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백서: 블록체인 팀이 향후 계획을 공시한 문서
4.
“권도재!”
통화가 끊긴 걸 확인한 주혜성이 버럭 했다. 배를 잡고 웃은 권도재가 눈매를 살랑거렸다.
“형 이름을 그대로 부르고. 아주 막 나간다. 어?”
“너한테는 막 해도 돼.”
이를 간 주혜성이 벌떡 일어섰다. 권도재에게 다가가 멱살이라도 잡으려는 찰나, 흑인 억양이 강한 남자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무슨 일 있어?]
주혜성의 눈이 돌아갔다. 자신이 화상 통화 중이었다는 걸 잠시 잊었다. 화면에 담긴, 흑인과 백인의 경계에 선 듯한 남성이 이해한다는 듯 빙글거렸다. 화면 하단에 ‘ALEX’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얼굴을 짚고 난 주혜성이 사과했다.
“미안해. DZ가 장난을 쳤어.”
[괜찮아. 그래서, 우리 쪽에서 보낸 프로토 버전은 테스트해 봤어?]
“오전에 해 봤는데 시범 기업과의 호환성이 너무 떨어져. 노드 간 네트워크도 느리고, 개발 담당 헤드가 이해를 잘못한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혹시 몰라 일단 보내 준 거야. 보완한 버전 준비 중이야.]
“우리도 최대한 인력 가동하고 있어.”
데스크 앞에 선 주혜성이 뇌까렸다.
[두 달 안에는 확실한 결과물이 나와야 해.]
“그건 나도 알아.”
알렉스가 낄낄거렸다. 주혜성 다음으로 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높은 인물이었다. 뜸을 들인 그가 다른 얘기를 했다.
[베이스터 코리아 대표에 DZ 이름이 올라갔더라고.]
“어떻게 알았어?”
[테디 있잖아. 이쪽 오피스에 있는 한국인 멤버. 걔가 알려 줬어.]
“뭐…… 그렇게 됐어.”
[특별한 이유가 있어? 네가 본인 노출을 사린다는 건 익히 알아. 하지만 플랫폼 사업을 하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B2B 사업을 하는 회사인데, CEO 정보 정도는 오픈하는 게 좋지 않겠어?]
알렉스가 물었다. 주혜성은 잠시 먼 곳을 봤다. 사무실의 새하얀 벽을 눈으로 훑다, 담담하게 답했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
[재미있는 이유이길 바랄게.]
화면 안의 알렉스가 손을 까딱했다.
[예를 들어 네 형과 관련한 거라든지.]
주혜성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참으로 형에게 관심이 많구나 싶었다.
알렉스는 곧 사라졌다. 모니터를 꺼 버린 주혜성이 앞을 봤다. 권도재는 능청스럽게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주혜성이 성을 냈다.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어?”
“재미있잖아. 천하의 주혜성이 덜떨어진 애처럼 구는 거.”
“그거 보고 싶어서 내 허락도 없이 형한테 전화를 해?”
“너는 내 허락도 없이 내 이름 한국 법인 대표로 올렸잖아.”
권도재가 정색했다. 할 말을 잃은 주혜성이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반박을 할까 고민한 끝에, 해명하듯 운을 뗐다.
“그건…….”
“미안. 잠깐만 나 좀, 메이슨.”
돌연 문이 열렸다. 들어온 한나가 포니테일 머리를 꼬며 주혜성을 봤다. 이번에는 주혜성과 권도재가 동시에 외쳤다.
“한나. 아무 데서나 메이슨이라고……!”
“밖에 외부인 없어. 내가 확인하고 왔어.”
한나가 페이퍼를 팔랑였다. 곧 신속하게 말을 꺼냈다.
“30분 뒤 면접인데, 생각보다 대상자가 많아.”
“오늘 40명이라며.”
“80명이야.”
“왜 갑자기 늘었어.”
“막판에 지원자가 엄청나게 몰렸어. 문제는 코딩 테스트 레벨이 하나 같이 높아. 걸러 낸다고 했는데, 일정 수준부터는 도무지 그게 안 되더라고. 면접으로 판단하는 수밖에는 답이 없어.”
“희한한 일이네. 막판에 몰린 이유가 있어?”
“우리 회사에서 트래킹 플랫폼 내놓는 거, 보도 자료로 냈고. 실은 내가.”
제 얼굴을 만지작거린 한나가 덧붙였다.
“메이슨 밑에서 세 달간 집중 교육받을 수 있다고 약간의 홍보를 했거든.”
“미쳤어? 내가 왜.”
주혜성이 황당해했다. 한나가 대꾸했다.
“그래야 인재가 모여들지. 넌 이쪽 업계에서 신이야. 아직도 몰라?”
주혜성이 석연치 않은 숨을 골랐다. 아무것도 못 봤다는 양 페이퍼를 탁, 벽에다 친 한나가 물었다.
“면접은 어떻게 할까.”
“뭘 어떻게 해.”
“예정대로 나 혼자 진행해? 아니면 DZ라도…….”
“내가 직접 갈게.”
주혜성이 곤로하게 말했다. 나직한 한 마디가 이어졌다.
“나하고 일하고 싶어 지원한 사람들이니, 내가 판별하는 게 맞겠지.”
한나가 생긋거렸다.
“그럼 난 빠질게. 직함은 뭐로 붙여 줄까.”
“적당한 걸로 아무거나. 일단 입사하기 전까지는 내 쪽 신변을 오픈하지 않는 게 원칙이니까.”
“십 분 안에 생각해서 얘기해 줄게.”
한나가 문을 열었다. ‘CEO’라고 적힌 유리문이 밀려 났다. 그대로 나서려던 한나가 갑자기 권도재를 봤다.
“오빠는 PT 준비 잘하고 있어?”
“무슨 PT.”
“다음 달에 우리 트래킹 플랫폼 PT한다고 얘기했잖아. 기업이며 언론 초청해서, 꽤 규모 있게.”
한나가 그를 노려봤다.
“설마 메이슨이 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쟤 블라인드 CEO야. 오빠가 꼭두각시 역할 해 줘야 해.”
권도재가 사색이 됐다. 한나가 나가며 남긴 탁, 소리가 여운처럼 맴돌았다. 못 본 척 외면하는 주혜성의 앞으로 이번에는 권도재가 다가왔다. 주혜성의 어깨를 잡은 그가 호소했다.
“야. 이건 아니지 않아? 내가 무슨 PT를 해. 베이스터 플랫폼의 총괄 프로덕트 매니저는 너잖아. 애초에 베이스터도 너와 알렉스가 만든 거고. 나는 그냥 너희 직원이야. 내가 어떻게 PT를 해. 어?”
“난 PT 못 해. 사람들 앞에만 서면 멀미가 나.”
주혜성이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권도재가 눈을 부라렸다.
“구라 치지 마. 학교 다닐 때 멀쩡하게 과제 발표하는 것 내가 다 봤어. 대체 뭘 못 한다는 거야.”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왜. 형 앞에서 덜떨어진 애 연기해야 해서?”
권도재가 쏘아붙였다. 얼굴을 더듬던 주혜성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형 앞에서 덜떨어진 애 연기. 맞는 얘기다. 너무도 정확한 표현이라, 부정하고 싶을 지경이다.
ADHD가 눈에 띄게 나아진 건 만 16세 무렵이었다. 꾸준한 약물 치료가 효과를 봤고, 결정적으로 ‘형을 떠올리는 치료법’이 도움을 줬다. 아버지가 교수로 있던 주립 대학의 아동 심리학 전문 교수가 만든 것이었다.
처음 상담한 날 교수가 물었다. ‘대체 뭐가 문제니?’ 주혜성은 답했다. ‘나비가 날아다녀요. 싫어하는 걸 할 때나 불쾌한 상황을 접하면 나비가 떠올라 어지러워요. 그러면 감정이 주체가 안 돼요. 원래는 자극하는 것에 실체가 없었지만…… 언젠가부터 나비로 구체화됐어요.’,
‘나비는 핑계일 뿐이야. 넌 그냥 네가 좋아하는 수학이나 컴퓨터만 하면서 평생을 고립돼 살고 싶을 뿐이지.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살다 보면 사람들과 교류를 해야 하고, 보다 넓은 세상을 체험할 필요도 있단다.’ 교수의 조언에 주혜성이 답했다. ‘저도 알아요. 그래서 필요할 땐 가끔 형을 떠올려요.’, ‘형?’ 교수의 고개가 삐뚜름해졌다. 주혜성이 설명했다.
“형이 나비를 치워 주는 역할을 하거든요. 정확한 이유는 저도 몰라요. 아무튼 형을 생각하면 진정이 돼요.”
“형은 네가 12세일 때 처음 만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럼 그전에는 누가 머릿속에서 널 도와줬니?”
주혜성이 눈을 깜빡였다. 어물거리는 대답이 나왔다.
“도와준 것, 없었는데요.”
교수가 생각에 잠겼다. 한참이나 뭔가를 계산하다가, 묵직한 한 마디를 꺼냈다.
“한번 훈련을 해 보자꾸나.”
치료법은 간단했다. 머리가 복잡해 온다. 형을 생각한다. 나비가 떠오르기 전, 형의 존재로 못을 박도록 했다. 형과 나비는 상극의 개념이었으므로 형이 나타나면 나비가 나타나지 않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효과는 점진적으로 나타났고, 주혜성은 이성을 찾아갔다. ‘형의 세계’ 속에서 주혜성은 보통의 사람에 근접해 갔다. 시도 때도 없이 치미는 분노를 억누를 수 있었고, 하기 싫은 것을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원치 않는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형은 주혜성을 안전하게 덮는 외투였다.
만 18세에 MIT공과대학 EECS5) 과정에 입학했다. 형이 떠난 후, 매일 같이 컴퓨터만 붙들고 이것저것 눌러 대다 우연히 프로그래밍을 독학하고 혼자서 개발까지 하게 된 것이 도움을 줬다. 이 사실은 하나의 스토리가 돼 입시용 자기소개서에도 쓰였다.
입학을 했지만, 생각보다 재미는 없었다. 혼자서 컴퓨터를 만지작거릴 때에는 게임이며 웹 사이트, 플랫폼을 자유롭게 만들었지만 정식으로 입문한 IT의 세계는 지루하고 딱딱했다. 그나마 블록체인과 AI에는 흥미가 있었으므로 해당 수업에만 비교적 적극적이었다. 주혜성은 선택적인 학습을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알렉스를 만났다.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의 혼혈인 그는 블록체인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주혜성이 블록체인 수업 발표를 능숙하게 하는 걸 보고 한 유명 블록체인의 사이드 체인을 함께 만들어 보자 제안했다. 주혜성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로 수락했다.
개발 기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그들은 정확히 보름 만에 원하는 형태의 사이드 체인을 만들었으며, 이는 가장 큰 블록체인 커뮤니티에서 호평을 얻었다. 의욕이 생긴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블록체인을 만들어 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개발에는 8개월이 걸렸다. 그동안 그들은 거의 학교에 나가지 않았고, 그저 서로의 집을 오가며 개발만 거듭했다. 막상 완성에는 성공했으나, 이걸 올릴 만한 플랫폼이 없었다. 그들은 교내에서 ‘DZ’로 불리는 권도재를 불러 뭐라도 만들어 보라 했다.
권도재는 떨떠름해하다 일주일 만에 교내 학생만 접근할 수 있는 도박 플랫폼을 하나 만들어 왔다. 오픈 소스 기반의 몇몇 게임을 가져와 플랫폼에 올렸다. 가상의 크립토 코인을 쌓아 놓고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게임을 하며 가상의 수입을 올리는 체계였다. 크립토 자체가 지하 경제에 특화된 수단이라는 점에서, 방향성 자체는 맞았다 할 수 있었다.
다만 기존 블록체인에 비해 투명성과 속도가 너무 좋았다. 돈을 따고 잃는 과정이 초 단위로 공개가 되고, 누구에서 얼마가 깎여 누구에게 얼마만큼 들어갔는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대놓고 공개되는 크립토 보유 현황은 학생들의 승부욕을 자극했고, 관련 커뮤니티에는 일정한 이율을 받고 크립토를 빌려주는 ‘가상의 대부업자’까지 등장했다.
심지어 수준 높은 DID6)를 접목해 MIT 학생이라면 누구나 쉽게 접속이 가능했으므로, 학생들은 시간만 나면 이걸 하기 시작했다. 플랫폼은 단기간에 교내 명물이 됐다.
교내에서 말이 나오기 시작한 건 순식간이었다. 이거 누가 만들었어? 심심풀이로 만든 플랫폼이 학생은 물론이고 교수 입에까지 올랐다. 그들은 조금 불안해졌다. 현물 거래를 전제한 것이 아니니 사행성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학생들의 기강이 흔들렸다는 평가를 받으면 곤란했다.
“이 병신들아.”
그때 들이닥친 게 수학과의 한나였다. 이런 엄청난 걸 고작 이딴 일에 쓴다고? 윽박지른 그녀는 알렉스와 주혜성, 권도재를 모아 놓고 눈을 번뜩였다. 이건 혁명이야. 너희들은 전설이 될 수 있어. 내가 친히 도와줄게.
‘기존에 없던 블록체인’. 이미 범람할 대로 범람한 블록체인 사이에서 제법 획기적인 양 등장한 것이 베이스터(Baseter)였다. Base와 Taster을 합친 명칭은 ‘시작을 시험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름을 만든 건 주혜성이었고, 의미를 부여한 건 한나였다.
베이스터는 기존 블록체인보다 빠른 TPS와 보안성, 확장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업계에서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세간이 원하는 건 매우 매력적이며 파격적으로 베이스터를 어필할 문구 하나였다. 한나는 그 역할을 제대로 했다.
‘베이스터 이외의 블록체인은 가짜다.’
이 한 문장이 미국을 뒤흔들었다. 200조 원을 넘는 베이스터의 시가 총액도 거기에서 시작됐다. 정말로 그들은 전설이 됐다.
“그나저나 저번에 이메일 보낸 국내 기업 30곳 중 28곳에서 회신이 왔는데.”
권도재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양 제 노트북을 열었다. 찡그린 주혜성이 물었다.
“28곳이나?”
“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시가 총액 30위 내 기업에는 전부 넣었거든. 28곳이나 회신 올 줄은 몰랐지만.”
“5곳으로 추려.”
“뭐.”
권도재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주혜성이 귀찮다는 양 대꾸했다.
“자잘한 곳까지는 필요 없어. 무조건 시총 기준으로 톱5 안에 드는 기업 집단만. 거기서 스타트 끊으면, 밑에는 알아서 따라와.”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공부한 적은 없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업은 빅 비즈니스 위주로 해야 한다는 걸. 권도재가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곧 우물쭈물 입을 뗐다.
“그래, 뭐……. 그건 한나하고 상의해 최종 결정하고. 투자사는 어떻게 할까.”
“무슨 투자사.”
“우리 캐시 좀 필요해. 지금 오피스에 10명 있는 거, 40명 이상으로 늘려야 하고. 개발 비용도 적잖게 들어갈 테고. 자체 조달을 깨나 할 예정이지만, 두어 곳 정도는 외부 출신 우리 편을 두는 쪽이 든든하겠지.”
“그건 알지만…….”
주혜성이 머뭇거렸다. 키보드를 탁, 두드린 권도재가 물었다.
“아무튼 DF벤처스는 들어와야 할 것 아니야.”
“DF?”
“어. 너희 형 DF에 있다며.”
권도재가 실눈을 했다. 당연한 것 아니냐는 투였다. 이마를 구긴 주혜성이 짙은 숨을 내뿜었다. 단호한 대꾸가 나왔다.
“일단 DF부터 빼.”
“뭐?”
“거기는 빼라고.”
등을 보인 주혜성이 얼굴을 짚었다. 박동하는 심장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숨을 골랐다. 목덜미가 냉풍에 휩싸인 것처럼 싸늘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지금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데. 형 곁에 남아 있기 위해, 10년 전의 모습을 연출하려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데.
자신이 베이스터 공동 창업자라는 게 알려지면 끝이다. 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22세라는 게 발각되면 그동안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두 번 다칠 수는 없었다.
***
사각, 사각, 사각. 형의 방에서는 뭔가를 갉아 먹는 소리가 났다. 엄밀히 따지면 좀 더 날이 선 쪽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의 주혜성은 그것 이외에 소리를 표현할 만한 마땅한 언어를 찾지 못했다.
사과가 깎이는 소리.
주혜성은 딱 그렇게만 생각했다.
“형은 사과를 좋아해?”
12세의 봄이었다. 잔뜩 지쳐 방에서 나오는 문성하를 붙들고 주혜성이 그런 질문을 했다. 얼어 있던 문성하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안 좋아해. 형은 과일 싫어.”
“왜?”
“신선한 걸 먹어 본 기억이 없거든.”
“어제 같이 딸기 먹었잖아.”
“그건 형 게 아니야. 혜성이 거였지.”
“왜 내 거야?”
“그야 혜성이만 이 집 친아들이니까…….”
무심코 답하던 형이 더듬거렸다. 새하얀 낯에 서리가 내렸다가, 곧 거두어졌다.
“아무튼. 왜 형이 사과를 좋아한다 생각했어?”
무릎을 꿇은 문성하가 주혜성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주혜성은 길 잃은 아이처럼 제 머리만 만지작거렸다. 왜 형이 사과를 좋아한다 생각했냐고. 이유는 있었다. 아버지는 때때로 문성하를 데리고 방으로 가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는 동안 문 너머로 사과 깎는 소리가 났다.
실제로 사과를 깎는지, 아닌지는 몰랐으나 주혜성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그러므로 그 시간은 ‘사과의 시간’으로 인식됐다. 어린 주혜성이 모르는 새, 아버지와 형만이 주고받는 내밀한 시간. 그 시간 안에 실제 무엇이 존재하는지와 별개로, 사과는 사과였다.
“아까 아빠하고 형이 들어간 방에서 사과 깎는 소리가 나서…….”
“아.”
형이 알았다는 양 주억거렸다. 한참이나 입을 다신 형이 다른 곳을 봤다. 텅 빈 허공을 응시하다, 곧 손을 올려 주혜성의 얼굴을 쓸었다. 새삼 확인한 형의 얼굴이 다 갉아 먹은 사과의 뼈대보다 야위어 있었다.
“그건 사과 깎는 소리가 아니야.”
“그럼?”
“그건…….”
주혜성의 눈치를 본 형이 얼버무렸다. 가느다란 현 같은 울림이 그치고, 사뭇 안정적인 목소리가 찾아들었다.
“아냐. 사과 깎는 것 맞아.”
“왜 하필 사과야?”
“혜성아.”
문성하가 대답 대신 이름을 불렀다. 주혜성은 고분고분 마주 봤다. 형이 갑자기 어깨를 둘러 왔다. 주혜성의 몸이 훅 이끌렸다. 귓가에 형의 숨소리가 걸렸다.
“형 방 함부로 엿듣고 그러는 것 아니야. 알았어?”
“안 했어.”
“했잖아.”
문성하가 엄하게 다그쳤다. 할 말을 잃은 주혜성이 옴지락거렸다. 자그마한 사과가 나왔다.
“미안.”
“그럼 이제 하지 마.”
문성하가 주혜성의 등을 다독였다. 빤히 형을 머금은 주혜성의 눈이 말라 갔다. 조심스러운 질문이 건네졌다.
“그런데 형.”
“응.”
“왜 사과인지 얘기해 주면 안 돼?”
주혜성이 칭얼거렸다. 궁금한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잠자코 있던 문성하의 면상에서 묘하게 핏기가 사그라져 갔다. 꽤나 긴 침묵을 삼키고 난 그가 옅은 숨을 내쉬었다. 올라온 손이 주혜성의 머리를 주물렀다.
“이유가 딱히 있겠어? 맛있으니까 그렇지.”
“형 사과 엄청 좋아하는구나.”
주혜성이 반색했다. 형을 기쁘게 해 줄 새로운 것을 알아냈다.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형을 위해서라면, 사과를 백 개라도 구해다 줄 의향이 있었다. 문성하가 영혼 없이 읊조렸다.
“어…….”
“앞으로 내가 많이 사다 줄게.”
“괜찮아. 형도 많아.”
“언제 그렇게 많이 샀어?”
“산 것 아니고, 나비…….”
두서없이 열린 형의 입이 미적거렸다. 한동안 뜸을 들이다, 차분하게 뇌까렸다.
“나비가 가져다줘. 근데 이건 비밀이야.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
형이 침묵했다. 주혜성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당연히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주혜성은 또래보다 상식에 대한 이해가 떨어졌으나, 그런 허무맹랑한 걸 믿을 정도로 아주 멍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푹 숙인 형의 머리통을 보고 있자니, 맹목적인 믿음이 치밀었다. 그래, 의심하지 말자. 형이 한 말이니 설령 거짓이라 해도 믿는 게 맞다. 형이라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나비조차 쫓아다닐 정도로, 형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니까.
“좋겠다. 형은.”
나지막이 감탄했다. 주혜성에게 정수리를 보인 형이 주억거렸다.
“고마워. 이제 사과 얘기는 하지 말자.”
형의 목이 느른해졌다. 좀처럼 들릴 것 같지 않은 머리통을 보며 주혜성은 하염없이 입 안의 혀를 굴렸다. 자신의 어딘가에도 있을 나비를 찾았다. 긴 시간 노력했음에도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멍해진 주혜성의 눈이 푹 기운 형의 옆얼굴을 담았다. 조금 망막이 흔들렸다.
형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 * *
혜성아.
부스럭, 소리가 났다. 가물거리던 주혜성의 눈이 뜨였다. 바라본 맞은편에는 베개에 얼굴을 뉘인 형이 있었다. 주혜성은 홀린 것처럼 바라봤다.
처음 본 순간부터 내내 느낀 감상이지만, 참으로 신비로운 얼굴이다. 남자와 여자, 현실과 비현실, 무기질과 유기질. 그런 특정한 구분을 짓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특별한 생김새다. 자신 역시 외모가 빼어나다는 얘기를 적잖게 들어 왔지만, 이 얼굴에 비견할 정도는 아니다.
분명히 형제인데, 각기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기분이다. 그 사실이 처음에는 원통했으나, 이제는 흡족하다. 덕분에 그 이상의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됐다.
손이 나아갔다. 새근거리는 형의 볼을 덮고 찬찬히 어루만졌다. 말랑한 볼에서는 찰흙처럼 기분 좋은 촉감이 났다. 주혜성은 좀 더 손바닥을 펼쳤다. 커다래진 손이 형의 뺨을 덮었다. 자그마한 얼굴이 가려졌다.
“혜성이.”
어둠 속에서 형이 자신을 불렀다. 주혜성은 가만히 눈동자를 미끄러뜨렸다. 휴식을 취하듯 단잠에 빠진 낯을 감상했다. 편안하게 감긴 눈 밑으로 얼핏 미소 지은 입매가 보인다. 꽤나 평화로운 표정이다.
불현듯 인공적인 진동음이 들렸다. 주혜성의 고개가 돌아갔다. 협탁 위에서 새하얗게 빛나는 핸드폰 액정이 비쳤다. 잡아서 눈앞으로 가져왔다. 새까만 글자가 형형했다.
「A/S 주문 왜 거부해? 나 만족시켜 줘야지.
현주원 DF벤처스 대표」
액정은 곧 멸등했다. 주혜성의 윗눈썹이 구깃구깃 비뚤었다. 흘러간 눈질이 문성하를 살폈다. 고저 없는 한 마디가 나왔다.
“형은 뭐 하고 지냈어? 나 없는 10년 동안.”
형제의 10년은 망각의 연속이었다. 동생을 잊고자 하는 형, 형을 잊고자 하는 동생. 각자의 사정은 있었다. 그럼에도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의 시작은 형제였으며, 새로운 파도가 일지 않는 한 그 이름은 모래성 안에서 존속할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보이지 않는 핏줄에 얽혀 있다.
“형. 있잖아…….”
얼굴이 내려갔다. 미끈한 형의 볼에 입을 맞췄다. 10년 전 형이 해 준 것처럼, 다정하며 부드럽게. 형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형태로. 실제 형제가 이런 걸 하는지는 모르지만 주혜성은 상관없었다. 문성하와 하는 모든 것이 형제의 표준이었다.
“나 형 동생 맞아.”
텅 빈 귀에 속삭였다. 끊겨 가는 동아줄처럼 바삭바삭한 어조였다. 곧 팔을 내밀었다. 아까처럼 하얀 볼에 손을 얹은 뒤 잠잠한 속눈썹을 관찰했다. 나직한 한 마디가 덧붙었다.
“그러니 나 좀 사랑해 줘.”
손가락이 형의 눈을 쓸었다. 으음. 형이 간지러운 듯 어깨를 떨었다. 주혜성의 입매가 올라갔다. 대답을 들은 기분. 만족스러운 손길이 이번에는 형의 귓불을 건드렸다. 거기에 오롯이 새기듯, 확고한 언어를 흘렸다.
“그리고 불행해져.”
이번에는 답이 없었다. 주혜성은 기지개를 켜듯 목을 젖혔다. 농몽한 혼잣말이 흩어졌다.
“진실이 뭐가 중요해.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게 중요한 거지.”
중요한 건 문성하가 돌려받는 일이다. 10년 전 자신이 겪은 걸,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