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71화
“이건 아직도 있네.”
채경의 중얼거림을 미루어 그들뿐만 아니라 단합회에 참가하는 에스퍼라면 누구나 작성해야 하는 것 같았다.
주현은 첫 번째 문항부터 천천히 훑어보았다. 간단하게는 이름과 나이, 소속부터 시작해 취미나 특기, 심지어는 휴일을 보내는 법 따위도 묻고 있었다. 폭주 에스퍼들에겐 무척 어려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주위를 보니 역시나 다들 곤란한 표정으로 쉽사리 펜을 들지 못했다.
“그냥 대충 해. 어차피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폭주 에스퍼라는 이름표지, 우리 자체에는 아무 관심도 없을걸.”
봄의 말에는 언제나 묘한 설득력이 있다. 단호한 목소리에 주현을 포함한 모두의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게 느껴졌다.
“하긴, 그것도 그러네.”
“그렇다니까. 물론 주현이는 좀 다르겠지만.”
“나? 왜?”
“넌 팬이 꽤 많아. 모르지?”
농담하지 말라는 듯 가늘어진 눈에도 봄은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더욱 부추기며 펜을 내밀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최대한 상세하면서 남들이 봐도 괜찮을 내용으로 써. 무조건 인터뷰할 테니까.”
“내 인터뷰를 누가 봐……?”
폭주 에스퍼의 인터뷰를 즐겁게 시청할 사람이 어딨다고 그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겠냐는 질문은 봄이 아니라 채경에게서 대신 답을 얻었다. 주현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경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아이고, 주현아, 주현아. 사람들은 생각보다 순진해. 폭주 에스퍼는 무섭다는 걸 알아도 화면 속 모습만 보고 널 얌전하고 안전한 사람이라 멋대로 생각한다니까?”
찰나의 순간,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경은 곧바로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걸 기대하고 너의 인터뷰를 보는 거야. 자기 머릿속에 새겨진 이미지대로 행동하는 널 보고 싶어서.”
곰곰이 생각하던 주현은 다시 한번 종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닿을 듯 가까운 채경 덕에 선글라스 너머가 조금 보인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동안 주현의 모습을 찍은 방송들은 어째서인지 하나같이 편집되어 그를 연약한 겁쟁이처럼 묘사했다. 없는 장면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 테니 분명 그것들 또한 주현의 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방송처럼 얌전하고 수줍은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털을 세운 맹수처럼 언제든 상대에게 덤벼들 준비가 된 자존심 덩어리다. 성격도 나쁘고, 쉽게 무언갈 싫어하고, 트라우마도 가득하며, 누군가를 용서하는 데 많은 시간이 든다.
주현의 진짜 모습을 본다면 방송에서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그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실망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미리 준비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덜 미움받지.”
“형, 우린 폭주 에스퍼야. 미움받는 게 당연한데 조금 덜 미움받는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
모든 삶이 미움과 경멸투성이였던 주현은 누군가 그를 싫어한다면, 그 배로 상대를 증오함으로써 상처를 매만지며 살아왔다.
시선이 마주친 것만으로 마구 인상을 구기는 사람들 틈에서 기어코 살아남은 그는 이젠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라면 누가 뭐라고 떠들든 신경 쓰지 않는 경지에 올랐다.
물론 차인호가 주현의 뒷담화를 한다거나 대놓고 경멸한다면 견디기 힘든 상처를 받겠으나, 그는 이미 주현의 진짜 모습을 다 알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본 채경은 입을 살짝 벌린 채 굳어 있었다. 선글라스 때문에 정확한 표정을 간파할 순 없었으나 큰일은 아닐 것이다.
그를 내버려 둔 주현이 힘없이 뒤로 넘어간 종이를 흔들어 빳빳하게 폈다. 그러곤 부러진 곳을 테이프로 말아 둔 볼펜을 딸깍여 글자를 적어 넣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렇네. 어차피 바닥이니까 발버둥 칠 이유가 없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채경이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여전히 멍한 세화와 함께 있으니 시체 둘로 보이기도 했다.
“가이딩 떨어졌어? 주사 맞고 와.”
원래 S급 에스퍼였던 채경은 가이딩 부족 후유증이 남들보다 컸다. 어쩔 수 없이 가이딩 약물에 의존하다 중독되어 버린 그는 가끔 부작용으로 헛소리를 하거나 손을 떨곤 한다. 천천히 손을 내저은 채경은 여전히 누워 가만히 숨만 내쉬었다.
그런 채경을 의아하게 보던 주현은 묻기를 포기하고 다음 빈칸을 채웠다. 그러다 맞닥뜨린 특기 항목. 생각나는 게 없어 가만히 노려보던 그는 현란하게 펜을 돌리며 고민 중인 승철의 종이를 슬쩍 보았다.
[바퀴벌레 빨리 잡기]
“누난 뭐 적었어? 특기.”
결국 주현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봄뿐이었다. 긴 다리를 꼰 채 종이를 채우던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밥 먹기.”
“밥 많이 안 먹잖아.”
“많이 먹기라곤 안 적었어.”
아무도 제대로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평소 <에스퍼 단합회> 방송을 챙겨 보지 않은 탓에 보통은 어떤 걸 적어 가는지조차 모르는 주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대충 끄적인 주현은 멋대로 쓰는 게 훨씬 쉽다는 걸 깨닫곤 밑으로 이어진 항목들도 따라서 대강대강 썼다.
잠시 후 채경과 세화도 비틀비틀 일어나 다 죽어 가는 몰골로 종이를 채웠고, 폭주 에스퍼들의 <에스퍼 단합회> 참가 신청서는 무사히 직원의 손에 들어갔다.
해가 지고 방으로 돌아간 주현은 어둠 속에서 가만히 누워 있다 문득 베개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에 잡혀 나온 건 주황색 전화 카드였다. 공중전화에 집어넣지 않고 대신 베개 밑에 넣어 둔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
주현은 차인호가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만약 그가 폭주 에스퍼들이 웃기지도 않는 방송에 나가게 되었다는 걸 안다면 무슨 반응을 할까?
늘 의문스러운 사람이라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어쩌면 무언가 조언을 해 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짧은 고민 끝에 카드를 다시 제자리에 밀어 넣은 그가 몸을 돌려 누웠다. 차가운 창살에 세로로 갈라진 달은 오늘따라 유난히 밝았다.
* * *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목소리에 담긴 원망은 너무나도 짙고 커서 주현은 숨조차 들이쉴 수 없었다. 그걸 바란 듯 몇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하던 여인은 마침내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속삭였다.
“말해 봐. 네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너무 많아서 주현은 어떤 것부터 입에 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멍청한 물고기처럼 입술만 뻐끔대던 그는 정답을 찾았으나 뱉지 못했다.
아빠를 죽여서 죄송합니다.
그걸 말하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목을 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주현을 가만히 보던 여인은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멀어졌다.
“이미 늦었어.”
대답할 타이밍이 늦었다는 건지, 혹은 훨씬 전부터 돌이킬 수 없었다는 뜻인지. 답을 알고 있는 주현이 낡고 더러운 옷자락을 손끝으로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작고 구멍까지 뚫려서 가출하며 두고 온 옷이었다.
‘내가 이걸 왜 입고 있지?’
고개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휙 돌아선 주현은 눈을 크게 떴다.
“처음으로 행복을 맛보게 해 준 우리에게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혜린의 단발머리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가늘게 흔들렸다. 혜린뿐만이 아니었다. 민재, 석규, 은하, 영찬, 은비, 서하, 서후, 유민, 그리고 원장 선생님의 품에 안긴 막내 라연까지.
원장 선생님은 웃음이 많았는데, 이토록 싸늘한 얼굴은 그날 후로 처음이었다. 주현의 모든 세상이 붉게 물든 날.
“왜 우리를 죽였어?”
주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벌린 순간 추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미, 미아-”
“사과는 받아 줄 사람이 있을 때 하는 거잖아.”
그렇지. 주현의 사과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다. 그야 이미 모두 죽었으니까.
그걸 깨달은 순간, 그의 가족들이 서 있던 공간이 온통 새까매졌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홀로 서 있던 주현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천천히 돌아섰다.
“신주현.”
머리 없는 남자는 똑바로 주현을 향해 서 있었다. 붕대가 없는 홍연우가 어떻게 생겼는지 주현은 모른다. 알기 전에 그를 죽였으니까.
연우의 비난은 소리 없이 이어졌다. 그는 얼굴도 목소리도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 주현을 죽고 싶게 만들었다. 얼굴도 없는 주제에 숨소리가 들려왔다.
말하기 위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고, 주현은 잠에서 깼다.
멍하게 바라본 천장엔 아침 햇살이 퍼져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주현이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온 얼굴이 축축했다. 눈물이 흘러넘쳐 베개까지 젖은 통에 머리카락도 지저분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주현은 오랫동안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밖에 없는 방이라 아무도 보지 않음에도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연우의 말은 듣지 못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 했을까? 다른 이들과 같은 비난과 경멸일까, 아니면 싸늘한 비수일까. 생각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꿈은 꿈일 뿐이니까.
지금껏 비슷한 꿈을 수도 없이 꾼 주현이 손을 내렸다. 푹 젖은 얼굴은 짙은 자기혐오를 담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어깨가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