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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장. 종점 (37/37)

N장. 종점

12세 주혜성과 단 한 번 놀이동산에 간 일이 있었다. 주혜성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먼 곳에 따로 외출 보내는 걸 질색하는 아버지로부터 유일하게 허락받은 날이었다. 그날은 주혜성의 생일이기도 했다.

놀이동산 방문의 구체적인 목적은 불꽃 축제에 있었다. 문성하와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불꽃 축제의 존재를 처음 안 주혜성이 한동안 불꽃을 보러 가자 졸라 댔었다. 그걸 기억하다 생일 선물 장소로 서울 외곽의 한 놀이동산을 택했다. 딱 그 시즌에 이벤트성 불꽃 축제를 하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주혜성은 놀이동산에 가자마자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 좀처럼 한곳에 못을 박고 있지 않았다. 목이 마르다 해 음료 가게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회전목마 앞에 있었고, 롤러코스터를 타고 싶다 고집을 부려 기구 앞에서 줄을 서고 있다 보면 저편의 퍼레이드 장소에 가 넋을 놓는 식이었다. 주말인지라 사람이 많아 일단 사라지면 찾는데 수십 분은 우습게 쏟아야 했다. 핸드폰이 없는 아이였기에 발로 찾아다니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었다. 문성하는 세 시간 만에 기진맥진했다.

“불꽃은 언제 해?”

겨우겨우 세 개의 놀이 기구를 타고 공원을 걷던 주혜성이 물었다. 입에 핫도그를 물고 있었다.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가면 기다려야 하고, 그사이 또 주혜성이 사라질까 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걸 사 줬다. 평소 좋아하는 먹거리라 그건 다행이었다.

“불꽃은 저녁에 해.”

“일찍 하면 좋은데.”

“해가 져야 불꽃을 터뜨리지.”

“낮에도 할 수는 있어.”

“그럼 잘 안 보이잖아.”

영양가 없는 말에 일일이 답해 주던 문성하가 주춤했다. 저 앞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솜사탕이 보였다.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잡혀 있던 주혜성이 질질 끌려왔다.

“솜사탕 얼마나 걸려요?”

막 완성한 하나를 손님에게 건네는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이 난처한 양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미안해라. 다 팔렸는데.”

“벌써요?”

“주말이라 손님이 많아서.”

“알겠습니다.”

김빠진 문성하가 발길을 돌렸다. 터벅터벅 걷는 문성하의 곁에서 주혜성이 연신 곁눈질을 했다. 해맑은 질문이 다가왔다.

“형. 솜사탕 좋아해?”

“몰라.”

“왜 몰라?”

“안 먹어 봐서.”

나지막한 대꾸가 나왔다. 괜히 어깨가 처졌다. 별것도 아닌 일에 속이 상했다. 입 안에서 소리 없는 혼잣말이 굴러갔다.

거참 더럽게 힘드네. 솜사탕 한번 먹어 보는 거.

살다 보면 계기가 없어 못 하는 일이 생긴다.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도 없으나 순전히 타이밍이 맞지 않아 경험에 실패한 일들이다. 예를 들어 겨울 산에 오른다, 윷놀이를 한다, 달고나를 먹는다 같은 것.

문성하에겐 솜사탕 먹는 일이 그랬다. 어쩐지 어릴 때부터 접할 기회가 없었다. 통상 경로는 두 가지다. 학교 앞, 아니면 놀이동산처럼 어린아이가 주로 찾는 유원지. 우선 문성하가 다니는 학교 앞에는 단 한 번도 솜사탕 장수가 선 적이 없었다. 그러면 후자를 노려야 하는데, 거기에도 간 일이 영 없었다. 학교 소풍으로는 산이나 고궁 따위를 갔고,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문성하를 데리고 유원지에 가지 않았다.

솜사탕 맛이야 안 먹어 봐도 안다. 엄청나게 단 불량 식품 맛일 거다. 그럼에도 한번 먹어 보고 싶었다. 그 몽글몽글한 걸 베어 물고 녹이는 느낌이 어떨지 궁금했다.

“운도 참 없다.”

혀를 찬 문성하가 뇌까렸다. 붙어 다니던 주혜성이 가만히 개웃거렸다.

***

주혜성은 불꽃 축제 시작을 십 분 남긴 시점에 홀연히 사라졌다. 문성하로서는 그저 환장할 노릇이었다. 여기에 온 사실상의 목적이 그것인데, 그 중요한 시점에 주혜성이 실종됐다. 허망한 몸을 이끌고 불꽃 축제를 보기 위해 모인 수많은 인파를 가르며 뛰어다녔다.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묻기도 하고, 나중에는 본부 사무실로 찾아가 방송까지 틀었지만 주혜성은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두 시간 넘게 찾아다닌 끝에 문성하는 녹초가 됐다.

그러는 새 폐장 시간이 다가왔고, 문성하는 일단 놀이동산을 뜨기로 했다. 안에서 찾는 데 실패했으니 밖을 뒤져 보기로 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빠지는 입구를 통과해 넓은 주차장에 당도했을 때 문득 걸음이 멎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벤치에 앉아 다리를 휘적거리는 익숙한 머리통이 보였다. 가쁜 숨을 뿜은 문성하의 발이 나아갔다.

“주혜성!”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화들짝 일어난 동생이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문성하는 태연히 인사할 수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동생의 앞에 서서 사납게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이의 눈살이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대체 왜 형 말을 안 들어? 사람 많으니까 혼자서 다니지 말고 옆에 붙어 있으라 했잖아. 그 간단한 걸 왜 안 지키고…….”

“형. 솜사탕.”

움츠린 애가 작은 혼잣말을 했다. 문성하의 턱이 흠칫했다. 눈치를 본 주혜성이 슬금슬금 빠져 벤치로 돌아갔다. 이내 위에 올려 둔 둥근 비닐 봉투를 챙겨 다가왔다. 밑으로 빠져나온 막대기가 문성하의 손안에 들어왔다. 동생이 조곤조곤 말했다.

“원래 파는 것보다 작아. 남은 설탕 모아서 한 거라 그래. 형 떨이 알아? 떨이는 공짜래. 아저씨가 그랬어.”

주혜성이 모은 손가락을 곰지락거렸다. 문성하는 멍하니 눈길을 떨어뜨렸다. 분홍색 뭉게구름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응시하던 시선이 좀 더 아래로 갔다. 신발 하나를 어디에 빠뜨렸는지 잿빛에 가까운 흰색 양말만 신은 발이 보였다.

“불꽃은 봤어?”

착잡한 질문이 나왔다. 도리질을 친 주혜성이 답했다.

“솜사탕 아저씨 찾느라 못 봤어. 나중에 보면 돼.”

“솜사탕도 마찬가지야.”

“솜사탕은 지금 주고 싶었어.”

눈을 굴린 주혜성이 덧붙였다.

“지금 주는 건 지금이 아니면 못 하는 거잖아.”

문성하의 가슴이 낮게 융기한 끝에 가라앉았다. 막대를 쥔 손이 느슨해졌다. 축축한 나무젓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몸을 낮췄다. 주혜성의 등 뒤로 팔을 넣은 뒤 오랜만에 안아 들었다. 몇 개월 새 성장한 애는 조금 버겁게 들렸다. 그래도 아직은 안을 수 있었다.

“솜사탕 먹으면서 가자.”

발을 뻗으며 말했다. 긴장을 푼 주혜성이 솜사탕에 덮인 비닐을 부스럭거리며 벗겼다. 털 뭉치 같은 것이 잔잔한 바람에 흩날렸다. 주혜성이 한 덩이를 떼 문성하의 입에 넣어 줬다. 혀 위에 안착한 설탕 덩어리가 타액에 젖어 녹아 갔다. 주혜성이 물었다.

“맛있어?”

문성하의 발에 차여 돌멩이가 멀리 날아갔다. 문성하는 대답 대신 눈망울을 끌어 올렸다. 높은 하늘에 오늘따라 둥그런 달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한 불꽃처럼 관조하다 입을 열었다. 단 내음에 젖은 대꾸가 흘러나왔다.

“그런 거 같아.”

솜사탕은 상상한 것보다 부드럽지도, 달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어린애 머리통만 한 걸 다 먹어 치웠다. 지금 이 순간, 이것을 다 먹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돌아올 수 없는 마음이었다. 쉼 없이 솜사탕을 베어 무는 문성하의 허리춤에서 아이의 허전한 발이 달랑거렸다.

그날 다시 보기로 한 불꽃은 나중에도 보지 못했다. 불꽃을 보러 간 곳에서 솜사탕을 먹은 것처럼, 문성하와 주혜성은 너무도 많은 목적지를 헤맸다. 함께 있기로 한 미국의 집에서 문성하만 이탈했고, 다시 만나서도 좀처럼 한시 한곳에 머물지 못하며 방황에 방황을 거듭했다.

그들의 종착지는 빙글빙글 돌아야만 당도할 수 있는 아주 복잡한 경로를 지닌 것이 분명했다. 정작 그곳에 뭐가 있는지는 문성하도 주혜성도 모르지만, 닿기 어렵다는 것 하나는 명명백백했다.

무려 15년이나 걸렸으니 말이다.

***

요란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문성하의 팔이 반사적으로 뻗어 나갔다. 목표물은 협탁에 올라온 큐브였다. 빨갛고 파란 블록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걸 채서 양손에 쥐었다. 러시아 민요 같은 음악을 쏟아 대는 네모 박스를 이리저리 돌렸다. 원하는 모양새가 생각보다 쉬이 나오지 않았다. 빨간 건 빨간 것끼리, 파란 건 파란 것끼리, 노란 건 노란 것끼리 뭉쳐야 하는데 아무리 끼워 맞춰도 블록 색깔이 엉망진창이었다.

“뭐 하는 거야?”

뒤편에서 노곤한 질문이 들렸다. 블록 맞추기에 집중한 문성하가 답했다.

“나 6시까지 회사 가야 한단 말이야.”

“그래서 그 알람 맞췄어?”

“어. 큐브 다 맞춰야 꺼지는 알람이야.”

“지금 1분째 못 맞추는 것 같은데.”

“시끄러.”

문성하가 뒤를 흘겨봤다. 벗은 상체를 모로 한 주혜성이 턱을 괴었다. 문성하는 열심히 큐브를 마저 돌렸다. 어찌저찌 끼워 맞췄다 생각한 큐브가 돌연 축 늘어졌다. 하단과 뒷면에 색깔 다른 조각 서너 개가 박혀 있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문성하의 입에서 아이씨, 소리가 나왔다.

“6시까지 왜 가야 하는데?”

밑에서 들어온 손이 큐브를 쥐었다. 넌지시 빼 가서는, 남은 조각을 찬찬히 맞추기 시작했다. 몸을 튼 문성하가 답했다.

“스터디.”

“스터디?”

“한나한테 딥러닝 과외받기로 했어.”

“갑자기 그건 왜.”

“배우면 좋잖아.”

“내 말은 배우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냐는 얘기지. 원래 그다지 관심 없던 분야잖아.”

작았다 커졌다를 반복하던 음악이 뚝 끊겼다. 10초도 안 돼 색깔별로 맞춰진 큐브를 휙 시트 밑으로 던진 주혜성이 팔을 내밀었다. 문성하의 허리가 둘러 감겼다. 그대로 당긴 주혜성이 다른 손으로 협탁을 더듬었다. 이내 핸드폰을 찾아 곁눈으로 확인하며 액정을 두드렸다.

“딥러닝은 내가 알려 줄게.”

“싫어. 한나는 그거 석사한 사람이란 말이야.”

“그래도 내가 더 잘 알아.”

“암튼 놔. 나 가야 해.”

“지금 가 봐야 한나 없어.”

주혜성이 액정을 슥 들이밀었다. 내려다본 문성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막 한나로부터 온 메시지가 떠 있었다.

「네가 뭔데 멋대로 취소야? 아무튼 오늘은 안 하는 걸로 알게. 성하 씨한테 한 소리 들어도 난 모른다.

Hanna」

“혹시 초조해? 형.”

문성하의 배가 은근하게 쓸렸다. 문성하는 말없이 입을 서슴거렸다. 어깨의 힘이 점점 빠져 갔다. 자못 느슨해진 몸이 주혜성의 품 안에서 늘어졌다.

눈동자가 뭉그적뭉그적 이동했다. 여전히 턱을 괸 자세로 내려다보는 주혜성이 보였다. 문성하는 마주 보며 입을 축였다. 시트를 짚은 손가락이 삐걱거렸다.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느끼며 머릿속에 쌓인 생각을 곱씹었다. 그게 초조함이었던가. 스스로 명확한 이름표를 붙여 본 일이 없지만, 정 그런 걸 한다면. 아마도.

가장 근접하긴 했다.

라이징 벤처 발굴 팀장. 청신투자가 NGX에 인수된 후 문성하가 얻은 직함이었다. 주혜성은 팀이 아닌 본부 체제를 얘기했지만, 문성하가 극구 만류해 팀 수준으로 맞췄다. 실제로 그다지 인력이 필요한 조직이 아니었다. NGX라는 기업의 사회 공헌성과 직결된 곳인지라 공격적인 운영을 요하지 않았다.

팀의 목적성은 간단했다. 홍보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저평가받거나 음지에 숨어 있는 벤처 기업을 발굴해 각종 성장 지원을 해 주고, 본격적인 궤도에 올리는 것이다. 기존에 D급 이하 벤처를 주로 취급하던 청신투자 출신에 딱 걸맞은 역할이었다. 게다가 문성하는 보잘것없는 기업에도 나름의 스토리를 입혀 대중으로부터 주목받도록 하는 잔재주가 있었다. 기업이 잘 되면, NGX의 초기 기업 발굴 역량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라이징 벤처 발굴팀은 발족한 지 반년 만에 22개의 기업을 찾아냈고 그중 15개가 시리즈A에 들어갔다. 거기서 또 3개가 시리즈B에 진입했다. 결과가 나쁘지 않아 회사 내부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다만 문성하는 내심 불안했다. 자신이 낸 실적은 회사의 이익에 직결되는 것이 아닌 데다가, 무엇보다도.

NGX라는 훌륭한 조직에 자신이 어울리는 인물인지를 아무리 고민해도 확신할 수 없었다.

NGX에서 문성하가 주혜성의 애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제임스 임과 한나, 권도재가 짐작 정도를 할 뿐이다. 사람들은 문성하를 주혜성과 아주 가까운 지인 정도로 취급했다. 일부는 한때 형제로 지낸 사실까지 알았지만, 결과적으로 아니게 됐으므로 큰 의미는 없었다.

혈육도 뭣도 아니지만 주헤성이 아주 아끼는 인물. NGX 직원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합의된 문성하의 정체성은 그것일 거다. 문성하는 그 수식어가 심히 불편했다. 마치 주혜성의 아량에 의해 자신이 기회를 얻은 듯한 인상을 줬다. 그것이 진실이긴 하지만,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건 탐탁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제 몫을 한다 한들 그 수식어가 남아 있는 한 문성하는 떳떳치 못한 방식으로 이 조직의 사람이 된 인물일 뿐이다.

마치 DF벤처스 때처럼.

“그냥 배우고 싶었어. 그게 다야.”

마침내 꺼내진 언어는 단조로우나 불순물을 미처 걸러 내지 못한 양 혼탁한 것이었다. 올라간 손이 확신을 심듯 주혜성의 팔뚝을 주물렀다. 주혜성이 미미하게 주억거렸다. 썩 개운해 보이는 고갯짓은 아니었다.

“딱 6시 30분에 일어나자.”

머리를 베개에 눕힌 주혜성이 문성하를 꽉 안아 왔다. 그의 어깻죽지에 코를 박은 문성하가 눈을 까물거렸다. 얼떨떨한 질문이 나왔다.

“한 시간 반 동안 뭐 하게.”

씩 웃은 주혜성이 팔 하나를 내렸다. 슬그머니 옮겨진 손이 문성하의 벗은 엉덩이를 장난처럼 쓸었다. 바로 간파한 문성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밤에 했잖아.”

“그건 어제 일이지.”

“아침엔 안 된다고 했을 텐데. 하고 나면 하루 종일 피곤해. 이따 밤에 해.”

“그건 이따 밤 일이고.”

천연덕스레 응수한 주혜성이 머리를 기울였다. 문성하의 볼에 입을 맞추고, 눈초리를 휘었다. 다정한 한 마디가 다가왔다.

“지금 하는 건 지금만 할 수 있는 거잖아.”

문성하의 낯이 허탈해졌다. 헛헛한 상념이 뇌리에서 맴을 돌았다.

도대체가 이 아이는 16년이 지나도 변하지를 않는구나.

***

침대에서 일어난 건 7시였다. 6시 30분에 맞춰 문성하가 일어나려 했지만, 주혜성이 놓아주지를 않았다. 벗어나려는 몸을 허벅지에 앉혀 놓고 시트에 걸터앉은 자세로 또 했다. 이미 정액이 치덕치덕한 치부에 도포한 것처럼 두 번째, 세 번째 체액이 흩뿌려졌다. 샤워 워시를 잔뜩 묻혀 씻어 내야 할 정도로 하반신이 주혜성의 체향투성이었다. 문성하는 주혜성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며 샤워를 했다. 함께 씻던 주혜성은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그저 키들거렸다.

시간이 촉박해 아침 식사도 생략하고 집에서 나왔다. 함께 올라탄 엘리베이터가 바로 밑층에서 입을 벌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후드 재킷을 뒤집어쓴 안재림이었다. 두 사람을 발견한 그가 움칠했다. 문성하가 달갑게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켜보던 주혜성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출근하는 거야?”

재킷에 붙은 먼지를 떼어 주며 물었다. 끄덕인 안재림이 답했다.

“어. 좀 늦잠 잤어.”

“아침은 먹었고?”

“대충. 형은?”

“나는 가서 먹으려고.”

“왜 아직도 안 먹었어.”

안재림이 바로 메고 있던 백팩을 내려 지퍼를 열었다. 안을 뒤적인 그가 뭔가를 꺼내 포장지를 깠다.

“한입에 먹을 수 있겠다. 아, 해 봐.”

손을 내민 안재림이 턱짓을 했다. 문성하가 고분고분 입을 열었다. 김 가루와 참치가 묻은 밥 덩이가 쑥 굴러 들어왔다. 빈 은박지를 동그랗게 뭉친 안재림이 입을 닫아 줬다.

“내 점심으로 한 건데. 그냥 형 먹어.”

“애 으그믄 므구.”

“오늘 좀 바빠서. 이거 하나 먹고 끝내려 했지.”

‘왜 이것만 먹냐’는 뭉개지는 질문에 찰떡같이 답한 안재림이 또 가방을 뒤적였다. 이번에는 작은 페트병에 담긴 보리차가 나왔다. 뚜껑을 열어 문성하의 아랫입술에 붙여 준 안재림이 말했다.

“이거 마시고.”

“고마워.”

물을 목으로 넘기며 남은 밥 덩이를 모조리 삼키고 난 문성하가 뒤를 일별했다. 팔짱을 낀 채 우뚝 서 있던 주혜성이 안재림을 힐금했다.

“주먹밥은 하나밖에 없나 봐?”

보지도 않은 안재림이 지퍼를 닫으며 대꾸했다.

“있어도 안 줘요.”

주혜성이 입매를 꼬았다.

“줘도 안 먹어. 분식 싫어하거든.”

대놓고 찌푸린 안재림이 가방을 걸쳐 메며 등을 보였다. 주혜성. 주혜성의 팔을 꽉 조인 문성하가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혜성이 안여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왜 동생 편만 들어? 나도 어린데.”

문성하의 입에서 허, 소리가 났다. 두 손아귀를 다 써도 들어가지 않는 팔뚝이 참으로 어리다 싶었다.

***

「여기 쩔지 않냐? 다음 주에 계약할 거야.

최재율」

메시지 밑에 사진 하나가 붙어 있었다. 문성하는 눌러서 확인했다. 커다란 수영장이 딸린 이층 저택이었다. 뒤로 동남아 특유의 푸르른 바다가 보였다. 아주 중국 갑부처럼 집 수집을 하는구만. 혀를 찬 문성하가 액정을 두드렸다. 퉁명스러운 문장이 찍혔다.

「또 사는 거야? 대체 몇 개째야.」

「돈 있으면 사는 거지.」

「인도네시아가 잘 맞나 봐? 아주 돌아올 생각을 안 하네.」

「좋긴 좋네. 하루 종일 수영하고 놀고먹는다. 아예 국적 바꿀까 봐.」

태만하기 그지없는 답신이었다. 지랄한다, 한 문성하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실없는 소리에 일일이 맞춰 주고 싶지 않았다.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청신투자가 NGX에 인수된 후 최재율은 매각금을 정산받아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NGX 같은 거대 조직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얘기를 했다. 소소하게 주식 투자나 하며 휴양지에서 여생을 즐길 셈이라 예고했다. 문성하는 30대 입에서 여생 얘기가 나오면 노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 했고, 최재율은 여생을 여생이라 하지 그럼 뭐라 하냐고 반문했다.

문성하는 최재율이 인생에 썩 도움 되는 인간은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런데 막상 사라지니 조금 허전했다. 무엇보다 최재율이 없는 마당에 NGX 내 외부인은 자신뿐이었다. 라이징 벤처 발굴팀에는 총 6명의 팀원이 있었는데, 전원 NGX코리아 출신이라 문성하만 제외하고 종종 저들끼리 아는 대화를 했다. 성격 모난 팀원은 없어 이끄는 데 어려움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심리적인 장벽이 작용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이지 외로웠다. 정확히 뭐가 외롭냐 하면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웠으나, 외로운 건 외로운 거였다.

“어? 성하 씨!”

저편에서 반가운 외침이 들렸다. 막 머신에서 커피를 채우고 난 문성하의 얼굴이 돌아갔다. 직원용 카페테리아 테이블에 앉아 손을 흔드는 한나가 보였다. 꾸벅하는 문성하를 향해 그녀가 손짓했다. 커피 잔을 든 문성하가 다가갔다.

“아침에 무슨 일 있었어요?”

긴 소파의 옆자리를 내준 한나가 물었다. 문성하는 곁에 앉으며 한나의 맞은편을 봤다. 말쑥한 캐주얼 정장 차림의 동양인 청년이 보였다.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 시원하게 찢어진 눈매며 달걀 같은 얼굴형이 꼭 연예인 같다는 인상을 준다.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생김새인데, 아무리 돌이켜 봐도 이 건물에서 본 적 없던 인물이다.

“그냥 좀 정신이 없었어요.”

“메이슨이 또 멋대로 성하 씨 잡았나 보다. 맞죠?”

“뭐 익숙한 일이죠.”

“그러게 좀 떨어져 지내라니까. 메이슨 걔하고 같이 살아 봐야 성하 씨만 손해예요. 얼마나 귀찮게 할지 안 봐도 유튜브인데.”

끌끌거린 한나가 트레이에 놓인 쿠키를 집어 아작아작 씹었다. 맞은편 남자가 부쩍 문성하를 주시했다. 은은한 질문이 찾아들었다.

“메이슨이 상당히 아낀다는 한국 본사 직원이군요. 맞죠?”

움찔한 문성하의 눈동자가 끌어 올려졌다. 남자가 눈웃음을 쳤다. 명백한 미소인데, 묘하게 호의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석연치 않은 예감에 문성하가 눈을 깜빡거렸다. 서둘러 쿠키를 삼킨 한나가 그쪽을 가리켰다.

“아. 인사해요. 이쪽은 루카스. 미국 국적 한국인. 뉴욕 본사에서 왔어요.”

“반갑습니다.”

루카스라고 불린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머무적거리며 맞잡은 문성하가 고개를 숙였다.

“라이징 벤처 발굴팀장 문성하입니다.”

“뉴욕에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무슨 얘기를…….”

“그냥 뭐.”

루카스의 미소가 진해졌다. 상냥한 언어가 따라붙었다.

“메이슨이 지인 때문에 영양가 없는 팀을 하나 만들었다고. 합리적인 본인답지 않게 판단했다는 식의 얘기가 있었죠.”

문성하의 낯이 멍해졌다. 루카스가 능청스레 말을 맺었다.

“기분 나빠하진 마시고요.”

목을 타고 꿀꺽, 침이 넘어갔다. 기분 나빠하지 말라니. 이미 저 좋을 대로 말해 놓고.

대체 의도가 뭔지 모르겠다.

“여기에 있었어?”

불현듯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주혜성이 트레이에 놓인 쿠키를 집어 들고 있었다. 한나가 질색했다.

“야! 이거 내 아침이야.”

“내가 또 사 줄게. 형은 아침 먹었어?”

동그란 쿠키를 문 주혜성이 문성하의 옆에 착석했다. 조각낸 절반을 내려놓는 주혜성을 보며 루카스가 꾸벅했다. 힐금한 주혜성이 떨떠름하게 마주 숙이며 물었다.

“누구시더라.”

“뉴욕 본사에서 온 루카스입니다.”

“아. 레일라한테 들었어요. 모레 온다 들었는데.”

“시차 적응할 겸 하루 앞당겼습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불편한 건 없고요?”

주혜성이 문성하의 커피 잔을 입에 가져가며 질문했다. 루카스가 예의 바르게 답했다.

“아직은요.”

“다음 주 월요일에 임원 회의 있어요. 그때 정식으로 인사시킬 겁니다. 궁금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제임스 임 쪽에 연락하시고요. 연락처 알죠?”

“그전에 보고드릴 사항이 몇 가지 있는데, 직접 CEO실로 찾아뵈어도 됩니까.”

남은 반개를 마저 문 주혜성의 입에서 파삭, 소리가 났다. 권태롭게 눈을 굴린 그가 주억거렸다.

“시간이 비는지 확인해 보죠.”

“감사합니다.”

루카스가 몸을 일으켰다. 올곧게 선 그의 상체가 구십 도 각도로 굽었다. 이내 허리를 세우며 입을 뗐다.

“가까이서 일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늘 존경해 왔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몸을 틀었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걸 지켜보던 한나가 슬그머니 주혜성을 확인했다. 문성하도 주혜성 쪽으로 눈길을 넘겼다. 아무렇지 않게 쿠키 부스러기가 묻은 손을 터는 그가 보였다.

“여기 쿠키 맛있네. 처음 먹어 봤어. 형은 알았어?”

재차 트레이를 더듬은 주혜성이 물었다. 한나가 이제 포기했다는 양 커피를 마셨다. 주혜성에 잡힌 쿠키가 문성하의 입가로 올라왔다. 옴씰거린 문성하가 주변을 둘러봤다. 지나가는 직원 몇몇이 이쪽을 힐끔거리는 게 비쳤다. 문성하의 입이 바싹 말라 갔다. 아까 들은 얘기가 새삼 뇌리를 울렸다.

-메이슨이 상당히 아낀다는 한국 본사 직원이군요. 맞죠?

“하지 마. 사람 많은 데서.”

문성하가 손을 올려 저지했다. 주혜성이 갸웃했다.

“쿠키 좀 먹여 주는 게 어때서.”

“이상하게 보잖아. 일반적인 남자끼리 누가 이런 걸 해.”

“하면 안 된다고 정해진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까지…….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좀.”

덜컥 커다란 소리가 튀어나왔다. 주혜성이 낯이 미세하게 굳었다. 덩달아 여짓거린 문성하가 망설이다 몸을 일으켰다. 부리나케 테이블에서 벗어나는 걸 보며 한나가 휘둥그레졌다. 문성하는 도망치는 것처럼 발을 내뻗었다. 돌연 치솟은 현기증에 뇌리가 부옇게 일렁였다.

엘리베이터를 잡아 빈 승강기에 몸을 밀어 넣었다. 라이징 벤처 발굴팀이 있는 꼭대기 층을 누르고 벽에다 등을 기댔다. 고요 속에서 진동음이 들렸다. 재킷 주머니로 들어간 손이 핸드폰을 끄집어냈다. 액정에서 갓 들어온 최재율의 메시지가 비쳤다.

「너는 좀 어때? NGX 생활.」

“몰라.”

들리지도 않을 답을 하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쥐어짜듯 움켜 대며 고개를 숙였다. 반질거리는 바닥에 허망에 찬 낯이 고스란히 반사되고 있었다.

정말이지 모르겠다. 왜 화를 냈는지. 주혜성은 명백한 동의를 얻고 문성하를 이 조직에 끌어들였다. CEO로서 합리적인 판단 아래 문성하의 역할을 부여했고, 그것이 원활하게 돌아가게끔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선 잘못한 게 없다.

반면 문성하는 어떤가. 이 조직에 들어오는 것에 동의하고, 주혜성으로부터 역할을 부여받고, 넘치는 지원을 받으며 하나의 조직을 이끄는 자신은. 주어진 길을 열심히 달려도 모자랄 판에 종종 예기치 못한 돌부리에 걸린 양 주춤거리고 있다. 충분한 탄탄대로를 눈앞에 두고 맞지 않은 신발을 신은 사람처럼 비치적거리고 있다.

패배에 익숙한 사람은 승리의 도포를 입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이것이 자신의 것이 맞는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뇌한다.

그래서 길을 알고도 걷지 못한다.

***

며칠간 주혜성과 제대로 맞닥뜨리지 않았다. 회사에 있을 땐 주혜성의 호출이 와도 대신 직원을 보냈고, 집에는 늦게 들어갔다가 주혜성과 다른 침실에서 취침한 뒤 아침 일찍 나섰다. 주혜성은 무리해 문성하를 잡지 않았다. 섣불리 붙들었다가 역효과만 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NGX가 10조 원 규모의 대형 딜을 마무리 짓는 단계라 걷잡을 수 없이 바쁜 영향도 있었다.

주혜성과 마주친 건 일주일이 흐른 후였다. 로비에서 만난 한나와 권도재가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부추겨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카페테리아에 갔다. 주혜성은 거기에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맞은편에 일전에 본 루카스가 있었다.

“저 새끼 하여간 거슬려.”

카운터에서 커피값을 계산한 권도재가 혀를 내둘렀다. 한나가 빠르게 말을 얹었다.

“NGX 임원 회의에서 리암한테 큰소리쳤다며. 허위로 CEO 보고한 사람 취급하면서.”

“아주 충신 났어. 본인이 메이슨 오른팔이라도 돼? 덕분에 회의 분위기 개판이었다며.”

“승진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 그렇게 하면 메이슨이 좋아할 줄 아나.”

한나가 열을 올렸다. 커피를 건네준 권도재가 고개를 저었다.

“소피아 얘기로는 그런 느낌 아니라던데.”

“그럼 뭔데.”

“그냥 메이슨의 열렬한 팬이라나 봐. 자신이 따르는 메이슨에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건 스스로 차단하겠다는 의지가 엄청나게 강하대. 애초에 NGX 들어온 게 메이슨 때문이라며. 아이비리그 총학생회장 출신에 집안까지 좋아 WJ로젠버그에서 고연봉 오퍼 받았는데, 메이슨하고 일하겠다며 NGX 택한 걸로 알아.”

“로젠버그는 웬만한 미국인 엘리트도 들어가기 힘든 데잖아.”

“그 정도라는 거지. 하여간 주혜성에 좀 미친놈인 건 분명해.”

학을 뗀 권도재가 문성하의 어깨를 잡았다. 어디에 앉을까요? 물어 오는 그를 두고 문성하는 말없이 뒤꿈치를 달싹였다. 괜히 오금이 저려 오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가 있겠구나 싶었다.

“제이슨, 잠시만요.”

정해진 자리를 향해 걷는 문성하 쪽으로 영어 이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성하의 얼굴이 돌아갔다. 손을 흔드는 루카스가 보였다. 문성하의 발걸음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저벅저벅 걸어가 앞에 서자 루카스가 페이퍼 하나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은 문성하가 눈으로 살폈다. 그간 라이징 벤처 발굴팀에서 투자한 기업 리스트에 줄줄이 코멘트가 달려 있었다.

“제이슨이 이끄는 팀에서 투자한 기업을 한번 평가해 봤어요. 좀 위험한 기업이 몇 개 보여서요. 사전 리스크 검토 차원이에요. 시간 날 때 한번 봐요.”

“그래요.”

“서로서로 좋기 위해 한 거니, 불쾌해하진 말고요.”

루카스가 빙긋거렸다. 문성하는 천천히 날숨을 내쉬었다. 천진한 표정의 그를 보고 있자니, 비슷한 질문을 이전에도 들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도 기분 나빠하지 말라 첨언했는데. 습관인가.

아니면 고의인가.

“잠깐만.”

문득 주혜성이 몸을 일으켰다. 문성하의 팔이 덥석 잡혔다. 아프지 않게 힘을 줘 가며 끌어당긴 주혜성이 루카스를 일별했다. 심상한 눈짓이 건네졌다.

“루카스는 이만 가 봐요.”

“보고 아직 안 끝났…….”

“내가 끝났어.”

착 깔린 대꾸를 꺼낸 주혜성이 발을 뻗었다. 잡힌 문성하가 속수무책으로 이끌렸다. 몇몇 이들이 의아한 듯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문성하는 서둘러 주혜성의 손을 쳐냈다. 끄떡도 하지 않은 손아귀에 오히려 힘이 실렸다. 가죽이 아려 오는 듯해 문성하의 입에서 아, 소리가 났다.

빈 회의실에 문성하를 들여놓고 난 주혜성이 문을 잠갔다. 문성하는 찌푸린 채 팔을 주물러 가며 숨을 몰아쉬었다. 허리를 짚은 주혜성이 남은 손을 내밀었다. 문성하가 든 페이퍼 쪽이었다.

“줘.”

“뭘.”

“달라면 줘.”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페이퍼가 채어졌다. 끄트머리를 잡은 주혜성이 인정사정없이 종이를 찢었다. 찍, 찍, 소리를 내며 페이퍼가 난도질당했다. 휴지 조각이 된 종이가 팔랑거리며 흩어졌다.

“내 허락 없이 남이 주는 거 받지 마.”

재차 허리를 짚은 주혜성이 경고했다. 실눈을 뜬 문성하가 섟을 냈다.

“겨우 보고서인데 뭘.”

“내가 기분이 나빴어. 방금 전에.”

“주혜성.”

“그리고 언제까지 나 피할 거야.”

갑작스레 허를 찌르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무춤한 문성하가 뒷걸음질을 쳤다. 주혜성의 이마가 깊게 팼다. 어금니를 질근거린 그의 입이 열렸다. 한층 무지근한 목소리가 귀를 옭맸다.

“이제 말할 때도 됐잖아. 뭐가 문제인지.”

문성하의 눈이 흔들렸다. 흘러간 시선이 텅 빈 벽에 고정됐다. 절로 달뜬 호흡이 터졌다. 일주일이 지나도 여전한 머릿속 잡념이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처럼 똬리를 틀었다. 문성하의 손이 느릿느릿 올라갔다. 떨리는 얼굴을 덮고, 메마른 뺨을 문질렀다. 닿은 살이 줄줄 녹아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나 NGX에서 내보내 줘.”

주혜성의 어깨가 뜰썩였다. 문성하의 얼굴에서 손이 떨어졌다. 지친 눈길이 그를 머금었다.

“내가 이 조직에서 잘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안 서.”

목울대가 덜덜거렸다. 맥없는 한 마디가 실내를 울렸다.

“나 도저히 여기에 못 있겠어. 혜성아.”

***

“입에 안 맞아? 형.”

걱정스러운 질문이 들려왔다. 문성하의 손안에서 젓가락이 삐끗거렸다. 떨어진 미트볼이 바닥을 굴렀다. 문성하는 몸을 굽혔다. 데굴거리는 음식물을 잡고, 다른 손으로 티슈를 빼 바닥을 닦았다.

“아니. 맛있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먹어.”

“먹고 있어.”

영혼 없이 응수한 문성하가 젓가락으로 밥그릇을 헤적거렸다. 윤기 도는 쌀밥이 맛없게 흐트러졌다. 맞은편의 안재림이 테이블 위에서 손깍지를 꼈다. 서슴거리는 손가락이 손등을 쓸었다.

“주 대표랑 무슨 일 있어?”

사뭇 진중한 물음이었다. 문성하의 젓가락질이 멈칫했다. 마른침을 삼킨 안재림이 말을 이었다.

“요즘 틈만 나면 여기로 오잖아. 난 좋지만, 주 대표가 싫어할 것 같아서.”

“너 좋으면 됐지. 그리고 주 대표랑 별일 없어.”

“오늘 출근은. 벌써 8시인데 안 나가도 되는 거야?”

안재림이 테이블에 올려 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터치된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오전 8시 3분을 가리키는 숫자가 떴다. 문성하는 심드렁하게 입 안의 밥알을 깨작거렸다. 상관없다. 지금이 8시든, 9시든, 10시든. 어차피 그만둘 회사, 몇 시에 출근하든 자신이 알 바 아니다.

어제 NGX에서 내보내 달라는 얘기를 한 뒤 주혜성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조금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문성하는 발을 뗐다. 주혜성의 곁을 지나쳐 입구로 향했다. 이 이상 주혜성과 있어 봤자 상처만 줄 것 같았다.

이건 첫 투정이었다. 그간 두 사람 간에 투정이라 할 수 있는 건 주혜성만의 몫이었다. 문성하는 그런 걸 한 적이 없다. 형이라는 입장에 뼈저리게 얽매인 문성하는 무의식적으로 소모적인 감정 표출을 피해 왔다. 덕분에 큰 마찰 없이 반년간 원만한 연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고, 문성하도 사람이었다. 불만스럽고 껄끄러운 감정을 언제까지 끌어안고 있을 수 없었다. 주눅 든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 담벼락처럼 쌓아 올린 자존심을 지탱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문성하는 처음부터 NGX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었고, 그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알면서 버티는 건 돈이 필요한 광대나 하는 짓이었다.

문성하는 또 비참하고 싶지 않았다.

“주 대표가 얼마 전에 나한테 전화한 얘기 했어?”

돌연 안재림이 다른 얘기를 했다. 문성하는 잠자코 갸우뚱했다. 안재림이 작게 탄식했다. 사뭇 담담한 언어가 찾아들었다.

“그 주먹밥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더라.”

“그건 왜.”

“몰라. 형이 맛있게 먹는 것 같아 신경 쓰였대.”

“요리도 못하면서, 무슨.”

문성하가 시큰둥하게 물컵을 집어 들었다. 입가로 가져가는 걸 지켜보던 안재림이 쓴웃음을 지었다.

“못하는 걸 하려는 게 정말 대단한 것 아니야?”

막 입술에 스친 잔이 멈칫댔다. 수면에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솔직히 지금도 주 대표 좋아하지 않지만, 그건 본받을 만하다 생각해. 예전에 사업가로서 존경할 때도 하고자 하는 일에는 전부 도전하는 게 대단하다 생각했어. 그러니 성공했지.”

가까스로 물을 담은 입이 오물거렸다. 입을 다신 안재림이 읊조렸다.

“그게 연애할 때도 똑같나 봐. 그 사람은.”

마무리를 짓듯 들려온 언어에 뇌리가 찰랑이는 물처럼 아물거렸다.

누군가를 위해 못하는 걸 하는 것.

자신도 그랬던가.

“형. 핸드폰.”

안재림이 가붓하게 테이블을 짚었다. 문성하의 시선이 내려갔다. 진동하는 핸드폰 액정에 제임스 임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네. 이사님.”

통화 아이콘을 누르며 귀에 가져갔다. 다소 조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 팀장님. 지금 어디십니까.]

“집입니다.”

안재림의 집도 집이긴 했다. 긴 숨을 뿜은 제임스 임이 또 말했다. 꽤나 심각한 어조였다.

[혹시 지금 바로 CEO실로 올 수 있으십니까. 좀 급한 상황입니다.]

***

CEO실과 라이징 벤처 발굴팀 사무실이 있는 꼭대기 층은 평소와 다르게 숙연한 분위기였다. 복도에 들어선 문성하를 보자마자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속삭이듯 말했다. 지금 엄청 기다리고 있어요, 빨리요. 문성하는 갸웃거리며 걸었다. 무슨 상황인지 도통 감도 잡히지 않았다.

고급스러운 목재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구둣발이 경직됐다. 단숨에 커진 눈이 실내를 담았다. 응접용 테이블에 둘러앉은 10여 명의 사람이 일제히 문성하를 보고 있었다. 전원 NGX 임원진이었다.

“문 팀장님 오시느라 고생했습니다. 이쪽으로 와요.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상석에 앉은 주혜성이 손뼉을 치며 일어섰다. 문성하는 엉거주춤 발을 옮겼다. 몇몇 임원이 눈인사를 건네 왔다. 틈바구니에 낀 루카스가 언짢게 이를 갈고 있었다. 문성하는 풀린 다리로 지벅거리며 걸었다. 대체 왜 임원 회의에 자신이 불렸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긴 애초에 문성하가 올 자리가 아니었다.

뭐 하는 거야, 대체. 주혜성의 곁에 선 문성하가 작게 닦달했다. 무시한 주혜성이 문성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턱짓했다.

“제이크. 화면 띄워 봐요.”

노트북을 앞에 둔 직원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빔 프로젝터가 비추는 화이트보드에 화면 하나가 떴다. 확인한 문성하의 면상이 새하얘졌다. 라이징 벤처 발굴팀이 투자한 22개 기업 리스트였다. 옆에 하나하나 그래프가 달려 있었다.

“라이징 벤처 발굴팀이 그간 발굴한 벤처 기업 리스트입니다. 옆에 붙어 있는 그래프는 해당 기업에서 긍정적인 이슈가 발생해 뉴스가 뜰 때마다 NGX를 두고 어떠한 대중 여론이 형성됐는지를 나타냅니다. 보시다시피 호의적인 키워드와 NGX가 함께 노출되는 빈도가 온라인상 급증함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유기견 매칭 스타트업 ‘제로루징’의 경우 프리시리즈A와 시리즈A를 유치했다는 기사가 뜰 때마다 ‘착한’, ‘NGX’의 동시 검색량이 이전보다 8% 늘어나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여론 형성은 글로벌적으로 반영돼…… 제이크, 다음.”

주혜성이 손을 까딱했다. 직원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전환된 화면에 해외 포털 사이트 검색 지수를 분석한 그래프가 떴다. 긴 흐름에서 상승 곡선을 나타내고 있었다. 주혜성이 찬찬히 임원진을 둘러봤다.

“국내에서 자주 노출된 긍정적 키워드가 해외에서 그대로 검색되는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국내 뉴스를 번역한 해외 언론 영향이 있었던 걸로 추정됩니다.”

주혜성이 숨을 골랐다. 자못 꼿꼿해진 시선을 느낀 일부 임원이 움츠렸다.

“‘착한 기업’ 이미지가 자리 잡는 건 NGX 입장에서 매우 생산적인 일입니다. 벤처 기업의 주주들은 당연하게도 이미지가 나쁜 투자 회사를 꺼립니다. 투자를 받는 것 자체가 기업 가치가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질 위험이 있어서죠. 지난해 홍콩의 MA도슨 CEO가 성 추문 스캔들에 휩싸이며 회사 이미지에 타격을 입은 영향으로 최종까지 간 헤지튼과의 23억 달러짜리 딜 체결이 결렬된 것이 대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주헤성의 구둣발에서 딱, 소리가 났다. 그의 얼굴이 들렸다.

“전 합리적이며 계산적인 CEO이고, NGX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선택은 하지 않습니다. 이거면 제가 NGX 본부에 라이징 벤처 발굴팀을 꾸린 이유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주혜성의 고개가 꺼덕거렸다.

“혹시 질문 있는 분 있으십니까.”

Nope. 모니터에 뜨는 음성 번역 내용을 보던 한 서양인 임원이 말했다. 옆에 있던 중국인 임원도 손을 내저었다. 곧 주혜성을 보며 물었다. That's enough. Can I get up now?

동의하는 분위기가 임원진 사이에 번졌다. 홀로 멈춰 있던 루카스가 대뜸 손을 들었다. 주혜성이 그를 힐끗했다.

“네. 얘기해요.”

“말씀하신 내용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다만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뭡니까.”

“왜 하필 문성하 팀장입니까. NGX에서 하나의 팀을 이끌기엔 커리어며 프로필이 너무나도 부족한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문 팀장을 택한 이유가 뭡니까.”

문성하의 입이 말아 물렸다. 주혜성은 예사로운 고갯짓을 했다.

“제가 이 얘기를 미처 못 드렸군요.”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가 항상 곁에 둬야 하는 사람입니다. 문성하 팀장이.”

다부진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능력이 너무나 좋아 먼저 반한 제 애인이거든요.”

***

“난 이제 모르는 일이야.”

임원들이 빠져나간 후 텅 빈 CEO실에서 문성하가 데스크에 걸터앉았다. 다가온 주혜성이 양팔을 뻗었다. 문성하를 사이에 가둔 손이 데스크를 짚었다.

“진작 알려야 하는 일이었어.”

“소문나면 어쩔 거야. 감당할 수 있겠어?”

“소문 안 나.”

주혜성이 피식거렸다.

“하나같이 여우들이라 회사에 타격 줄 짓거리는 일체 하지 않거든.”

문성하의 눈 밑이 옴짝거렸다. 생각해 보니 맞는 얘기였다.

“형은 지금까지 잘해 왔어. 앞으로 더 잘할 거고.”

주혜성의 손이 올라왔다.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엉키고, 칭찬하듯 쓸어내렸다. 두피가 녹아 가는 기분에 문성하의 속눈썹이 하늘거렸다. 괜히 목덜미가 붉어졌다.

꼭 자신이 동생이 된 기분이었다.

“더워?”

이동한 손이 허벅지를 짚었다. 흠칫한 문성하가 도리질을 쳤다.

“아니.”

“얼굴 엄청 빨간데.”

“괜찮아. 나 이만 가 볼게.”

허둥지둥 내려온 몸이 주혜성의 품을 벗어났다. 막 등을 보인 문성하의 팔이 잡혔다. 확 당긴 주혜성이 재차 허벅지를 만졌다. 이번엔 좀 더 위쪽이었다.

“안 더운데 왜 세우고 그래.”

문성하의 아랫입술이 깨물렸다. 터질 듯 달아오른 얼굴에서 전기가 튀는 것만 같았다.

“좀 넘어가지 그래. 어?”

“난 싫은데.”

무릎 밑에 팔을 집어넣으며 안아 든 주혜성이 도로 데스크 위에 문성하를 앉혔다. 원망스레 쏘아본 문성하가 데스크 가장자리를 움켜잡았다. 눈을 맞춘 주혜성이 싱긋거렸다.

“일주일 치 하자. 지금부터.”

“집에서 해. 여기서 어떻…….”

“지금 하는 일은 지금만 가능하다는 거 알잖아.”

느물거린 주혜성이 문성하의 셔츠 밑자락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목에 밀린 천이 속수무책으로 올려붙여졌다. 쇄골까지 셔츠를 밀어 놓은 주혜성이 문성하의 뒷덜미를 받치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한쪽 유두에 화끈한 훈기가 내려앉았다. 문성하의 상체가 무너졌다.

“아……!”

쿵, 소리를 내며 데스크에 등짝이 붙었다. 주혜성이 뒤통수를 잡고 있어 머리를 부딪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아픈 것을 달래 주듯 목덜미를 주물거린 주혜성이 젖꼭지를 빨아 들였다. 쭈웁, 소리를 내며 중심부가 꼿꼿하게 섰다. 데스크 밑으로 늘어진 다리가 버둥거렸다.

“아, 좀……!”

“싫어?”

식식거린 문성하가 대뜸 손을 내뻗었다. 주혜성의 얼굴이 덜컥 잡혔다. 빨개진 얼굴을 푸들거린 문성하가 눈을 치떴다. 달뜬 지시가 나왔다.

“넣으면서…… 빨아.”

주혜성이 비식거렸다.

“하여간 밝혀.”

뒷덜미에 머물러 있던 손이 내려갔다. 문성하의 바지춤에 다다라 버클을 풀고, 속옷과 동시에 거머쥔 채 끌어 내렸다. 순식간에 옷가지가 발목 밑으로 빠졌다. 허전해진 허벅지가 움츠러들었다. 옷가지를 데스크 구석에 치워 둔 주혜성이 문성하의 허벅지 하나를 어깨에 올리며 다른 손으로 제 버클을 풀었다. 철컥거리며 풀린 바지춤이 새까만 속옷과 함께 내려갔다.

“나랑 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

나머지 다리를 어깨에 올린 주혜성이 하체를 밀어붙였다. 젖혀지는 허벅지 밑에서 엉덩이가 쪼개졌다. 찬 공기에 젖은 회음부를 움찔거리며 문성하가 주혜성의 팔뚝을 잡았다. 촉촉한 음성이 나왔다.

“혼자서도 방법 있어.”

“혼자서 넣었어?”

“꼭 말해야 알아?”

“보여 줘.”

고개 숙인 주혜성의 입매에 초승달이 걸렸다. 문성하가 인상을 썼다.

“그럴 시간 없어.”

“보여 주기 전에 안 넣어 줄 거야.”

“개새끼야.”

“더 욕해. 난 좋아.”

주혜성이 키득거렸다. 문성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하여간 못된 것만 배워서.

도대체 누가 그렇게 가르쳤는지.

데스크를 헤매던 문성하의 손이 엉덩이 틈으로 들어왔다. 회음부를 찾아 검지와 중지를 대고는, 천천히 미끄러뜨렸다. 엊그제도 한 일인데 괜히 긴장이 됐다. 가죽을 꿰뚫는 듯한 주혜성의 눈빛에 손가락이 자꾸만 굼지럭거렸다. 이미 삽입 당한 사람처럼 문성하의 입에서 더운 숨이 번졌다.

회음부를 간질거리던 손가락이 구멍을 찾았다. 빠끔거리는 입구를 살살 문질러 가며 안에다 끄트머리를 박았다. 두 개의 손가락이 동시에 절반가량 들어왔다. 문성하의 아랫배가 울렁였다.

“으음……!”

“엄청 변태 같아. 형.”

“나도 알……아……!”

보다 힘차게 들어온 손가락이 깊숙한 구석에 처박혔다. 짓눌린 내벽이 놀라 소스라쳤다. 송연한 뱃가죽이 쿨렁거렸다. 눈매를 구긴 문성하가 발발거렸다.

“하아…… 못 하겠어…….”

“안에서 긁어 봐.”

“저려서 못 하겠어…… 그냥 넣어…….”

“보고 싶어. 빨리. 응?”

주혜성이 달콤하게 신소했다. 그 와중에 여유로운 태도가 심히 마뜩지 않았다. 노려본 문성하가 억지로 배 안에서 손가락을 세웠다. 점막을 더듬어 가며 손끝을 놀렸다. 손가락에 걸린 주름이 스프링처럼 튕겨지며 경련했다. 문성하의 아랫배가 쑥 들어갔다.

“으음…… 좀……!”

“혼자 해도 이 정도구나.”

의중을 알 수 없는 혼잣말이 들렸다. 조금 젖은 문성하의 눈꺼풀이 들렸다. 다리를 건 어깨를 곤두세웠다 내리며 주혜성이 한탄처럼 말했다.

“다음엔 찍어 둬야겠다. 한 번만 보기 아까워.”

무표정이 된 그가 대뜸 하반신을 추어올렸다. 그새 강고하게 부푼 살덩이가 문성하의 손등을 덮었다. 흠칫거린 손목이 밀려 났다. 더운 숨을 뿜은 주혜성이 말했다.

“손 빼지 마.”

주혜성의 손이 제 치부를 짚었다. 굵은 밑동을 움켜쥐고는, 세워진 음경을 회음부에 갖다 붙였다. 쿠퍼액이 터져 축축한 귀두가 간지럼을 태우듯 맨살을 쓸었다. 문성하의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아…… 빨리…….”

“손가락 잘 넣었어?”

“어….”

“벌려 봐.”

배 안에서 꿈지럭거린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가위 모양으로 교차하며 내벽을 갈랐다. 꽉 다물린 구멍이 살짝 벌어졌다. 생겨난 틈에 불끈한 귀두가 바로 꽂혔다. 가슴을 크게 부풀리고 난 주혜성이 교근을 불뚝대며 하반신을 밀어붙였다. 불에 덴 것처럼 홧홧한 마찰이 내밀한 살을 휩쓸었다. 문성하의 목이 넘어갔다.

“아아…… 안에, 안에 꽉 차…….”

“하아…… 더 채워 줘?”

“으응, 더…….”

“얼마나.”

은근하게 물은 주혜성이 굴신했다. 빠듯한 배 안을 가르며 두툼한 살덩이가 채워졌다. 손가락을 지르밟은 표피가 세차게 꿀렁거렸다. 생식기에 억눌린 손가락이 벌벌거렸다. 문성하의 성대가 녹아 갔다.

“끝까……지……. 흣…….”

“여기까지?”

적잖게 남아 있던 밑동이 일순 줄었다. 순식간에 막다른 내벽에 다다른 귀두가 판판한 점막을 비비며 체액을 묻혔다. 주혜성의 팔을 잡은 손가락이 곤두섰다. 문성하의 발등이 감전된 것처럼 들썩였다.

“더어…….”

“삼킬 수 있어?”

“응…….”

“자지 만져 봐.”

주혜성이 뇌까렸다. 문성하는 배 속의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였다. 안이 워낙 뻑적지근해 옮기는 게 버거웠다. 끙, 소리 낸 문성하가 가까스로 주혜성의 남근에 손가락을 겹쳤다. 억눌린 핏줄이 발작하듯 굼틀거렸다. 절로 손가락이 찌릿했다.

“쓸고.”

묵직한 음성이 머리맡에 내려앉았다. 손가락이 허우적거리며 부푼 핏대를 더듬었다. 자극에 취한 살덩이가 포효하듯 열기를 뿜었다. 짙은 숨을 몰아쉬고 난 주혜성의 눈이 풀렸다. 나직한 읊조림이 들렸다.

“진짜 좋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배 안에서 파동이 일었다. 돌연 빠졌다 들이닥친 생식기가 아까의 내벽에 몽둥이질을 했다. 아. 탄성을 터뜨린 문성하가 버둥거렸다. 헐떡인 주혜성이 그대로 치골에 힘을 실었다. 막힌 자리를 지나친 성기가 기역 자로 꺾이며 기어갔다. 문성하가 눈을 홉뜨며 까무러졌다.

“아응……! 아, 흐으…….”

“여기가 좋아?”

“흐읍, 조…… 좋아, 아……!”

“나도 좋아.”

목 끓는 소리를 낸 주혜성이 거친 허리 짓을 했다. 푹 들어온 음경이 침침한 내벽을 마구 쑤석거렸다. 등줄기를 타고 알싸한 전율이 차올랐다. 문성하의 아랫배가 파도를 머금은 것처럼 꾸물거렸다.

엉덩이에서 연신 철써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덜컹이는 데스크를 이기지 못한 서류가 우수수 떨어졌다. 전쟁이라도 일어난 양 어지러운 자리에서 문성하는 몇 번이고 자지러졌다. 머릿속에서 쉼 없이 번개가 쳤고, 주기적으로 기절할 것처럼 오싹한 감각이 사지를 옥죄어 왔다. 실제로 수 번이나 정신을 놓을 뻔했다. 위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땀방울이 신경을 깨우지 않았다면 진작 혼절했을지도 몰랐다.

“형.”

갑자기 허리를 받쳐 온 주혜성이 문성하를 안아 들었다. 어깨에 걸친 다리를 내려 교차하며 등을 감은 문성하가 진 빠진 얼굴을 보였다.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본 주혜성이 신음처럼 말했다.

“욕해 봐.”

문성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잔잔한 미소를 저금은 입에서 지극히 부드러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싫어. 사랑해.”

비식거린 주혜성이 고개를 낮추며 씨근덕거렸다. 점막을 파고든 음경의 혈관이 터질 기세로 불끈거리고, 펄떡거린 배 안의 생명체가 강철처럼 딱딱해졌다. 곧 맹렬한 진동이 아랫배를 사로잡았다. 내장을 엘 것처럼 후끈한 액이 내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문성하의 사타구니가 중심을 못 잡고 달달거렸다. 곧 성기 끄트머리에서 배 안의 것 못지않게 뜨거운 액을 쏟아 냈다.

옴짝달싹한 어깨가 축 처졌다. 주혜성의 상체가 기울었다. 무거워진 문성하의 몸이 데스크 위에서 늘어졌다. 배뇨감을 닮은 사정의 욕구에 귀두가 간질거렸다. 짜릿함을 견디지 못한 발가락이 자꾸만 꼼짝거렸다. 문성하의 얼굴이 무력하게 돌아갔다. 훤한 통유리창 너머로 점점 중천을 향해 가는 해가 보였다. 말끔한 유리에 묻은 몇몇 지문이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문성하의 입이 순간 달싹였다. 방금, 뭔가를 본 것 같았다.

***

오전 오후 내내 CEO실에 있었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업무를 빠릿빠릿하게 처리한 주혜성은 공백이 생길 때마다 문성하와 몸을 겹쳤다. 기회만 생기면 발정기 짐승처럼 벗은 몸을 교접하는 바람에 꽤나 넓은 실내가 온통 무더웠다. 초봄이라 더울 이유가 전혀 없는데, 꼭 열대야 같았다.

해가 떨어지고 어두컴컴한 밤이 찾아온 후에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시간이 도통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저녁인지, 한밤인지, 새벽인지. 식사라곤 점심 무렵 주먹밥 하나를 나눠 먹은 게 다였다. 일전에 안재림이 한 것과 놀라울 정도로 같은 것을 해 온 주혜성이 직접 입에 먹여 줬다. 양이 찰 턱이 없음에도 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일어날까.”

데스크에 등을 붙인 채 숨을 고르는 문성하의 곁에서 주혜성이 운을 뗐다. 문성하는 말없이 눈을 굴렸다. 별 하나 빛나지 않는 밤하늘에 반달도 보름달도 아닌 것이 걸려 있었다. 멀거니 보던 문성하의 눈꺼풀이 문득 달막였다. 우련한 시야에 아까처럼 유리창에 맺힌 얼룩들이 들어왔다. 빛을 머금은 자국이 각자의 모양으로 깜박거렸다. 문성하의 눈이 점점 커졌다. 입에서 아, 소리가 났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있자.”

나른한 손길로 주혜성의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주혜성은 순순히 문성하의 가슴에 옆얼굴을 기댔다. 머리카락을 쓸어 준 문성하가 아까처럼 창문을 봤다. 밑에서 주혜성이 물었다.

“뭐 봐? 형.”

반짝이는 빛을 머금은 문성하의 눈이 흐무러졌다. 서서히 열린 입에 몽글몽글한 단내가 차올랐다. 태어나 딱 한 번 먹어 본 솜사탕. 그것과 닮은 목소리로, 문성하는 말했다.

“불꽃 축제.”

얼마나 오랜 시간 얼마나 긴 길을 헤매었든지, 결국 두 사람은 오고야 말았다. 같은 시간, 같은 곳. 이곳이 원하던 그곳임을 확신할 길은 없지만 적어도 문성하는 안다. 이곳이 종점이라는 걸. 그들의 삶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첫 번째 지점이라는 걸.

이제야 축제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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