어?”

“응.”

“그럼 다시 가서 해 봐.”

손을 옮긴 문성하가 주혜성이 가져온 물컵을 집어 들었다. 자신의 입가로 가져간 뒤, 꿀꺽거리며 내용물을 쏟아부었다. 곧 텅 빈 잔을 주혜성의 앞에 밀어 줬다. 문성하가 지시했다.

“자. 시작.”

대답도 없이 일어난 주혜성이 문성하의 잔을 챙겼다. 그대로 몸을 돌리고는, 정수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허망하게 응시하던 최재율이 제 관자놀이를 눌러 댔다.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다.”

“저런 애 처음 봐?”

“너 말이야. 네가 대단하다고.”

최재율이 정색했다. 문성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너 변했다. 남을 다 챙기고.”

배신감 어린 어투에 손목이 전율했다. 부딪힌 푸드 코트 테이블이 덜컹거렸다. 최재율이 팔짱을 꼈다.

“대체 왜 안 하던 짓을 해? 다른 사람 맞춰 주는 거 토 나온다는 놈이.”

“쟨 내 동생이야.”

“어. 네 동생이지. 네가 버리고 간.”

최재율이 이기죽거렸다. 문성하의 낯이 싹 식었다.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선택은 네 몫이니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겠지만, 결과도 네 몫이라는 거 명심해. 10년 전처럼 또 저쪽 집안 때문에 정신 나가서 민폐 끼치면 죽여 버린다.”

진저리 친 최재율이 몸을 일으켰다. 끼익, 소리를 남기며 의자가 밀려 났다. 문성하를 지나친 최재율이 발을 내디뎠다. 한참을 기다린 감혜연은 서운한 기색도 없이 그를 반겼다. 멀리서 보면 평범한 연인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인 두 남녀가 팔짱을 낀 채 멀어졌다.

“형. 물 떠 왔어.”

불현듯 해맑은 한 마디가 들렸다. 문성하의 얼굴이 우물쭈물 끌어 올려졌다. 빙긋거린 주혜성이 물컵을 내밀었다. 투명한 수면이 잔잔하게 찰랑였다.

“잘했어. 혜성아.”

맥없이 칭찬하며 잔을 받았다. 들어서 입에 댄 뒤, 천천히 물을 삼켰다. 냉수도 온수도 아닌 것이 미지근하게 입 안을 헤매다 식도를 타고 미끄러졌다. 문성하는 부쩍 목이 말랐다. 물을 마시고 있는데도 허기진 것처럼 갈증이 났다.

결국 모든 문제의 원인은 자신에 있다. 두 번의 처절한 학습 끝에 명명백백하게 깨달은 사실이다. 이렇게 될 운명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그러므로 다시는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또 멍청한 짓을 해 봤자 새로운 과오를 낳을 뿐이다. 이제는 확실히 안다.

그러므로 세 번째는 없다.

“혜성아.”

자못 부드러운 부름이 나왔다. 주혜성은 기꺼이 대꾸했다.

“응. 형.”

“한 달이면 될까.”

텅 빈 컵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물을 그렇게나 마셨는데도 입술이 아릴 정도로 건조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에워싼 모든 공기가 물 먹은 일 없는 기름종이처럼 퍼석퍼석하다. 너무도 익숙한 자신의 옷. 문성하는 의연하게 현실을 받아들인다.

“한 달 동안 형하고 지내며 여기에 최대한 적응하고……. 다음부터는 너 혼자 살아야지. 안 그래?”

쨍그랑. 매서운 마찰음이 들렸다. 주혜성의 손에서 밀려 난 물컵이 사방팔방 물을 흩뿌려 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근처의 사람들이 깜짝해 이쪽을 봤다. 주혜성은 그저 문성하만 넋 놓고 바라봤다. 표정 없는 문성하를 머금은 눈망울이 거세게 진동했다.

“왜 그래야 해?”

입 안의 혀가 굼틀거리다 자리를 잡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무서운 영화를 본 아이처럼 겁에 질린 동생을 보며, 문성하는 목구멍에서 칼처럼 날카로운 언어를 끌어 올렸다.

“형은 다른 사람과 같이 못 살아. 그렇게 됐어.”

자신은 오래전 혼자가 되는 일을 택했다. 이제 와 운명을 배신할 수 없었다. 그것이 더 큰 고통으로 돌아오리라는 걸, 문성하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2) ICO: 암호 화폐 업계의 I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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