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왜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했어?』
법원에서 나오자마자 알렉스가 섟을 냈다. 주혜성은 못 들은 척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한 대를 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지켜보던 알렉스가 한탄했다.
『재판장에서 ‘아버지를 증오했다’ 따위를 말을 하면 안 돼. 그 한마디로 인해 판사가 네 고의성을 따지기 시작하면 어쩌려 그랬어.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간다. 다 해결된 마당에 왜 불필요한 불을 붙이고…….』
『그만합시다. 결과적으로 잘 끝나지 않았습니까.』
씩씩거리는 알렉스를 달랜 건 같은 상황에서 배는 진땀을 뺐을 변호사였다. 포기한 알렉스가 고개를 돌렸다. 생각에 잠겨 있던 변호사가 주혜성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주혜성은 곁눈질로 변호사를 봤다.
『고생했습니다. 원만하게 무죄 판결이 나와 다행입니다. 다만 다음에는 같은 상황에서 그런 진술을 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주혜성의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가 까딱거렸다. 차디찬 질문이 나왔다.
『제가 또 사람을 죽일 것 같습니까.』
변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차분한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한 건 없는 법이죠.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주혜성의 입술에 틈이 생겼다. 훅 쏟아진 연기가 변호사의 옆얼굴을 덮쳤다. 변호사는 꼿꼿하게 주혜성을 올려다봤다. 주혜성이 중얼거렸다.
『전 저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툭, 담배 끝이 두드려졌다.
『형도요.』
변호사의 입이 다물렸다. 주혜성을 배회하던 그의 시선이 사그라졌다. 인사도 없이 등을 보인 그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등을 쭉 편 채 하늘을 감상하던 알렉스가 인사했다. 고생했습니다. 변호사가 작게 응수했다. 네, 행운을 빕니다. 그의 등이 멀어졌다.
『어쨌거나 잘 끝나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베이스터 창립 멤버 잃을 뻔했어.』
평정심을 찾은 알렉스가 너스레를 떨었다. 주혜성은 재차 입 안에 찬 연기를 내뿜었다. 법원 앞을 바쁘게 오가는 인영들이 안개 속처럼 끄무레해졌다. 반복해 뻐끔거리고 난 주혜성이 알렉스를 힐금했다.
『나 다음 달에 한국 갈 거야.』
알렉스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진작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주혜성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가서 뭐 할 건데.』
『베이스터 한국 법인 세우려고.』
『사업 모델은?』
『블록체인 플랫폼. 언젠가 우리가 논의한 것 중 하나.』
『기억하고 있어. 그때 말한 장소는 한국이 아니었지만.』
알렉스가 주억거렸다. 깊숙이 연기를 들이켠 주혜성이 읊조렸다.
『괜찮은 시장이야. 기업의 수요가 있고 유저의 이해 수준도 높아. 테스트 베드 삼아 진출하기에 썩 좋은 환경이야. 손해 볼 일은 없어. 내가 장담할게.』
『굳이 부가 설명할 필요 없어. 그런 이유가 없었어도 넌 한국에 갔을 테니까.』
알렉스가 심상하게 응수했다. 주혜성이 미간을 좁혔다.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가 시소처럼 오르내렸다. 심각한 질문이 건네졌다.
『그게 무슨 얘기야.』
『너 결국 형 때문에 가는 거잖아. 죽은 줄 알았던 형이 한국에서 버젓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당장 가 만나야지. 지금 사업이 중요해? 네게 필요한 건 형을 만나는 일이야.』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뼈 있는 한 마디가 덧붙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형제애와 다른 의미에서.』
주혜성의 담배 끝이 흔들렸다. 바스러지는 낙엽 같은 대꾸가 흘러나왔다.
『형제애는 분명히 아니지만, ‘그런 의미’도 아니야.』
『허, 그러면 뭐였는데.』
『나도 궁금해. 이건 아주 복잡한 감정이야. 인풋이 불분명한 아웃풋과 같아.』
새하얗게 타들어 간 끄트머리가 끝내 떨어졌다. 내동댕이쳐진 돌멩이처럼 바닥을 구르는 잔해를 응시하다, 말을 이었다.
『이번에 찾을 거야. 그 인풋.』
알렉스가 목을 젖혔다. 흘러가는 구름을 주시하던 그가 아리송하다는 양 제 머리를 털었다. 허탈한 대답이 찾아들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형제 관계가 매우 돈독해질 것이라는 건 명백하네.』
『글쎄. 나는 반대라고 보는데.』
주혜성이 눈을 깔았다. 무작정 타들어 가는 막대에서 몽롱한 연무가 번졌다. 주혜성의 머릿속이 부옇게 물들었다.
『나는 형을 다치게 할 생각이야.』
알렉스가 면상을 구겼다. 황당함에 찬 음성이 돌아왔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형 때문에 내가 많이 다쳤어. 지난 10년 동안, 내내.』
다 타들어 간 꽁초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주혜성은 시름처럼 말했다.
『형제잖아. 형도 나와 같은 걸 겪어야지.』
어조가 무뎌졌다.
『서로의 과실이 0이 되면, 인풋은 자연히 도출될 거야.』
주혜성의 손이 풀렸다. 손가락에 감겨 있던 꽁초가 추락했다. 하얀 콘크리트 위에서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던 필터가 조금조금 식었다. 주혜성은 발을 내밀었다. 볼품없는 재 덩이가 마구잡이로 짓이겨졌다.
『그것이 실은 공기처럼 가벼운 것이기를 바라고 있어.』
주혜성은 진심으로 원했다. 자신이 ‘사랑’이라 부르는 감정은 사실 알량하며 유치한 알고리즘처럼 하잘것없는 것이기를. 쉽게 무너뜨리고, 쉽게 날려 버릴 수 있는 고작 그런 것이기를.
주혜성은 뿌리까지 형에게 잠식된 나무다. 10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일 초의 예외 없이 형의 대지에서 살아왔다. 너무도 가혹한 감옥이었다. 정작 형은 자신을 까맣게 잊고 비옥한 사계절을 보내고 있는데, 주혜성만 그를 반추하지 않으면 말라 죽는 하루하루를 산다.
살고 싶었다. 형에게 같은 고통을 안기고, 이 처절한 감정의 늪에서 벗어나,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다.
이 인풋은 반드시 초라해야 했다.
***
[어쩔 수 없었어. 한편으로는 예견된 결과야. 네 지시에 따라 베이스터는 문성하 심사역을 투자 담당자로 변경했어. 앞으로 밥 먹듯이 베이스터에 방문할 거고, 본격적으로 실사 들어가면 네 정체 까발려지는 건 시간문제야. 너 역시 언제까지고 숨길 생각이었던 건 아니잖아. 이만 인정해. 알려질 때가 돼서 알려진 거라는 걸.]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던 고단한 목소리가 멎었다. 뜸을 들인 권도재가 웅얼거렸다.
[방식이 좀……. 그렇긴 했지만.]
주혜성의 눈이 감겼다. 넘어간 등이 소파 등받이에 묻혔다. 시트를 불안정하게 억누르던 주먹이 올라왔다. 다섯 손가락을 드러내며 펼친 손이 얼굴을 덮었다. 머릿속이 깜깜했다.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그것도 꽤 많이.
“씨발…….”
나직한 욕설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환한 형광등 빛에 눈이 아렸다. 시근덕댄 상체가 바닥을 향해 기울었다. 빛이 잦아들고, 냉한 어둠에 낯이 잠겼다.
“어떻게 하지.”
벌어진 입에서 독언이 샜다. 별안간 구덩이에 빠진 사람처럼 얼굴을 쥐어뜯어 가며, 주혜성은 반복해 말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이제 시작인데, 시작부터 어긋나 어떻게 하지.
자신이 베이스터 CEO라는 사실은 문성하에게 밝힐 수많은 진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주혜성은 훨씬 더 많은 사실을 숨겨 왔고 죄를 갚듯 그것을 순차적으로 드러낼 생각이었다. 내일의 여행이 디데이로, 대부분을 공개하려 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두 사람이 지닌 최초이자 최후의 연결 고리, 형제. 그것에 대한 진실만큼은 남겨 두기로 했다. 일종의 보루였다. 자신의 거짓에 문성하가 그 어떤 진저리를 치더라도, 연결 고리가 존재하는 한 자신은 버려지지 않을 테니까. 비겁하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주혜성은 여전히 문성하가 두려웠다. 10년 전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매일 매시 매초.
경외심은 습관이었고, 삶을 지탱하는 버릇이었다.
두려움마저 생(生)이 된다. 문성하에서 기인한 모든 감정이 자양분이고, 이를 잃으면 내일의 아침은 황무지 밑에서 맞이하리라. 그것이 이 인풋의 결말이었다.
그렇게나 증오하며 솎아 내려 안달한 토양은 주혜성의 죽음마저 관장하는 사신이었다. 교활한 속임수로 어린 자신을 버리며 죽였다. 동시에 태양이었다. 올곧은 고백으로 밤에 얼룩진 자신의 일상에 빛을 드리웠다. 주혜성은 이제 이것이 없으면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음을 알았다.
깨달음 속에서 경계의 대상은 넘어가는 계절처럼 변경되었다. 문성하에 얽매이는 것에서, 문성하를 잊는 것으로.
그리고 잊히는 것으로.
“괜찮아.”
시트를 짚은 손가락이 발작하듯 표면을 긁었다. 끄트머리가 아릴 정도로 벅벅거리던 손 어딘가에서 뚝, 소리가 났다. 주혜성의 눈길이 내려갔다. 하얀 부분 밑까지 깨져 철철 피를 흘리는 손가락이 보였다. 주혜성은 초점 잃은 눈으로 줄기를 이뤄 가는 혈흔을 봤다. 지렁이처럼 기어가던 핏물이 소파 밑으로 낙하했다. 백지 같은 바닥에 붉은 마침표가 찍혔다.
입 안에서 비릿한 살냄새가 맴을 돌았다. 주혜성은 살아 있음을 확인하듯 혼잣말을 곱씹었다. 괜찮다. 괜찮을 거다. 정말로, 정말로 괜찮아야 한다.
자신은 품어진 땅으로부터 버려지지 않는다.
주혜성은 아직, 문성하의 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