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73/161)

폭주 에스퍼 66화

[7월 5일 날씨 흐림

길고 긴 교섭 끝에 겨우 FW-50으로 들어가는 허가를 받았다. 아무리 협회라고 해도 보름은 길긴 한가 보다. 하지만 보름도 나에겐 불안하다. 제발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7월 6일 날씨 비

비가 오면 놈들은 조용해진다. 걸어 다니는 생물이라면 무엇이든 잡으려고 애쓰는 괴물 주제에 마치 물을 먹고 자라는 진짜 식물인 것처럼 구는 게 어처구니가 없다.

오늘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이틀이니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기다려 줘.]

[7월 7일 날씨 흐림

벌써 전투 식량에 질리고 말았다. 따뜻한 밥을 먹고 싶다.

낮에 드디어 꽃을 찾은 줄 알고 절벽을 기어올랐는데 붉은 곰팡이였다. 너무 화가 나서 걷어찼다가 신발에 달라붙어 큰일이었다. 희지가 봤다면 배를 잡고 웃었을 텐데.]

꽃? 처음으로 나온 실마리였다. 그것도 색은 붉은색. 머릿속으로 메모하며 주현은 페이지를 넘겼다.

[7월 8일 날씨 맑음

드디어 꽃을 발견했다. 여우를 닮은 동물의 등에 피어 있었다. 잡으려 했지만 그 전에 다른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크기가 작으니 어차피 프러포즈용 꽃다발에는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생각해야 배가 덜 아프다.

희지는 뭘 하고 있을까?]

폭주 에스퍼의 흉터투성이 손이 구겨진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중 반으로 접혀 있던 종이를 펼치자 역시나 눈에 익은 사진이 나타났다.

“하…….”

드디어 정답을 알아낸 주현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에스퍼가 찾던 꽃이란 바로 이곳의 식물형 괴물이 숙주에게 피워 내는 꽃이었다. 이런 섬뜩한 걸로 청혼할 생각을 하다니, 취향 한번 독특한 사람이었다.

고개를 내저은 주현이 다시금 다이어리를 들었다. 7월 9일에서 11일까지는 특별히 눈여겨볼 정보가 없었다. 그저 매칭 가이드로 추정되는 ‘희지’라는 여인에 대한 사랑의 말만 가득할 뿐이다.

그러고 보면 가이드 없이 홀로 들어온 이유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가이드에게 줄 선물을 그녀와 함께 찾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7월 12일 날씨 비 오다 맑아짐

이곳에 제법 익숙해졌다고 방심했는지, 오늘은 처음으로 상처를 입었다. 바닥에 엎드린 채 느리게 걷는 괴물의 머리에 핀 꽃을 잡으려다 뒤에서 오는 줄기를 미처 보지 못했다.

덕분에 바지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출혈은 금방 멎었지만 결국 꽃은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 꽃이 완전히 핀 것은 아니니 내일 다시 수색할 예정이다.

저번에 봤던 작은 꽃을 제외하면 실제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인데, 생각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현실에는 없는, 오직 괴물들 틈에서만 구할 수 있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꽃.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 희지가 기뻐했으면 좋겠다.]

[7월 13일 날씨 맑음

날씨가 화창할수록 괴물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활발해진다. 덕분에 식사 도중 일어나 싸워야 했는데 슬슬 가이딩이 떨어져 가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하다.

꽃은 오늘도 찾지 못했다.]

[7월 14일 날씨 강한 바람

벌을 받은 걸지도 모른다. 다른 생명의 고통과 죽음을 사적인 욕심으로 얻으려 해서 하늘이 벌을 내린 게 분명하다.

내 다리에 꽃이 피었다. 호숫가에서 목욕하다 발견했다. 얼마 전 다친 자리인데, 설마하니 그때 숙주가 되었을 줄이야. 그래도 이제 3일밖에 되지 않았으니 서둘러서 가이딩을 받으면 나을 수 있다.

최대한 빠르게 게이트로 돌아간다면 오래 걸려 봤자 반나절이면 갈 수 있다. 좀 더 늦어진다 해도 제한 시간인 11일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찾아봐야겠다.

널 위해 꽃을 찾으려다 내가 꽃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면, 너는 미련하다 욕하면서도 결국 웃어 주겠지?]

[7월 15일 날씨

FW-50의 보고서는 업데이트되어야 한다. 씨앗은 숙주의 신체가 강할수록, 즉 짧은 시간 동안 받을 수 있는 영양분이 클수록 빠르게 피어난다. 그동안 관찰한 결과를 보면 명확하다. 소형견 크기의 괴물보다 트럭 크기의 괴물이 씨앗으로 인해 더욱 빨리 목숨을 잃었다.

가이드보다야 에스퍼가 강한 건 당연하다. 내 다리에는 벌써 꽃이 피부를 뚫고 자라났다. 게이트를 넘을 때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안해, 희지야.]

일기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에스퍼는 7월 16일 새벽에 사망했다.

가이드는 11일 만에 사망했고, 가이드보다 신체적으로 훨씬 뛰어난 에스퍼는 기껏해야 닷새 만에 목숨을 잃었다. 어쩌면 에스퍼의 등급에 따라서 사망까지 걸리는 시간이 조금씩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가방을 숨긴 이유는 아마 급격히 떨어진 체력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나섰다가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씁쓸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방법은 없다.

다이어리를 닫고 종이 뭉치를 정리해 제자리에 넣은 주현이 마지막으로 상자를 집어 들었다. S급 에스퍼가 꼬박 돈을 모아서 샀을 반지는 보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현이 보기에도 무척 아름다웠다.

매칭 가이드이자 연인에게 내밀 계획을 세우며 들떴을 에스퍼를 잠시 생각한 주현이 뚜껑을 닫았다. 임무는 끝났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협회의 바람과는 달리 결국 에스퍼가 두고 왔다고 한 건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이었다. 허탈함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반지를 희지라는 가이드에게 가져다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섰다.

이걸 본다면 마음은 아프겠지만, 결국 죽은 이를 애도할 수 있으니 무엇보다 큰 선물이 될 거다. 가족들의 유품을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주현이 괜히 콧등을 훔쳤다.

커다란 가방을 두 개나 메고 길이 험한 정글을 걷는 건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못 할 것도 없었다. 물론 임무가 예상보다 일찍 끝나 능력을 한계까지 억누를 필요가 없다는 점이 한몫하긴 했다.

차인호는 3일 전에 C동에 왔다. 4일 후에 온다고 가정했을 때, 그동안 또 어떤 임무를 받을지는 몰라도 웬만해선 버틸 수 있었다.

“다른 가이드를 만날 필요는 없으면 좋겠는데…….”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주현이 단단한 부츠로 감긴 다리를 뻗은 때였다. 그가 소리 없는 공격을 눈치채고 바닥을 구른 건 순전히 그동안 갈고닦은 직감 덕분이었다.

검붉은 눈동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샌가 비가 그치고 구름이 개어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선 이곳도 하늘만은 익숙한 탓에 알아채는 게 늦었다.

쏟아지는 비에 움직임을 멈췄던 괴물이 하나둘씩 꿈틀거리며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다.

다시금 그를 향해 날아오는 줄기를 단검으로 베어 낸 주현이 빠르게 몸을 돌려 뛰어나갔다. 줄기 각각에 실린 힘은 강하지 않아서 온몸을 감싸는 방어막을 친다면 효과적이겠으나 게이트까지 남은 거리가 상당해서 어쩔 수 없었다.

뾰족한 가시가 박힌 줄기가 주현의 다리를 노리며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앞으로 메고 있던 가방을 내던져 공격을 막고는 잽싸게 자리를 피하는 몸놀림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결국 주현의 가방은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딱히 중요한 게 든 것도 아니라서 상관없었다. 오히려 짐이 반으로 줄어든 덕에 조금 더 빠른 움직임을 할 수 있게 된 주현은 다시금 날아오는 줄기를 베곤 질척한 땅을 박찼다.

결국 머리 위의 하늘이 붉은색이 되었을 즘 게이트에 도착했다.

온통 흙과 점액투성이가 된 그는 그다지 멀쩡하다 말할 수 있는 꼴이 아니었다. 그래도 치료가 필요할 정도의 상처는 없었다. 다만 두 시간 전 수많은 줄기에 몇 분간 붙잡혀 있던 탓에 옷 곳곳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주현의 위치가 게이트에 가까워지는 걸 확인하고 미리 와 있었는지, 게이트 너머에서 대기하던 직원은 주현의 지저분한 몰골에 눈썹을 찡그렸다.

며칠간 제대로 된 목욕도 못 한 주현이 최대한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좌석에 몸을 실었다. 그럼에도 시트가 더러워지는 걸 막을 순 없었지만,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묻자 바짝 세우고 있던 가시가 천천히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주현은 가물가물한 시야를 받아들이며 왠지 간지러운 어깨를 손끝으로 긁적였다. 게이트 너머에도 모기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 * *

아침 샤워 후 바라본 거울 속 창백한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다. 늘 그렇듯 눈 밑이 조금 어둡고, 섬뜩한 검붉은색이 건너편을 노려보고 있다.

그런데도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을 찾아 집중하던 주현은 왼쪽 어깨 한 부분에 흉터완 다른 이상한 흔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위치가 애매해서 고개를 꺾어서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지저분한 거울에 어깨를 들이댄 주현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

거울에는 흡사 꽃봉오리를 그린 듯한 동그란 문양이 비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보고서에서 사진을 봤었으니까. 크기는 조금 작지만, 모양만은 완벽하게 같았다.

씨앗의 숙주가 된 가이드는 11일을 버텼으나 에스퍼는 5일 만에 사망했다. 주현이 임무를 마친 건 이틀 전이니 최소치를 잡아 빠르면 3일, 길어 봤자 4일이면 그는 죽을 것이다.

주현은 선택해야 했다. 당장 상부에 문양을 내보이며 괴물의 숙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든가, 혹은 입을 다물든가.

가이드와의 깊은 스킨십. 즉, 관계를 가져야만 제거되는 씨앗인 만큼 차인호에게 연락하는 대신 또 다른 범죄자를 이곳으로 부를 게 뻔했다.

애초에 일주일에 한 번밖에 못 올 정도로 바쁘다고 했으니 차인호는 불러도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주현과, 폭주 에스퍼와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매칭을 끊을지도 모른다.

허탈하게 웃은 주현이 어깨를 문질렀다. 어떠한 통증도 없다고 적혀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조금 아픈 것도 같았다. 어깨보다는 조금 더 밑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