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마지막 퍼즐
시작은 마카롱에서부터였다.
말도 안 되는 가설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재하는 자신의 창대한 상상력에 아연해졌다. 삼류 드라마도 아니고, 사랑하는 연인이 과거 찾아 헤매던 여자와 겹쳐 보이다니.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윤연우가 그 여자와 닮았다는 생각은 처음 봤을 때부터 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재하 역시 전 세계에 내로라하는 미남뿐 아니라 미녀들을 닮았다는 얘기를 신물 날 정도로 많이 들어 왔다. 아름다움이라 하면, 원래 인종과 성별을 초월한 정형화된 것이니까.
그런데 왜 자꾸,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까.
재하는 애드스톰이 MT를 떠났던 날을 회상했다. 그때는 이미 그녀가 서서히 희미해지고 윤연우에게 모든 관심이 쏠려 있던 시기였다. 애써 그 감정을 부정하면서도 절대 외면하지 못했다.
은경이와 윤연우 사이에 묘한 기류가 돌고 있다고 착각하고, 먹지도 못하는 술을 마셨다. 유치한 질투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소주 두 잔에 필름이 끊어졌지만 정신을 잃기 직전의 기억은 선명히 남아 있었다.
김상진이 앱으로 윤연우의 성별을 변환시킨 사진을 보여 줬었다. 그때 본 사진 속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그녀’와 닮아 있었다. 아니, 그냥 그 사람 자체였다. 그러나 그래서 뭐 어떻다는 말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갓 깨어난 병아리처럼 눈앞의 후배를 맹목적으로 좇게 됐다. 그녀와 얼굴이 닮아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누굴 닮았다는 이유로 사람을 좋아할 정도로 단순한 바보는 아니었다.
왜 지금 와서 그 사진이 생각나는 걸까.
하지만 이제 와서 뒤늦게 김상진이 보여 준 사진을 떠올리는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고작 마카롱 때문이었다. 처음 윤연우가 동아리방에서 마카롱을 먹는 걸 봤을 때는 무언가 착각한 게 아닐까, 하고 여상하게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연우는 그 이후에도 재하의 눈앞에서 은경이 선물로 준 마카롱을 몇 개씩이나 집어 먹었다.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라는 말까지 해 가면서 말이다. 그 모습은 재하의 마음속에 강한 의구심을 가져다줬다.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이 절대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몇 가지 있다. 마카롱도 그 가운데 하나다. 마카롱의 주재료는 아몬드 가루다. 강재하는 어렸을 때, 프랑스 여행에서 형이 먹던 마카롱 한 입을 몰래 먹었다가 현지 병원에 실려 간 적이 있었다. 운이 없었으면 타지에서 객사했을 수도 있었다.
온몸에 발진이 일어나고, 기도가 부어 목구멍이 꽉 막혔던 괴로운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러나 그 마카롱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마카롱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제가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그러나 같은 알레르기가 있다던 연인은 재하가 말리기도 전에 마카롱을 몇 개씩이나 집어 먹었다. 그때 재하의 안에서 윤연우를 향한 최초의 의심이 피어났다.
알레르기가 없는데 거짓말을 했다고? 도대체 왜.
그는 윤연우가 처음 알레르기 이야기를 꺼냈던 식당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덕분에 재하도 병원에 실려 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신기한 우연이라고만 생각했지만 만약 거짓말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렇다는 건, 자신이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데…….
윤연우와는 동아리와 수업 때문에 얼굴 두세 번을 마주친 게 다였다.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나 보다, 하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많았다.
만약 강재하에 대한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면,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선배 견과류 알레르기 있지 않아요? 하고 대놓고 물었으면 됐을 간단한 일이었다.
별것도 아닌데 왜 거짓말을 했을까. 아마 ‘강재하라는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왜.
그 이후로 재하는 종종 윤연우에게 작은 견과류가 들어간 초콜릿 등을 급여(?)하며 반응을 살폈지만 연인은 멀쩡했다. 처음부터 알레르기 따위는 없었던 거다. 그렇게 ‘마카롱 미스터리’는 미제 사건으로 재하의 머릿속에 남았다.
그다음부터는 윤연우가 처음부터 이상할 정도로 재하의 취향과 잘 맞았던 것마저도 의심스러워졌다. 떡볶이, 헤르난 바스, 현대 미술 작가, 프랑스 영화 감독, 수십 년 전에 나온 절판된 책, 커피 취향, 좋아하는 인테리어 소품까지.
윤연우는 어떨 때는 재하가 처음 털어놓는 얘기마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대꾸하곤 했다.
한번 시작된 의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윤연우를 볼 때마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듯한 찜찜한 감정이 들었다.
어…… 이거 그건가. 의처증?
재하는 특별한 사람과의 신뢰 관계를 가장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연인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게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그리고 연인을 의심하는 자신마저 싫어졌다.
재하의 외모와 배경만 보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의 여자들이 떠올랐다. 윤연우는 나를 왜 좋아할까. 언제부터 나에 대해 알고 있던 걸까, 혹시 이 사람도, 그들처럼 의도적으로 나한테 접근한 걸까.
윤연우가 그럴 리 없어.
하지만 마카롱으로 사람을 의심하는 건 과대망상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윤연우가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 이유가 있는 거겠지.
재하는 언젠가는 자신에게 다 말해 주겠거니 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섣불리 캐물었다가 사이가 완전히 벌어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윤연우가 자신에게 보여 주는 신뢰와 사랑의 눈빛은 꾸미거나 연기할 수 없는 ‘진짜’였다. 그것만으로 그들의 사랑은 지속할 가치가 있었다.
뭐가 됐든, 윤연우는 강재하를 좋아한다. 다른 목적으로 접근한 것만 아니면 되는 거다.
그러나 윤연우가 가지고 있던 비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본가로 돌아온 지 며칠 뒤 저녁, 강재하는 인스타그램 앱에서 이상한 게시물을 발견했다. 팔로우를 끊지 않고 놔뒀던 ‘그녀’의 계정에 아주 오랜만에 게시물 하나가 올라왔다.
자신이 구해 주려고 애썼던 절판된 책,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올라와 있었다. 재하는 순간적으로 화면을 캡처했다. 게시물은 몇 분도 되지 않아 삭제되었지만 그의 사진첩에 게시물이 박제됐다.
‘이건…… 내가 윤연우한테 준 책인데.’
그녀의 계정에, 자신이 윤연우에게 선물한 책이 올라와 있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재하는 캡처한 사진을 확대해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그녀가 다른 곳에서 책을 구한 걸까? 아니다. 그녀가 올린 사진 속 책은 자신이 윤연우에게 선물한 것이 확실했다. 살짝 접힌 모서리 각도, 제목에 그어져 있던 옅은 펜 자국까지 완벽하게 일치했다.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는, 표지에 남아 있는 하트 모양 스티커였다.
그럼…… 윤연우가 그녀에게 책을 준 건가? 둘이 아는 사이인가?
재하는 일단 상식적인 가능성부터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뇌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숨겨져 있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들어맞는 순간, 모든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윤연우가 그 사람이었던 거였어.
왜 지금까지 몰랐던 걸까. 남자와 여자, 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이미 내려져 있던 답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재하가 윤연우를 좋아하고 있었음에도 처음에 자각하지 못했던 이유와 같았다. 후배가 남자라는 이유로 감정을 깨닫지 못했으면서, 어리석게도 또다시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렇게 눈길이 간 거였나.
제 머릿속에 들어온 것처럼 잘 통하던 것도, 이상할 정도로 많은 걸 알고 있었던 것도, 그리고 윤연우가 ‘그녀’에 대해 얘기하면 대화를 피했던 것도. 다 두 명이 같은 사람이라서라면 설명이 됐다. 그가 좋아했던 사람이 바로 그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 이게 대체 무슨…….”
때마침 윤연우로부터 전화가 왔지만 재하는 받을 수 없었다. 그에게서 무려 일주일 만에 오는 연락이었건만 지금은 반갑지 않았다. 윤연우가 전화한 의도가 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연인이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을까 봐, 확인하려는 거겠지.
“……아니, 휴대폰 안 보고 있었어.”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아직 머릿속에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윤연우에게 계정을 실수한 얘기를 꺼내면, 그가 쉽게 헤어짐을 선택할 것 같았다.
진실이 두려워 마주 보지 않으려 하다니, 내가 이렇게 한심한 놈이었던가. 재하는 자조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불면의 밤이었다. 윤연우는 혹시, 여기저기 그런 사진을 뿌리고 살아온 걸까. 나는 그가 낚은 수많은 남자들 가운데 하나였던 걸까. 애초에, 인스타로 친구를 신청하고 나한테 접근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재하는 간헐적으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그의 꿈속에서 윤연우는 사진을 미끼로 남자를 유혹하고, 게이 앱에서 만난 남자들과 밤새 뒹굴었다. 그의 집에 가득 차 있던 서랍 속 러브젤, 그리고 랜덤 사이즈로 구비된 서랍 속 콘돔 상자가 꿈속에 여러 차례 등장했다.
그럼에도 재하는 연우가 자신의 입으로 진실을 고백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세컨 계정으로 자신에게 ‘보고 싶다’는 떠보는 듯한 연락을 해 오기 전까지는 분명 그럴 심산이었다.
* * *
“……알고…… 있었어?”
강재하가 다 알고 있었어.
도대체 언제부터? 역시 SNS 게시물을 잘못 올린 날이었을까. 아니면 김상진이 성별 전환 앱으로 사진을 보여 줬을 때부터? 혹시, 어쩌면…… 처음부터?
“다 알고서…… 나한테 사귀자고 한 거야? 언제부터 알았어?”
“지금, 그게 제일 중요해?”
연우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그가 모든 걸 알고서도 자신을 만나 왔다면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 말은 즉, 자신을 거미줄처럼 옭아매고, 벌을 주기 위해 이 연극에 가담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따질 수 있는 이유가 된 ‘보고 싶다’는 답장도,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는 연우라는 걸 알고서 보낸 거였다. 그렇기에 강재하는 저렇게 자신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러니까 이 관계에서, 모든 걸 사과하고 무릎을 꿇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신뿐이었다. 온갖 잘못을 저지른 주제에 꼴 같지 않게 질투하고, 상대를 추궁하다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재하는 고개를 푹 숙인 연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연인의 눈에 깃든 물기와 죄책감, 그리고 조금씩 떨리는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자신이 말도 안 되는 공상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 했던 일말의 희망조차 지워 버리는 표정이었다. 재하는 그저 공허하게 웃었다.
“이러면, 우리 사이에서 장난을 친 게 나야, 아니면 너야?”
“……미안해.”
그러나 너무 늦은 사과는 상대에게 어떠한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너, 여자인 척 사진 뿌리고 다녀? 아무 남자나 걸려라 하면서.”
“……아니야. 그런 건 처음이었어.”
연우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처음, 이라는 단어에 강재하는 아예 코웃음을 쳤다.
“왜, 아예 내가 첫 남자라고 하지 그래?”
“…….”
다 처음 맞는데. 처음이었는데…….
거짓말쟁이로 낙인이 찍혀 버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상대가 알아채기 전에 말했어야 했다. 때늦은 후회는 이제 와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더라도, 자신은 다시 비겁하고 소심한 남자가 되어 진실의 틈도 보여 주지 못할 게 뻔했다.
“애초에 나한테 접근한 이유가 뭐야?”
“……그냥, 이상형……이고…… 좋아서…….”
“아아. 좋아서.”
연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연인의 혐오스럽다는 듯한 눈빛을 받아 낼 용기가 없었다.
“내 인스타는 어떻게 알았어. 선배 누가 알려 줬는데? 아…… 동아리에 돈 많은 선배가 휴학했다니까 관심이 생겼던 건가.”
“그런 거…… 아니야…….”
강재하는 사실보다 더 부풀려 그를 오해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강재하가 학교 선배라는 사실을 알고 접근한 건 아니었다. 그를 카페에서 만났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말해 봤자 믿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을 더 징그럽게만 여길 것만 같았다. 얼굴만 보고 스토킹한 것보다는, 차라리 동아리 선배 계정을 발견했다고 하는 게 나았다.
“우리 부모님이 누군지는 또 어떻게 알았어. 뭐, 돈이라고 뜯고 싶었던 거야?”
연우는 물기 어린 눈을 들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돈을 뜯다니, 그건 뉴스에서나 보는 로맨스 스캠 같은 거 아닌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지만 꽃뱀 취급을 하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무슨 돈을 노리고. 그건 너무…….”
“아아, 맞다. 잊고 있었네. 그러려고 했었지.”
재하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했다.
“네가 보낸 DM에 네가 직접 답장했잖아. 휴대폰비 안 물어 주려고.”
“그, 그건 선배가 먼저 제안해서…….”
“아, 그랬지 참. 너는 날 속이려고 한 적이 없는데, 다 내 탓이지.”
연우는 하얗게 질린 채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사죄의 말 말고 다른 말을 해 봤자 화를 키울 불쏘시개가 될 뿐이었다.
화가 나면 이성을 잃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고 더 침착해지는 사람이 있었다. 강재하는 후자였다. 연우는 그가 이렇게 이성적으로 따지지 않고 차라리 주먹으로 자신을 몇 대 패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어제 보낸 그 메시지는 뭐야. 뭐? 보고 싶어?”
“그건, 내가 한 게…….”
연우가 억울한 마음에 진실을 말해 보았지만, 강재하는 형형한 눈으로 연우를 쏘아볼 뿐이었다. 어제의 메시지는 주진영이 보낸 거였다. 하지만 그 자그마한 진실이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니, 말하면 믿기나 할까. 연우는 변명을 포기했다.
“다 잘못했어. 그래……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 맞아. 친해지고 싶었어. 하지만 돈 때문은 절대 아니야. 이제 와서 뭘 숨기겠어.”
연우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은 어느새 말라붙었다.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눈물로 동정을 사거나 호소하는 인간쓰레기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걸 포기한 듯한 그의 태도는 상대방의 눈에 덤덤함으로 비쳤다. 재하는 더욱 차가워져 갔다.
“……더 할 말 없어? 다 인정한다고?”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미안해. 다 선배가 하자는 대로 할게.”
“하자는 대로라니 무슨 뜻이야.”
재하가 비틀린 입술로 웃었다.
“변명할 생각도 없고, 할 말도 없다?”
그의 입에서는, 지금껏 연우가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장 여기서 나가.”
연우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깨달았다. 누구도 명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완전한 끝을 의미했다. 바보 같은 연극의 종막이고, 누구도 읽지 않을 연애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연우는 차라리 씁쓸하게 웃었다. 울고 매달려 잡을 수 있다면, 삼 년을 밤낮으로 통곡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깨진 믿음은 되돌릴 수 없었다.
언젠가, 자신이 강재하의 고백을 믿지 못하고 그를 집에서 쫓아냈던 과거가 떠올랐다. 지금 자신이 정확히 반대의 처지에 있었다. 심지어 강재하는 그런 취급을 당할 이유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응당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는 자신과는 너무나 달랐다.
“……미안해.”
다 내가 망쳤어. 정말 미안해.
연우는 속으로 작별 인사를 건네고 힘없이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좋아했던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사치였다. 용서받을 방법이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다. 연우는 그대로 비척비척 걸어 현관을 나섰다. 집은 쓸데없이 넓어서, 방에서 출입문까지의 거리가 견딜 수 없을 만치 길었다.
등 뒤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자신의 사랑은 이렇듯 끝까지 비겁하고 이기적이었다.
이럴 거면, 애초에 만나지 말걸.
무거운 철제 현관문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연우는 그제야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다시 그를 볼 수 있을까, 취업이고 뭐고 동아리는 탈퇴하는 게 맞았다. 2년 정도 휴학을 하면 되지 않을까……. 원래 가려고 했던 교환 학생은 어떨까. 두서없는 생각이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올랐다.
빌라를 나서자 뜨거운 땡볕이 머리 위를 강타했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한 여성이 자신에게 다가와 괜찮느냐고 물었다. 멀쩡하게 걷고 있는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대로변으로 나설수록 숨이 점점 더 막혀 왔다. 습하고 더운 공기가 폐부로 훅, 들어옴과 동시에 연우는 그대로 아스팔트 위로 쓰러져 내렸다. 이상하게 세상이 빙글 돌았다. 손발이 저리고 눈이 아프다고 생각한 순간, 그대로 세상이 암전했다.
* * *
“날씨가 더워지면 더 심해질 텐데. 당분간 몸조심하셔야겠어요. 일주일에서 이 주일 정도는 푹 쉬세요.”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신고 덕분에 병원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의사는 저혈압과 더위로 인한 미주신경성 실신이라고 진단했다. 그나마 쓰러질 때 부딪힌 곳이 없어 다행이라고도 했다.
‘휴대폰이…… 없네.’
끔찍한 일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강재하의 집에 그대로 휴대 전화를 두고 나온 것 같았다. 휴대폰을 돌려 달라고 연락하느니 그냥 하나 새로 사는 편이 나았다.
퇴원을 하려면 보호자가 필요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사실 강재하가 떠올랐지만 곧바로 지워 냈다. 한 톨의 양심도 없는 생각이었다. 연우는 스스로가 어이없어서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저기, 휴대 전화를 잃어버려서요. 전화 한 번만 빌릴 수 있을까요?”
연우는 병원 직원에게 부탁해 카페 디 팔로아로 전화를 걸었다. 주진영은 아르바이트생이 휴대 전화도 없이 혼자 병원에 쓰러져 있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 혼비백산 뛰어왔다.
진영은 카페를 아는 친구에게 맡기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주 사장은 혼이 나가 있는 연우의 몰골을 보고 몇 번이나 무언가를 물으려고 입을 달싹였다. 그는 건강 상태 때문에 알바를 계속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연우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나 때문에 강재하랑 잘 안된 거야?”
“헤어진 건 맞지만…… 사장님 때문 아니에요.”
그냥 이건 다 저 때문이에요. 전부 다 들켰어요. 연우가 조용히 읊조리자 주진영이 입을 가리며 경악했다.
물론 진영이 조금도 밉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었다. 괜한 DM을 보내서 안 그래도 절망스러울 강재하의 화를 키웠으니 말이다. 하지만 주진영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강재하는 이미 모든 사태를 알고 그저 관망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저 선고를 얼마나 더 유예하느냐의 문제였다.
“사장님, 정말 죄송해요. 저 가족들이랑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제주도로 내려가려고요.”
“그래, 그래야지. 혼자 뭐 하려고…… 얼른 내려가.”
주 사장은 퇴직금 대신으로 쳐 주겠다며 연우의 병원비를 결제하고, 제주도까지 가는 편도 티켓도 끊어 줬다. 고작 세 달 일한 알바한테 퇴직금이라니. 그것도 후임도 안 구하고 그만두는데……. 연우는 꼭 정신을 차리고 취직 준비나 열심히 해서 나중에 주 사장한테 보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지금 당장은 그럴 힘도, 정신도 없었지만 평생 이렇게 폐인처럼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방학 끝나면 꼭 연락할게요. 올라와서 돈도 갚을게요. 너무 감사하고 죄송해요.”
“방학 때는 연락 안 하겠단 뜻이야? 섭섭하게시리.”
주진영은 ‘강재하에게 손절당한 사람들의 모임’, 줄여서 ‘강손모’를 만들면 어떻겠냐며 부적절한 농담을 했다. 잘 찾아보면 자격 조건이 되는 사람이 몇십 명은 있을 거라며. 연우는 눈물 섞인 눈으로 웃었다. 나쁜 농담에 웃기에는 아직 상처가 너무 컸다.
그렇게 연우가 세워 뒀던 방학 계획이 변경됐다. 서울에서 돈 벌고 공부하고 연애질하는 계획은 전면 폐기했다. 제주에 내려가서 요양이나 하고, 과외를 구할 수 있으면 구하고, 인터넷 강의도 들어야 한다. 강재하와의 추억이 넘치는 자취방에 혼자 있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엄마 나 아파. 의사가 요양 좀 하래. 오늘 제주 내려갈게.”
- 뭐? 너 또 밥 안 먹고 라면 처먹고 다녔지?
“아니야아. 저녁 6시 비행기 끊었어. 근데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알아서 들어갈게. 잠깐 연락 안 돼도 걱정하지 마요.”
어머니는 산 지 2년도 안 된 휴대 전화를 어디다가 팔아먹었냐며, 찾아오라고 잔소리 폭격을 퍼부었다.
“아니. 그 휴대전화는 절대 못 찾아. 그냥 새로 살게.”
제주 공항에 내리자 고향 특유의 짠 바다 냄새가 연우를 반겼다.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머지않은 곳에 있는 펜션으로 향했다.
“아들 왔냐. 마침 잘됐다, 그 1층에 있는 택배 좀 들고 올라와.”
“아빠아…… 나 아팠는데. 흑.”
물론 가족이 공항으로 마중을 온다거나, 도 지역 특산물로 만든 저녁 만찬 같은 걸 준비하리라는 기대는 눈곱만치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는가. 말이 ‘택배 좀’이지, 엘리베이터도 없는 1층 계단 아래에는 온갖 잡기가 박스로 10개도 넘게 쌓여 있었다. 연우는 투덜대며 택배 박스를 위층으로 옮겼다.
몸조리를 하러 고향에 돌아온 병약 미소년을 잡부 취급 하다니…… 연우는 가족의 덤덤함에 절망했다.
어머니 신영주 씨의 반응도 아버지 윤종범 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날 밤, 연우가 침대에 누워 실연을 곱씹으며 훌쩍이고 있는데 예고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집에 왔으면 펜션 청소라도 돕지, 그렇게 침대에만 자빠져 있냐?”
“엄마, 흑, 나 좀 가만 놔둬어…… 나 아파. 으어엉.”
“얼씨구. 또 이상한 드라마 봤냐, 왜 질질 짜고 있어?”
드라마를 본 게 아니고 찍고 왔습니다만…… 하지만 실연으로 우는 것보다는 드라마를 봤다고 하는 게 덜 쪽팔렸다. 그래서 굳이 변명은 하지 않았다.
아들이 말없이 줄줄 눈물만 흘리자, 어머니는 그럼 내일부터 하든가, 하고 장군처럼 소리치고 방문을 세게 닫았다. 연우는 무심한 부모님 사이에서 어떻게 자기 같은 섬세한 아들이 태어났을지 늘 궁금했다.
과연 제주도로 돌아온 게 옳은 선택이었을까. 연우는 중학교 때부터 써서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 데스크톱으로 벌써부터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윤연우! 나 오만 원만!”
방문을 열고 키가 자그마한 여자아이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고향에는 빌런이 하나 더 있었다.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된 여동생 윤서우는 연우의 기준에서 되바라지기 짝이 없는 동생이었다. 5살 정도 차이가 나면 남매들이 대부분 사이가 좋기 마련이다. 연우네는 완벽한 예외였다. 그는 여동생을 귀여워하는 친구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잘 생각했으면, 고향 집이 요양하기 적절한 장소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렇듯 질병은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그게 네 달 만에 만난 가족한테 하는 첫인사야?”
“아아… 안녕! 나 오만 원만.”
“…….”
어린 동생과 입씨름을 하느니 오만 원을 쥐여 주고 마는 게 덜 피곤했다. 마침 지갑에는 더도 덜도 아닌, 딱 오만 원이 있었다. 연우는 카드 지갑에서 돈을 꺼내 던지며 저리 꺼지라는 손짓을 보냈다. 목적을 달성한 서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그제야 동생이 지갑을 미리 열어 봤는지도 모른다는 강한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후회해 봤자 늦은 일이다.
그는 울며 뒤척이다가 새벽 세 시가 다 되어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깨어났다. 실연을 해도 배가 고픈 건 인간의 본능인가 보다. 이런 순간마저 배가 고픈 스스로가 짐승처럼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어제는 하루 종일 쌀 한 톨도 먹지 못했다. 그는 슬슬 부엌으로 내려가 어머니의 눈치를 봤다.
“엄마 나 배고픈데…….”
“302호 청소하고 오면 밥 차려 줄게.”
“…….”
펜션 운영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부모님은 청소를 맡겼던 외부 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대신 부모님과 직원 한 명, 이렇게 셋이 번갈아 가면서 객실을 치웠다. 연우도 집에 있을 때면 가끔 청소를 도왔다.
그러나 청소는 고역이었다. 머리로는 힘든 부모님을 도와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머리카락으로 꽉 막힌 하수구를 뚫거나 쓰레기통을 비워야 할 때면 자신 같은 섬세한 사람이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자괴감이 들었다.
“오랜만에 바다 보니까 좋다…….”
그래도 오늘은 몸을 움직이는 일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302호는 펜션에서 가장 뷰가 좋은 방이었다.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있으려니 꽤 럭셔리한 실연 기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드처럼, 명품 가방을 스위트룸 호텔에 던지면서 오열하지는 못해도 풍경이 꽤나 괜찮지 않은가.
무엇보다, 해야 할 임무가 있으니 침대에 누워 청승을 떨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혼자 자취방에 누워 있었다면, 식음을 전폐하고 울다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강재하의 집으로 달려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긍정적인 생각은 쓰레기통에 나뒹구는 콘돔 더미를 보자마자 싸그리 사라졌다. 콘돔, 머리카락, 정체불명의 휴지 등이 쓰레기통 안에 가득 쌓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하드한 플레이를 했는지 피 묻은 휴지도 몇 장 발견됐다.
“으으, 이건 현대 미술이다…… 현대 미술이다…….”
연우는 자기 최면을 걸며 눈을 질끈 감고 쓰레기통을 비웠다. 침대 옆에는 비어 있는 M사이즈 콘돔 박스 여러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세상에, M사이즈라니. 좆도 좆나 작은 게 좆나게 많이도 했네.
“……미친, 나 왜 울어…… 흐어엉.”
헤어지는 순간에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건만 우습게도 쓰레기통 안에 있는 콘돔을 치우다가 눈물이 터졌다. 오래 사귀지도 않았건만 매일 마주치는 세상이 온통 강재하였다.
엄마가 해 준 떡볶이, 잡지 속 향수 광고, 벽지에 인쇄해 붙여 두었던 헤르난 바스의 그림, 쓰레기통 속 콘돔에 러브젤 껍데기까지. 어느 사소한 것 하나 그를 연상시키지 않는 게 없었다.
이웃 농장에서 온 수말 무리를 봤을 때가 절정이었다. 부모님은 풀을 뜯는 종마를 보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들을 보고 경악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물어보려다가 말고 끝내 외면했다. 부모님이 아무것도 묻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런 건, 도무지 설명할 방법도 없으니 말이다.
부모님은 시도 때도 없이 울어 대는 아들을 보고 애가 서울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긴 받았나보다, 하고 안쓰럽게 여겼다. 그래서 나름 큰 결단을 내렸다. 귀한 아들을 청소 업무 및 잡무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기로 한 것이다.
“나가서 바람이나 쐬고 와라.”
덕분에 오후는 자유 시간이 됐다. 연우는 그 시간을 바닷가에 멍하니 앉아 있거나,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때로는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보냈다.
‘휴대폰은 좀 나중에 사야겠다.’
처음 며칠은 휴대폰 없는 삶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괜찮게 느껴졌다.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그를 편안하게 했다. 물리적인 수단이 없으니 강재하에게 연락하거나, 그의 인스타를 훔쳐보고 싶은 충동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게 다 스마트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외간 남자를 찾아내고, 집착하고, 스토킹하고, 미국으로 떠났음에도 매일같이 연락을 이어 나갈 수 있었던 건 다 스티브 잡스에서 비롯된 이 끔찍한 문명의 이기 탓이었다.
학교로 돌아가면 그래도 스마트폰을 안 쓸 수는 없겠지. 그는 나중에 서울에 돌아가면 그때 새 기기를 사서 개통하기로 마음먹었다.
“아, 날씨 좋다.”
오늘도 연우는 점심을 느지막이 먹고 근처 바닷가로 나왔다. 파라솔을 2만 원에 대여해 주는 아저씨가 호구를 잡기 위해 다가왔다. 그러나 연우는 집에서 가져온 ‘동문재래시장 상인회’ 우산을 펴고 그 아래에 앉았다. 파라솔 아저씨는 방문자가 도민이라는 사실을 알고 실망해 돌아갔다.
그는 그늘막에 앉아 오스카 와일드의 ‘심연으로부터’를 읽으며 그 표현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책은 감옥에 갇힌 작가가 동성의 애인에게 편지를 보내는 내용이었다. 연우가 절반 정도를 읽어 내려갔을 때, 책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혹시 윤연우? 맞아?”
역광으로 인해 자신에게 말을 건 남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연우는 눈을 찌푸리며 상대를 관찰했다. 자세히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그러나 기억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얼굴이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연우는 당황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어. 너는…….”
“나 기억해? 나 중앙중 김민준. 와, 진짜 반갑다. 이게 얼마 만이지?”
민준은 아주 친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손을 잡고 크게 흔들었다. 연우는 얼떨떨한 심경으로 손을 마주 잡았다. 민준은 연우에게 있어 큰 의미가 있는 친구였다.
열다섯 살, 생전 처음 꾸었던 야한 꿈에 여자가 아닌 민준이 등장했었다. 그날의 몽정으로 연우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자각할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진실한 마음이라기보다는 그저 풋사랑이었지만, 그의 성향을 정의해 준 인물이기에 쉽게 잊힐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와, 민준아! 어떻게 지냈어? 한 5년 만인가?”
김민준이 너는 머리만 길어졌고 그대로네, 하면서 웃어 보였다. 그건 민준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연우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어른스러움과 차분함은 5년이 지난 뒤에도 그대로였다.
“고등학교를 육지로 갔었거든. 동창들이랑도 거의 연락 못 했어.”
“그랬구나. 민준아, 대학은 어디로 갔어?”
연우는 민준과 지난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민준은 친척 집에 머무르며 서울에 있는 특목고를 다니다가 의대에 진학했다고 했다. 방학 때면 가족이 있는 제주로 돌아왔지만, 동창들은 모두 연락이 끊겼거나 다른 지역에 있어 방학마다 심심하고 따분했다고 했다.
“잘됐다, 연우야. 계속 심심했는데…… 방학 동안 나랑 좀 놀아 줘.”
민준은 연우에게 연락처를 알려 달라며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당황한 연우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 휴대폰이 없는데…….”
“……나랑 연락하기 싫어?”
민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연우는 당황해 그게 아니라고 변명했다. 현대 사회에서 휴대 전화가 없다는 건, 다시 말하면 상대방과 소통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민준은 다행히 당분간 휴대 전화를 쓰지 않을 생각이라는 연우의 뜻을 이해했다.
“그럼, 너 보고 싶으면 연서펜션으로 가면 돼? 아직도 부모님 펜션 하시는구나.”
“응. 난 늘 펜션에 있으니까, 찾아와도 되고. 미리 전화 주면 더 좋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던 듯, 그 이후로 민준은 뻔질나게 펜션을 드나들었다. 연우의 부모님은 낯이 익은 중학교 동창을 살갑게 맞아 주었다. 특히 아버지는 아들의 친구가 의대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더 큰 호감을 갖는 눈치였다.
제주에서의 연우의 하루 일과는 이렇게 굳어졌다.
8시 반쯤 기상해 가족끼리 아침 식사를 하고, 연우가 설거지를 한다. 그리고 나면 펜션 미니트럭으로 근처 시장에 가서 장을 봐 오거나 엄마 심부름을 한다.
인터넷 토익 강의를 듣고, 점심을 먹는다. 민준이 만나러 오면 그의 차를 타고, 도민들이 공짜로 들어갈 수 있는 관광지를 가서 사진을 찍거나, 카페를 가서 논다.
“오늘은 어디 가지. 아, 나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혹시 같이 러브랜드 가 볼래?”
“……아니 그건 좀. 카페 가자.”
러브랜드를 남자인 친구랑 가다니, 미쳤나! 연우는 지나치게 헤테로적 사고방식을 가진 민준에게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민준은 중학교 때 그대로, 좋은 친구였고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었다.
연우는 그와 함께 있어도 조금도 설레지 않는 스스로를 깨닫고 쓰게 웃었다. 이제는 한때 설렜던 사람을 만나도,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마음이 고장 난 것만 같아서였다.
언젠가 나아지기는 할까.
아직 2주도 지나지 않았으니 상처가 아물기를 기대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그래도 민준을 다시 만나게 돼 다행이었다. 민준은 한없이 편하기만 하고, 뭐든지 다 받아 줄 것 같은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하마터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떠벌려 버릴 뻔했을 정도로.
그렇게 보름 가까이를 놀러 다니며 어느 정도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됐을 무렵, 민준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연우야,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저번에 해변에서 처음 봤을 때, 왜 울고 있었던 거야?”
내가 울고 있었던가……? 그냥 책을 읽고 있었는데. 차라리 민준이 놀리듯 물었으면 연우도 이렇게까지 창피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냥 장난으로 넘겨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배려가 느껴지자, 꼭 진실을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음…… 얼마 전에 사귀던 사람이랑 헤어졌거든.”
“많이 좋아했나 보다.”
“응. 어마어마하게 잘생…… 예뻤고, 좋은 사람이었어. 내가 많이 좋아했고.”
“그렇게 좋아하는데 왜 헤어졌어?”
“내가 잘못을 했거든. 그래서 차마 매달리지도 못했어.”
연우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잊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잠시 덮어 두었을 뿐이다. 최근 연우는 강재하와 완벽한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편지지 10장이 나올 만큼,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저 미안하단 말 외에는 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슴속에는, 한에 가까운 응어리가 져 있었다. 다시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연우는 쪽팔림에 고개를 숙였다.
“아…… 창피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뭐가 창피해. 그만큼 좋아했다는 건데.”
그리고 실은, 나도 실연당한 지 얼마 안 됐어. 민준이 위로한답시고 속삭이자 연우는 눈을 크게 떴다. 민준이 같은 사람도 여자한테 차이고 다니는구나…… 나만 등신이 아니군. 알 수 없는 동질감에 가슴이 아릿해졌다.
“어떤 바보 같은 여자가 김민준을 찼어?”
“하하. 그러게. 네 전 여친만큼이나 보는 눈 없는 사람인가 봐.”
뭐가 좋다고 껄껄대며 웃던 민준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정도로 아직 좋아하면, 한번 연락을 해 봐. 너무 늦으면 되돌릴 수 있는 것도 못 되돌려.”
“그건 절대 안 하려고.”
“왜?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바람피웠어? 몰래 클럽 갔어?”
“그건 아니고, 용서받지 못할 거짓말을 했어.”
“여친이 죽어도 용서 못 한대?”
연우는 조용히 민준의 말을 곱씹었다. 강재하가 자신의 입으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꼭 모든 걸 말로 해야 아는 건 아니지 않은가. 강재하는 다시는 윤연우를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기준에서, 아니 누가 봐도 자신이 저지른 죄는 평생 용서받지 못할 잘못이 맞았다.
“차마 연락도 못 할 만큼 미안하다? 그냥 네가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서 그런 거 아닐까. 상대 입장에선 그렇게 잘못을 해 놓고 휴대폰도 없이 잠수 탔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연우는 이걸 어디까지 민준에게 설명해야 할까, 하고 고민하다가 그냥 말을 않기로 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마 아닐 거야.”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10년, 20년 뒤에도 후회한다, 너.”
연우는 하마터면 자신이 게이고, 여자인 척 접근해 사기를 쳤다는 말을 할 뻔했다. 그러나 충동적인 마음으로 아무에게나 떠벌릴 정도로, 그의 고민은 가벼운 종류가 아니었다.
“……응, 충고 고마워. 참, 나 오늘은 집에 가서 밥 먹으려고.”
“그럼 북 카페 갔다 집에 갈까?”
민준의 제안에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함께 찾은 북 카페는 거대한 목조 주택을 개조해 만든 곳이었다. 카페를 돌아보던 연우의 시선이 예술 서적 앞에 머물렀다. 강재하와 함께 봤던 헤르난 바스 관련 서적이 가장 위에 놓여 있었다. ‘이달의 추천 예술가’라는 타이틀과 함께. 연우는 자연스럽게 그와의 첫 데이트를 회상했다. 이제는 전생처럼 멀게 느껴지는, 돌이킬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었다.
“너도 북 카페 자주 다녀?”
“응. 조용하고, 책 추천도 해 주니까 좋아. 오래 있어도 눈치도 안 주고.”
그렇구나. 난 별거에 다 의미 부여를 했었어.
연우는 쓰게 웃었다. 북 카페를 다니는 남자는 강재하와 자신 말고도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특별하다고 여기고 싶었다. 그깟 취향이 뭐라고. 같은 영화를 좋아하고, 북 카페를 다니고, 같은 노래를 좋아하는 게 뭐라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다. 작은 접점 하나라도 찾아내 확대 해석하고, 거기에 거창한 이유와 서사를 부여하려 했던 거다. 자신의 사랑은 특별한 거라고 애써 포장하고 싶어서.
“그 사람도, 북 카페를 좋아했었어.”
연우는 마치 죽은 사람을 회상하듯 말했다.
“그 작은 걸로도 우리가 운명이라고 믿었어.”
“그 전 여친?”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책을 그렇게 읽으면 뭐 해. 나는 뭐가 중요한 건지도 모르는 멍청이였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 아예 처음부터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는 걸.
사랑의 근간은 운명적 로맨스가 아닌 신뢰다. 자신이 처음부터 줄 수 없었던 바로 그것.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진흙탕 위에 지어진 집 같은 거였다. 이제 좆같은 운명 타령은 그만둬야 할 때였다.
“원래 그렇게 배우는 거지.”
민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더 이상 그를 보면 설레지 않지만, 왜 자신이 어린 시절 그에게 호감을 품었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다음에 연애하면, 그때는 잘하면 돼.”
다음 사람, 다음 연애.
그런 건, 모든 걸 다 잊은 뒤에야 가능하겠지. 그러나 언제 잊을 수 있는 걸까.
집 옆이 하필 말 농장이어서. 북 카페에 그와 함께 갔던 전시회 사진이 보여서. 길거리에 키가 큰 남자가 있어서. 지나가다 들른 편의점에 콘돔이 있어서……. 각양각색의 이후로 강재하가 떠올랐다.
“이렇게까지 절절매니까 진짜 궁금하긴 하네. 너 원래 중학교 때 여자한테 전혀 관심 없었잖아.”
무심코 던진 말에 게이가 맞아 죽을 뻔했다. 연우가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무, 무슨 소리야! 완전 관심 많았거든?”
“그래?”
“어어. 나 매일 야동 봤어. 그, 남녀 야동!”
엄청난 TMI를 들은 민준은 아, 그래……. 하고 말을 흐렸다. 연우가 뒤늦게 제 말실수를 깨닫고 스스로를 비난했다. 괜히 혼자 지레 찔려서는. 남녀 야동이 뭐냐. 아예 온 세상에 커밍아웃을 하지 그러냐.
“사진 한번 보여 주면 안 돼?”
“그…, 그게, 없어. 다 지웠어.”
거짓말이다.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은 지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 강재하는 잘 지내고 있을까.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고, 다른 사람을 만났을 수도 있다.
그가 새 연애를 할 가능성을 생각하자마자 심장이 베인 것처럼 아팠다. 헤어진 지 몇 주가 흘렀지만 상처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언젠가 잊히기는 하는 건가. 벤자민 버튼이라도 된 것처럼 그제보다 어제, 어제보다 오늘 더 마음이 아픈데.
연우가 또 눈물을 쏟으려 하자 민준이 화장실에 가겠다며 일어났다. 그도 나름의 배려를 해주는 걸 테다. 하지만 민준이 돌아왔을 때까지 연우는 평정심을 되찾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눈이 빨개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민준이 모른 척하며 쾌활하게 말했다.
“저녁 먹고 나서 또 잠깐 볼까? 저번에 빌려준 만화책 다 읽었어. 이따 밤에 갖다줄게.”
민준이 다정하게 물었다. 중학교 때도 이런 다정함에 마음이 설렜던 거겠지. 연우는 자신을 세심하게 살피는 그가 고마웠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기대서는 안 된다. 그의 상사병은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나 괜찮아, 민준아. 그렇게까지 안 챙겨 줘도 돼.”
“뭘 챙겨 줘?”
“걱정할 필요 없어. 나 보기보다 씩씩해.”
민준은 이번에도 연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야? 나는 그냥 다음 권이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런 건데.”
“…….”
* * *
“오빠아, 왜 이제 왔어어. 우리 계속 기다렸잖아아.”
연우는 제 귀가 고장 났나 싶어 귀를 후볐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동생이 보였다. 눈에 넣으면 눈이 괴사할 것 같은 동생, 윤서우가 생전 처음 듣는 깜찍한 목소리로 자신을 맞이하고 있었다. 윤서우가 연우를 ‘오빠’라고 불렀던 건 지난해 생일 때 무선 이어폰을 사 줬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뭐, 회라도 잘못 집어 먹은 걸까. 그래서 여름 회는 믿을 만한 곳에서 갓 잡은 걸로 쳐야 하는 거다.
“오빠 휴대폰 없으니까 불편하다. 얼른 사아.”
“네가 빌려 간 돈만 갚았어도 두 대는 샀을걸?”
“아이, 오빠도 참. 재밌다.”
얘가 진짜 왜 이러지. 자세히 보니 서우는 평소 쓰고 다니던 뿔테 안경은 어디로 갔는지 렌즈를 끼고 있었다. 게다가 틴트를 발랐는지 아님 선지 해장국을 먹었는지 입술은 또 평소답지 않게 시뻘겠다. 여러모로 뭔가 이상하다.
“너, 입술이 그게 뭐야?”
“얼른 올라와. 엄마 아빠가 오늘 맛있는 거 많이 하셨어.”
연우의 가족은 펜션에 별채처럼 붙어 있는 협소 주택에서 생활했다. 부모님이 직접 펜션을 관리하기가 편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사춘기 무렵의 예민했던 연우는 낯선 사람들이 집 마당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견디기 힘들었지만, 대학생이 된 뒤로는 방학 때나 잠깐 들르는 정도라 버틸 만했다.
“아, 참. 오늘은 손님도 같이 먹는대.”
“……아, 불편한데.”
문제는 손님이 너무 많을 경우였다. 공용 식당 테이블이 좁아, 식사를 원하는 인원이 많으면간혹 손님이 가족의 집 주방을 침범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연우네 부모님은 직접 집 부엌에서 식사를 대접하곤 했다.
단골손님들은 연우네 주방에서 같이 아침을 먹게 될 때마다 ‘계 탔다’고 했다.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끝내줬기 때문이다. 연우는 계단을 오르며 개처럼 코를 킁킁댔다. 음, 냄새가 끝내준다. 오늘 점심은 갈치국이군.
“와, 어머님. 음식 솜씨가 진짜 끝내주시네요.”
부엌으로 다가가던 연우는 순간 깜짝 놀라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숲속에 있는 듯한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착각도 병이라더니, 상사병 때문에 환각까지 느끼는 건가. 연우는 진저리를 치며 부엌으로 들어섰다.
“먹고 또 먹어. 세상에. 재하 학생 부모님은 너무 좋으시겠다. 어떻게 같은 한국대인데 우리 아들이랑 이렇게 달라?”
“아니에요. 연우가 학교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요. 잘생기고, 싹싹하고, 눈치도 빨라서.”
“그치, 걔가 그래도 나를 닮아서…… 우리 아들, 왔어?”
환청, 환각에 이은 환시라. 연우는 그대로 사후 경직된 사람처럼 굳었다. 강재하가 사람 좋아 보이는, 예의 그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여기…… 왜…… 선배…… 어……?”
해체되고, 정제되지 못한 언어가 튀어나왔다. 휘청이며 식탁 모서리를 짚었다. 강재하가 어깨를 으쓱하며 주머니에서 익숙한 물건을 꺼냈다.
“우리 집에 휴대폰 두고 갔잖아.”
“어…… 어어…….”
“가져다주려고 왔지.”
재하가 휴대 전화를 내밀며 해사한 얼굴로 웃었다. 저런 표정을 언제 봤더라. 연우는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었다. 아, 알았다. 저건 몇 달 전, 깨진 휴대폰을 물어 달라며 내밀었을 때 봤던, 바로 그 미소였다.
저녁 식사 시간 내내 연우는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밥을 먹는 건지, 토하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반면 강재하는 뭐가 그렇게 편한지 고봉밥 두 공기를 깨끗이 비웠다. 윤서우는 아예 강재하 쪽으로 몸을 틀고 앉아 그의 말을 경청했다. 동생의 눈빛에는 오빠의 전 남자 친구에 대한 선망이 가득했다. 위험한 관계가 형성되려 하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강재하는 식탁 위 그릇을 한데 정리해 모으더니 싱크대에 넣고 물을 부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따로 분류해 개수대 망에 모으기까지 했다. 어머니가 “윤연우, 네가 해야지 이걸 손님이 치우게 두고 있어?”라고 화를 냈다. 그러나 연우는 의자 위에서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
“설거지 제가 할게요, 주세요.”
“아니, 무슨 손님한테 설거지를 시켜. 놔둬.”
“아니에요, 재하 오빠. 엄마, 제가 할게요.”
윤서우가 자신이 하겠다며 강재하가 들고 있는 고무장갑을 빼앗았다. 재하가 부드럽게 눈을 휜 채 윤서우를 향해 웃었다.
“연우 동생은 얼굴도 예쁘고 착하네. 연우는 좋겠다. 난 형밖에 없는데.”
“…….”
윤서우는 귓불까지 새빨개진 채 그릇 닦기에 몰두하는 척했다. 하지만 이 상황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연우는 동생의 기행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거의 먹지 못한 밥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갖다 부어 버렸다. 아버지가 과일을 깎아 내오는 동안, 연우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들, 재하 군이 우리 얼마 전에 사기당한 거 바로 신고해 줬어. 사기꾼 놈 통장도 묶었고, 신원 확인도 곧 가능하대.”
어머니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재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마워, 응? 이렇게 빨리 되는걸. 경찰은 소액이라고 신경도 안 쓰더니…….”
“제가 한 것도 아닌데요, 뭘. 저 아는 분이 경찰 쪽에 계셔서. 그분 덕분이죠.”
재하가 겸손하게 웃으면서 공을 돌렸다. 연우는 어머니의 눈에서 자신을 향할 때조차 보지 못했던 애정의 빛을 봤다. 아무래도 그의 강력한 얼빠 유전자는 모계에서부터 비롯된 모양이었다.
“아우, 진짜 사위 삼고 싶다.”
“켁-!”
어머니의 악의 없는 말이 양심의 스트라이크존에 꽂혔다. 연신 물만 삼켜 대던 연우가 헤어 볼을 토하는 고양이 같은 시늉을 했다.
“며칠 놀다 가요, 응? 근데 지금 성수기라 우리 펜션 빈방이 없네……. 내가 방 생기면 바로 내줄게. 그 전까지는 연우 방에서 같이 자고.”
“아, 아니 안 돼! 엄마! 내보내!”
“이놈 자식이, 지 휴대폰 챙겨 주러 온 선배한테 무슨 소리야? 그럼 안방에서 재우리, 서우 방에서 재우리?”
“선배 돈 많단 말야. 호텔 잡으라 그래!”
연우의 비명에 가까운 절규에 어머니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저 새끼, 내가 저렇게 안 키웠는데……. 아버지는 눈을 감고 고개를 가로저었고, 윤서우는 더러운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으로 오빠를 응시했다. 두 눈을 맹하게 뜨고 가족 분열을 지켜보던 재하가 맑게 웃으며 상황을 종결했다.
“그럴게요, 어머님.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 어머님이래. 왜 이렇게 듣기 좋지.”
연우는 거의 정신을 잃은 채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제 방에 왔음에도 낯선 곳에 온 햄스터처럼 몸을 말고 침대 구석에 숨었다. 강재하는 연우의 뒤를 바짝 따라오며 사냥감이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았다.
“흐음, 여기가 네 방이야?”
그러더니, 흥미롭다는 듯 방 한 바퀴를 둘러본다. 강재하는 방 곳곳에 꽂힌 책과 포스터, 그리고 연우의 어린 시절이 담긴 액자 속 사진을 관찰했다. 네다섯 살쯤 됐을까. 사진 속에는 지금과 똑같이 하얗고 말랑말랑한 볼을 가진 어린아이가 눈을 접어 웃고 있었다.
“진영이 형한테 제주 갔다고 들었어. 상진이한테 펜션 물어보고.”
“…….”
“숨 쉬어. 안 잡아먹으니까.”
“흐… 하아…….”
연우는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 그는 그 전까지 제가 숨도 쉬지 못하고 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남의 방에 침입한 재하는, 마치 제 영토에 온 영주처럼 여유가 넘쳤다. 정작 방 주인은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구석에서 떨고 있는 기괴한 장면이 연출됐다. 한동안 말을 잃었던 연우가 겨우 토해 내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가서…… 얘기해요.”
“왜? 여기 좋은데. 아늑하고.”
여긴 부모님도 계시고…… 방음도 안 되고…… 연우가 작게 중얼댔다. 그러자 조용히 연우를 지켜보던 강재하도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둘은 함께 펜션 바로 앞에 위치한 해변으로 나갔다.
철썩, 철썩 쏴아-
밤바다는 세상을 다 삼켜 버릴 것처럼 검고 깊었다. 낮에는 활기차게만 느껴졌던 파도 소리는, 빛 하나만 사라졌을 뿐인데도 음산하고 어둡게 들렸다. 말없이 걷던 재하가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 온 건…….”
“으아아악-!!”
재하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연우는 죽을힘을 다해 펜션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비명 소리는 파도 소리를 뚫고 해변가를 울렸다. 연우는 도저히 제정신으로 그의 얘기를 들을 수 없었다. 밤에 본 재하의 눈은 흰자가 도드라지게 빛나 평소보다 더욱 무서웠다.
“……잡히면 가만 안 둬, 진짜.”
강재하는 조용히 읊조린 뒤 사냥개처럼 도망자의 뒤를 쫓았다. 여기까지 쫓아왔는데 또다시 추격전을 벌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쩐지, 집을 나설 때 신발 끈을 유난히 단단히 동여매더라니.
“아악!”
연우는 보기보다 빠른 편이었지만, 다리 길이만 봐도 이미 승부는 정해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연우는 황새와 대결한 뱁새처럼, 채 50미터도 가지 못해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그는 모래사장에 엎어진 채 한없이 흐느꼈다.
“흐윽, 잘못했어. 진짜 잘못했는데…….”
“연우야.”
“흐윽……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내가 변태고 미친 새끼인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흐어엉- 변태 새끼라서 미안해. 여자인 척해서 미안해.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서 무서워서 그랬어. 그냥 혼자 첫눈에 반해서, 좋아서 그랬는데……. 알게 되면 경멸할 게 뻔하니까, 그래서…….”
그냥 칵 죽어 버려야지. 연우는 게처럼 모래사장 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지구야 미안해…….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소비하고 있는 산소조차 아까웠다. 할 수만 있다면 사회에 환원하고 싶었다.
“저번에 그렇게 말해 주지 그랬어.”
“……뭐?”
이상하게, 재하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인 것처럼 들렸다. 이건 또 무슨 착각일까. 연우가 저도 모르게 더러워진 얼굴을 들었다.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강재하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듯이 보였다.
“편지는 왜 안 줬어.”
히끅거리던 연우가 무슨 소리냐는 듯 재하를 올려다봤다. 재하는 연우의 겨드랑이를 잡아 일으켜 세우고, 모래를 털어 준 뒤 가로등이 있는 근처 벤치로 그를 이끌었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눈에 익은 종이 뭉치를 꺼냈다. 연우가 자취방에 열심히 써 둔 뒤 버려두고 나왔던 바로 그 편지였다.
“이, 이거 어서 났어-?!”
재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편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선배, 나는 아직도 그날이 생생해. 선배를 처음 만난 건 내가 신입생이던 어느 봄날, 신촌역 폼페이 북 카페에서였어. 선배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우선의 시집을 읽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에 첫눈에 반하고 말았지.”
“……뭐, 뭐 하는…….”
연우가 창피함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나 재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편지를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그때만 해도 특별한 생각은 없었어. 난 그냥, 선배의 인스타그램 계정이라도 구경하고 싶었어. 그래서 책이랑 카페 해시태그로 검색해 선배 계정을 찾아냈어. 보니까 취향도 나랑 잘 맞길래 별생각 없이 댓글을 달았던 거야.”
자신의 수치스러운 행각이 판결문처럼 읊어지고 있었다. 패닉에 빠진 연우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바닥만 바라봤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어. 선배가 나한테 DM을 보내면서 우린 점점 가까워졌지. 그때부터 내 고민이 시작됐어. 선배가 나한테 보여 준 관심은 누가 봐도 이성적인 호감처럼 보였어. 내가 남자라는 걸 알면 선배가 실망할 것만 같았어.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거야. 선배는 미국에 있고, 어차피 만날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페이스앱 성별 전환 사진을 보내고 말았어.”
귓불까지 뜨거워져 참을 수 없어진 연우가 한 손으로 편지를 잡아채려 했다. 하지만 강재하는 재빠르게 편지를 팔 위로 들었다.
“그니까 이걸 왜 선배가 가지고 있냐니까!”
“왜, 나 주려고 쓴 거 아니었어?”
연우가 얼굴 끝까지 새빨개진 채 다시 해명을 요구했다. 그제야 재하는 편지를 얻게 된 경위를 실토했다.
“너네 집 비밀번호 알아서, 들어가 봤어.”
“……뭐?!”
이건 엄연한 가택 침입이었다. 강재하가 어쩔 수 없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실종된 줄 알았어. 휴대폰 주려고 찾아갔는데 흔적도 없고, 안에는 사람이 있는 기척도 없고. 며칠이 지나도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 상진이한테 물어봐도 모른대고……. 디 팔로아에는 다른 알바생이 일하고 있고.”
“그건 범죄잖아!”
“아아, 아냐. 나는 그럴 권리가 있었어. 빌려 갔던 내 목도리 안 돌려줬었잖아. 난 목도리 가지러 들어간 거야.”
뭐 설마… 3월에…… 빌려 갔던 그 목도리?! 연우는 잊어버리고 돌려주지 않았던 E사의 명품 목도리를 기억해 냈다. 그걸 지금 와서 무단 침입 근거로 써먹다니, 지금은 한여름이라 목도리가 필요도 없을 텐데. 연우가 경악하자, 재하는 눈을 접어 웃었다.
“그리고, 거기 들어간 덕분에 이 편지를 볼 수 있었지.”
재하는 자취방 문을 따고 들어갔을 때의 아득함을 떠올렸다. 처음 윤연우에게 들었던 감정은 한없는 배신감과 분노였다. 그가 자신에게 눈물 콧물 쏟으며 사과하는 그림을 예상했지만, 윤연우는 무덤덤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마치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재하의 집에 휴대 전화까지 두고 갔으니 연락할 수단도 없었다. 재하는 직접 전화를 돌려주면서 다시 얘기를 해 보려고 했지만 윤연우는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어디로 갔는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후배의 자취방에서는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흘렀다. 그는 실종자를 찾는 탐정처럼 집안을 샅샅이 탐색했다. 옷장은 비어 있었고, 책상 아래 있던 21인치 캐리어도 사라져 있었다.
앉은뱅이 테이블 위에는 쓰다 만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찢어 버리거나, 구겨 버린 듯한 종이의 잔해가 널려 있었다. 편지에는 그토록 듣고 싶었던 해명이 적혀 있었다. 재하는 편지를 읽으며 가슴속 깊이 안도했다.
그리고 그 순간 재하는, 자신이 윤연우를 포기할 준비가 안 됐다는 것, 그리고 사실은 연인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상대의 행방은 묘연했다. 연우가 멀리로 떠났음을 직감한 재하는 김상진과 허은경은 물론이고 주진영에게까지 연락해 행방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 진영이 형은 알아? 윤연우 어디로 갔는지?
- 연우 길에서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어. 그때 나랑 술 마신 다음 날이던가…….
- ……뭐?
- 걔 거의 죽을 뻔했어. 엄청 엄청 아팠어!
주진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우가 아주 많이 아팠고, 힘들어했으며, 그 탓에 병이 깊어 요양을 하러 고향에 내려갔다고 전했다. 단순 저혈압으로 쓰러진 거였지만, 주진영의 얘기만 들어 보면 마치 윤연우는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순간 사망할 것만 같았다.
깜짝 놀란 재하는 직접 주진영을 찾아갔다. 진영은 가게 문도 닫고 두 시간에 걸쳐서 연우가 얼마나 지금까지 힘들어했는지, 또 그의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 설명했다.
- 걔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아? 걘 바로 지 죄를 고백하려고 했어. 근데 내가 그러면 너한테 차인다고 도시락 싸 들고 말렸다고.
- 그러니까 널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야. 그건 의심하지 마. 내가 연대 보증이라도 서 줄 테니.
강재하는 그날 이미 마음속으로 윤연우를 용서했다. 자신을 우연히 만나서 좋아했고, 좋아했기 때문에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거라면 그를 비난할 이유가 없었다.
재하가 얘기해 줘서 고맙다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주진영이 불쌍한 눈으로 물었다.
- 우리도 이제 그만 화해할 수는 없을까?
띠동갑도 넘는 나이 차이의 남자가 불쌍한 눈으로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재하는 더 이상 주진영이 밉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다른 성향을 가진 주진영의 삶 또한 녹록지 않았으리라 짐작이 가능했다. 재하는 연인을 통해 더 넓은 시야와 이해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 다 잘 풀리면, 연우랑 셋이 봐요.
재하의 말을 들은 주진영은 감동받은 듯 눈물까지 그렁거렸다. 그러더니 마지막에 남은 죄 하나를 덧붙였다.
- 아, 맞다. 그 보고 싶다는 DM, 내가 보낸 거야. 네가 진심인지 알아보려고. 이것도 용서하는 김에 같이 용서해 주면 좋겠다.
- …….
일 년 만의 극적인 화해는 하마터면 3분 만에 끝날 뻔했다.
아무튼, 재하는 이러한 과정을 걸쳐 자신의 죄로부터 도망친 연인을 용서하기로 했다. 그는 눈앞에서 옅게 떨고 있는 사랑스러운 거짓말쟁이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편지를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고…….”
재하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연우는 언젠가부터 소리 없는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다.
“이 편지의 내용이지.”
강재하가 연우의 손 한쪽을 잡았다.
“정말 나한테 반해서 접근했던 거야? 내가 토일 그룹 회장 아들이라서가 아니고?”
연우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아무리 내가 이상한 사기를 쳤어도 그런 꽃뱀…… 아니, 방울뱀은 아니야.”
“응. 그걸 직접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연우는 TV에서 토일 그룹 회장 비서를 봤다고 설명했다. 그가 자신의 집안을 알게 된 과정까지 듣게 되자 남아 있던 작은 불신의 씨앗마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편지에 써 있는 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야. 정말 미안해. 선배는 이런 일을 당할 사람이 아닌데…….”
연우는 그제야 뒤늦은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그는 더 해야 할 말을 고르다가, 헤어진 이후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여기까지 와 줘서 정말 고마워. 짧았지만 선배랑 사귀는 동안 정말 행복했어. 다음번엔 나 같은 사람 말고, 정말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랄게.”
“……다음번?”
그때 펜션 방향에서 누군가가 연우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저 멀리서 민준이 팔을 휘적거리며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보기보다 해변이 멀었는지, 연우와 재하의 앞까지 뛰어온 민준은 숨을 고르느라 헉헉댔다.
“펜션 갔더니, 어머니가 너 해변 나갔대서. 휴대폰 없으니까 진짜 불편하다. 어어, 친구랑 있었나 보네. 안녕하세요!”
민준이 고개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강재하도 고개를 까딱이며 마주 인사했다. 연우는 강재하의 시선에서 묘하게 경계하는 듯한 기운을 느꼈다.
“오늘 저녁에 잠깐 보기로 했었잖아. 까먹었어?”
“어, 아아…… 맞다. 어떡하지. 미안해. 갑자기 아는 선배가 오는 바람에.”
아는 선배? 안 그래도 깊게 팬 미간의 골이 점점 더 깊어졌다.
연우는 친구에게 보일세라 옷소매로 얼굴에 묻은 흙과 콧물, 눈물을 닦아 냈다. 강재하를 본 이후, 그의 머릿속에서 민준과의 약속 따위는 날아간 지 오래였다. 휴대폰을 다시 되찾았는데도 민준에게 연락할 생각을 못 한 건 명백한 실수였다.
“우와… 선배님이셔? 되게 잘생기셨다. 저는 연우 중학교 때 친구예요.”
민준이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중학교 동창이라는 말을 들은 재하는 손을 내미는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는 민준의 반질하고 말끔한 얼굴을 위아래로 훑었다. 키가 180쯤 되려나. 키도 크고, 옷도 잘 입고. 민준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꽤 인기가 많을 법한 타입이었다.
“혹시 중학교 때 반장이었어요?”
강재하가 민준에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엇? 우와. 어떻게 아셨지? 제가 그렇게 반장같이 생겼나요?”
연우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두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아, 하고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귀신같이 기억력도 좋은 남자 같으니라고. 그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깨달은 연우가 둘 사이에 난입해 중재했다.
“민준아! 미안한데! 오늘 선배랑 할 얘기가 있어서.”
“아아, 알았어. 근데 나 내일은 꼭 러브랜드 가 보고 싶은데… 진짜 안 돼? 궁금하단 말야. 수요일은 도민 특별 할인도 한대.”
“……러브랜드?”
그리고 재하의 오해는 점점 더 눈덩이같이 불어났다. 연우의 눈에 힘이 실리는 강재하의 주먹이 보였다. 왜 자꾸 이런 오해가 생겨나는 거지. 마치 신이 ‘윤연우는 금사빠 여장 변태’라는 팻말을 들고 강재하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연우는 남자들끼리 러브랜드만큼은 절대 안 되겠다고 거절했다. 그리고는 삐진 친구를 달래서 집으로 보내려 했다. 민준이 근데 만화책은… 하고 말을 흐리자, 연우는 자신의 방에 가서 알아서 가져가라고 말했다. 그제야 민준은 발걸음을 돌렸다.
“……이래서였어?”
민준이 멀리 사라지자, 재하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뭐가 이래서야. 아니, 아니야! 쟨 게이 아니야. 좋아하는 사람도 다 여자였고,”
“저번에도 말했지. 나도 그랬었어.”
“아니, 아오…… 진짜 아니라고!”
연우는 자신도 남자지만 남자들은 참 알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강재하가 민준에게 보이는 분노는 대체 뭘까. 사실 이렇게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어차피 끝난 사이고, 강재하는 그저 자신과 좋게 헤어지려고 하던 중이 아니었던가. 지금 그의 행동은, 그들이 연인 시절이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까지도 연우는 강재하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고 여기고 있었다. 감히 그가 자신과 계속 사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했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잠깐. 어차피 끝났는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거야?”
“……끝나?”
재하가 물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다 못해 아예 짓씹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확연한 분노와 실망감이 엿보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기이함을 느낀 연우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재하가 다시 간격을 좁혀 오며 물었다.
“우리가, 끝났어?”
“그, 그때… 선배가 나한테 그냥 꺼지라고. 나가라고…….”
“……아, 연우야.”
재하가 이마를 짚으며 연우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는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끝난 사람 집 앞에서 일주일을 기다리고…… 주변에서 안 보인다고 문 따고 들어가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귀에서 웅웅대며 이명이 들렸다. 숨이 가빠 오고, 괜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용서를 받은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아직도 나랑 계속 만나고 싶어 하다니. 강재하는 혹시 성자가 아닐까.
“헤어진 사람 얼굴 보려고 비행기 타고 날아오는 등신이 세상에 어딨냐고.”
연우는 입술을 떨며 강재하가 하는 말을 해석하기 위해 애썼다. 혹시나, 자신이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너는 끝이 그렇게 쉬워? 왜…… 내가 서툴러서?”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나랑 하는 게 그렇게 별로였나, 나로는 전혀 충족이 안 되는 건가, 난 그런 생각까지 했어.”
“아니, 아니, 잠깐. 얘기가 왜 그렇게 흘러?”
세상만사를 섹스로 귀결 짓는 건 남자들의 본능이자 그들이 가진 단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맹세컨대 연우는 단 한 순간도 강재하의 스킨십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매번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물론 애초에 잘하는지 못하는지 비교할 기준점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에라이, 모르겠다. 연우는 머리를 감싸 쥐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숨겨진 비밀을 폭로했다.
“아니, 난 뭐가 잘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난 아예 경험이 없단 말야!”
“……뭐?”
강재하가 바보 같은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다 용서하려 했더니, 또 자신에게 사기를 치려는 건가,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굳이 이 순간에 또 다른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 그 서랍 속에 잔뜩 있던 러브젤이랑 콘돔은 뭔데?”
“사장님이 준 거야! 버리려다가 조금 남겨 둔 거고! 앱도 한번 써 보고 지워 버렸어. 난 선배랑 한 모든 게 다 처음이었다고. 근데 내가 감히 누구 섹스 실력을 논해?”
“……그럼 나랑 했던 연애 상담은 뭐였어? 30명을 사귀어 봤다는 건?”
“그건…….”
연우는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거리더니, 결국 자포자기하듯 말했다.
“다 뻥이지. 나 약간…… 태생이 사기꾼인가 봐.”
그리고는 창피함에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쥔다. 재하는 그 순간 연우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이 귀여운 녀석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거짓말을 해 온 걸까. 그러나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만 진짜라면, 나머지는 모두 거짓투성이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재하는 만면에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연우의 얼굴에서 그를 가리고 있는 손을 떼어 냈다.
연우가 어떤 상태였냐 하면, 얼굴에 거의 수맥이 흐르는 것 같았다. 줄줄 떨어지는 눈물 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었다. 그는 잠긴 목소리로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나 같은 애를…… 아직도 좋아해? ……왜?”
왜일까.
질문을 들은 재하는 자신이 왜 윤연우를 좋아하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의 얼굴, 목소리, 분위기, 생각하는 방식까지. 어느 하나 자신의 취향이 아닌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재하는 본래 정해 놓은 이상형 따위는 없는 사람이었다. 강재하의 취향은, 윤연우가 SNS에 나타나 그와 대화를 나눈 순간 정립되고, 그가 현존하는 사람으로 동아리에 나타난 순간 완성된 것이다.
“태어나서 딱 두 번 누굴 좋아한다고 느꼈어. 근데 그 둘이 같은 사람이래. 이 정도면 운명이겠지. 이제 네가 아니면 난 혼자 늙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내가 널 놔줄 것 같아?”
연우의 눈앞에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기적이 펼쳐지고 있었다. 강재하가 자신을 용서하는 걸 넘어서서, 헤어질 생각이 없다니. 조금 전 그가 자신을 용서하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신에게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었다. 차마 사랑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정말…… 나랑 계속 만나겠다고……?”
“응. 그러니까 제발, 그렇게 미련 없다는 듯 굴지 마.”
강재하는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그 얼굴을 보는 연우의 심장이 조일 것처럼 아파 왔다. 눈물로 매달려야 할 사람은 재하가 아닌 자신이었다. 손톱 한 개만큼도 잘못하지 않은 연인이, 오점투성이인 자신 때문에 바다를 건너 날아왔다. 그리고는 자존심을 버려 가며 애정을 구걸하고 있었다. 이건 어딘가 잘못됐다.
“약속해 줘. 이번만큼은 진실을 말해 준다고.”
연우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상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더 선명하게 보기 위해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 냈다.
“윤연우, 지금도 날 좋아해?”
연우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재하가 말로 해 줘, 하며 어린아이처럼 보챘다. 연우가 작게 응, 좋아해…… 아직도. 하고 속삭이자 재하가 긴장이 풀린 듯 하아- 하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나도야. 여전히. 아니, 예전보다 더 많이.”
가족이, 혹은 민준이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들은 깊은 포옹으로 다시 만났다.
“이제 서로 아무것도 숨기지 말자.”
그 말을 신호로 연우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강재하의 사랑은 연우가 생각한 것보다 더 거대하고 견고한 것이었다. 연우의 가장 큰 잘못은 거짓말을 한 것도, 진실을 숨긴 것도, 상대를 떠본 것도 아니라 연인의 마음을 믿지 못한 것이었다. 민준이 했던 충고가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나는… 헤어지기 싫어. 뻔뻔한 거 알지만 날 용서해 줬으면 좋겠어. 다신 거짓말 안 할게. 흑, 잘못했어.”
“계속 그렇게 다 말해 줘. 응? 이제 아무것도 숨기지 마.”
“응…, 응, 그럴게.”
다정한 연인의 눈이 연우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 속에는 자신이 있었다. 연우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입맞춤은 길고도 절박했다. 강재하의 모든 것이 연우에게로 쏟아져 내려왔다. 몇 주 만에 맛본 입술에서는 익숙한 향과 바다와 흙 맛이 났다.
“지금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둘이서만.”
재하는 더 이상 참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론 연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휴대폰을 뒤지더니 금세 가장 가까운 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했다. 그리고는 거의 2인 3각을 하듯 근처 호텔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남의 시선 따위는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재하가 덤벼들었다.
“자, 잠깐. 나, 나 완전 흙투성인데.”
“괜찮아. 귀여워. 인디언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 연우가 샤워실로 도망쳐 더러워진 얼굴과 몸을 씻어 냈다. 온몸에 샤워젤 거품을 문지르고 있는데, 별안간 강재하가 옷도 벗지 않고 진입해 들어왔다.
“으, 으악! 나……, 나가!”
이놈의 호텔은 무슨 변태가 만들었는지, 샤워실은 안에서 잠글 수도 없게 설계돼 있었다.
“……우리 이제 나가란 말 하지 말자. 트라우마 생겼어.”
“아니이, 트라우마가 생기면 내가 생기지, 왜 자기가 생겨?”
“드디어 자기라고 불러 주는 거야?”
그 자기가 아닌데. 연우가 어버버거리는 사이 연인은 순식간에 상의와 하의를 벗어 던졌다. 그러더니 각자 씻을 시간이 아깝다고 중얼거리며 몸을 치대 왔다.
“하아…….”
가쁜 호흡이 얽히고, 연우의 몸에 잔뜩 묻어 있던 거품이 재하에게로 옮겨 갔다. 비벼지는 두 몸 사이에서 거품은 윤활제 역할을 했다. 서로의 몸은 견딜 수 없이 단단하고, 또 실크처럼 부드러웠다. 육체를 탐구하는 사이 견딜 수 없는 강한 자극이 온몸으로 퍼졌다.
“오늘은 진짜 못 참아. 각오해.”
“응, 참기만 해 아주.”
낮은 경고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온몸이 폭발할 것 같은 건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정말 참을 수도 없고, 참고 싶지도 않았다. 어둡게 번들거리는 재하의 형형한 눈동자는 맹수의 것과 같았다. 연우는 기꺼이 짐승에게 잡아먹히기로 했다.
“우와, 후배님 되게 무섭다.”
“……혀, 형이라고 불러. 원래 내가 형이잖아.”
연우의 도발에 재하는 아아, 그게 취향이었어? 라며 씨익 웃었다.
비누 거품이 모조리 씻겨 나가고, 샤워기의 물줄기가 멈췄다. 재하는 연우를 타일 벽에 비스듬히 세운 채 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온몸을 핥아 먹었다. 마치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찾은 목마른 짐승과 같았다. 그는 혀를 길게 빼고 뺨, 쇄골, 배꼽, 엉덩이, 그리고 허벅지 안쪽에 고인 물까지 기쁘게 마셨다. 으으…… 다리에 힘이 빠진 연우가 괴로운 신음을 내며 반쯤 주저앉았다.
“힘줘야지. 응?”
형인데 왜 그것도 몰라? 재하가 타박하듯 말하자 연우는 목덜미가 새빨개졌다. 재하는 그 붉은 빛이 마음에 들었다. 온몸이 빨갛게 물들면 얼마나 예쁠까, 그는 불현듯 든 무모한 생각을 실행시키기로 했다.
“아, 진짜…… 형 너무 예쁘다. 어떻게 아무도 안 건드렸지.”
“그, 그러는 너는…….”
“얼마 전까지 난 미성년자였잖아. 그리고,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었다고.”
재하는 감탄을 뱉으며 온몸에 입술 자국을 남겼다. 하얀 피부에 붉은 열꽃이 핀 듯한 무늬가 예상한 것보다 더욱 마음에 들었다. 발끝에 힘을 주고 버티던 연우가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그, 그만해. 응? 침대로 가자…….”
“아직.”
그러나 재하는 큰 목욕 타월을 화장실 바닥에 깐 뒤 연우를 번쩍 들어 그 위에 눕혔다. 적나라한 화장실 조명이 온몸을 비추자 연우는 실신하고 싶은 기분이 됐다. 똑같이 경험이 없는데도 자신과는 달리,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재하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 아…….”
재하가 이를 세워 옅은 색 유두를 물었다. 몸이 꽈배기처럼 뒤틀리고, 낯선 음성이 연우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왔다. 연우는 늘 만져 보고 싶었던 연인의 귓불과, 단단한 가슴, 그리고 허리께를 움켜잡으며 본능만 남은 동물처럼 울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이러면 어떡해.”
재하의 시선이 거의 배 위로 올라붙은 연우의 성기로 향했다. 가슴을 지나 골반께를 핥던 재하의 혀가 예고도 없이 중심을 건드렸다.
“아!”
평생 누군가의 혀가 닿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기관이었다. 연우가 바르작거리며 반항했지만, 재하는 허벅지 안쪽을 꽉 눌러 압박하며 상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간 살덩어리가 크기를 키우고 점점 더 단단해졌다. 말랑한 혀 안의 점막이 귀두를 빨아 올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복상사가 괜한 게 아니었다. 연우는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제발 그만, 응? 빼, 빼 줘…… 으어엉…….”
“여기에라도 박아 봐.”
그래야 안 억울하지. 재하가 웃으며 말하자 연우가 도리질을 치며 불분명한 소리로 애원했다. 사정감이 심해지자 연우는 재하의 얼굴을 억지로 잡고 떼어 냈고, 동시에 그의 성기에서 불투명한 액체가 뿜어졌다. 정액은 화장실 바닥과 수건, 연우의 배, 그리고 재하의 볼과 가슴께까지 넓은 반경으로 분사됐다. 재하가 장관이네…… 라고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스프링클러……?”
“아니, 제발 그런 비유 좀……!”
그러더니, 얼굴에 묻은 정액을 닦아 자신의 입술에 립밤을 묻히듯 바른다. 연우는 그 광경을 보며 소리 없이 경악했다. 재하는 혀를 길게 내어 번들거리는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신기해. 내 거랑 냄새가 달라. 좀 더 단 것 같기도 하고.”
마카롱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연우는 한없이 이상한 말을 하는 연인의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재하는 목구멍 깊숙이 웃는 소리를 내더니, 연우를 들쳐 업고 침대로 향했다. 그는 침대로 가는 내내 볼과 입술, 머리에 쪽쪽대며 옅은 뽀뽀를 멈추지 않았다.
“어디를 핥는 게 제일 좋아?”
“모, 몰라…….”
“어쩔 수 없다. 하나씩 다 해 봐야겠네.”
일단 엉덩이부터. 재하는 연우를 제 아래 엎드리도록 유도했다. 볼처럼 하얗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작은 엉덩이가 유혹적이었다. 마치 빨리 좀 어떻게 해 달라고 그를 채근하는 듯했다. 엉덩이를 지분거리고, 살살 깨물며 괴롭혔다. 아무도 도달한 적 없는 작은 구멍에 혀를 대자, 연인이 움찔하며 포복으로 침대 끝까지 기어갔다.
재하는 어렵지 않게 다리를 잡아 내리며 도망을 저지하고는 엉덩이를 이빨로 꽉 깨물었다. 그리고는 다시 혀를 뒷구멍에 가져다 대고,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부분을 빨아 올렸다.
“아윽, 뭐 하는…….”
“아, 예쁘다.”
“흐윽…… 으응……, 으으응…….”
연우는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자신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소리처럼 낯설게만 들렸다. 그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신음은 재하에게 더 빨리 움직이라고 보채는 듯했다. 그러나 재하는 처음인 연인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주 천천히 공을 들이기로 했다. 호텔 일회용 젤을 찢어 연우의 엉덩이 골 깊숙이 부었고, 천천히 손가락 하나를 길게 밀어 넣었다. 손가락은 곧 두 개가 되고, 마침내 세 개까지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연우가 다리로 이불 시트를 차며 보챘다.
“그냥, 그냥 넣어 줘, 제발. 응?”
“안 돼. 다쳐.”
아아, 그런데 오늘도 콘돔이 없는데. 어떡하지.
재하는 속으로 자신의 준비성 부족을 탓했다. 아무리 머릿속이 섹스로 꽉 차 있을 20대 초반 남자라고 해도 24시간 늘 짐승 모드는 아니었다. 제주도까지 온 목적은 윤연우를 잡기 위해서였지, 잡아먹으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분위기가 이렇게 흐르고 나니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 오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하아… 어떡하지…….”
멈추고 싶지 않은 원초적 본능과, 상대를 배려해야 한다는 이성이 머릿속에서 싸웠다. 재하가 아래를 쑤시며 고민하자, 연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해 줘. 응?”
“안 돼. 그러다 다치게 하면…….”
“나 튼튼하거든?”
“얼마 전에 쓰러졌었잖아.”
그러나 재하는 말과 행동이 달랐다. 그의 성기는 이미 끝에 프리컴을 머금은 채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재하는 연우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비며 낮게 신음했다. 멈추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온몸의 세포를 지배하고, 그를 폭력의 세계로 이끌려 하고 있었다.
“빨리, 빨리 그냥 넣어 줘…….”
그 간절한 몸짓에 연우가 반응했다. 그는 어설프게 재하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계속해도 된다는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허락이 떨어지자 재하는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 번도 무언가가 침입한 적 없던 작은 구멍으로 거대한 좆의 끄트머리가 밀려 들어왔다. 연우는 아무리 아파도 재하를 저지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은 예상치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아…… 너무 좋다. 어떡하지, 형.”
“아, 아파…… 아파…….”
“미안한데, 하… 이제 절대 못 멈춰. 차라리 날 죽여.”
재하는 한 번에 뚫듯이 깊숙이 자신의 좆을 집어넣었다. 천천히 넣어 봤자 고통의 시간이 길어질 뿐이었다.
연우는 허리를 튕기며 비명을 내질렀다. 내벽을 가르고 들어오는 성기의 모양과 굵기가 지나치게 생생했다. 뿌리로 갈수록 점점 더 두꺼워지는 성기의 모양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눈을 감고 그리라고 해도 그의 것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꼬치처럼 꿰어진 연우의 몸이 바르르 떨리며 발작하듯 휘었다. 재하는 잠시 적응할 시간을 주기 위해 숨을 골랐다. 시간이 지나자, 괴로움 탓에 새우처럼 구부러졌던 연우의 몸이 조금씩 펴졌다.
“많이 아파?”
“……자기가…… 하는 거면…… 아픈 것도 좋아.”
그 말은 100% 진심이었다. 연인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라면, 그것이 고통이라 해도 달콤했다.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감각은 쾌락이 아닌 행복에 더 맞닿아 있었다. 손장난을 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충족감이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멈추지 마, 계속 내 안에 있어.
재하가 골반을 붙잡고 조금씩 허리 짓을 시작했다. 겨우 적응했던 구멍의 내부가 다시 한번 요동치며 빠듯하게 성기를 조였다. 재하는 달싹이는 연인의 입술에 농염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지금 입가에 흐르는 침이 자신의 것인지, 연인의 것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왜 울어, 응?”
재하는 자신에게 가학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아래에서 흔들리며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입술, 그리고 충격에 눈물이 흐르는 눈은 지나치게 색정적이었다. 역시 마카롱 탓인지, 눈물도 달콤했다.
그는 연인을 번쩍 들어 자신의 위에 앉히고, 상대를 들어 아래로 절구처럼 찧어 대기 시작했다.
“아, 너무 좁아…… 너무 좋아.”
“으읏… 으응. 나도, 나도…….”
일단 한번 진입로를 뚫어 놓고 나니 처음보다 훨씬 수월했다. 젤로 한동안 내벽을 풀어 놓은 덕도 있었다. 그는 핏줄이 불거진 기둥을 점점 더 안쪽으로 누르며 힘있게 밀고 들어갔다.
“아… 진짜. 윤연우, 너무 좋다…….”
재하는 깊이 전율했다. 이런 종류의 쾌락은 난생처음이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미치고, 섹스에 중독돼 인생을 망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윤연우의 몸속에는 인류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 온 우주의 기원과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자제할 수 있다,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겠다. 섹스 이전에 재하가 했던 다짐은 아무것도 모르는 동정의 자만심일 뿐이었다. 이제 뇌에 남아 있는 건, 그저 박고 싸서 상대를 정복해 버려야 한다는 1차원적 욕구뿐이었다.
“좀 더 해도 돼? 응?”
“아읏…… 아흑!”
재하는 상대의 몸을 뚫을 듯이 처박았다. 배 아래에 휘몰아치는 간지럽고 미칠 것 같은 감각을 해소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이 순간 윤연우는 강재하의 신이자 동시에 제물이었다. 경배하고 싶은 마음과 목을 뜯어 피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재하가 다시 한번 강한 힘으로 안으로 들어왔을 때, 연우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 대신 교성에 가까운 탄성이 뻗쳐 나왔다. 아, 방금 뭐였지. 연우는 제 입을 한 손으로 막고 허리를 뒤틀었다. 아파서 죽을 것 같던 사이, 번개 같은 쾌락이 순간적으로 그를 덮쳤다.
동시에 조금 전 사정을 마친 뒤 늘어져 있던 연우의 성기가 한순간에 다시 발기했다. 여기가 좋았던 건가. 재하는 방금과 같은 깊이, 같은 각도로 허리를 튕기며 몰아붙였다.
“흐아악-!”
여기구나. 재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몸 깊숙한 곳에 정액을 흩뿌리고 싶은 충동을 이겨 내며 연우의 머리가 침대 헤드에 닿을 만큼 강하게 몰아붙였다. 개나 낼 법한 헉헉대는 소리가 자신의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싫어, 거긴, 아니… 너무 좋아, 싫어, 좋아…….”
“하아…… 연우 형,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재하가 웃음기조차 없이 말했다. 연우는 그렇게 계속해 달라며 본심을 말했다. 재하는 이를 악물며 십여 번을 더 강하게 찧고 들어갔다.
연우는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참을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동시에 연우의 허리가 위로 꺾이며 튀어 올랐다.
“아, 아…….”
몸이 경련하며 뒤가 저절로 조여졌다. 윽,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찌푸린 재하가 당장이라도 싸지를 것 같은 강한 자극을 간신히 버텨 내며 물었다.
“설마 내가 형이라고 불러서 싼 거야?”
연우가 목도 가누지 못하고 경련하며 시트를 쥐어뜯었다. 아까부터 마음에 들었던, 새빨간 색이 온몸에 퍼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강재하의 배 아래에서 가라앉지 않은 욕정이 꿈틀거렸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두어 번, 그는 좀 전보다 더욱 빠르게 상대를 몰아붙였다. 탈력감으로 온몸이 이완된 연우가 흐윽, 하는 소리를 내며 종이 인형처럼 흔들렸다.
모든 내밀한 감각이 정확히 한 지점에 모여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처음이라서 특별한 게 아니라, 서로이기 때문에, 그래서 당장 죽어도 상관없을 것처럼 타오르는 거였다.
“큭…….”
재하의 목 안쪽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아주 오랜 시간 운명을 만나기 위해 참아 왔던 욕구가 몸 안 가장 깊은 곳을 적셨다. 연우는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뜨고, 연인의 눈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완전히 하나가 된 순간,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들은 처음 서로를 발견한 사람들처럼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눈 안에 서로를 아로새겼다.
* * *
스무 살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연우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반면 재하는 그 위에서 햄버거 속 패티처럼 포개진 채 헐떡이는 중이었다.
20년을 묵은 욕구는 세네 번 정도 싼다고 완벽하게 지워질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박고, 흔들고, 싸고 나도 끝이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성기는 몇 분 만에 다시 착실히 크기를 키웠다. 동정남을 마법사라고 부르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야말로 매직이 아니고서는, 이 끝없는 부활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아… 으…….”
연우의 목에서는 간밤의 높은 신음 대신 허스키하고 갈라진 음성만 나왔다. 어스름한 새벽, 창밖에는 일출이 떠오르고 있었고, 파도 소리까지 더해졌다. 바다에서 맞는 첫날밤은 한없이 낭만적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침대 위 풍경은 지나치게 퇴폐적이었다.
이불 시트는 그 용도를 다한 채 침대 밑으로 쓸려 내려간 지 오래였다. 덕분에 두 나신은 조금도 가려지지 않은 채 서로의 모든 부분을 탐닉할 수 있었다.
“나… 이제 목소리도 안 나와…….”
“응. 말하지 말고 쉬어. 형은 이제 가만히 누워 있자.”
이게 무슨 쉬는 거야! 연우는 속으로 욕을 내뱉으면서도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이십 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연우 역시 새벽 내내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네다섯 번을 싸질렀다. 그런데도 여전히 강재하가 만지면 만지는 대로, 넣으면 넣는 대로 중심이 착실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인생이 대단히 타락해 버릴 것만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게다가 연우는 만약 강재하가 자신을 원한다면, 그게 어느 때든 몸이 부서져라 빨아 주고 대 주겠다는 희생적인 결심까지 한 상태였다.
‘……오히려 내가 중독될 것 같은데.’
탐색전이 끝나고 처음의 서투름이 가시고 나니, 행위가 거듭될수록 더 큰 쾌락이 온몸을 적셨다. 이건 정말 인체의 신비다. 재하의 성기가 너무 커서 도저히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고작 하루 만에 맞춰진 것처럼 벌어지더니 어느새 쾌락이 고통을 추월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강재하가 발전하는 속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대단했다. 처음보다는 두 번째, 두 번째보다는 세 번째, 세 번째보다는 그다음 번의 섹스가 더 강하고, 무자비했다. 연우는 비교군이 없어 상대의 절륜함을 판단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철회했다. 이 정도면 굳이 비교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섹스계의 심볼이라고 할 만한 모든 것을 타고난 남자인 것이다.
세상에, 내 애인이 동정 절륜남이었다니. 이게 무슨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소리인지.
“하아…….”
“흐읍…….”
몇 번째인지 모르게 몸속에 정액을 배출한 재하가 길게 늘어진 성기를 빼내며 빙글 돌아 떨어져 나왔다. 그는 휴지를 가지고 오더니 연우의 뒷구멍을 벌려 흐르는 액체를 꼼꼼하게 닦아 냈다. 간밤의 관계 중에는 한 번도 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연우가 휴지를 가져오려 할 때마다 또 할 건데 닦아서 뭐 하냐며 저지했던 것이다.
드디어 10시간을 가까이 이어져 온 섹스가 마무리된 걸까. 연우는 아릿한 둔통을 느끼며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출 보고 와서 한 번 더 하자.”
하지만 재하는 연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끝이 아님을 예고했다.
“……인간이야?”
연우의 몸과 정신은 지금 이 순간 성욕보다 수면욕에 더 깊게 지배당한 상태였다. 물론 몇 번 싸고 현자가 된 상태라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는 했다.
“나머지는 밤에 하자, 응? 제주에 선배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많단 말야.”
“아, 맞아. 전에 말한 거 기억난다.”
재하는 오래전 그녀, 아니 윤연우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윤연우는 제주도에 있는 미술관과 카페를 하나씩 언급하며 언젠가는 연인과 같이 그곳에 가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재하는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자고 속삭이며 연우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원래 사랑은 육체와 정신을 균형 있게 충족시켜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법이니까.
“그 첫사랑한테 빨리 연락해서 말해. 오늘 얼굴 볼 생각하지 말라고.”
대신, 다시 만난 연인을 단 1분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그 대상이 상대의 첫사랑이라면 더욱 안 될 말이었다.
“민준이 내 첫사랑 아니야.”
재하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첫사랑은 선배라고.”
“뭐, 이번 거짓말은 듣기 좋으니까 그냥 넘어가 줄게.”
우씨, 거짓말 아닌데. 진짜인데. 연우가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렸지만, 모든 의심은 자신의 원죄 탓이기에 할 말이 없었다.
“아, 해 뜬다.”
수평선 위로 빼꼼 고개를 내민 붉은 덩어리가 서서히 크기를 키웠다. 통창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런 풍경이라면 백만 번도 볼 수 있을 것 같아. 연우는 살면서 몇백 번도 넘게 봤을 섬의 일출을 보며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아름답네.”
응, 아름답다. 정말로.
새벽 바다와 떠오르는 태양, 그리고 태초의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인의 모습. 연우는 손가락을 들어 프레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보이는 풍경을 눈과 마음에 박제하듯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