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당신의 이름
30.
「어디 여행 좀 갔다 내일 늦게 돌아올 거야. 냄비에 찌개 해 뒀으니 밥이랑 같이 먹고 출근해.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사각거리며 움직이던 펜이 멎었다. 뚫어져라 메모지를 보던 문성하가 단락을 바꿔 펜촉을 꽂았다. 단출한 단어가 덧붙었다.
「형이.」
펜과 메모지를 협탁에 올려놓고 몸을 세웠다. 곤히 자고 있는 안재림의 이불을 고쳐 덮어 준 뒤 등을 보였다.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게 걸으며 문지방을 넘어섰다. 현관 앞에 다다라 문을 열고 나오는 내내 미처 떨치지 못한 동생의 숨소리가 문성하의 귓가를 유영했다. 문성하는 마지막까지 조심조심 문을 닫았다. 탁. 희미한 소음이 복도를 울렸다.
***
“못해도 내일 오후 4시엔 출발해야 해. 해 떨어지면 바람이 엄청나게 세져. 그럼 꼼짝없이 섬에 갇히는 거야. 서울 올라오면 오후 9시 맞춰 화상 회의 시작이야. 뉴욕 시간 기준으로 오전 7시에 월간 임원 회의가 있어.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참석해야 해. 지난 주간 회의 2회를 내가 연달아 대참했어. 이번 회의는 반드시…….”
주혜성이 보내온 세단을 타고 잠실에 있는 헬기장에 도착했다. 돌아가는 프로펠러를 단 헬기 앞에서 멈춰 선 세단의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득달같이 잔소리하는 제임스 임이 눈에 들어왔다. 건성으로 듣던 주혜성이 문성하를 힐금했다. 문성하는 어색한 옆 걸음을 했다. 뒤늦게 문성하를 발견한 제임스 임이 다가왔다.
“아침 일찍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이동하는데 불편한 건 없으셨습니까.”
“네. 덕분에 편히 왔습니다.”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부탁 하나만 좀.”
제임스 임이 몸을 밀착해 왔다. 문성하는 말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미간을 구긴 제임스 임이 호소했다.
“내일 오후 4시까지는 꼭 좀 출발 부탁드립니다. 혜성이 저 새끼가 무슨 얘길 하면서 구슬리든 반드시 그때는 섬에서 나와야 합니다. 저녁에 정말로 중요한 회의가…….”
“그만하자. 지겹다.”
안달하는 제임스 임을 끌어낸 주혜성이 한숨을 쉬었다. 흘겨본 제임스 임이 볼멘소리를 냈다.
“지겨운 건 나야. 그동안 네 형에 눈 돌아가서 브레이크 낼 뻔한 딜들 생각하면 아주 속에서 천불이 난다. 어?”
“형. 이쪽으로 와. 더 들을 것 없어.”
무시한 주혜성이 문성하 쪽에 손짓했다. 망설이던 문성하가 땅에서 발을 뗐다. 인상 쓴 제임스 임을 지나쳐 가며 짧은 위로를 했다.
“걱정 마십시오. 주 대표는 제가 시간 맞춰 보내겠습니다.”
찌푸린 제임스 임이 허리를 짚었다. 전혀 안심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운행을 맡은 조종사 김재석입니다. 소음이 크니 보호구 착용부터 부탁드립니다. 저 안쪽에 탑승하시면 됩니다.”
두 사람 앞으로 다가온 조종사가 헤드셋 모양의 귀마개를 하나씩 건넸다. 양손으로 받아 든 문성하가 귀에 걸었다. 멍해진 귓속으로도 프로펠러 소리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것 빼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주혜성의 부축을 받으며 헬기에 올라탔다. 문성하부터 창가 자리에 앉힌 주혜성이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옆자리에 착석했다. 뭔가를 찾는 듯 보였다. 곁눈질을 하던 문성하가 무심코 바깥쪽을 봤다. 저 밑에서 조종사에게 뭔가를 신신당부하는 제임스 임이 보였다.
문득 한쪽 팔이 잡혔다. 흠칫한 문성하가 눈동자를 끌어 올렸다. 주혜성이 손에 든 것을 문성하의 무릎 위에 놓아 줬다. 글씨를 적은 수첩의 한 페이지였다.
「잘 안 들리니 이걸로 대화하자.」
입을 오므린 문성하가 끄덕였다. 수첩을 도로 가져간 주혜성이 또 적기 시작했다. 그사이 운전석에 착석한 조종사가 외쳤다. 출발합니다. 곧 문이 닫히고, 거센 진동음과 함께 기체가 덜컹였다. 화들짝한 문성하가 몸을 움츠렸다. 비행기는 제법 탔지만, 헬기는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덜덜거리던 어깨가 돌연 훈기에 사로잡혔다. 미동하던 눈망울이 굴러갔다. 여전히 수첩에 글자를 적는 데 집중하며, 남은 팔로 문성하의 어깨를 두른 주혜성이 보였다. 옷 몇 장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맨살이 접착했다. 괜히 간질거려 문성하는 애꿎은 시트를 긁었다. 그런 가운데 묘하게도 경직이 풀려 갔다.
「솔직히 조금 놀랐어. 섬에 가자는 제안을 형이 선뜻 받아 줘서.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 가능한 일일 거라 생각했거든.」
다시 다가온 페이지에서 올곧은 글씨가 비쳤다. 빤히 응시한 문성하가 주혜성의 손에서 만년필을 빼 왔다. 주혜성이 적은 문장 밑에 펜촉을 꽂고는, 글자를 적어 나갔다. 주혜성은 묵묵히 문성하를 내려다봤다.
「놀랄 것 없어. 그때 못한 걸 이제 와서 하는 것뿐이니까.」
문성하의 손가락을 타고 펜이 빙글, 돌았다. 단락을 바꾼 펜이 다시금 움직였다. 웅웅거리는 소음 속에서 문장이 완성됐다.
「그때는 타인이라 못했던 걸, 이제는 타인이라 할 수 있게 된 거야. 그게 다야.」
주혜성의 망막에 먹빛이 스몄다. 문성하는 페이지를 더듬으며 그를 힐긋거렸다. 문성하가 말을 했으니 이제 주혜성이 말할 차례다. 슬슬 자신에게서 수첩을 거둬 가 제 얘기를 적을 줄 알았는데, 어쩐지 주혜성은 문성하의 글귀만 보고 있었다.
떠오른 헬기가 상공 높은 지점에 도달했다. 창 너머로 장난감 같은 빌딩이 그득해져 갔다. 눈치채지 못한 새 이리도 높이 왔다는 게 겁이 나 문성하는 목을 수그렸다. 미세하게 벌벌거리는 걸 본 주혜성이 손을 내밀었다. 무릎 위의 수첩이 치워졌다.
그대로 올라온 손이 문성하의 한쪽 귀마개 틈을 파고들었다. 폭신한 보호구가 귀에서 떨어졌다. 웅, 소리가 한층 커졌다. 문성하가 놀라지 않게끔 귓바퀴를 어루만져 준 주혜성이 고개를 숙였다. 시끄러운 소음을 가르며 부드러운 음성이 찾아들었다.
“성하야.”
깜짝한 문성하가 눈을 키웠다. 웃음기 없이 마주 본 주혜성이 도로 귀마개를 덮어 줬다. 팔을 뻗은 그가 시트에 치워 뒀던 수첩을 챙겼다. 제 무릎에 올리고는, 서걱거리며 글자를 적었다. 금세 완성한 문장이 건네졌다. 일렁이는 시야에 주혜성의 글자가 빼곡히 찼다.
「그냥 그렇게 부르고 싶었어. 방금.」
페이지를 짚은 문성하의 손가락이 웅크려졌다. 반응을 살피듯 건네 오는 시선이 옆얼굴을 타고 미끄러졌다. 볼이 점점 달아 왔다. 문성하는 괜히 이마를 쓸며 창 너머에 눈을 뒀다. 오밀조밀해진 서울 시내를 가로지르며 한강 물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 겁은 나지 않았다.
***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대기하던 리무진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말쑥한 정장 차림을 한 40대가량의 남성이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담당 매니저 박태진입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식사는요.”
“‘월우당’ 정찬성 셰프가 아침 일찍 도착해 준비 중입니다.”
남자가 정연하게 보고했다. 문성하는 주혜성의 등 뒤에서 골똘히 기웃거렸다. 월우당은 강남에 있는 미쉐린 3스타 한식 레스토랑이었다. 이름은 꽤나 들어 봤으나, 워낙 비싸 가 볼 엄두도 내 본 적 없던 곳이다.
“이쪽에 있는 리조트 겸 호텔을 예약했는데, 셰프를 마음대로 부를 수 있다 해 몇 번 괜찮게 먹은 곳 주방장을 불렀어. 지금 가면 바로 식사할 수 있을 거야.”
주혜성이 문성하의 등을 떠밀었다. 문성하는 반강제로 리무진을 향했다. 먼저 달려간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어 줬다. 문성하부터 태운 주혜성이 옆자리에 앉았다. 차를 휘 돌아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탄 남자가 운전기사에 턱짓을 했다. 바로 차가 출발했다.
“레저 활동을 하나도 신청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원하는 게 있다면 얘기 주십시오. 빌라동 고객께는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딱히 생각한 게 없어서.”
중얼거린 주혜성이 넌지시 문성하를 봤다. 리무진 내부를 구경하는 문성하의 손목을 잡고는, 조곤조곤 속삭였다.
“하고 싶은 것 있어? 형.”
“아니……. 글쎄.”
얼버무린 문성하가 홱 뒤통수를 보였다. 완전히 차창에 시선을 박는 문성하를 두고 주혜성이 주춤거리다 손을 풀었다. 문성하는 창문에 비치는 그를 보며 보이지 않는 진땀을 훔쳤다. 목덜미가 다시금 홧홧했다. 마음속에서 연신 가슴이 쓸어내려졌다.
아까 헬기에서 주혜성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이후 내내 이 모양이다. 별것 아닌 접촉이나 부름만으로 쉽게 몸이 단다. 특별한 계기도 징조도 없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됐다.
꼭, 뒤늦게 발현한 사고 후 외상 같다.
“울릉도 시내입니다. 저쪽이 항구이고요, 관광객들은 무조건 여길 거치죠.”
창밖을 가리킨 남자가 안내했다. 문성하는 멀거니 차창 너머를 응시했다. 다양한 형태의 사람 무리가 보였다. 배낭을 멘 청년도 있고, 손을 맞잡은 채 걸어가는 노부부도 있다. 주말이라 그런지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가 다수 있었다.
“내일 저녁에 바람이 많이 분다 하던데요.”
문득 주혜성이 운을 뗐다. 뒷좌석을 일별한 남자가 대꾸했다.
“예. 예보상으로 그렇습니다.”
“모레는요.”
“모레는 오전이나 오후나 기상 상황이 크게 나쁘지 않은 걸로 압니다.”
“그래요?”
주혜성이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새삼 주혜성을 살핀 남자가 말했다.
“그런데 고객님께서는 오늘 하루만 숙박하시는 걸로…….”
“아.”
돌연 문성하가 탄성을 터뜨렸다. 주혜성과 남자가 동시에 문성하를 봤다. 흔들리는 시선이 도로변의 작은 식당에 걸렸다. 입구 앞에서 해녀복을 말리는 70줄 여성이 보였다.
“잠시 좀 세워 주시겠어요?”
문성하가 운전석을 향해 외쳤다. 기사가 바로 핸들을 돌렸다. 죽 미끄러진 차가 도로를 벗어나 멈춰 섰다. 문성하가 급하게 문손잡이를 잡아 밀었다. 덜컹거린 문이 확 젖혀졌다.
“할머니!”
뛰어나온 문성하가 여자를 불렀다. 막 해녀복을 널어 둔 여자가 휘둥그레졌다. 부리나케 오는 문성하를 멀뚱히 지켜보다, 입을 떡 벌렸다. 억센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서여이 아들 아이가?”
“맞아요. 오랜만이에요, 할머니.”
“허이구야. 이기……. 하나도 안 변해 뿟네. 여긴 우짠 일잉교.”
여자가 다짜고짜 문성하를 부둥켜안았다. 동시에 열린 식당 문틈으로 한 남자가 나왔다. 굴러다니는 해녀복을 집어 든 그가 버럭 했다.
“아, 진짜. 엄마! 이거 밖에다 두지 말라고 했…….”
여자를 쏘아본 그가 흠칫했다. 덩달아 움찔한 문성하가 그를 마주 봤다. 문성하를 담은 그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심각한 질문이 건네졌다.
“한성연 아들이냐? 너.”
뒷걸음질 친 문성하가 끄덕였다. 남자의 낯이 허옇게 물들었다. 꽤나 당황한 기색이었다.
“형. 무슨 일인데?”
뒤편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성하의 머리가 돌아갔다. 차에서 내린 주혜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할머니를 가리킨 문성하가 말했다.
“아. 어머니하고 가까이 지내신 분인데, 갑자기 눈에 띄어서…….”
“거긴 주 교수 아들이네. 맞지?”
남자가 알은체를 했다. 주혜성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주혜성과 문성하를 번갈아 본 남자의 입에서 허, 소리가 터졌다. 헛헛한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나 참……. 결국 둘이 만났구만.”
혀를 찬 그가 허탈하게 문성하를 봤다.
“한성연 예상이 맞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