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86/161)

폭주 에스퍼 78화

“봤지. 코가 아주 박살 난 것 같던데.”

“야비하게 굴길래 박치기했거든. 거지 같은 헬멧이라고 욕했었는데 처음으로 고마웠지 뭐냐.”

벌써 만난 지 6년이 지난 세화와의 대화는 살갑진 않아도 편안하다.

적당한 속도로 이어지던 대화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할 말이 없으면 입을 다무는 게 당연하다. 밖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서로에게 잘 보일 필요 없는 C동에서는 당연한 상식이다.

달빛조차 새지 않는 어두운 산길을 훑던 주현은 세화답지 않게 희미한 부드러움이 담긴 목소리에 집중했다.

“난 가이드라면 다 싫어. 너도 알지? 사람 목숨을 인질 삼으며 우위에 선 것처럼 구는 놈들 다 죽이고 싶은 기분 말이야.”

물론 잘 알고 있다. 가이드에게 인생을 내던지는 에스퍼가 그리 많다던데 평생을 가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때가 주현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네 매칭 가이드……. 차인호는 좀 다른 것 같다.”

주현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녀 또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정당당하게 쟁취한 승리에 내던진 사람들의 환호 그 깊은 곳에는 차인호의 노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가이드 때문에 말 그대로 팔 하나를 잃을 뻔했던 에스퍼의 짧은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휙 흔들렸다.

“이왕이면 붙잡고 있어라.”

“그럴 생각이야.”

곧장 되돌아온 대답에 잠시 멈칫한 세화는 이내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아드레날린이 식어 낮처럼 환하지는 않지만, 아침보다는 가벼운 미소였다.

할 말 다했다는 듯 입을 다문 세화를 잠시 바라보던 주현이 유리창에 머리를 툭 부딪혔다.

차인호의 가슴에 못을 박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그가 C동에 남기고 떠날 구멍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으나,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주현의 자존심이 견디질 못한다.

기어코 사람들이 폭주 에스퍼에게 환호하며 손뼉 치게 만든 가이드를 떠올리던 주현이 입술을 다시금 강하게 씹었다. SS급 가이딩은 이미 진작에 사라졌는데, 고작해야 B급 가이딩은 온도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주현은 울고 싶은 기분을 숨기며 배어난 핏방울을 꿀꺽 삼켰다.

좁지만 아늑한 방으로 돌아온 주현은 그제야 긴장을 내려놓으며 지친 듯 침대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신경을 스치는 희미한 위화감만 아니었다면 곧장 이불 위로 몸을 날렸을 것이다.

말라 가는 핏방울 같은 눈동자가 좌우로 굴렀다. 책상 위의 소설책. 던져둔 후드티. 물이 반쯤 든 컵 등등. 물건의 위치가 미묘하게 틀어져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미세하기 짝이 없는 변화였으나, 1㎝ 차이로 목숨이 날아가는 전장에서 십여 년을 구른 에스퍼에겐 상당히 큰 이질감을 주었다.

아주 느리게 작은 감옥을 맴돌던 주현의 발은 책상에 붙어 있는 작은 서랍 앞에서 멈췄다.

대청소가 있었다고 했으니 사소한 변화가 있는 건 당연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현의 창틀은 여전히 더럽고, 방 모서리의 거미줄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그런 와중에 홀로 깨끗해진 서랍이 주인의 손가락에 걸려 가볍게 열렸다. 며칠 전 실수로 손잡이에 묻힌 볼펜 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잡동사니 틈을 날카롭게 주시한 주현이 두 번째 서랍도 열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서랍이 열렸을 때, 주현은 한숨과도 같은 허탈한 미소를 흘렸다.

게이트 CE-33. 오아시스에 세워진 부자들의 쉼터. 그곳에서 죽은 반란군의 유품이 사라졌다.

자그마한 통은 눈에 띄지 않게 노트와 볼펜 따위가 어지럽게 널린 서랍의 가장 안쪽에 밀어 넣어 뒀었다. 혹시 몰라 단 한 번도 꺼낸 적 없으니 다른 곳에 있을 리는 없다.

한참을 뒤적이다 결국 모든 물건을 꺼내 서랍 세 개를 완전히 비워 내도 찾는 건 발견되지 않았다.

주현은 천천히 서랍을 정리하며 범인이 누구일지 생각해 보았다. 청소 업체 직원? 가능성이 낮았다. 여전히 쌓여 있는 먼지를 보면 애초에 대청소 자체가 물건을 찾기 위한 핑계였을 게 뻔하다.

그렇다면 범인은 한 명밖에 없다. 임무에서 돌아온 주현에게 어떠한 의구심을 품은 태석이 이런 일을 벌인 게 틀림없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다. 태석은 굳이 이런 식으로 뒤에서 몰래 행동할 필요가 없다. 그냥 방에 무작정 들어와서 당장 서랍이고 옷장이고 싹 다 털라고 말하면 주현은 제 손으로 그리해야만 한다.

그럼 대청소라는 어이없는 변명을 밀어붙이면서까지 몰래 주현의 방에 들어와야 했던, 반란군이 목숨 걸고 건네준 정보를 훔친 사람은 누구일까.

혼자 고민해 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지문을 지우듯 깨끗이 문질러진 서랍 표면을 훑은 주현이 고개 돌려 새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앞에 놓인 수많은 의문 속에서 단 하나 확실한 사실이 있다. 만약 태석 혹은 협회 상층부가 범인이라면, 주현은 내일 죽는다. 반란군의 정보를 숨겼다는 죄로 이틀 정도 고문받다 끝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곤 미련 없이 그를 죽일 게 분명했다.

좀 더 확실히 숨기지 못한 주현의 잘못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임무에 갈 때도 가지고 다녔을 텐데.

뜨거운 사막의 태양 아래에서 주현의 품에 안겨 죽은 반란군, 해산은 정보가 담긴 USB를 반란군에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주현이 대체 어디서 반란군을 만날 수 있을까? 살면서 만난 유일한 반란군이 해산인데, 언제 어디서 다른 반란군을 만날 줄 알고 중요해 보이는 물건을 들고 다니겠는가.

하다못해 협회에 빼앗기지만 말아 달라던 목소리를 떠올린 주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사소한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아무튼 내일이면 대충 알 수 있다. 그가 제압되어 잡혀간다면 물건은 협회의 손에 들어간 것이고, 모레가 되어도 멀쩡히 살아 있다면 제삼의 세력이 개입했다는 뜻이다.

주현은 자신이 어떤 걸 바라는지 모른다. 다만 그날 밤, 주현은 새하얀 후드티를 입고 모자까지 뒤집어쓴 채 잠들었다. 꿈에는 가족들과 환호하던 관객, 그리고 차인호가 나왔다. 명백한 악몽이었다.

다음 날, 임무를 받기 위해 만난 태석은 평소와 다름없이 삭막하고 짜증 나 보였다. 그 외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뚫어지게 자신을 주시하는 주현에게 뭐 문제 있냐고 직접 묻기까지 했다.

대답을 애매하게 한 탓에 뺨에 멍이 든 주현은 목숨을 건졌다는 생각 대신 조용히 차인호를 생각했다. 분명 어제 만났는데 그가 보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닌 게 나쁜 것이 된 하루 속에서 주현은 복수를 다짐하며 속절없는 사랑에 몸을 맡겼다.

‘인생은 단 게 있어서 쓴 거야.’

언젠가 어른인 척하던 아이가 거들먹거리며 했던 말이다.

‘혀를 뽑지 않는 한 앞으로 평생 쓰겠지.’

약속된 미래를 곱씹던 폭주 에스퍼는 임무에 가기 위해 살벌한 무기를 챙겼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입에 든 사탕을 뱉고 싶지 않다는 게 사랑의 미친 점이다.

자타 공인 미친 남자가 서늘한 얼굴로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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