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관계의 정리
고요한 침묵이 방 안을 뒤덮었다. 연우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이 모든 게 꿈속이기를 바랐다.
성향을 들키는 건 살아가면서 충분히 겪을 법한 일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상상해 본 적도 많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들키는 건 다른 문제였다. 게이를 이해한다는 열린 사고의 남자들조차 자신을 좋아한다면 주먹을 떠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해야만 했다.
연우는 아니에요! 하고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자병 말기세요? 혀……, 형 별로 나, 남자들한테 인기 있을 스타일 아니에요!”
“그럼 내가 네 취향인 걸로 해 두지, 뭐.”
강재하가 피식 웃었다.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순간적으로 수치심과 함께 화가 치밀었다.
미쳤나, 여기서 갑자기 왜 웃어?
“아, 아니…… 제 취향도 전혀 아니라고요.”
몇 번이고 부정하는 연우를 강재하가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는 달래듯 연우에게 말을 건넸다. 기이할 정도로 다정한 어투였다.
“그럼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봐. 왜 그렇게 찔찔 짜면서 은경이 만나지 말라고 방해를 한 건데.”
“어, 그건…… 그건…….”
연우는 상상 속에서 다양한 핑계를 떠올렸다. 수많은 변명과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1,400만 개의 시나리오 중에 강재하의 의심에서 벗어나는 미래는 단 한 개도 없었다.
무슨 거짓말을 해도 믿지 않을 거고, 무슨 변명을 해도 앞뒤가 맞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그가 했던 말이 다 정답이기 때문이다. 이미 진실을 간파한 자 앞에서 알량한 변명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강재하는 저에 대한 욕망을 감지하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모든 걸 파악한 이상 이 이상의 발뺌은 소용이 없었다.
“그건…….”
이제 어떻게 할까. 교환 학생, 휴학, 워킹 홀리데이…… 연우는 변명 대신 미리 준비해 놓은 대비책들을 떠올렸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변명을 포기했다.
“……그래요. 맞아요. 형 좋아한 거.”
헤테로에게 같은 동성이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면 거부감이 심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차마 강재하의 얼굴에 떠오르는 혐오의 빛을 볼 자신이 없었다. 연우의 시선은 재하의 발치 아래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남겨 둔 카드가 있었다. 이럴 때는 아주 일부분의 진실만을 내보이면 되는 거다.
“그,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한때 그랬다는 거예요. 지금은 형한테 진짜 손톱만큼도 그런 감정 없어요.”
“……뭐?”
강재하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연우는 상대가 질문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그냥 형한테 잠깐 관심이 있던 거였어요. 저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요. 보, 보셨죠? 지금 그 사람이랑 잘되고 있거든요. 그게…… 뭐랄까. 그, 형이 인스타 그분한테 느낀 것처럼 운명을 느꼈달까. 그러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이번 학기만 지나면 학교에서 사라져 줄 테니까.”
“……사라진다고?”
연우는 계속 눈을 감은 채였다. 사라져 버리겠다는 말은 충동적으로 내뱉었지만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연우는 지금까지 몇 겹의 거짓 안에 자신을 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입고 있던 것이 투명 망토임을 알게 됐으니 앞으로 강재하를 볼 자신이 없었다.
“네, 네.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어요. 워홀이나, 교환 학생이나…….”
“……사라지겠다고? 그 사람이랑 잘해 본다면서?”
“아, 어, 그게…… 같이 가려고요.”
소개팅남이 지금 하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상대방의 의사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순도 100%의 헛소리였다. 어쨌든 지금은, 자신을 혐오할 게 분명한 선배에게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니까, 이제 나를 안 좋아한다고?”
어딘가 허망한 듯한 목소리에 연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강재하의 턱 근육이 부들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성적으로 좋아했다고 말하는 친한 남자 후배에게 헤테로가 보일 법한 가장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덮쳐 오는 두려움에 황급히 다시 고개를 떨궈야 했다.
“네. 진짜 진짜 아니에요. 완전 착각이었어요.”
침묵이 무거워진 공기를 감싸고 돌았다. 한참 동안 말을 잃었던 강재하가 하하, 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조소했다.
“게이들은 다 그래?”
“……네?”
연우가 되물었다. 강재하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 올리며 독설을 뱉기 시작했다.
“그러면 날 얼마나 좋아한 건데. 한 달? 아니 두 달은 돼? 잠깐 좋아하고, 또 바로 다른 남자 만나고…… 이젠 그 사람이 좋다고? 사람이 왜 그렇게 가벼워?”
게이들은 다 그렇냐는 말이 연우를 아프게 찔렀다. 자신은 한순간도 가벼웠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오해하게 놔두는 편이 현명했다.
“어, 그, 게이들이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저만 그래요. 저 완전 금사빠거든요.”
강재하가 순간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대충 봐도 주먹이 참 컸다. 저걸로 맞으면 되게 아플 텐데…… 연우는 선배에게 얻어맞는 상상을 하며 어깨를 옹송그렸다.
“넌 지조도 없어? 나 봐. 얼굴 한번 안 보고도 계속 좋아했잖아!”
그런데 강재하의 말이 어딘가 이상했다. 연우에게 엉덩이가 가볍다며 화를 내더니, 제 지고지순함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정말 순정남이기라도 한 줄 알겠네. 연우는 부아가 치밀어 턱을 빳빳이 들고 따졌다.
“아니 뭐 어떡하라고요. 계속 형 좋아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그리고 지금 와서 말인데, 형 되게 변태 같은 거 알아요?”
“뭐, 뭐…… 변태?”
재하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평생 눈 높아 보인다, 고상하다, 범접하기 어렵다…… 이런 말만 듣고 자란 그에게 변태라는 오명은 씻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럼 그게 변태지, 정상인가? 좀 정상적인 연애를 하든가. 원래 남자는 몸 가는 데 마음 가는 게 정상이죠. 무슨 얼굴 한번 안 보고…….”
강재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상대가 움직이자 놀라 버린 연우는 말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다.
“너, 너…… 벌써 그놈이랑 잤어……?”
“아니…… 그게 얘기가 왜 그렇게 돼요?”
당황한 연우가 말끝을 흐리며 되물었다.
“네가 방금 그랬잖아. 몸이 가서 마음이 간다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직…… 이익, 이걸 내가 왜 대답해야 돼?!”
연우는 별걸 다 추궁하는 상대의 태도에 점차 피곤을 느꼈다. 몰아가듯 성향을 따져 묻더니 이제는 아예 누구를 좋아했냐는 둥, 섹스 라이프는 어떻냐는 둥 과도한 간섭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저 오만한 남자가 자신을 헐뜯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어떻게든 이 인간을 내쫓아야겠다. 호시탐탐 내보낼 기회만 엿보는 연우를 보며 강재하가 믿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럼, 나랑 잘래?”
잠깐, 방금 뭐라고 했어.
연우는 몇 초 동안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바닥만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점차 위를 향했다. 곧 그의 눈이 바둑알처럼 검고 깊은 재하의 눈과 마주쳤다.
“뭐……라고요?”
게이 옆에 있어서 그까지 타락한 걸까? 자기는 순수한 사랑을 했다며 고결한 척 위선을 떨던 남자가 내뱉었다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말이었다.
“몸 가는 데 마음 간다며. 그럼 나랑 자면, 어떨 거 같아?”
“……허.”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이 강재하의 탈을 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남자 후배가 자신에게 성적인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자빠뜨릴 궁리부터 하다니. 그 결벽증에, 연애에 있어서는 맹하다 못해 순수하던 남자는 어디로 간 걸까. 호모포비아는 실은 호모일 확률이 높다는 속설이 설마 진짜였던 걸까.
열감이 오르며 귓불까지 뜨거워지는 느낌이 생생했다. 손끝이 조금씩 떨려 왔다.
“왜요. 남자랑 하면 어떨지 궁금해요?”
“궁금해서 남자랑 자는 또라이도 있어?”
“남자랑 자는 게, 뭐 어떤 건지나 알아요? 할 수는 있고? 하다 토하는 거 아냐?”
“네가 가르쳐 주면 되잖아.”
연우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상대를 바라봤다. 질 나쁜 농담이길 바랐지만, 강재하의 얼굴에는 웃음기도, 비열함도, 그리고 혐오의 감정도 없었다. 무슨 생각인지 읽을 수가 없어 더욱 절망스러웠다.
남자랑 섹스 파트너를 하겠다고 덤비는 헤테로는 난생처음인데, 그게 하필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그리고 그 남자는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는 여자까지 따로 있었다. 와, 도대체 나한테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설마. 남자랑 자면 사고 칠 걱정은 없어서 그러는 건가.
강재하만큼 집안이 좋으면 좆을 함부로 놀리기가 무서울 만도 했다. 20년쯤 전, 토일 그룹 방계 쪽 아들이 엄한 여자애를 임신시켜 결혼했다가 후계 구도에서 제외됐다는 일화는 연우도 알 정도로 유명했다. 연우가 그 일화를 떠올리며 조소했다.
“한번 잤다가 까이면, 쪽팔려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그럴 리는 없을걸.”
그 와중에도 강재하는 자신만만했다.
“아, 이거 혹시 협박인가? 거절하면 에타 같은 데 1X학번 윤연우는 게이다! 이런 글이라도 올라오는 거예요? 그러면 한번 대 주고.”
“그딴 짓은 안 해.”
“참 고맙네요. 저한테도 거부권은 있죠? 싫어요.”
강재하는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연우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입맞춤으로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고,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상대가 너무나도 야속했다.
그때 문득, 어떠한 계시 같은 깨달음이 왔다. 지금은 윤연우를 비난할 때가 아니었다. 윤연우가 게이고, 자신을 좋아해 왔다는 걸 깨달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자만했던 거였다. 자신만 손을 내밀면 쉽게 이루어질 관계라고 생각한 건 지나친 오만이었다. 자신은 지금 그 흔한 사랑 고백조차 하지 않은 채 상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재하는 다시 도전해 보기로 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는 유명한 광고 카피도 있지 않은가. 쉽게 움직인 마음이라면 되찾아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원했던 것을 가지지 못했던 적이 없었다.
“아니야, 순서가 틀렸어.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어.”
강재하는 계획 없이 움직이고, 두서없이 말을 내뱉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언젠가 만날지 아닐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데이트 코스 답사를 다녀오고 선물, 고백, 대사까지 완벽하게 준비할 정도로 철두철미한 인간형이었다. 그에게 프러포즈를 받는 여자는 그게 누구든, 자신이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된 황홀감에 휩싸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예측불허의 감정은 그를 다른 사람처럼 변모시켰다. 한밤중에 몇 번이고 행패를 부리게 했고, 질투에 눈이 멀어 유치한 짓을 서슴지 않게 했다. 급기야는 고백보다도 이르게 섹스를 하자는 끔찍한 말까지 했다. 사춘기 중학생보다도 더 서투른 행동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말간 얼굴을 찬찬히 훑어봤다. 닿고 싶어 미칠 것 같던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천 번이 넘게 스스로의 감정을 부정했지만 마주 본 순간 모든 게 명확해졌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 사람이야. 감정이 넘쳐흘러 입 밖으로 흘러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널 좋아해.”
반지도, 이벤트도, 꽃도 없었다. 이렇게 준비 없이 고백을 하게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원래 사랑이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재하는 윤연우의 첫사랑이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순간부터, 조금도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제가 고쳐 준 가로등 밑에서 다른 남자와 붙어 있는 걸 봤을 때조차 분노와 함께 미약한 환희가 피어올랐다.
죽을 때까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윤연우가 은경이가 아닌, 자신을 좋아했다는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을 땐 마약을 한 듯한 환희가 찾아왔다. 이런 걸 기적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 이 세상의 기적은 모두 멸망해야 했다.
“처음에는 내가 찾던 사람이랑 닮아서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야. 그냥 네가 좋아.”
“미쳤……어요?”
연우가 경악으로 눈을 홉떴다. 재하는 자신의 고백을 듣는 상대의 얼굴에 기쁨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했다. 하지만 희망은 있었다. 쉽게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가는 마음이라면, 노력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 되돌아오기만 한다면 그 마음을 잡아 두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응. 그런 것 같아.”
재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삶에서 이렇게까지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이게 미친 게 아니라면 뭐겠어. 그는 인생의 첫 일탈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니까 다시 날 좋아하도록 해.”
그러나 진심 어린 고백은 상대를 조금도 감동시키지 못했다.
“지금 그게, 믿으라고 하는 말이에요?”
처연하게 내리뜬 연우의 눈가가 점차 붉게 물들어 갔다. 연우는 제 목소리가 목구멍에 바이브레이터를 넣은 것처럼 떨린다고 생각했다. 어느 구멍에도 꽂아 본 적은 없지만 아무튼 그랬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나한테 도와달라고 해 놓고…… 은경이는 또 뭔데. 그래 놓고 지조 없다고 날 비난해……?”
지금까지 그는 가까운 사람에게 감정을 직설적으로 쏟아부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불편한 상황은 미리 피하고, 누군가가 헛소리를 하면 못 들은 척 잘 도피하며 살아왔으니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러운 수작을 당하기 전까지의 얘기였다.
“여자 꼬시는 법 알려 달라고 난리를 치다가, 딴 여자 때문에 멱살을 잡더니, 이제는 갑자기 게이가 되셨다……?”
격양된 추궁에 강재하가 조목조목 틀린 부분을 짚어 줬다.
“은경이 좋아한 적 없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잖아. 다 오해였어.”
“그럼 인스타 그분은요. 연락 안 해요? 정리하긴 했어요?”
“……아.”
마치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듯한 강재하의 반응에 연우는 실소를 내뱉었다. ‘그녀’와 크리스마스에 만나기로 한 약속은 아직 유효했다. 강재하는 지금 다른 여자에게 다리 하나를 걸쳐 놓은 채 저를 유혹하고 있었다.
은경이한테 관심이 없었다는 말 역시 믿을 수 없었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신뢰가 가지 않는 말은 ‘너를 좋아한다’는 고백이었다.
“정리하려고 했어. 연락 안 한 지 오래고, 안 만날 거야.”
연우가 자신의 고백을 믿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강재하의 패착이었다.
“사진만 보고 스토킹할 정도로 여자에 환장하면서, 이제 와서 되지도 않는 게이 행세라…… 여기서 믿으면, 저만 바보 되는 거죠.”
“연우야.”
연우는 고슴도치처럼 빳빳하게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인류의 조상은 원숭이고, 지구는 둥글고, 강재하는 헤테로였다. 그 당연한 명제 앞에서 재하의 고백은 힘을 잃었다.
연우는 잠시의 유희, 혹은 착각에 불과한 감정 때문에 인생을 불구덩이에 내던질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또한 상대의 감정이 거둬졌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도 않았다.
“형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게이라니까 신기해서 한번 자 보려고 들이대다가, 금방 아, 별로네, 하고 다시 여자 친구 사귀는 놈들.”
“그런 거 아니야.”
“한번 대 주면, 그런 헛소리 그만할래요?”
연우가 자신의 티셔츠 아랫단을 잡아 당장이라도 벗어 던질 듯이 올렸다. 옷자락 사이로 하얗고 납작한 배가 드러났다. 재하는 연우의 손목을 잡아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제 고백을 믿지 않는 것도, 상대가 닳고 닳은 남자처럼 보이는 것도 모두 참기 어려웠다.
“넌 남자 후배 한번 따먹어 보려고 내가 이 짓거리 할 것 같아 보여?”
“그럼 뭐요. 진짜 나를 좋아하기라도 한다고?”
연우는 아예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재하는 그런 후배를 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떠한 말도 지금의 그에게는 닿지 않을 것 같았다. 재하는 손을 뻗어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상대는 움찔하고 한 발자국 뒤로 도망갈 뿐이었다. 뻗은 팔이 쓸쓸하게 거두어졌다.
“손대지 마!”
“연우야.”
타이밍도,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충동적인 고백과 고백보다 앞선 섹스 제의, 최근 은경을 사이에 두고 최악으로 치달았던 둘의 관계, 그리고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인스타 썸녀까지. 연우는 갑작스러운 상대의 고백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상대가 자신을 가지고 나쁜 장난을 치고 있다고밖에는 여길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앞으로 그냥 모르는 사이처럼 지내요.”
“……뭐?”
그렇기에, 고백에 돌려줄 말은 절연 선언뿐이었다.
“과제나 같이 하고, 마주치면 인사나 하면 되지. 뭘 섹스 파트너까지 하려고 들어요.”
“못 믿는 건 이해해. 하지만, 나는…….”
“아니에요. 믿어요.”
연우가 상대의 말을 중간에 막아 버렸다.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들어 줄 만한 기운은 남아 있지 않았다. 초여름인데도 집 안에는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좋아해 줘서 고마워요. 그치만 미안한데, 아까 말했듯이 저는 이제 선배 안 좋아해요.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거든요.”
“…….”
“그러니까, 지금 선배는 나한테 차인 거야.”
연우는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강재하를 지나쳐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문손잡이를 열고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이만 제집에서 나가 달라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기름칠이 되지 않은 쇳덩어리가 어긋나며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그게…… 내 고백에 대한 네 대답이야?”
강재하는 밖으로 나가는 대신 굳은 얼굴로 한참 동안 연우를 응시했다. 연우는 그보다 더 결연한 표정으로 강재하의 시선을 받아 냈다. 바늘 한끝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무표정이었다. 연우로서는 최대치의 분노를 표현한 것이었다.
“진짜, 이제 난 아닌 거야?”
“네.”
연우는 아예 현관문을 열고 바깥을 향해 턱짓했다. 빨리 꺼지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상대가 미동도 없자 그는 바로 옆에 있는 휴지, 먼지떨이, 에코백 같은 것들을 집어 던졌다. 그 와중에도 맞아도 전혀 타격 없는 물건들을 던지는 게 정말 윤연우다웠다.
“안 나가면 경찰 부를 거예요.”
그제야 강재하가 발걸음을 옮겼다. 상대가 자신을 스쳐 나감과 동시에 연우는 현관문을 닫고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많은 감정을 겪어서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이윽고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문에 기댄 몸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농락당한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를 좋아했던 모든 시간이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이 모든 사건은 다 자신이 지나치게 상대를 좋아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좋다고? 나돈데. 그럼 한번 잘까? 딱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면 여러모로 편리했을 거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화내고, 좌절하고, 실망하고 눈물 흘릴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냥 한번 자고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절대로 그럴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걸까.
강재하를 내쫓은 뒤 새벽 6시가 될 때까지 눈은 말똥말똥했다. 잠이 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날 좋아했다고? 언제부터? 아니, 왜? 그럴 리 없잖아? 꼬리를 무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이곳에 없었다. 이 와중에도 혹시나, 하는 희망이 가슴에서 꿈틀대자 스스로가 싫어 견딜 수 없어졌다.
다음 날은 영상 광고 수업도, 조별 과제도, 동아리 총회도 없는 날이었다. 일부러 약속을 잡지 않는다면 강재하를 만날 이유가 없다는 소리다. 경영대 건물은 사회과학대학과 버스 정류장 두 개만큼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수업이 겹치지 않는 한 강재하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 * *
차였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좋아졌다는 잔인한 말로.
재하는 절망과 패배감에 사로잡힌 채 노트북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해야 할 과제가 한가득이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윤연우가 그렇게 가벼운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는 나를 좋아했는데, 이제는 아니라니.
그러나 상대를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그는 자신도 얼마 전까지 다른 여자를 찾겠다며 윤연우한테 조언까지 구했던 신세였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그래서 있는 건가 싶었다. 수많은 영화를 보고도 체감하지 못했던 연애에 관한 속설들이 이제는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이제는 포기해야 하는 건가.
당연히 포기해야 했다. 남자끼리의 연애라고 해서 남녀와 다를 건 없었다. 한쪽이 아니라고 말하면, 아닌 거다. 그래도 더 억울한 느낌이 드는 건 역시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기에, 거절당할 리가 없다고 여긴 탓이다.
그러나 애초에 평범하게 살고 있던 놈한테 입술을 들이댄 건 저쪽이었다. 멀쩡한 남자를 게이로 만들어 놓고는 그새 다른 남자한테 마음을 주다니. 무책임하기가 코피노를 낳고 도망친 아버지 급이었다.
분노와 창피함에 휩싸인 채 부들거리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서용준이 약속도 없이 불쑥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용준은 뭐 하는 짓이냐는 재하의 눈빛을 무시한 채 현관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어어, 그냥 너랑 술이나 한잔하려고.”
술? 강재하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서용준을 응시했다. 제가 술을 못 마신다는 건 세상 그 누구보다 용준이 잘 알았다. 친구는 너는 먹지 마, 나만 먹을 거니까. 하고 선언하듯 말하더니 가져온 소주 두 병과 새우 과자 한 봉지를 식탁 위에 펼쳐 놓았다.
저 혼자 먹을 거면 뭐 하러 여길 온 거지? 재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저 친구가 저럴 정도면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내색하지 않았다.
서용준은 혼자 한 병 가까이를 비워 낼 때까지 쓸데없는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도 중간에 한 번씩 요즘 뭐 힘든 건 없고? 라는 질문을 추임새처럼 끼워 넣었다. 결국 재하가 네가 계속 똑같은 걸 물어보는 게 제일 힘들다고 말하고 나서야 반복되던 질문이 멈췄다.
“그, 있잖아. 내가 그 인스타 여자하고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재하에게는 더 이상 관심 없는 주제였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다니,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강재하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서용준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 그 말 취소할게. 그냥 그 여자랑 만나면 안 되냐?”
“갑자기 왜.”
서용준이 눈을 굴리며 그, 그냥. 하고 다른 곳을 응시했다. 재하가 별 싱거운 놈 다 보겠다는 듯 쳐다보더니 빈 잔에 술을 한잔 따랐다. 술이라도 마시면 억지로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친구의 행동에 오히려 소주병을 들고 찾아온 서용준이 더 놀랐다.
“뭐야, 너 마시게? 기절할 거잖아.”
“집인데 기절하면 뭐 어때.”
그렇게 연거푸 세 잔을 마시고는 고대로 쓰러졌다.
서용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쓰러진 친구를 이불 위에 누였다. 누가 봐도 실연당한 놈의 모습이었지만,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절대 묻지 않기로 다짐했다. 얼마 전에 전화를 해서 키스를 했다느니, 어쩌니 헛소리를 하던 친구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재하는 친구에게 털어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용준도 자신이 괜한 짓을 했구나, 싶어 재하를 바닥에 누이고 대충 이불을 덮어 준 뒤 집을 벗어났다. 당연히, 용준은 친구가 얼마 후 잠에서 깨어나 사고를 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강재하는 풀린 눈으로 휴대폰을 들고 익숙한 이름을 찾았다. 그는 벌써 32통째 윤연우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전화는 33통 만에 연결됐다. 상대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만 이어 갔다.
“책임져……, 윤연우……”
- ……술 마셨어요?
“네가 꼬셔 놓고…… 먹튀 하면 다야?”
- 취했으면 자요. 전화 끊을게요.
“네가 나한테 키스했잖아…… 엠티 날 밤에.”
- ……네?
“잊어버린 거야, 잊어버린 척하는 거야……?”
- ……거, 거짓말하지 마요. 끊을게요.
재하가 전화를 걸기 전까지 연우는 다른 수업의 조별 과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강재하가 수십 번 걸어오는 전화를 무시하려 애썼지만, 상대는 받을 때까지 전화를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그래서 하릴없이 받은 전화였다. 상대방은 엉망으로 취해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 왔다. 거짓말이라고 몰아붙이고 끊었지만 그렇게 넘기기에는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꿈속에서 했다고 생각했던 그와의 키스가 여전히 생생했다. 그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던 것이다.
연우는 이제야 강재하가 왜 갑자기 남자한테 몸이 동해서 매달리는지 알 것 같았다. 헤테로 주제에 갑자기 자자고 달려드는 게 이해가 안 갔었다. 그러나 그날 키스에서 꽤나 몸이 동했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천재지변 같은 사고 탓에 남자랑 자는 것도 가능하다는 그릇된 자신감을 얻게 된 거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이렇다 할 성 경험도 없다고 했었다. 그러면 꼴린 상대에게 충분히 한번 자자고 덤빌 만하다. 결국 이번 역시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었던 것이다.
‘그냥 죽자. 다 내 탓이다…….’
다음 날에도 연우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수업 내내 집중을 하지 못했고, 그 탓에 김상진에게 엉망인 필기를 빌려야 하는 비극까지 발생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오늘의 마지막인 카피라이팅 실습 강의 시간이었다. 뇌는 우주로 날아간 지 오래였지만 몸은 착실하게 302호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깐깐한 카피라이팅 교수는 수강 인원을 늘려 달라는 김상진의 요청을 거절했다. 덕분에 연우는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수업을 듣는 처지였다. 조별 모임도 없는 개인 평가 실습수업이었기에 새롭게 사귀거나 수업에서 친해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낮은 목소리가 옆에 자리 없죠? 하고 물었을 때 그는 쳐다도 보지 않고 네, 하고 대답했던 것이다.
하지만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와중에도 목소리가 어딘가 섬뜩할 정도로 낯이 익다고 느꼈다. 어제 뇌 내에서 반복 재생되던 남자와 음성이 비슷했다. 깨달음보다 앞서 몸이 반응했다. 온몸에 조금씩 소름이 돋았다.
“어제 못 잤어?”
“……어?”
“얼굴이 푸석한데.”
헉, 하는 소리가 폐부를 뚫고 터져 나왔다. 이제 막 강단에 선 교수가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 교수가 이쪽을 째려보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절대로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 강의실에 앉아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선배 강의실 잘못 찾았는데요.”
“카피라이팅 실습 아냐? 이 수업 온 거 맞아.”
“이 수업을 듣는다고요? 종강 2주 남기고? 인제 와서?”
“청강하러 온 거야. 교수님 강의가 훌륭하다는 소문을 들어서.”
잘도 그러겠다. 대기업 AE를 거쳐 카피라이터로 여러 히트작을 냈다는 교수는 수업 방식이 극악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강의 도중 갑자기 학생을 지목해서 그 자리에서 카피를 만들어 내라고 닦달을 하곤 했다. 그리고 카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구리다’는 악평을 서슴지 않았다. 연우도 몇 번이나 피해자가 됐다. 이미 강의 평가에 최하점을 주려고 단단히 마음먹은 차였다.
“교수님한테 이를 거예요. 강의실에 등록금 도둑 앉아 있다고.”
“총학생회장 감이네. 근데 어떡하지? 교수님께는 이미 허락받았어.”
연우가 불신의 눈빛으로 쏘아보자 강재하가 자신의 노트북 화면에 메일을 띄워 보여 줬다.
[교수님께. 안녕하십니까, 저는 광고홍보학과를 복수 전공하고 있는 경영학과 1X학번 강재하라고 합니다. 교수님이 기존에 쓰셨던 동광 소화제, 구름 보리, 화정화장품 수분 크림 광고 카피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학기에 카피라이팅실습 수업을 꼭 듣고 싶습니다. 미리 교수님의 수업 방식을 배우고자 청강을 요청하오니...]
“허.”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다 교수를 하는 건 아니지만 교수들은 죄다 자존감이 높았다. 이렇게까지 극렬하게 빨아 주는 메일에 거절의 답장을 할 교수는 아마 한 명도 없을 거다. 김상진도 진작에 이 메일 스킬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수강 인원 한 명 늘리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연우는 탄식했다.
강재하가 간밤의 난장 이후 재회 장소로 강의실을 고른 건 전략적으로 훌륭한 선택이었다. 교수의 눈앞에서는 상대방한테 나가라고 할 수도 없었고, 고라니처럼 뛰쳐나갈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말소리가 계속 들리자 교수가 힐끔거리며 이쪽을 쳐다봤다. 연우는 말싸움을 포기하고 노트북을 켰다. 그러고는 PC 메신저로 강재하에게 대화를 신청했다.
나이제 이런 짓까지 해요? 미쳤어요?오후 4:14
1기 강재하강의 들으러 왔다니까.오후 4:14
나진짜 왜 이래요.오후 4:15
1기 강재하몰라서 물어?오후 4:15
나말 걸지 마세요.오후 4:15
1기 강재하대화는 네가 걸었는데.오후 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