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8. 관계의 정의 (8/13)

Chapter 8. 관계의 정의

동아리 엠티에서 쫓겨나듯 돌아온 이후로 재하는 극심한 방황을 겪었다. 아니, 정정한다. ‘방황’은 그의 최근 심경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정돈된 단어였다. 그는 이유 없이 수업에 빠졌고, 멍하니 있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내리기도 했다.

해일처럼 밀려온 감정이 그의 생을 흔들었다. 그는 후배를, 남자를, 윤연우를 원망하는 동시에 극렬하게 원했다. 양가적인 감정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신경을 갉아먹었다. 감정은 끔찍하리만큼 선명했으나 그가 꿈꿔 왔던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재하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이란 이런 거였다. 가치관이 맞는 사람과의, 서로를 아껴 주고 보듬어 주는 관계. 여기에는 ‘사회에서 인정받는’이라는 문맥이 생략돼 있다. 당연한 얘기를 굳이 끼워 넣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현듯 찾아온 감정은 이 세상은커녕 스스로조차 용납할 수 없는 이상 성욕이었다.

남자 후배를 향해 처음 욕구가 치밀었을 때만 해도, 젊고 건강하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고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결국 닿아 버린 순간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진짜 절망은 그 이후에 찾아왔다.

재하는 엠티에서 돌아온 이후로 끊임없이 어떤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만약 윤연우가 그날의 입맞춤을 기억하고 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에.

윤연우는 재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은경이의 이름을 부를 정도로 취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라도 기억이 돌아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억이 남아 있으면 어쩌지. 그래서 혹시 윤연우가 영원히 나를 피해 다니면 어쩌지. 재하는 온갖 걱정을 하느라 밤새 잠도 이루지 못했다. 급기야는 열이 올라 며칠이나 침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며칠 동안의 번민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후배 녀석은 제가 먼저 키스하고, 매달려 남의 인생을 망쳐 놓은 주제에 깨끗이 잊어버리기까지 했다.

진한 입맞춤을 나눈 이후에 내뱉은 다른 여자의 이름, 그리고 그 이후에 찾아와서 뱉은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들.

“저는 그냥, 그……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잖아요. 그런데 은경이한테 이상하게 행동하니까. 그리고 은경이는 저랑……도 친하고. 제가 가운데서 곤란해질 수도 있고.”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인지, 그 속이 해파리처럼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괜히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찝쩍대지 말고 SNS에서 만난 여자나 쫓아다니라는 뜻이다. 윤연우는 사랑 앞에서는 상상 이상으로 비겁한 애였다. 이참에 실망해서 싫어지기라도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리학 용어 중에 ‘유사 효과’(Mathing Principle)라는 것이 있다. 자신과 가치관이나 태도가 비슷한 사람에게 끌린다는, 당연한 얘기를 용어로 정립한 것이다. 재하는 이전까지 자신이 연우에게 끌렸던 것도 바로 이 유사 효과로 인한 것이라고 굳게 믿어 왔다.

넓은 범위로 보면, 인종이나 종교, 정치관, 사회 계층이 동일한 것 역시 상대에 대한 호감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성별’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더 이상은, 어떠한 심리학과 사회학 이론으로도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재하는 전 세계 논문을 모아 놓은 사이트에서 게이섹슈얼에 관한 논문을 검색해 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동성애자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이미 주변에 주진영이라는 사례가 있었지만, 그냥 그 사람은 그렇구나, 하는 선에서 끝났지 호기심으로 증폭되지는 않았다. 미국 클래스메이트들도 마찬가지였다. 네 명이 모이면 그중 한 명 꼴로 게이거나 바이였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겼었다.

「미국정신의학회(APA)가 1965년 발간한 『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편람』은 동성애를 성격 장애(disoder)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1973년 수정판은, 동성애를 질병이나 질환이 아니라 성적지향의 혼란(disturbance)이라는 범주로 대체했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지독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성적 지향의 혼란. 겨우 그렇게 말하기에는 감정의 파도가 지나치게 거셌다.

어떤 논문에도 그의 감정을 대신 정의해 줄 답 같은 건 없었다. 육체만이, 혹은 정신만이 그에게 종속됐다면 착각일 거라고 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재하의 시선이 관상용으로 사 두었던 와인병에 머물렀다. 그는 충동적으로 와인 마개를 따고, 잔 가득히 액체를 부었다. 진득한 핏빛 와인이 조명을 받아 잔 가득히 넘실거렸다. 와인이 마치 폭탄주라도 되는 것처럼 입 안으로 들이부었다. 취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끔찍한 숙취와 함께 후회가 찾아왔다. 이딴 걸 윤연우는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머리를 부여잡고 있으려니 전화통을 붙잡고 하소연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 야, 윤연우…… 네가 나한테 키스해 놓고 뭐? 기억을 못 해?

- 넌 왜 멀쩡한 사람을 게이를 만드냐…….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통화 목록을 뒤져 봤더니 서용준과 한 시간 가까이 통화한 기록이 있었다. 다행히 윤연우한테는 전화를 건 흔적이 없다. 재하는 용준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내가 어제 너한테 전화했어?오전 9:32

서용준아니.오전 9:33

통화 기록이 있는데...오전 9:33

서용준몰라. 난 모르는 일이야.오전 9:3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