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5장. 주는 자와 받는 자) (25/37)

5장. 주는 자와 받는 자

25.

안재림의 ‘스푼G’ 2호점은 청신투자 사무실로부터 걸어서 10분가량 걸리는 자리에 개점했다. 본래 식당으로 쓰이던 곳인지라 공사에 소요된 기간이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문성하는 종종 공사 중인 가게를 둘러보기도 하고, SNS에 스푼G를 검색해 보기도 했다. 이미 몇몇 인플루언서가 강남에서 스푼G가 오픈을 한다며 발 빠른 홍보를 하고 있었다.

개점 첫날 가게 앞에는 수십여 명이 줄을 섰다. 크지 않은 매장인지라 수용 가능한 인원에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방문 손님에 중점을 둔 매장이 아니었다. 안재림의 자본이 큰 매장을 임대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으므로, 문성하는 진작 다른 전략을 제시했다. 테이크아웃과 배달에 중점을 둔 매장이었다.

매장은 일종의 랜드마크 개념이고, 실질적인 매출은 매장 밖에서 발생시키는 게 맞다고 봤다. 전담 배달 인력과 포장 인력을 두고 운영하면 브랜드의 신뢰도도 올라갈 것이다. 설명을 들은 안재림은 바로 수긍했다. “대표님은 머리가 정말 좋으신 것 같아요”라며 눈을 빛냈다.

옆에서 듣던 최재율은 괜히 이기죽거렸다. 본인 돈 날아가게 생겼는데, 없는 머리라도 갈아야지. 문성하는 안재림 모르게 최재율의 무릎을 걷어찼다. 억, 소리를 낸 최재율이 뭐 하는 짓이냐며 짜증을 냈다. 문성하는 뻔뻔하게 응수했다. 형도 나한테 똑같이 하던가. 꺼떡거리는 마른 다리를 쏘아본 최재율이 혀를 찼다. 이 여우 같은 새끼.

“너무 바쁜 것 아니야?”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 포장이나 배달을 기다리는 사람 등으로 어수선한 가게 입구를 뚫고 들어서니 이마에 땀까지 달고 서빙 하는 안재림이 보였다. 문성하를 발견한 그의 낯이 활짝 폈다. 옆의 직원에게 서빙을 맡기고는, 성큼 다가와 문성하의 팔을 잡았다.

“지금이 그나마 나은 거예요.”

“밖에 사람 이십 명 있던데?”

“점심에는 쉰 명도 넘게 있었어요. 그건 그렇고, 잠깐 와 보세요, 대표님.”

안재림이 부리나케 문성하를 잡아끌었다. 뒤에 있던 최재율이 가게를 휘 둘러보며 따라갔다.

끌려간 곳은 주방 안쪽에 붙어 있는 작은 사무실이었다. 세 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다. 두 사람에게 의자를 내준 안재림이 데스크 위의 노트북을 열었다. 열심히 마우스를 클릭한 그가 파일 하나를 열었다.

“이거 봐요. 대표님.”

숫자로 그득한 화면이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깔끔하게 정리한 엑셀 파일이었다. 문성하는 찬찬히 숫자를 확인했다. 오전 10~11시 137만 5420원. 오전 11시~오후 12시 246만 9510원…….

“개점한 지 5시간 만에 1000만 원 찍었어요. 오늘 안으로 무난하게 2000만 원 달성할 것 같아요.”

안재림이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문성하는 차분한 고갯짓을 했다. 옆의 최재율이 짝, 소리 나게 박수를 쳤다. 곧 등을 젖히며 한탄했다.

“역시 음식 장사가 최고야. 세상을 뒤집어 놓는 기가 막힌 플랫폼 내놓으면 뭐 해? 배고픈 소비자는 당장 눈앞에 있는 떡볶이부터 집어 먹을 텐데.”

“매장 내 매출하고 매장 외 매출 비중은.”

문성하가 물었다. 안재림이 바로 대꾸했다.

“3 대 7이에요.”

“1 대 9까지 가져가자. 배달 인력 충원 중이지?”

“네.”

“10명 채울 때까지 계속 뽑아. 포장 전담 직원도 한 명 더 두고.”

“인건비가 엄청 들어가겠네요.”

“매출로 만회하면 돼. 월 매출 3억 원이 코앞인데 월 200만 원 주는 직원 좀 늘리는 게 대수야?”

문성하가 고개를 까딱했다. 빤히 보던 안재림이 수긍했다.

“네. 맞는 말이에요.”

“방문객 중 특이사항 있는 사람 없었어?”

“방송국 사람 두 명이 찾아왔어요. 컨설팅 업체 사람도 세 명 왔고……. 투자하고 싶다는 사람도 하나 있었어요.”

“방송국은 뭐래?”

“하나는 광고비 받는 대가로 맛집 프로그램 내보내 주겠다 했고, 다른 하나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 했어요.”

“다큐멘터리 뭐.”

“청년 사업가를 다루는 내용이라던데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명함만 받았어요.”

“나한테 줘 봐.”

문성하가 손을 내밀었다. 주머니를 뒤적인 안재림이 하얀 종이 하나를 빼 건넸다. 문성하는 받은 것을 유심히 살폈다. 국내 3대 방송사 조연출의 명함이다. 오른쪽 하단에 프로그램 이름이 적혀 있다. ‘다큐멘터리 신화’. 아는 프로그램이다.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옴니버스식으로 연출한 다큐멘터리인데, 마니아층이 두터워 매번 안정적인 시청률을 기록한다. 당연히 광고비 따위는 요구하지 않을 거다.

“이쪽하고는 내가 얘기할게. 협의 결과에 따라 실제로 방송 나가게 될 수도 있어. 준비해.”

“괜찮을까요?”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이런 프로그램은 나가면 좋아.”

“그럼 할게요.”

명함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망설이던 안재림이 질문했다.

“컨설팅 업체하고 투자하겠다는 사람은요?”

“무시해. 컨설팅도 투자도 내가 알아서 하고 있잖아. 어중이떠중이 추가로 달고 다닐 이유 없어.”

“그럴게요.”

안재림은 더 묻지도 않고 고분고분 답했다. 문성하 얘기라면 범죄만 아닌 이상 다 따를 기세였다. 똑똑. 사무실 문이 두드려졌다. 이내 열린 문틈으로 여직원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사장님. 잠깐 나오실 수 있어요?”

“급한 거야?”

“급하다기보다는……. 잡지사에서 취재를 나왔어요. 대표님하고 몇 마디 나누고 싶으시대요. 광고 같은 것 아니고, 순수한 취재 목적이라 하던데요.”

“오 분만 기다려 달라고 해.”

안재림이 여직원을 떠밀었다. 여직원이 문을 닫고 나갔다. 닫힌 문을 일별한 안재림이 재차 문성하를 봤다. 긴장한 물음이 건네졌다.

“해도 돼요?”

“그 정도는 네가 판단하자. 응?”

몸을 일으킨 문성하가 안재림의 볼을 꼬집었다. 안재림은 아픈 티를 내는 대신 멋쩍게 제 머리를 긁적였다. 눈을 맞춘 문성하가 단호하게 지적했다.

“난 스푼G의 투자자이자 컨설턴트지, 네 매니저가 아니야. 투자자 동의가 필요하지 않은 이슈 가운데 회사에 득이 되는 제안이 존재한다면, 나한테 물을 것 없이 그냥 해. 하고 나서 나에게 얘기만 해 주면 돼.”

“알겠습니다.”

들숨을 삼킨 안재림이 주억거렸다.

“잡지사하고는 만날게요.”

“잘 생각했어.”

문성하가 흐뭇하게 손을 거뒀다. 이어 앉아 있던 의자를 밀어 넣고, 다른 걸 물었다.

“스푼G 전용 SNS는 만들었어?”

“아직이요.”

“만들라 했잖아. 안 하고 뭐 했어?”

“바쁘기도 했고, 무엇보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서.”

“모르겠으면 일단 네 사진 올려. 아주 잘 나온 걸로.”

문성하가 안재림에 손가락질을 했다. 이해를 못한 안재림이 눈만 끔뻑거렸다. 문성하의 손가락이 꼿꼿해졌다.

“네 사진 올려서 팔로워 5000 찍은 다음에 자세한 걸 생각해. 일단은 팔로워 확보하는 게 우선이야.”

“제 사진 하나 가지고 팔로워 5000이 모일까요? 그런 건 유명한 사람이나 가능한 거잖아요.”

안재림이 걱정했다. 낯을 구긴 문성하의 눈이 돌아갔다. 동시에 문성하를 본 최재율이 키득거렸다. 웃겨 죽겠다는 혼잣말이 들렸다.

“저 새끼는 진짜 떡볶이 만드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구만. 여우 같은 문성하 안 만났으면 진작 망했다.”

비식거린 최재율이 일어섰다. 문성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슬슬 이동해야 할 시간이었다. 최재율에게 가자는 말을 하기 위해 막 틀고 난 머리가 흠칫했다. 벽에 붙어 있는 신문 기사 스크랩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같은 것을 본 최재율이 안재림을 불렀다.

“안 대표야. 너 NGX 주혜성 팬이냐?”

노트북을 덮은 안재림이 화들짝했다. 더듬거리던 그의 입이 열렸다.

“네……. 네.”

“이유가 있어?”

“그냥, 뭐. 워낙 대단하시잖아요. 어린 나이에 엄청난 사업가가 된 것 자체가.”

안재림의 눈이 최재율과 문성하를 차례로 머금었다. 그의 어조가 진지해졌다.

“제 롤 모델이에요.”

멀거니 있던 문성하가 공연히 제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많고 많은 사업가 중 왜 하필 주혜성일까 싶은 생각에 괜히 안재림이 원망스러웠다. 그사이 자리를 정리한 안재림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가실 거죠? 앞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빈자리 없이 빼곡한 식탁 사이사이로 헐레벌떡 서빙 중인 직원들이 보였다. 낯을 추스른 문성하가 발을 내디뎠다. 뒤따라온 최재율이 뇌까렸다. 나이 어린 사업가한테는 그저 주혜성이 신이네, 지난주에 만난 26세짜리 스타트업 CEO도 주혜성 만나 보는 게 꿈이라고 노래를 하던데.

“야! 안재림.”

돌연 저편에서 우렁찬 남자 소리가 들렸다. 문성하의 눈길이 넘어갔다. 덩치 좋은 남학생 세 명이 껄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안재림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안재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을 봤다. 막 정차한 버스에서 우르르 내리는 승객 무리를 응시하듯, 무미건조한 낯빛이었다. 그들의 몫으로 남겨 둘 제 감정은 한 자락도 남아 있지 않다는 양, 냉소적인 감회까지 비쳤다.

“인스타에 올라왔기에 궁금해서 와 봤다. 사람은 왜 이렇게 많냐?”

무리 중 야구 점퍼를 입은 남학생이 안재림의 어깨를 툭, 쳤다. 꿈쩍 않은 안재림이 대꾸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

“말했잖아. 인스타 보고 궁금해서 왔다고. 나 알바 하는 곳이 저 건너편이야.”

남학생이 입구 너머를 가리켰다. 문성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은 각양각색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보였다. 강남의 클럽 거리를 얘기하는 듯했다.

“줄은 서고 온 거야?”

안재림이 물었다. 남학생이 저소했다.

“서긴 뭘 서. 바빠 죽겠는데. 빈자리 하나 받기로 너랑 사전에 얘기했다 했어. 바로 해 주던데?”

남학생이 낄낄거렸다. 저편에서 막 자리를 세팅한 여직원이 손을 흔들었다. 이쪽으로 오시면 돼요. 남학생이 걷기 시작했다. 그 뒤로 또 다른 두 명이 따랐다.

“민아야.”

안재림이 손짓했다. 서둘러 다가온 여직원이 초조해했다.

“설마 제가 실수했나요? 사장님.”

“아니야. 그럴 수 있지. 대표 메뉴로 적당히 내줘. 계산 받지 말고.”

“알겠습니다.”

“다만 이거 하난 확실히 하자. 다음에는 이런 것 해 주면 안 돼. 철저하게 매뉴얼 지켜 가며 하는 거야. 알았지?”

“네. 죄송해요.”

여직원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고 난 안재림이 남학생 테이블로 갔다. 지켜보던 문성하도 발을 옮겼다.

“내가 낼 테니 잘 먹고 가.”

테이블을 짚은 안재림이 말했다. 야구 점퍼가 과장되게 실실거렸다.

“야, 고맙다. 문전 박대 당할까 봐 좀 걱정했는데, 확실히 넌 성격이 좋아. 중학교 때 내가 했던 거 다 장난인 거 알지? 나 학기 초에 너 되게 좋아했잖아. 학교에서 제일 잘생긴 놈이라. 가끔 쓸데없이 고집부리는 거 빡쳐서 걷어찬 적은 있지만, 뭐. 아프라고 한 것 아니야. 솔직히 안 아팠잖아. 어? 내가 미쳤다고 그딴 짓을…….”

“다음부터 오지 말고.”

서늘한 한 마디가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야구 점퍼의 앞이마가 꿈틀거렸다. 안재림의 눈초리에 힘이 실렸다. 한없이 딱딱한 경고가 덧붙었다.

“앞으로 모르는 사이로 살자. 내가 그러고 싶거든.”

“야. 안재림.”

야구 점퍼가 인상을 썼다. 무시한 안재림이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사람 비슷한 대접을 해 주는 거야. 여긴 내 매장이고, 오늘은 나에게 아주 의미 있는 날이니까. 하지만 지금뿐이야. 오늘 이후로 너와 아는 사이처럼 마주칠 일은 절대 없어.”

“이 새끼가 미쳤나.”

탕! 일어선 야구 점퍼가 테이블을 쳤다. 홀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안재림을 쏘아본 그가 씩씩거렸다. 서빙하던 남직원 하나가 다가왔다. 재림아, 내보낼까? 안재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직접 데리고 나가서 해결할게.

문성하의 눈 밑이 옴씰거렸다. 낯설 정도로 차게 식은 안재림의 표정에서 분노가 비쳤다. 테이블을 짚은 손가락이 표면을 바드득, 긁고 있었다. 그대로 야구 점퍼의 목에다 꽂고 같은 걸 해도 놀라지 않을 것만 같았다.

돌겠네. 속으로 한탄한 문성하가 머리를 쓸었다. 조금조금 동요하는 홀 안을 둘러봤다. 구석에서 대기 중인 잡지사 기자가 찌푸린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눈싸움을 하는 두 청년을 재차 확인했다. 문성하의 입에서 무거운 숨이 샜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 위험하다. 여기서 야구 점퍼는 잃을 게 없지만, 안재림은 잃을 게 있다. 심지어 개점 첫날이다. 대표라는 사람이 작은 소동이라도 일으키면 이곳의 브랜드 가치에 금이 간다.

한배를 탄 문성하 역시 난처해지는 건 당연지사다.

생각을 정돈한 문성하가 몸을 바로 했다. 성큼성큼 발을 뻗으며 그들을 향했다. 동시에 다가온 여직원이 테이블 위에 두 개의 접시를 내려놓았다. 커리 떡볶이와 이탈리안 떡볶이 나왔습니다. 그중 하나를 챈 문성하가 그대로 야구 점퍼의 몸에 접시를 엎어 버렸다.

“뭐야, 씨발!”

발을 구른 야구 점퍼가 쌍욕을 했다. 문성하는 묵묵하게 유광 점퍼를 타고 흘러내리는 빨간 국물을 봤다. 시근덕거린 야구 점퍼가 팔을 뻗었다. 다짜고짜 문성하의 멱살을 잡고는, 홀이 떠나가라 외쳤다.

“씨발 새끼야. 너 돌았어?”

“너 데스원 가드지.”

외침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문성하가 그의 주머니에서 출입 카드를 꺼내며 물었다. 야구 점퍼가 주춤했다. 그대로 뺀 문성하가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정윤환, 데스원, 가드……. 맞네.”

“뭐 하는 새끼야, 너.”

“데스원에 투자한 사람.”

문성하가 안여하게 응수했다. 야구 점퍼의 미간에 조금조금 주름이 잡혔다. 문성하는 가만히 문 너머의 클럽 거리를 응망했다. 데스원을 포함해 총 6개의 클럽이 위치한 거리. 문성하는 그곳을 제법 잘 안다. 6개 클럽이 전부 한 조폭 출신 개인 사업가에 의해 굴러간다. 클럽 지분 대부분이 그의 소유지만, 일부는 투자 회사나 개인 투자자의 자금을 빌리고 있다.

청신투자는 설립 초기 최재율의 지인 소개로 클럽 거리에 자금을 묻었다. 사업가는 6개 클럽을 묶어 하나의 상품으로 만든 후 투자 자금을 모집했다. 웬만해선 망할 수 없는 사업이고, 수익률도 안정적인지라 안전 자산 확보 차원에서 투자를 결정했다. 많은 지분을 보유한 건 아니지만 조폭 출신 사업가와 정기적으로 식사할 정도의 친분은 갖추고 있다.

“고철영 사장 잘 지내? 지난달에도 나하고 술 마셨는데.”

문성하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야구 점퍼의 낯이 하얗게 질려 갔다. 미미하게 전율하는 팔뚝이 보였다. 문성하는 내심 비웃었다. 고철영 사장. 야구 점퍼 입장에선 대통령보다 무서운 이름일 거다. 조폭 출신 고철영은 명함만 번듯할 뿐 행동거지가 깡패 시절의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6개 클럽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고철영을 ‘형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모신다. 그 형님에 잘못 찍히면 피에 떡이 되도록 맞는 게 불문율이었다.

안재림과 동갑인 스무 살. 학생 때의 치기 어린 골목대장 시절에서 여태 졸업하지 못한 철부지. 강남 최대의 클럽으로 꼽히는 데스원에서 가드로 일하는 것 따위에 자부심을 느낄 어리숙한 망나니.

야구 점퍼에게는 유감이지만 안재림의 시계가 그의 것보다 훨씬 더 빨랐다. 더 이상 밟는 대로 밟히는 중학생이 아니다. 야구 점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세상을 살고 있으며, 나름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를 보호하는 튼튼한 울타리마저 존재한다.

문성하는 안재림에게 돈을 걸었다. 그러므로 이 상황을 무탈하게 해결할 의무가 있었다.

“데스원도 여기도 내가 투자한 업장이야. 난 내 돈 깔아 놓은 자리에 양아치 묻는 것 싫어하고.”

출입 카드가 야구 점퍼의 가슴을 툭, 건드렸다. 그의 가슴팍이 꿀렁거렸다.

“고철영 사장한테 전화해서 직원 관리 잘하라고 한마디 하기 전에 나가.”

냉한 시선을 끌어 올린 문성하가 경고했다.

“나 방금 네 이름 외웠어.”

야구 점퍼의 어깨가 파들거렸다. 우뚝 서 있는 안재림을 보며 이를 간 그가 손을 올렸다. 문성하에게서 출입 카드를 팍, 낚아채고는 밭은 호흡을 터뜨렸다. 어물거리던 입이 가까스로 열렸다.

“죄송합니다.”

홱 몸을 튼 야구 점퍼가 자리를 떴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두 남학생이 빠릿빠릿하게 그를 따랐다. 피로한 숨을 뿜은 문성하가 안재림을 일별했다. 안재림이 고개를 숙이며 탄성을 뱉었다. 기어들어 가는 사과가 찾아들었다.

“잘못했습니다.”

“뭐가.”

“제가 절제를 못 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날에…….”

“됐어. 진짜로 사고 친 것 아니니까.”

얼굴을 푼 문성하가 가벼운 너스레를 떨었다.

“요즘 애들 되게 무섭다. 그치?”

느슨한 팔이 안재림의 어깨를 둘렀다. 발을 뻗자 그대로 안재림의 몸이 이끌렸다. 죄송합니다, 잠시 사고가 있었습니다. 서비스로 튀김 한 접시씩 돌릴게요! 홀 매니저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사람들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비로소 매장이 활기를 찾았다.

“저 새끼 또 오면 나한테 얘기해.”

가게를 나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간 문성하가 말했다. 안재림이 풀 죽은 고갯짓을 했다.

“네…….”

“대답이 왜 그래?”

“죄송해서요.”

“죄송하다는 말 하지 마. 저 새끼가 잘못한 거지, 네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문성하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입을 꾹 다문 안재림의 눈망울이 젖어 갔다. 문성하보다 키는 한 뼘이나 크면서, 물을 엎은 10세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문성하는 조금 웃고 말았다.

“왜 울고 그래? 누가 보면 내가 너 때린 줄 알겠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수그린 안재림이 중얼거렸다. 문성하는 됐다는 양 재차 어깨를 두드려 줬다. 한참이나 등을 떨던 그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지만 뭐 하나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해. 뭔데.”

“호칭 있잖아요.”

“응.”

“대표님 말고, 형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형?”

문성하가 휘둥그레졌다. 안재림이 자신 없이 읊조렸다.

“실례일 수도 있는데, 그냥…… 그렇게 부르고 싶어서요.”

눈치를 본 그가 덧붙였다.

“제게 이렇게 잘해 준 분이 그때 트럭 장사 같이 한 형 이후로 처음이라. 아니, 그 형보다 대표님이 훨씬 더. 뭐랄까…….”

안재림의 혀가 갈피를 못 잡고 너울거렸다. 문성하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뭐라 설명하긴 어려운데, 저한테는 대표님이 꼭 제가 그리던 형 같아요.”

안재림을 쓰다듬던 손이 멎었다. 맥 빠진 팔꿈치가 욱신거렸다. 매연을 머금은 텁지근한 공기가 입술 틈을 파고들었다. 폐를 보호하듯 내쉬고 난 문성하가 고개를 들었다. 헤매던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전광판에 걸렸다. We are NGX. 커다란 타이틀 밑으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

문성하가 태어난 이래 자신을 가장 많이 ‘형’이라 부른 사람. 문성하로 하여금 그 호칭의 소유주가 된 사람. 그토록 호칭을 점유하다 어느 날 자음과 모음 하나하나 갈가리 분리하고 사라진 사람.

문성하의 세상에서 누군가로부터 ‘형’이란 말을 듣는 일은 이제 폭력이다.

“미안. 그냥 대표님으로 하자.”

길게 눈을 감았다 뜬 문성하가 타일렀다. 안재림의 어깨가 들썩였다. 적막하게 문성하를 주시하다, 어쩔 수 없다는 양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이만 들어가 봐. 너무 오래 쉬었다.”

눈을 피한 문성하가 안재림의 등을 떠밀었다. 입을 다문 그가 매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문성하는 생기라곤 하나도 없는 그의 뒷면을 복잡하게 바라봤다. 걸리는 게 많아 가슴이 갑갑했다.

맞은편에서 안재림을 지나쳐 온 최재율이 문성하의 앞에 섰다. 안재림과 문성하를 번갈아 본 그가 물었다.

“표정이 왜 저래? 쟤.”

“어려서 그래. 별일 없었어.”

문성하가 혼잣말을 했다. 헛웃음 친 최재율이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덜컥 얼굴이 잡힌 문성하가 낯을 찌푸렸다. 곰곰이 살핀 최재율이 갸웃거렸다.

“나 방금 신기한 것 봤다.”

“신기한 것, 뭐.”

“눈꼬리 보조개.”

스멀스멀 이동한 손가락이 문성하의 왼쪽 눈 밑을 톡, 건드렸다. 진저리 친 문성하가 소리를 쳤다.

“뭐 하는 짓이야?”

“이거 진짜 섹시한 느낌이라 옛날에 너하고 할 때 내가 많이도 비볐는데. 응?”

“그 얘기 어디 가서 하면 죽여 버린다. 변태 새끼야.”

“아무튼, 내가 지금까지 눈꼬리 밑에 보조개 단 사람은 너뿐인 줄 알았거든.”

“애초에 흔한 게 아니니까. 그게 뭐.”

“저 새끼도 같은 게 있더라.”

뒤를 가리킨 최재율이 어깨를 으쓱했다. 문성하의 낯이 일순 굳었다. 척추를 타고 싸늘한 기류가 미끄러지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벌어진 입에서 탁한 숨이 샜다. 예기치 못한 뭔가를 삼켰다 뱉은 것처럼, 목이 칼칼했다. 아까 안재림이 주저하며 꺼낸 말이 머릿속에서 맴을 돌았다. 형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아니, 안 된다. 미안하게도. 안재림 때문이 아니다.

한번 동생을 잘못 선택한 자신 때문이다.

문성하의 팔이 들렸다. 견고한 손아귀가 최재율의 팔뚝을 감았다. 우둑,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비틀었다. 신음한 최재율이 이맛살을 좁혔다. 아이씨, 이 또라이 새끼야! 날뛰는 최재율을 쏘아본 문성하가 뇌까렸다.

“그래서 어쩌라고. 실은 먼 사촌이라도 된다는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별 쓸데없는 걸 따지고 앉아 있어. 인생에 도움도 안 되는걸.”

***

문성하는 어린 시절 페달을 밟는 게 싫었다. 그것을 하며 한 번도 남을 앞지른 적이 없었다. 첫 자전거를 얻은 일곱 살 때부터 그랬다. 동네 아이들과 자전거 타기 내기를 하면, 문성하는 예외 없이 꼴등을 했다.

문성하는 승부욕이 강하지 않지만 패배에 의한 수치에는 쉽게 얽매이는 편이었다. 자전거 내기에서 꼴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다섯 번, 열 번, 스무 번에 달하자 문성하는 자연스럽게 자전거와 멀어졌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자전거는 집 앞 현관에 방치됐고,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문성하는 이후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

다시 페달을 밟은 건 18년 만인 27세의 가을이었다. 올라탄 자전거는 나아가지 않았고, 함께 경쟁할 사람도 없었지만 문성하는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잘 훈련된 서커스장의 사자처럼 안장 위에 올랐다. 그리고 페달을 밟았다.

나아가지도 않고, 경쟁할 사람도 없는 페달 밟기는 패배에 대한 부담이 없어 출발이 수월했다. 다만 물레질을 하듯 반복적으로 발만 구르다 보면 외나무다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는 것 같아 공허해지기 일쑤였다. 이 자전거는 아무리 밟아도 도달할 곳이 없다. 허무감을 느낄 때마다 문성하는 오래된 박하사탕을 꺼내 먹는 것처럼 입을 오물거렸다.

꼴등을 해서 좋았던 시절도 있었다고, 새삼 생각했다.

“좀 쉽시다.”

물리 치료사가 패널을 짚었다. 삑, 소리를 내며 시동이 꺼졌다. 발을 감은 페달이 느릿느릿 멈춰 갔다. 빠져나온 발이 바닥에 늘어졌다.

“성하 씨. 비상장 주식 거래해 본 적 있어요?”

바닥에 앉는 문성하에게 물리 치료사가 물었다. 문성하는 곁눈질로 그를 봤다. 물리 치료사는 문성하가 투자업에 종사한다는 걸 몰랐다. 여느 기업의 사무직 정도로만 알았다.

“글쎄요.”

문성하는 대충 답했다. 물리 치료사가 만지작거리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문성하가 판 에센더의 회사 홈페이지였다.

“아는 형한테 여기 주식 싸게 넘겨받았어요. 아직 조그마한 회사인데, NGX에서 인수했으니 앞으로 엄청나게 커질 거예요.”

물리 치료사가 싱글벙글했다. 문성하가 물었다.

“주당 가격이 어떻게 돼요?”

“570원이요.”

바가지군. 문성하는 속으로 쯧, 소리를 냈다. 하여간 아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다.

“성하 씨. 잠시 원장님 좀 뵐게요.”

저편에서 안내 데스크 직원 목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킨 문성하가 원장실을 향해 걸었다. 원장실 방문은 이 재활 치료 센터에 온 5년 전부터 닳도록 했다. 센터장은 틈만 나면 문성하를 불러 면담을 했다. 모든 환자에게 그런 건 아니고, 문성하에게만 그랬다. 데이터 제공 조건으로 무상 치료를 받는 특수 환자니 그럴 수 있었다.

“오늘은 좀 괜찮았어요?”

원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센터장이 찻잔을 놓아 주며 반겼다. 자리에 앉은 문성하가 잠자코 찻잔을 들었다. 맞은편에 착석한 센터장이 양손에 깍지를 끼며 물었다.

“최근 간헐적 마비가 눈에 띄게 잦아졌다고요.”

“물리 치료사가 그런 얘길 하던가요?”

“성하 씨 데이터는 항상 체크하고 있으니까요.”

센터장이 빙글거렸다. 찻물을 들이켜고 난 문성하가 골똘해졌다.

헌데 내가 물리 치료사에게 그런 얘길 한 적이 있었던가.

“가끔은 다리를 다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필요해요.”

센터장이 조언했다. 문성하가 갸우뚱했다.

“그럼 뭐로 생각합니까.”

“‘다리를 쓴다’는 건 특유의 기능적 의미를 내포한 표현이잖아요. ‘걷는다’, ‘달린다’와 같은.”

“그렇지요.”

“그것에 지나치게 사로잡히면 부담감 때문에 무의식중에 기능 저하가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80% 할 수 있는 게 20%나 30%에 그치면 억울하잖습니까.”

“그렇다고 다리를 팔이나 목으로 볼 수도 없는 일이죠.”

문성하가 찌뿌둥해졌다. 센터장이 껄껄거렸다.

“그 정도로 극단적일 필요는 없지만, 다리의 기능성에 집착하는 걸 지양하는 연습은 해 볼 만하지 않을까요?”

그가 책상 위를 더듬었다. 뭔가를 찾고 있었다.

“대학 동기 중 심리 치료 센터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TV에 자주 출연하는 친구라 성하 씨도 딱 보면 누군지 알 겁니다. 그 친구 명함을 드릴 테니, 한번 연락해 센터에 찾아가 보세요. 성하 씨 얘기를 미리 해 두겠습니다. 아주 친절히 상담해 줄 겁니다.”

“그러면…….”

문성하가 아물거렸다. 두꺼운 책 하나를 집어 든 센터장이 문성하를 힐금했다. 미적거리던 문성하가 질문했다.

“비용이 많이 들까요? 상담료가 꽤 될 것 같은데.”

센터장이 웃었다. 문성하는 웃지 않았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자금이 청신투자에 묶여 있는 입장이라 문성하는 의무적으로 생활비를 최소화해 왔다. 재활 치료만 해도 이 센터에서 무상으로 제공해 주지 않았다면 진작 포기했을 거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성하 씨는 무료로 상담받을 겁니다. 우리 센터의 귀중한 자산 아닙니까.”

센터장이 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문성하는 속으로 안도했다. 무상이라면 얼마든지 받을 용의가 있다. 게다가 한 번쯤 심리 상담이 필요하다 생각한 시점이었다.

센터장은 한참이나 페이지를 뒤적였다. 넘어가는 종이 곳곳에서 명함이 비쳤다. 예전에 만난 중견 기업 CEO가 중요 명함은 상대방을 쉽게 연상케 하는 책 페이지에 끼워 보관한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도 그런 케이스인 듯했다.

툭. 넘어가던 페이지에서 종이 하나가 떨어졌다. 아. 몸을 일으킨 문성하가 대신 주워 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막 명함을 잡은 손이 옴짝거렸다. 삽시간에 낯이 얼어붙었다. 이게 왜 여기서 나올까 싶었다.

「NGX CEO, 주혜성.」

“이게 왜…….”

문성하가 고개를 들었다. 마주 본 센터장의 얼굴에 난색이 스쳤다. 폭풍우 직전처럼 냉하며 잠잠한 기류가 그들을 에워쌌다. 문성하는 재차 명함을 살폈다. 적혀 있는 이름은 주혜성이 맞았다.

“센터장님.”

문성하가 명함을 움켜쥐었다. 꼿꼿한 눈길이 센터장에 꽂혔다. 입을 다신 센터장이 책을 내려놓았다. 채 넘어가지 못한 페이지가 팔랑거리다 내려앉았다.

“설명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센터장은 대답 대신 제 이마를 짚었다. 생각을 곱씹듯 손가락으로 지분거리다, 자못 차분하게 문성하를 봤다. 먹지 같은 망막에 문성하가 걸렸다.

“우리 센터 후원자입니다. 주혜성 대표가.”

“왜 하필 여깁니까.”

문성하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센터장의 손이 다가왔다. 후들거리는 문성하의 손등을 덮고는, 조곤조곤 말했다.

“오해 마십시오. 주혜성 대표는 그저 순수하게…….”

“제가 이곳에서 무상 치료받는 이유가, 센터의 연구용 데이터를 제공해서인 게 맞기는 합니까.”

센터장은 차마 답을 하지 못했다. 문성하의 이가 아드득, 갈렸다. 날 선 음성이 실내를 울렸다.

“제 재활 데이터는 누구를 위해 수집돼, 누구에게 제공돼 온 거죠?”

센터장은 역시 답을 하지 못했다.

***

딩동. 벨 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문성하는 재차 벨을 눌렀다. 같은 소리가 반복됐다. 딩동, 딩동, 딩동.

“뭡니까.”

열린 문틈으로 옆집 남자가 몸을 뺐다. 또 상반신을 탈의하고 있었다. 문성하는 다짜고짜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이내 우악스럽게 밀어 대며 안에다 발을 들였다. 어, 어, 하며 밀려 난 남자가 우두커니 섰다.

“뭐 하나 물어봅시다.”

무례하며 저돌적인 방문에도 남자는 이상하리만치 불쾌감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위축돼 있었다.

“일전에 제가 복도에서 어떤 남자와 다툴 때.”

허리를 짚은 문성하가 눈을 치떴다.

“당시 시끄럽다 한 다음, 그와 관련해 따로 연락한 사람이 있습니까.”

입을 다문 남자가 무춤했다. 소파의 여자가 초조한 듯 쿠션을 끌어안았다. 그저 침묵하는 그를 노려보며 문성하가 역정을 냈다.

“확실하게 얘기해요! 아는 조폭 동원해 통화 내용 죄 까발려 버리기 전…….”

“난 그냥 집주인한테 얘기했어요! 그게 다예요.”

펄쩍 뛴 남자가 말했다. 문성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뭐 별거라고 집주인한테 얘기합니까.”

“집주인하고 사전에 한 얘기가 있거든요. 옆집에서 조금이라도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하면, 언제라도 자기에게 연락 달라고. 그러면 월세 깎아 주겠다고.”

“얼마를 깎아 받았는데요.”

“원래 100만 원인 것 80만 원에 계약했죠.”

“여기 월세가 100만 원이나 해요?”

이번에는 문성하가 놀랐다. 정말로 처음 안 사실이었다. 눈을 끔뻑거린 남자가 설명했다.

“이 빌라 통째로 보유한 아주머니가 똑같이 적용하고 있잖아요. 보증금 1억에 월세 100. 강남 역세권에서 이 정도면 양반이라면서.”

문성하의 입에서 황망한 숨이 터졌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말한 보증금과 월세는 문성하가 지난 7년간 납입한 금액의 정확히 2배다. 최초로 이곳에 들어올 때 보증금 5000만 원에 월세 50만 원의 계약을 했고, 이후 특별한 가격 상승 없이 주기적인 연장만 해 가며 살았다.

“근데 아주머니는 왜 이렇게 그쪽을 예의 주시합니까. 혹시 전과자예요?”

남자가 심각하게 물었다. 문성하는 대답 대신 등을 보였다. 터벅터벅 현관으로 돌아가, 휙 문을 젖히며 빠져나왔다. 탕. 문 닫히는 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제집 현관을 보며 서성거리던 문성하가 벽에다 이마를 박았다. 자분자분 비벼 대며 억지로 상념을 정리했다. 지뢰처럼 폭발해 흩어진 진실의 파편에 뇌리가 알싸했다.

재활 치료 센터에서 제공한 5년의 무상 치료는 사실 무상이 아니다. 주혜성이 진작 돈을 냈다. 센터장은 대가로 문성하의 재활 데이터를 그에게 전달했다. 집 쪽도 마찬가지. 저도 모르는 새 오른 보증금과 월세, 거기에 일정한 수고비가 더해져 집주인에게 전해졌다. 집주인은 대가로 문성하의 근황을 총망라해 주혜성에게 보고했을 거다.

또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 경과 체크를 위해 정기적으로 찾는 대학 병원 담당의도 수상하다. 필요 이상 긴 시간에 걸쳐 문성하를 진단한다. 공장식으로 돌아가는 병원 진료 특성상 3분 남짓한 시간에 모든 걸 끝낼 법도 한데 그는 매번 이십 분 가까이 문성하를 앉혀 놓고 초진처럼 본다. 이것 역시 주혜성이 짠 판일까.

그리고 이게 다일까.

한참이나 숙여 있던 고개가 퍼뜩 들렸다. 크게 심호흡한 문성하가 몸을 돌렸다. 성난 걸음으로 직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눌렀다. 기다렸다.

곧 올라온 승강기가 입을 벌렸다. 안으로 들어가 로비 층을 눌렀다. 죽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성하는 폭주 직전의 자전거 페달에 발을 건 사람처럼 색색거렸다. 분노에 찬 머리가 들끓었다.

“감히 날 가지고 거래를 해.”

‘그날’을 잊기 위해 발버둥 친 문성하의 나날 하나하나마저 주혜성은 돈으로 샀다. 문성하가 모르는 새, 5년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마치 이 버둥질을 감상하는 것처럼.

이게 기만의 연장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멈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문성하는 나가면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지도 앱을 켜고 주소지 하나를 검색했다. NGX코리아.

“어디 한번 끝까지 가 보자. 개새끼야.”

다리가 뻗어 나갔다. 오른발은 원활하게 바깥으로 빠졌는데, 버릇처럼 끌린 왼발이 엘리베이터 바닥 틈에 끼어 버렸다. 발을 사이에 둔 채 문이 닫혀 가기 시작했다. 문성하는 침착하게 움직였다. 딱 문이 닫히기 직전 탈출한 발이 바닥을 디뎠다. 두 발로 선 문성하가 저벅저벅 빌라를 빠져나갔다.

* * *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NGX 빌딩은 베이스터와 NGX가 49 대 51 지분으로 공동 소유한 건물이었다. 6층부터 20층을 베이스터 유라시아 지사가 썼고, 21층부터 29층을 NGX코리아가 썼다. 건물 꼭대기엔 전광판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이런저런 광고를 내보내다 주기적으로 NGX 홍보 영상을 띄웠다. 영상에는 늘 주혜성이 나왔다. 강남 직장인은 하루에 두어 번씩 전광판의 주혜성을 봤다.

1층부터 5층, 꼭대기 층인 30층에는 레스토랑과 바가 들어서 있었다. 대체로 가격대가 높고 고급스러운 곳이라 강남 직장인의 단골 접대 장소로 통했다. 그들 사이에서는 매우 직관적이며 간단한 장소 설명 방식이 있었다. 그, 주혜성 보이는 건물. 거기 1층 이탈리안. 이런 식이었다.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로비에 들어선 문성하의 귀에 지긋지긋한 여자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문성하는 찌푸린 채 액정을 쏘아봤다. NGX COO 제임스 임. 벌써 여덟 번째다. 무슨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도통 전화를 받을 기미가 없다.

“곤란한데.”

넓은 로비를 둘러본 문성하가 한숨을 쉬었다. 문성하는 주혜성의 핸드폰 번호를 모른다. 명함을 받은 적이 있지만, 받자마자 찢어 버렸다. 유일하게 NGX 측과 소통 가능한 수단이 제임스 임인데, 그가 연락을 받지 않는다. 난감할 따름이었다.

“What brought you here?”

『여긴 어떤 일로 오셨죠?』

저편에서 영어 질문이 들렸다. 문성하의 얼굴이 돌아갔다. 성큼 걸어온 남자는 적당히 까무잡잡하며 건강한 피부색을 지니고 있었다. 키가 190센티에 근접할 정도로 컸고 어깨도 아주 넓어 보였다.

주혜성과 비슷하거나 좀 더 작을까. 문성하는 속으로 가늠했다. 살면서 가까이서 접한 가장 큰 남자가 주혜성이다 보니 이런 남자를 보면 본능적으로 주혜성과 비교하게 됐다.

“Do you work here?”

『여기서 근무하세요?』

문성하가 물었다. 남자가 끄덕였다. 문성하는 또 물었다.

“NGX? BASTER?”

『NGX? 베이스터? 어느 쪽?』

“hmm……. both?”

『글쎄요……. 둘 다?』

남자가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문성하가 눈을 찌푸렸다. 둘 다 근무한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인가. 여기 가드라도 되는 건가.

“I want to meet NGX CEO, Joo.”

『NGX 주혜성 대표를 만나고 싶습니다.』

문성하가 또박또박 말했다. 남자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살짝 고개를 기운 남자가 혼잣말을 했다. 워낙 작아 잘 들리지 않았지만 ‘interesting’과 같은 단어를 들은 것도 같았다.

“Ok. I’ll take you him.”

『좋아요. 제가 그에게 데려가죠.』

보다 다가온 그가 대뜸 문성하의 팔을 잡았다. 깜짝한 문성하가 올려다보았다. 경계감이 완연한 기색을 눈치챈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위를 가리켰다. 슬금슬금 몸을 뺀 문성하가 중얼거렸다.

“Thank you.”

『감사합니다.』

남자가 발걸음을 돌렸다. 성큼성큼 나아가는 그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종종 귓속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긴 왜? 온다는 얘기 없었잖아. 게이트 앞에 다다른 그가 카드를 대는 대신 손을 올렸다. 얼굴을 본 데스크 직원이 바로 문을 열어 줬다.

문성하를 가리킨 남자가 직원에게 뭔가를 말했다. 그사이 문성하는 신분증을 꺼내고 있었다. 이런 건물에 외부인이 출입하려면 신분증을 맡기는 게 보통인 법이다. 지갑을 뒤적이는 문성하를 보며 직원이 손사래를 쳤다. 지극히 친절한 언어가 건네졌다.

“그대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문성하 앞 게이트가 확 젖혀졌다. 얼떨떨하게 쳐다본 문성하가 지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곧 발을 뻗어 게이트를 통과했다.

먼저 들어간 남자의 곁에 다다르자마자 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드문드문 대기 중인 10여 명을 가로지르며 남자가 걸어갔다. 그를 확인한 몇몇 사람이 경직됐다. 개의치 않고 승강기에 올라탄 남자가 문성하에 손짓을 했다.

주변을 살피며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만 태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혀 갔다. 문틈으로 입을 가린 채 말을 나누는 사람들이 보였다. 미쳤어? 저기에 어떻게 타.

올라가는 내내 남자는 승강기 벽에 붙은 전광판을 봤다. 문성하도 같은 걸 봤다. 베이스터 유라시아 지사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Center of Eurasia, BASETER’라는 문구가 휘황찬란하게 떴다 사라졌다. 이어 권도재와 한나의 얼굴이 나란히 떴다. 유라시아 지사 공동 CEO로 소개되고 있었다.

베이스터는 5년 새 약간의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본사는 기존대로 실리콘밸리에 두되, 유럽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플랫폼 사업을 하는 베이스터 유라시아 지사를 출범시켰다. 대표에는 권도재와 한나가 올랐고, 사무실 위치는 서울로 잡았다.

베이스터 유라시아 지사는 순항 중인 베이스터 한국 법인과 협업하며 영국과 일본, 독일 등에서 각종 플랫폼 사업을 전개했다. 성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유라시아 내 1만 개 기업이 베이스터 플랫폼을 채택했다. 연 매출은 지난해 10조 원에 육박했다.

전광판에서 흥미를 잃은 듯한 남자가 도로 엘리베이터 문에 눈을 뒀다. 문성하는 이번엔 남자를 살폈다. 아까는 워낙 정신이 없어 제대로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환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확인하니 조금은 익숙한 느낌이 든다. 신문이나 뉴스에서 봤을까. 혹은 둘 다에서. 아까 본 직원 반응을 고려하면 꽤나 높은 위치의 사람인 듯한데, 대체 어느 정도의 직함을 갖고 있는 거지.

29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남색 재킷을 입은 남자의 등이 보였다. 남자의 낯빛이 환해졌다. 성큼성큼 다가간 그가 남색 재킷의 어깨를 쳤다. 휙 고개를 튼 남색 재킷이 놀라 외쳤다.

“Oh my……! Why are you here?”

『깜짝이야. 넌 왜 여기에 있어?』

“DZ. Check my back behind.”

『DZ, 내 등 뒤 좀 봐 줘.』

남자가 넌지시 문성하를 가리켰다. 기웃거린 남색 재킷의 눈이 동그래졌다. 덩달아 문성하의 입이 벌어졌다. 아는 얼굴이었다.

“권도재 대표님?”

“문 심사역님! 와, 진짜 오랜만이네.”

권도재가 한달음에 문성하의 앞에 섰다. 달가운 악수가 청해졌다.

“잘 지냈어요? 살은 왜 이렇게 많이 빠졌어요.”

“그냥 뭐……. 어쩌다 보니.”

대충 손을 잡고 난 문성하가 얼버무렸다. 남자와 문성하를 번갈아 본 권도재가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주혜성 대표 쪽에 할 말이 있는데, 연락할 방도가 없어서요.”

“나한테 물어보지 그랬어요. 혜성이 연락처.”

권도재가 의아해했다. 문성하는 가만히 입을 말아 물었다. 권도재의 번호가 진작 지워졌다는 얘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알렉스가 기가 막히게 알아봤네요. 혜성이네 형을.”

권도재가 뇌까렸다. 문성하의 눈매가 움찔했다. 떨떠름한 질문이 나왔다.

“베이스터 공동 창업자 말하는 거예요?”

“네. 말도 없이 방한한 모양이에요. 저도 방금 알았네요.”

권도재가 저편에 선 남자를 가리켰다. 문성하는 멍하니 남자를 봤다. 마주 본 알렉스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다른 곳을 봤다. 마른침을 삼킨 문성하가 눈을 내리깔았다. 잊었던 기억의 한 조각이 떠올랐다. 주혜성에게 편지를 보낸 A. 알렉스. 모든 걸 아는 유일한 제3자.

“혜성이 지금 미팅 중인데. 저도 혜성이 만나러 올라왔다 대기 타는 거예요. 일단 어디서 좀 기다리시는 게…….”

문성하에게 내줄 자리를 찾는 듯, 권도재가 로비를 둘러봤다. 그사이 문성하의 눈에 또 다른 아는 얼굴이 들어왔다. 동시에 발견한 상대방의 걸음이 빨라졌다.

“문 심사역님! 여긴 웬일이세요?”

휘둥그레진 한나가 문성하의 앞에 섰다. 문성하가 적당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주 대표 만날 일이 있어서요.”

“혜성이 미팅? 나도 그것 때문에 대기 중인데. 서 있지 말고 어디 들어가 있어요.”

안내의 손을 내민 한나가 흠칫했다. 뒤늦게 알렉스를 알아보고는,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What the……! Why did you come without telling?”

『이건 무슨……. 넌 왜 말도 없이 오고 그래?』

고개를 까딱한 알렉스가 대꾸했다.

“Too lazy.”

『귀찮아서.』

한숨 쉰 한나가 마저 문성하를 잡았다. 사분사분한 언어가 건네졌다.

“Ok. Let’s go inside.”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곧 알렉스에게 따졌다.

“너 진짜 주혜성 닮아 가니?”

한나가 영어와 한국어 대상을 혼동하고 있지만, 문성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문 대표님?”

불현듯 또 다른 부름이 들렸다. 문성하와 권도재, 한나, 알렉스의 얼굴이 동시에 돌아갔다. 급하게 달려온 제임스 임이 몸을 굽히며 헐떡였다. 허둥거리느라 진을 다 뺀 기색이었다.

“쟨 또 왜 왔어? 재수 없게.”

대놓고 질색한 한나가 비꼬았다. 제임스 임이 허리를 세웠다. 안절부절못하는 물음이 찾아들었다.

“혹시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니요……. 그, 제 문자 보셨어요?”

“봤습니다. 봤는데……. 아주 중요한 미팅 중이라 제가 미처 확인을 못했습니다. 아무튼 지금 당장 대표실로 가시죠.”

제임스 임이 문성하를 이끌었다. 입이 떡 벌어진 권도재가 저지했다.

“지금 안 돼. 세명그룹 회장하고 DF그룹 회장 동시에 면담 중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주혜성 대가리가 지네 형 앞에서 이성적으로 돌아간 적이 있긴 해?”

미간을 좁힌 제임스 임이 버럭 했다. 권도재와 한나가 빠르게 조용해졌다. 손가락을 딱, 부딪친 한나가 혼잣말을 했다.

“천재.”

제임스 임이 프런트 직원을 손으로 불렀다. 직원이 바로 몸을 일으켰다. 제임스 임이 지시했다.

“지금 당장 내선 번호로 주 대표 호출해.”

“뭐라고 할까요?”

“1순위 딜 결재해야 한다고. 그렇게만 말하고 끊어.”

“알겠습니다.”

직원이 수화기를 들었다. 번호 하나를 누르고는, 잠시 기다리다 제임스 임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 대표님, 프런트입니다. 1순위 딜 결재 들어왔습니다. 곧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미팅 종료까지 5분 본다.”

팔짱을 낀 권도재가 말했다. 도리질을 친 한나가 정정했다.

“3분이지.”

한나가 제임스 임의 허리를 툭, 쳤다. 제임스 임이 심드렁하게 읊조렸다.

“너무 길다. 난 1분 30초.”

“30 seconds.”

문득 저편의 알렉스가 한마디 했다. 권도재와 한나, 제임스 임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그들을 일별한 알렉스가 덧붙였다.

“I understand simple korean languages.”

『간단한 한국어는 알아들어.』

끼익, 안쪽 복도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시계를 본 제임스 임이 감탄했다. 진짜 딱 30초네.

“그럼 주 대표. 머지않은 시일 내에 제대로 식사 한번 합시다.”

먼저 나선 DF그룹 회장이 주혜성과 악수를 나눴다. 고갯짓을 한 주혜성이 다음으로 세명그룹 회장 손을 잡으며 말했다.

“두 분 다 살펴 가십시오. 예정보다 빨리 미팅을 끝내 송구합니다.”

“사과할 것 없어. 바쁜 친구가 그럴 수 있지. 갑시다, 현 회장.”

세명그룹 회장이 먼저 발을 뻗었다. 두 거물이 뚜벅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안쪽 룸에서 득달같이 문이 열렸다. 대기하던 비서진이 우르르 뛰어나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두 사람이 승강기 앞에 다다르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내부가 꽉 채워질 정도로 사람을 실은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가시죠. 제임스 임이 문성하를 이끌었다. 지켜보던 권도재가 들고 있던 서류로 제 얼굴을 가렸다.

“한 시간은 또 기다려야겠네.”

제임스 임의 안내를 받으며 도달한 복도 안쪽 문에는 ‘MASON’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직함도 한국 이름도 없었다.

“한국에는 손에 꼽을 정도로 방문하지만, 여기가 이 건물 통틀어 가장 넓은 사무실입니다.”

설명을 마친 제임스 임이 문을 열어젖혔다.

내부는 정말로 넓었다. 고급 빌라의 펜트하우스를 연상케 했다. 바깥쪽 두 개의 면이 전부 통유리창이었다. 덕분에 불을 켜지 않았음에도 내부가 환했다. 찬란한 빛이 넘실거리는 가운데 형이상학적 문양의 대리석 바닥이며 예술적인 굴곡을 지닌 벽 등이 눈을 사로잡았다. 작고 고풍스러운 미술관 같았다.

“문 대표 왔어.”

열린 문을 똑똑, 두드린 제임스 임이 말했다. 주혜성은 등을 보인 채 데스크를 짚고 있었다. 표면을 긁어 대는 손가락이 느른했다. 문성하는 조금조금 매서워지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형은 이만 가 봐.”

마침내 돌아선 주혜성이 턱짓을 했다. 제임스 임이 바로 뒷걸음질 쳤다. 등 뒤에서 탁,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들숨을 삼킨 문성하가 고개를 바로 했다. 데스크에 걸터앉은 주혜성이 천천히 눈을 맞춰 왔다.

“미리 얘기하고 오지.”

“억지로 왔으니까.”

“왜 왔는데?”

“네가 예고한 수많은 ‘만날 일’ 중 하나 때문에.”

분연한 걸음이 나아갔다. 주혜성은 예사로운 표정을 유지했다. 코앞까지 다다른 문성하가 고개를 내렸다. 데스크 위에 빈 종이가 있었다. 확 잡아챈 뒤 굴러다니는 만년필을 함께 주워 주혜성의 가슴팍에 붙였다. 주혜성은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전부 적어.”

주혜성이 갸웃했다.

“뭐를.”

문성하가 쏘아붙였다.

“지난 5년간 내 주변에 어떤 식으로 개입해 왔는지. 재활 치료 센터, 병원, 집, 기타 등등. 거기에 얼마를 줬고 대가로 어떤 것들을 얻었는지. 전부 기입해.”

묵묵하던 주혜성의 입매에 호가 걸렸다. 바람 빠진 웃음을 터뜨린 그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은은한 질문이 찾아들었다.

“지금 그것 때문에 온 거야?”

“그럼 내가 뭣 때문에 왔겠어. 어서 적어.”

문성하가 재차 가슴팍을 쳤다. 흔들거리는 종이를 바라본 주혜성이 느릿느릿 눈을 깔았다. 걱정스러운 속삭임이 문성하의 귓바퀴를 타고 미끄러졌다.

“페이지 모자랄 텐데. 괜찮겠어? 형.”

“너 지금 장난……!”

덜컥 벌어진 문성하의 입이 문득 멎었다. 아무렇지 않게 몸을 숙인 주혜성이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단축 번호를 누르고는, 곧 받는 상대방을 향해 입을 열었다. 프런트 데스크로 보였다.

“응, 에밀리. 메이슨입니다. 마실 것 하나 갖다 주세요. 제 건 아니고, 손님 거. 네……. 종류는.”

문성하를 힐긋한 주혜성이 단조로이 덧붙였다.

“코코아가 좋겠어요.”

수화기가 원위치 됐다. 허리를 편 주혜성이 손짓했다.

“일단 앉자. 형.”

문성하는 듣지 않고 눈만 부릅떴다. 속내를 읽은 주혜성이 긴 숨을 뿜었다. 데스크를 배회하던 손이 올라와 문성하에 들려 있던 페이퍼와 만년필을 뺐다. 어르는 음성이 찾아들었다.

“적을 거야. 시키는 대로 할게. 응? 그러니 소파로 가자.”

주혜성이 먼저 다리를 내뻗었다. 문성하가 마지못해 그를 따랐다. 소파에 앉는 주혜성을 살피다,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에 종이를 펼친 주혜성이 펜을 곤두세웠다. 페이지 윗단에 촉을 대고는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실내를 메웠다. 문성하는 묵묵히 그의 정수리를 봤다. 종이에 뭔가가 적히는 것 같기는 한데, 커다란 손등에 가려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바깥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보지도 않은 주혜성이 말했다. 들어와요. 철컥, 문이 열리고 아까 프런트에서 본 여자가 트레이를 들고 들어왔다. 위에 유럽풍 찻잔 세 개가 올라와 있었다.

“코코아 종류가 세 개밖에 없어요. 더 사 놓을 걸 그랬나 봐요.”

찻잔을 하나하나 내려놓은 여자가 말했다. 페이지 채우기에 여념이 없던 주혜성이 끄덕였다.

“그거면 됐습니다.”

“또 필요한 것 있으신가요?”

“밖에 누구누구 있습니까.”

주혜성이 고개를 들었다. 트레이를 품에 안은 여자가 답했다.

“제임스 임 COO와 권도재 대표님, 한나 대표님. 그리고…….”

뜸을 들인 그녀가 말했다.

“알렉스가 와 있습니다.”

“온다는 얘기 없었는데.”

주혜성의 손가락을 타고 빙글, 만년필이 돌았다. 트레이를 주물럭거린 여자가 대꾸했다.

“자주 그러시잖아요. 그분은.”

“급한 일이라 하던가요.”

“모르겠습니다. 원래 주 대표님 즉결 보고가 아니면 말을 잘 하지 않는 분이시니.”

“알렉스 제외한 나머지는 내려가 있으라 해요. 내가 따로 연락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목례한 여자가 물러났다. 반쯤 열린 문이 선선한 바람을 남기며 닫혔다.

“한 번씩 맛보고 입에 맞는 걸로 들어.”

주혜성이 세 개의 찻잔을 밀어 줬다. 손대지 않은 문성하가 거부의 고갯짓을 했다.

“네가 주문한 거니 네가 마셔. 나 이거 마시려고 온 것 아니야.”

할금한 주혜성이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반쯤 채워진 종이를 뒤집고, 찻잔 하나를 쥐었다. 문성하의 얼굴 가까이 올려붙인 그가 말했다.

“나 코코아 못 마셔. 그러니 형이 대신 마시고 어떤지 얘기해 줘.”

찻잔의 표면이 찰랑였다. 문성하의 낯이 찡그려졌다. 암갈색 표면에 비치는 주혜성의 얼굴이 지극히 진지했다. 이 별것도 아닌 행위를 하지 않으면 이 이상 진행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무언의 경고가 비쳤다.

“너 진짜 제멋대로구나.”

짜증 낸 문성하가 얼굴을 내밀었다. 주혜성이 쥔 찻잔의 윗부분을 물어 가며 잔을 잡기 위해 손을 올렸다. 저지한 주혜성이 손수 찻잔의 각도를 조절했다. 흘러내린 코코아가 문성하의 입 안을 점점 채워 왔다. 액체에서 피어오른 김에 점막이 부쩍 더워졌다.

“맛있어?”

주혜성이 은연히 물었다. 적당히 꿀꺽하고 난 문성하가 입을 뗐다.

“몰라. 그냥 코코아 맛이야.”

“이거는.”

주혜성이 다음 찻잔을 들었다. 문성하가 성을 냈다.

“한 번 마셨으면 됐지. 뭘 또 먹여?”

“말했잖아. 내가 코코아를 못 먹는다고.”

찻잔 입구가 불쑥 문성하의 입술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흡, 소리 낸 문성하의 턱이 울렸다. 매끈한 표면으로 문성하의 아랫입술을 문지른 주혜성이 중얼거렸다.

“형이 대신 마셔 줘.”

“야.”

이번엔 화를 내기도 전에 코코아가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입 안이 젖었다. 속으로 개탄한 문성하가 뭉그적거리며 목구멍을 틔웠다. 미지근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줄줄 흘렀다. 후덥지근한 누기가 가슴께를 덮었다.

“나 원래 코코아 잘 마셨어. 어릴 때.”

적당량을 먹여 주고 난 주혜성이 찻잔을 거뒀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는, 세 번째 잔을 쥐었다. 문성하는 체념한 눈으로 잔 안의 갈색 파동을 봤다. 기억한다. 주혜성은 코코아를 좋아했다. 17세 때, 그의 집에 간 첫날 밤 함께 나눠 마신 것도 주혜성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코코아였다.

“이제는 안 먹지만.”

주혜성의 손가락이 잔을 타고 미끄러졌다. 문성하는 찌푸린 채 찻잔의 풀잎 문양을 읽었다. 칠을 입고 고온에서 익혀진 파란 잎은 몇 번을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미국행을 앞둔 12세 여름부터 그렇게 됐어.”

주혜성이 찻잔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웠다. 문성하는 잠시 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주혜성의 이 행위가 어떤 의도를 지녔든, 자신은 종이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주혜성이 자신 모르게 지운 빚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너무도 비겁하지 않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증오하는 사람의 은혜를 입힌 건.

“형이 우리 집에 오고 나서 석 달쯤 지났을까, 학급 반장이 부쩍 나를 잘 챙겨 주기 시작했어. 나한테 호의적으로 구는 학우를 둔 게 처음이라 얼마나 기뻤었는지 몰라.”

주혜성에 잡힌 찻잔이 올라갔다. 문성하의 눈이 움찔거렸다.

어쩐지, 다음 내용을 알 것만 같다.

“알고 보니 형이 토요일 방과 후마다 걔한테 학교 앞 카페에서 코코아 사 주며 나 챙겨 주라고 신신당부한 것 때문이었더라고. 미국에 가기 전에 그걸 알았어. 걔가 얘기해 주더라.”

찻잔이 문성하의 아랫입술을 스쳤다. 주혜성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린 나이에도 그게 엄청나게 충격적이었어. 걔는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형이 토요일마다 사 준 코코아 때문에 잘해 준 거였어. 형하고 토요일마다 대화하는 게 많이 즐거웠대. 걔 외동이었거든. 내가 아주 부러웠다더라. 자기도 형 같은 형이 있었으면 싶었다는 말도 했어.”

입술에 붙은 찻잔이 기울었다. 예고도 없이 흐른 액체가 혀에 스며 왔다. 쿨럭. 작게 기침 한 문성하의 목이 울렁였다. 딱 넘치지 않을 정도로 입을 메운 코코아가 목구멍을 타고 미끄러졌다.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반장이 내 진짜 친구는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에 서운하기도 했고, 그 와중에 나 몰래 형과 만나 왔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느꼈어. 너무도 복합적인 충격이라 감당하기 힘들었어. 그래서 아예 없었던 것처럼 잊기로 했어. 핵심은 코코아였어. 그걸 머릿속에서 지우니, 비로소 편해지더라고. 자연히 이후부터 코코아는 먹지 않게 됐고.”

테이블에 올라온 찻잔이 딱, 소리를 냈다. 소파 등받이에 등을 붙인 주혜성이 다리를 꼬았다. 문성하를 훑는 시선이 자못 엄숙했다. 문성하는 가만히 입 안에 남은 액체를 굴리다 삼켰다.

“형이 왜 그런 걸 했는지 알아. 날 위해서였겠지. 잘못된 게 있다면 진실을 알아 버린 나고. 난 그걸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달았어. 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그렇지 못해. 몇 살이 됐건 직접 겪은 후에야 알더라고.”

주혜성이 다시 종이를 집었다. 뒤집힌 페이지 안에서 올곧은 글자들이 비쳤다. 박종현 재활 치료 센터 6100만 원, 해일 빌라 8050만 원……. 익숙한 이름과 생소한 숫자가 얽히고설키며 문성하의 시야를 흐트러뜨렸다. 일렁이던 눈동자가 돌아갔다.

다 적은 것도 아닌 듯한데, 벌써부터 감당이 안 된다.

“형이 말한 것 맞아. 나는 돈을 주고 형의 정보를 샀어. 그렇게나마 형과 연결되고 싶었거든. 내 입장에서도, 상대방 입장에서도 윈윈이었지. 나는 정보를 얻고 그들은 돈을 얻었으니까.”

주혜성이 종이를 들어 올렸다. 글자 적힌 면이 주혜성 쪽으로 돌아갔다. 문성하는 이를 잘근거리며 빈 페이지만 봤다.

“그리고 형에게도 필요한 일이었어. 지금까지 형이 얼마나 많은 금전적 이득을 취했는지, 형은 몰라. 알길 바라지도 않고. 알아서 좋을 게 없잖아. 12세의 내가 ‘코코아의 진실’을 알지 말걸, 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는 쪽이 형에게 좋아.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종이가 찢겼다. 갈기갈기 부서진 조각이 눈송이처럼 흩어졌다. 주혜성이 찬찬히 문성하를 주시했다.

“없었던 일로 하자. 내가 얼마를 썼고. 형의 어떤 정보가 내게 들어왔고. 형이 어떠한 이득을 취했고. 이런 것 전부 다. 형은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이제.”

주혜성이 제 무릎에 내려앉은 종잇조각 하나를 무심히 치웠다. 문성하의 턱이 덜덜거렸다. 또 대표실 문이 두드려졌다. 주혜성이 성의 없이 말했다. 들어와요. 열린 문틈으로 아까의 여자가 몸을 들이밀었다. 한 손에 메모지를 들고 있었다.

“알렉스가 일정이 있다며 먼저 가 보겠다 했습니다. 이걸 전달하라 하던데요.”

여자가 테이블 위에 메모지를 놓았다. 내려다본 주혜성이 쯧, 소리를 냈다. 손에 들린 만년필이 탐탁지 않은 양 돌아갔다. 가 봐요. 주혜성이 손짓했다. 여자가 물러섰다.

문이 닫히는 사이, 주혜성의 펜촉이 메모지로 이동했다. 문성하는 식은 눈으로 적혀 있는 숫자를 읽었다. $2,215,000,000. 한국 돈 약 2조 6000억 원. 죽 금을 그은 주혜성이 그 위에 고친 숫자를 적었다. $3,000,000,000.

“연 1조 원을 벌어들일 베이스터 계열사를 고작 저 금액에 파는 건 말이 안 돼.”

주혜성이 메모지를 구석에 밀었다. 문성하는 잠자코 종이의 빳빳한 단면을 봤다. 단호하며 강고한 저 숫자 앞에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자신의 빈손이 부쩍 초라해지는 것만 같다.

문성하의 눈꺼풀이 흘러내렸다. 입 안에서 뭉친 숨이 새된 소리와 함께 내뱉어졌다. 공허한 사위를 둘러보다, 눈가를 짚었다. 몇 번을 봐도 이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이 커져 간다.

문성하는 주혜성이 쓴 돈을 절대 갚지 못할 거다. 애초에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물론 이전에도 빚을 진 적은 있다. 그때마다 문성하는 나름의 방식으로 대가를 치러 왔다. 이자를 쳐서 갚든, 금액에 상응하는 비물질적 대가를 치르든, 정 안 되면 말로라도.

그러나 이 빚에 대한 대가는 아무리 생각해도 깜깜하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때울 수도 없고 때우고 싶지도 않다. 주혜성은 지금까지 빚을 지운 이들과 여러 차원에서 다르다. 그간의 사람들은 ‘남’이라는 말로 치부할 수 있는, 어떤 규격화된 카테고리 안에 존재했지만.

주혜성은 남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라서. 예고 없이 찾아온 이 거래가 언제 시작돼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계절처럼 막막하고 난해하기만 하다.

그러므로 문성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회적인 경로를 통해 내 정보가 제공된 결과로, 내가 그간 취한 금전적 이득만 계산해 보내. 그 이상은 사실상의 내 부채라 보기도 어렵고, 내 자금 사정상 갚는 게 어렵기도 하니. 현실적인 것만 따지자.”

대뜸 딱딱한 언어가 건네졌다. 주혜성이 표정을 굳혔다. 똑바로 쳐다본 문성하가 말을 이었다.

“이미 알게 된 건 어쩔 수 없어. 12세 때의 네가 그랬던 것처럼. 그때와의 차이가 있다면, 12세의 넌 내 동생이었기에 그 코코아를 갚아야 할 의무가 없었지만 32세의 난 네 형이 아니기에 이 금액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거야.”

문성하의 몸이 일으켜졌다. 빠르게 등을 보이며 덧붙였다.

“금액 적어서 보내면 대출을 써서라도 갚을게. 이미 나간 내 정보가 그걸로 회수되진 않겠지만, 최소한 네가 다음부터 같을 짓을 해선 안 된다는 것 정도를 알려 줄 순 있겠지.”

발이 내밀어졌다. 성큼성큼 나아가는 내내 등 뒤에서는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차라리 문성하로서는 안심이 됐다. 주혜성이 뭐라도 따져 오기 시작하면, 자신이 반박할 수 있을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안도는 문손잡이를 잡은 순간 틀어졌다.

“그런데 형이 갚을 수 있을까?”

돌연 들려온 혼잣말에 문성하의 등이 얼어붙었다. 서서히 돌아간 눈길이 주혜성을 머금었다. 마주 본 주혜성이 살포시 눈웃음을 지었다. 이어진 언어가 지극히 상냥했다.

“형 좋을 대로 해. 내가 형을 어떻게 이겨. 안 그래?”

웃상인데도 불쾌해 보이는 건 착각이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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