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연우와 재하가 극적으로 화해하고 다시 연애를 시작한 지 2주 남짓. 동아리 내에는 강재하가 연애 중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에는 나름 근거가 있었다. 강재하가 나서서 SNS에 의미심장한 글과 사진을 끊임없이 올려 댔던 것이다. 팔로워 입장에서는 알아 달라는 신호나 다름이 없었다.
강재하는 ‘너 누구 만나?’ 하고 대놓고 물어 오는 동기와 선배들에게 애매한 미소만을 돌려줬다. 의심을 키우기에는 제격인 반응이었다.
“인스타 보니까 윤연우도 연애하는 것 같더라? 둘 다 아주 신났던데.”
“SNS에 티 안 내면 큰일이라도 나나. 뭐, 강재하도 그렇고 걔도 그렇고 둘 다 여친 없는 게 이상했지.”
“다행이네. 둘이 한때 은경이 사이에 두고 사이 안 좋은 것 같더니…… 각자 알아서 따로 짝 찾았으니 됐지.”
“하아, 외롭다. 나도 연애하고 싶다.”
방학이 한창인 7월, 유은과 세영이 동아리방에 모였다. 그들은 프리미엄 침구 회사 ‘코튼 그레이스’의 광고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동방은 공짜인 데다가 토일 그룹에서 지원해 준 공기 청정기와 커피 머신까지 있었다. 일을 하며 수다를 떨기에는 딱인 장소였다.
그들은 커플 탄생을 두고 잘된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내심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고로 잘생긴 남자는 다이아몬드만큼이나 귀한 법이다. 그런 희귀종들을 구경하기에는 임자가 없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하필,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동아리에서 제일 괜찮은 두 남자가 한 번에 품절남이 되다니…… 딱히 흑심을 품지는 않았더라도, 유쾌한 기분이기는 힘들었다.
“근데, 들어 봐. 강재하 여자 친구가 아무래도 우리 동아리 사람인 것 같다는 말이지.”
세영은 평소에 그러하듯, 오늘도 주변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그가 분석하기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강재하였다. 문제는 오늘따라 추리가 지나치게 잘 적중했다는 데 있었다.
“뭐? 설마. 은경이는 오해였다며. 그리고 걘 3기인데.”
유은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때 강재하의 강력한 썸 상대로 지목됐던 은경은 공인된 남자 친구가 생겼다. 얼마 전 만난 소개팅 상대와 사귄다고 했다. 자신의 인스타에 같이 록 페스티벌에 놀러 가 찍은 사진까지 공개한 상태였다.
“왜, 두 달쯤 전 성년의 날 기억나? 강재하가 2학년들한테 향수 돌리고 인스타에 사진 올렸잖아. 그게 되게 의미심장했단 말이지.”
유은이 그게 왜? 라고 반문하며 휴대폰을 꺼내 강재하의 인스타그램을 뒤졌다. 그러고는 문제의 게시물을 눌러 자세히 살펴봤다.
“이거 2기 애들 줬던 향수잖아.”
“응. 근데 내가 보기엔, 그날 향수 돌린 건 다 페이크야. 그때부터 2기 중에 한 명이랑 사귀고 있었던 것 같아.”
“헉? 에이…… 설마.”
유은이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세영은 또 다른 논거를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에 힘을 보탰다.
“왜, 강재하가 지난달에 갑자기 2기 애들 지원서 보여 달라고 한 적이 있었거든. 3기도 아니고, 이제 와서 웬 2기 지원서? 이유 없이 그럴 리가 없단 말이지.”
“아……? 걔는 2기 지원할 때 미국에 있어서 못 봤었지, 참.”
세영이 그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지금 와서 보니 수상해. 2기에 꽂힌 애가 있었던 거지- 하고 말했다.
세영의 추리에 유은이 정말 그런가, 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2학년이면 누구지. 김서영? 이주아? 유은은 열 명 남짓인 동아리 2기 여성 멤버를 하나씩 떠올렸다.
그때 어디선가 히끅, 하고 딸꾹질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났다. 적어도 유은이나 세영이 낸 소리는 아니었다. 뭐지? 설마…… 유은과 세영의 눈이 마주쳤다. 이건, 그러니까 완벽한 데자뷔였다.
세영이 간이침대 쪽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그러자 이불에 파묻혀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세영은 안도 반, 그리고 짜증이 절반쯤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윤연우, 또 너냐? 아니 대체 집 놔두고 왜 맨날 여기서 자는데?!”
* * *
“점점 포위망이 좁혀 오고 있어.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
연우가 손까지 떨며 연애가 발각될 가능성을 어필했다. 그러나 강재하는 뭐 그런 걸로 그러냐는 듯 태연하기만 했다. 오히려 별것도 아닌 걸로 난리를 치는 연인이 귀엽다는 듯 입가에는 옅은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그들은 제주도에서 신혼여행 같은 달콤한 삼 박 사 일을 보내고 함께 서울로 돌아온 차였다. 애초에 연우가 제주도에 간 목적은 휴식을 빙자한 강재하로부터의 도피였다. 이제 도망칠 필요가 없어졌으니 제주도에 머무를 이유 또한 없었다.
사랑에 눈이 먼 연우는 차마 강재하를 혼자 비행기에 태워 서울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그는 연인과 화해하자마자 곧바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한 핑계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골머리를 짜냈다.
평소라면 어머니의 의심을 샀을 테지만 이번에는 강재하라는 강력한 조력자가 있었다. 어머니 신영주 여사는 ‘공모전에서 수상하기 위해서는 윤연우라는 에이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강재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아들을 서울로 보내 주었다. 역시 아들이란 족속들은 키워 봤자 남 주는 존재가 분명했다.
어머니는 재하와 함께 먹으라며 갈치며 흑돼지 육포며, 각종 식재료를 바리바리 싸서 들려보냈다. 재하에게 방학마다 꼭 놀러 오라며, 아들을 보내는 것보다 더 아쉬워했다. 얼굴을 따지는 유전자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게 확실했다.
“어떡하지, 진짜.”
그날부터 2주를 밤낮도 없이,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있었다. 인생에 처음 맞는 장밋빛 시기였다. 오늘도 떨어지기 싫은 나머지 교수를 만나러 간다는 강재하를 졸졸 따라가기까지 했다. 학교에 볼일도 없으면서 말이다. 그러고는 동아리방 침대에 누워 있다가 (또) 봉변을 당한 것이다.
전날 새벽까지 집요하게 괴롭힘을 당한 탓에 잠이 부족했다. 침대에서 잠깐 새우잠을 자려던 것뿐이었는데. 강재하의 애인을 추적하는 탐정단을 만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러나 펄쩍 뛰는 연우와 달리 재하는 선비처럼 평정심을 유지했다.
“우리가 뭐 죄진 건 아니잖아.”
“들키면 여러모로 문제가 많잖아. 선배도 곤란할 거고.”
“괜찮아. 설마 누가 눈치채겠어. 여잔 줄 알겠지. 나름 스릴 있기도 하고?”
스릴은 개뿔. 연우는 한때 강재하의 할아버지로부터 수모를 당하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지구는 둥그니까, 학교에 알려지면 온세상에 알려질 거고, 그러면 재하네 집에서도 알게 될 수밖에 없다. 보수 할아버지가 보기에 게이는 정신병이나 다름이 없을 게 뻔했다.
“아무튼, 이제 남들 앞에서는 스킨십 금지야. 어깨동무도 안 돼. 그리고 얘기할 때도, 음, 좀 더 무뚝뚝하게 대해 줬으면 좋겠어. 아무도 나랑 사귄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연우가 정색을 하고 말하자 재하의 얼굴에 묻어 있던 웃음기가 그제야 사라졌다. 재하의 애인은, 정말로 불안해 보였다. 손톱을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손끝이 새빨갛게 짓이겨져 있었다. 아마 또 며칠씩 잠도 못 자겠지. 연우는 평소 신생아처럼 12시간도 내리 자면서, 고민이 생기면 밤새 뒤척이곤 했다.
그래서 재하는 순간 치밀어 오른 섭섭한 감정을 잠시 접어 뒀다. 둘의 사이를 들키면 곤란해지는 건 재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는 연인의 불안정함까지도 케어해 줘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앞으로 동방에 둘만 있을 때 뽀뽀를 하거나, 밖에서 슬쩍 손을 잡는 행동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니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감내해야 할 부분이었다.
“알았어. 이제 밖에서는 조심할게.”
“……정말?”
재하가 예상외로 순순히 대답하자 내심 놀랐다. 연인의 엄청난 반발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아진 연우는 선배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며 호기롭게 데이트 주도권을 상대방에게 넘겼다. 그 결정이 어떤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그래? 그러면…… 나 저거 찍어 보고 싶어.”
재하가 분홍빛 인테리어에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건물을 가리켰다. 그가 가고 싶다고 말한 곳은 요즘 SNS에서 자주 보이는 ‘사진네컷’ 매장이었다. 20년 전에 유행했던 스티커 사진 부스를 재연한 곳이다. 요즘 10대와 20대 사이에서 꽤나 유행이었다.
연우도 사진 촬영에 대한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별 저항감 없이 재하의 손에 이끌려 매장으로 올라갔다.
건물 안에는 사진을 찍을 때 착용할 화려한 선글라스랑 가발, 그리고 각종 코스튬까지 구비돼 있었다. 강재하는 흥미로운 듯 가발을 만지작거리더니 곧 눈을 반짝였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은걸. 연우는 한여름에 찾아온 한기에 오소소 몸을 떨었다.
“연우야, 저기, 이거 한번 써 볼래?”
얼굴에는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가 걸린 채였다. 재하는 손에 긴 생머리 가발을 들고 있었다. 연우가 윽,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지만 상대는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죽어도 싫어.”
그러자 강재하가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국에서 밤마다 네가 보낸 사진을 보면서 얼마나 설레고 행복했었는지 알아?”
“무슨 소리야, 갑자기?”
“너무 보고 싶었거든. 실제로도 그렇게 예쁘고 착할지 궁금했고.”
연인 간에 하지 말아야 할 일 1장 1절. 서로의 과거를 들추지 말라. 만약 연우가 연애지침서를 쓴다면 무조건 서두는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가끔 마음이 아파. 네가 진작 나한테 진실을 말했더라면, 우린 좀 더 빨리 행복해질 수 있었을 텐데.”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우리, 약속도 했었잖아? 제주도에서.”
“그, 그건…….”
강재하가 원죄를 입에 올리는 한, 연우는 절대로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의 부탁은 어떤 작은 것 하나도 거부하지 못했다. 굳이 과거의 일을 꺼내지 않았더라도 연우는 결국 우스꽝스러운 가발을 쓴 채 사진을 찍게 되었을 거다. 단지 강재하는, 그 사건을 언급함으로써 더 빨리 원하는 바를 얻어낸 것뿐이다.
나쁜 인간, 치사하게.
연우는 손에 잡히는 대로 긴 갈색 가발과 얼굴을 가릴 선글라스 하나를 골랐다. 그러고는 누가 볼 새라 부리나케 부스 안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강재하는 숨어 버린 연인을 다시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가발을 손수 씌워 주더니 머릿결이 엉켰으니 머리를 빗자는 둥, 의상도 고르라는 둥 헛소리를 하면서 수치스러운 시간을 연장시켰다.
“맞다. 틴트도 발라 볼래?”
“아니, 괜찮아. 여기 틴트가 어딨어?”
반문하기가 무섭게 강재하가 가방에서 포장도 뜯지 않은 새 틴트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연우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런 걸 왜 갖고 다니는데! 비명에 가까운 질문에 재하는 덤덤하게 오늘 이거 하려고 샀지, 하고 콧노래를 불렀다.
“이…… 이 변태!”
“고마워. 근데 잘 생각해 봐. 진짜 변태가 누군지.”
“……이익.”
재하는 연우의 턱을 잡고는, 마치 예술품을 만지듯 정밀하고 섬세한 손길로 입술을 터치했다. 반짝이고 매끄러운 붉은빛이 연우의 입술 안쪽을 중심으로 채워졌다.
“가만히 있어, 번져.”
연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재하의 손길에 입술을 맡겼다. 가만히 앉아 생각해 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사진을 찍으러 오고, 가발을 쓰고, 화장까지 하는 지금 이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매끄러웠다. 강재하는 오늘 처음부터 여장을 시키려고 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틴트까지 사서 가지고 온 거다. 이 모든 게 그의 철저한 계획하에 벌어진 일이란 뜻이다.
“이 맛에 인형 놀이 하는구나.”
“…….”
재하는 자신이 꾸며 놓은 인형이 마음에 쏙 들었다. 틴트를 바른 입술이 평소보다 반짝여서 생기 있고 더욱 통통하게 보였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그 사진이랑 비슷하네.”
감회에 젖은 말투가 퍽 거슬렸다. 꼭 옛 연인을 만난 듯이 뜨거운 눈빛이 연우의 얼굴에 내리꽃혔다. 연우는 한마디 하려다가 포기했다. 그래, 내가 죄인이다. 네가 즐거우면 됐지.
모든 게 자신의 업보였다. 연우는 자포자기한 채 마리오네트처럼 가만히 늘어져 있었다.
“……이제 됐지?”
연우가 다시 부스 안으로 숨으려 하자 재하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러고는 가발 코너 옆에 있는 의상 코너 쪽으로 상대를 이끌었다. 다시 오랜 고민이 이어졌다.
“인어공주 의상이랑, 토끼 잠옷 중에 뭐가 더 좋아?”
그는 영상 광고 실습 과제를 할 때보다도 훨씬 신중해 보였다. 옷만큼은 안 돼! 연우가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둘 다 싫어!”
“그럼 인어공주로 낙찰.”
“악!”
둘 다 입고 싶지 않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인어공주 의상은 특히 더욱 끔찍했다. 빨갛고 파란 비즈가 화려하게 붙어 있는 데다가, 위에는 가슴만 가려지고 아래는 아예 다리가 하나로 묶이는 꼴이었다. 연우는 황급히 토끼 잠옷을 집어 올렸다. 원래 인생이란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과정이니까.
“아니, 아니. 차라리 이게 나을 것 같아.”
“어차피 입을 거면서 왜 그랬어.”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다. 하지만 즐길 수 없을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연우는 거울에 비친 여장 남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토끼 잠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좋지도 않았다. 아마 가발과 틴트가 없었다면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 웃으세요, 찰칵!
연우는 사진을 찍는 내내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런 사진이 누군가에게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선글라스를 썼는데도 신경이 쓰였다.
기기에서 웃으라는 소리가 나왔지만 웃음이 나지 않았다. 네 컷에 모두 재하만이 웃고 있었다. 반면 선글라스를 쓴 여장 변태 토끼는 초점이 나간 채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창피해하면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생각을 했어?”
“……이……거랑 그거는 달라!”
사진이 인쇄돼 나오자 재하는 웃겨서 거의 쓰러지려고 했다. 연우는 몸서리를 치며 머리에 씌워진 가발을 벗기고 손등으로 틴트를 닦아 냈다. 상대의 놀림을 1초도 더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사진은 선배 가져. 난 필요 없으니까.”
연우는 볼이 부은 채 톡 쏘듯 내뱉고는 부스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강재하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한 번 더 찍자. 이번에는 윤연우 본캐랑 찍을래.”
그러더니 말리기도 전에 기기 안으로 지폐를 밀어 넣었다. 이윽고 스마일, 찰칵- 하는 기계음이 또 한 번 귓가를 울렸다.
가발과 옷을 벗어 던지니까 그래도 자신감이 생겼다. 연우가 브이자를 그리며 웃자, 재하가 갑자기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러더니 셔터음과 동시에 연우의 볼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연우가 한 손으로 볼을 감싸며 물었다. 그러자 재하는 짓이라니, 하고 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남들이 볼 땐 손도 대지 말라고 하니까…….”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마에 내려온 연우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은근하게 속삭인다.
“이럴 때라도 열심히 만지려고.”
셔텨음이 반복될 때마다 강재하의 행동은 점점 더 과감해졌다. 그다음에는 얼굴 여기저기에 뽀뽀를 하고, 다음 촬영 때는 연우의 볼이 맛있는 사탕이라도 되는 양 쪽쪽 빨아 댔다. 다음 컷에는 연우가 하지 말라는 듯이 손을 뻗어 재하의 가슴팍을 밀어내는 모습이 담겼다.
그리고 마지막 촬영을 뜻하는 신호음이 울리자, 재하는 토끼 옷의 귀 부분을 잡고 연우의 얼굴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연우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깨닫기도 전에 입술이 맞부딪쳤다. 조용한 촬영 부스 안에 혀가 얽히는 질척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번 시작한 입맞춤은 사진이 인쇄돼 나오고도 한참이 지날 때까지 쉬이 끝나지 않았다.
강재하는 각각 한 장씩 인출된 윤연우 본캐와 부캐 사진을 번갈아 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더니 도저히 고를 수 없다며 상대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하나 골라 봐. 네가 둘 중에 뭐 가질래?”
가발을 쓰고 화장을 한 사진과 남자들이 키스하는 커밍아웃 사진 중에 고르라고? 참으로 어려운 선택지였다. 둘 다 남들에게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될 사진이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장 사진은 평생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반면 스킨십 사진은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을 듯했다. 부끄럽긴 해도 사진 자체가 싫지는 않았다. 연우가 두 번째 사진을 고르자 앞선 사진은 자동으로 재하의 차지가 됐다.
“다음에는 선배가 가발 쓰고 화장해.”
“음, 난 평생 그런 취미가 없었는데…….”
누군 있었는 줄 아냐고 항변하려 했으나, 본전도 찾지 못할 개소리였다. 기운을 쏙 빼 버린 두 번의 촬영이 끝나고, 둘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이 자주 찾는 단골 카페는 정해져 있었다. 커튼이 쳐진 가장 구석 자리가 그들의 전용석이었다. 나란히 앉아 커피 두 잔을 시켜 놓고 그들은 에어컨의 시원함을 즐겼다.
잡은 손에서 땀이 배어나는 날씨였다. 재하의 긴 손가락이 연우의 손바닥을 지분거리며 노골적인 신호를 보냈다.
이거…… 같이 자자는 뜻이지?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긁으면 성적인 의미라고 했다. 아이, 참. 이럴 거면 바로 집으로 가지, 카페는 왜 들렀대. 연우는 못 알아들은 척 새침을 떨며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상대가 별 반응이 없자, 재하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말했다.
“……눈 감아 봐.”
으이그, 이 뽀뽀 귀신아.
이렇게 키스를 하면 불이 붙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강재하의 집으로 가서 엉켜드는 수순이 예상됐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기엔 지난 2주간의 패턴이 늘 비슷했던 것이다.
내심 강재하와 하고 싶었던 연우는 못 이기는 척 눈을 감았다. 그의 오동통한 입술에 살짝 힘이 들어가면서 오리처럼 주둥이가 점점 튀어나왔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던 입술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손아귀에 딱딱한 물체 하나가 만져졌다.
“자, 이제 눈 떠도 돼.”
뭐, 뭐지. 연우는 황당해하며 눈을 뜨고 손을 내려다봤다. 손에는 아까 강재하가 발라 주었던 틴트가 들려 있었다. 재하는 연우의 손을 감싸며 틴트를 단단히 쥐게 도왔다.
“선물. 앞으로도 종종 여장하고 싶을 때 써. 괜한 어플 쓰지 말고.”
“…….”
“바를 때마다 내 생각 하고, 알았지?”
* * *
진한 스킨십이 적나라하게 담긴 사진은 연우의 지갑 깊숙한 곳에 봉인됐다. 신에게 맹세컨대, 연우는 그날부터 일주일 동안 단 한 번도 사진을 꺼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갑 속에 블랙홀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사진이 사라질 일은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선배, 혹시, 혹시 내 지갑에서 우리 사진 가져갔어?”
“아니.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네 지갑엔 손 안 대.”
농담에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자 연우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혹시나 싶어 자취방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사진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재하와 사진을 찍은 건 일주일 전이었다. 그사이 지갑을 들고 나갔던 날은 딱 두 번, 지난주 금요일 주종계약 모임과 이틀 전 애드스톰 회식 때뿐이었다. 다른 날에는 지갑을 들고 나가기 귀찮아 달랑 체크카드 한 장만 들고 다녔던 것이다.
“누군가가 훔쳐 간 게 분명해.”
“설마. 어디 흘린 걸 수도 있잖아.”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재하와 달리, 연우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사진을 실수로 흘렸을 가능성은 없었다. 남들에게 절대 보여서는 안 됐기 때문에 깊숙이 숨겨 뒀던 것이다. 사진은 똑딱이를 열어야 보이는 안쪽 공간에 들어 있었다. 재하에게 흘렸을 리가 없다고 설명하자 재하도 그제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진정해 봐. 소매치기일 수도 있잖아. 혹시 짚이는 사람은 없고?”
소매치기나 도둑의 소행은 확실히 아니었다. 지갑 안에 들어 있던 오만 원짜리 현금은 그대로였다. 현금을 놔두고 사진만 가져간 것이다. 범행 의도는 아마 개인적인 원한이나 호기심이겠지.
“잘 모르겠어…….”
연우는 주종계약 멤버들이 모였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 연우는 만취했지만 그 자리에는 커플의 은인이자 수호자, 은경이 있었다. 은경이 만약 그 사진을 봤다면, 아마 그대로 화채 그릇에 토를 했을 것이다. 그는 그만큼 바퀴벌레 커플에게 관심이 없었다. 사진을 가지고 갈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반면, 또 다른 주종계약 멤버, 김상진은 충분히 지갑에 손을 댈 법한 위인이었다. 그러나 함께 있던 은경이 지척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니 범행은 불가능했다.
“그러면 동아리 회식 날일 가능성이 큰데…….”
회식 날이라고 하면, 몇 명 용의자가 있었다. 지갑은 동아리 회식을 하는 내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연우는 지갑을 방치한 채 어머니랑 3분, 그리고 주진영이랑 5분 정도 통화를 하러 자리를 비웠었다. 누군가 지갑에 손을 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날 연우의 옆자리에는 이준형이 앉아 있었다. 연우가 회식 장소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비어 있는 자리가 이준형 옆자리밖에 없었던 탓이다.
누가 사진을 가져갔대도 끔찍하긴 마찬가지지만, 그 주인공이 이준형이라면 특히 문제가 심각했다. 그는 윤연우에게 악감정이 있었고 강재하에게도 열등감이 있었다. 게다가 입이 싼 편이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음해하는 데 특출난 능력이 있었다. 동아리에서 사진을 가장 악독하게 활용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한 명만 지목하라면 바로 이준형이었다.
“음, 이준형이라…… 그건 좀 안 좋네.”
강재하도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강재하는 노트를 꺼내더니 정갈한 글씨체로 ‘후보 1. 이준형’이라고 적었다. 지금으로써는 그가 가장 의심스러운 용의자였다. 일단 ‘남의 지갑을 열어서 무언가를 가져간다’는 일반적이지 않은 행위는 딱 이준형 같은 놈들이 할 법한 짓이니까.
한번 의심을 시작하고 나니 회장의 모든 순간, 모든 행동이 이상했다. 휴지 케이스를 던져 피를 낸 사건 이후로 이준형은 의식적으로 윤연우를 피해 다녔다. 연우뿐 아니라 강재하도 세트로 멀리했고 말이다. 제가 한 짓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회식이 파할 무렵, 이준형은 갑자기 윤연우한테 다음 공모전 때 같은 조를 할 생각은 없냐느니, 너는 연애는 안 하냐느니 하며 쓸데없이 말을 걸었다.
“수상하지 않아? 갑자기 왜 친한 척을 하냐고.”
“그치만, 동아리 게이 커플을 발견한 사람의 반응이라기엔 무리가 좀 있는데. 다른 사람은 어때?”
다른 사람이라. 연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갑에 손을 댔을 법한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2차 가다가 길에서 지갑을 떨어뜨렸는데…… 서계훈 선배가 주워 줬었어.”
“서계훈?”
“응. 근데 계훈 선배는 뭐,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 가능성이 없진 않지.”
재하가 이준형의 이름 밑에 ‘후보 2. 서계훈’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연우는 재하가 서계훈을 용의선상에 올려놓은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태어나서 서계훈처럼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서계훈이라고 하면, 제 눈앞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해도 눈만 끔뻑이며 모른 척했던 인간이 아닌가. 하지만 강재하는 서계훈을 오히려 이준형보다도 유력한 용의자로 여기는 듯했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지.”
“……무슨 뜻이야?”
연우는 재하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명을 요구하듯 빤히 쳐다보자, 재하가 옅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보기보다 계훈이가 나한테 관심이 많거든. 너한테도 그렇고.”
“계훈 선배가……?”
재하는 연우에게 숨겨 왔던 동아리 혈투 뒷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연우는 친하지도 않은 선배가 이준형과 윤연우의 다툼을 녹음해서 강재하에게 전달했다는 전말을 듣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강재하의 설명을 듣는 동안 팔에 닭살이 돋아날 정도였다.
“……그날, 그래서 우리 집 앞에 온 거였어?”
“응. 나 감싸 주다 다쳤다니까 걱정돼서.”
“난 또. 그때부터 날 좋아했는지 알았네.”
연우의 중얼거림에 강재하가 시원하게 웃더니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강재하는 서계훈의 이름 밑에 ‘후보 3’이라고 쓴 뒤 그 뒤에 들어갈 이름을 비워 놓았다.
“상진이랑 은경이랑도 술 마셨잖아. 그날은 지갑 갖고 갔어?”
“응. 근데 은경이는 그럴 리가 없고, 김상진은 아니야.”
연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더니 이내 설명을 덧붙였다.
“……걔라면 아마 현금도 가져갔을 테니까.”
강재하도 연우의 날카로운 분석에 동의했다.
“그리고 걔는 단순한 놈이라, 아마 그거 봤으면 바로 나한테 물어봤을 거야. 너 게이냐? 하고.”
연우는 며칠 전에 있었던 주종계약 모임을 떠올렸다. 김상진은 윤연우가 연애를 하는 것 같은데 자신에게 언질조차 없다며 진심으로 분노했다. 내심 미안해진 연우가 사과하자 죄를 술로 씻어 내야 한다며 연거푸 잔을 채웠다.
그 탓에 만취하지 않겠다는 재하와의 약속을 어겼고, 다음 날 연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해야 했다. 재하는 다음번에는 침대에서도 가발을 써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겨우 화를 풀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냥 가발을 씌우려고 화난 척했던 것 같다. 애초에 화가 났던 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너무 걱정하지 마. 혹시 누가 수상하게 굴면 바로 나한테 말하고.”
아무튼, 전부 다 심증일 뿐 확신범은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엄한 사람들을 의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가 술에 만취해 사진을 꺼내 버린 걸 수도 있었다. 연우도 자기 자신을 믿기 힘들었다. 그는 민망함과 자괴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미안해…… 내가 잘 관리했어야 하는데.”
“아냐. 애초에 그런 걸 찍자고 한 내 탓이지.”
강재하는 화를 내지 않았다. 연우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재하에게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엄포를 놨으면서, 정작 자신은 열애의 증거가 담긴 사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잃어버렸다.
그러나 재하는 오히려 자신의 잘못이라며 연우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연우는 젖은 눈을 들어 올렸다.
“이러다가 동아리에 알려지고…… 학교에도 소문나고…… 선배 집에도 알려지면 어떡해?”
“괜찮아. 그럼 같이 미국서 옥수수밭 일구면서 살지, 뭐.”
혹시 모르니까 영어 공부 지금부터 열심히 해 놔. 강재하가 농담처럼 덧붙인 말에 미안한 마음은 더 커졌다. 재하는 연우를 자신의 팔 안에 완전히 가두고 아기를 어르듯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옆에 있을게.”
그러자 먹구름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밝은 빛이 비추는 것 같았다. 연우는 강재하의 오롯한 사랑을 느꼈다. 그와 입술을 겹치고, 몸이 얽힐 때보다 더 충만한 느낌이었다.
그는 온몸과 마음에 조금씩 스며드는 사랑의 감정을 만끽했다. 상대로 인해 곤경에 처했음에도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 아마 그것이 사랑의 본질일 것이다.
“흑…… 미안.”
연우가 울려고 하자, 재하는 우리 수도꼭지 또 우네- 하고 부드럽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상대가 다시 한번 괜찮다고 속삭이자 연우도 조금은 진정이 되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는 마법 같은 힘이 있어서, 정말로 다 괜찮을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위로가 지닌 힘은 대단했다. 이번 사건으로 최악의 상황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강재하와 함께 있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대책 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우야, 이 안쪽 주머니에 넣어 놨다고 했지?”
“응.”
“네 지갑 좀 잠깐 나한테 맡겨 놓을래?”
연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재하가 뜻 모를 제안을 했다.
“응? 왜?”
“범인을 찾아보려고. 한 일주일만 빌려줘.”
지갑을 가져가서 범인을 어떻게 알아본다는 거지. 사이코메트리 능력자라도 찾아볼 건가.
참으로 이상한 부탁이었지만, 연우는 그의 하해와도 같은 사랑에 감동받아 그냥 알겠다고 했다. 그는 카드에 들어 있는 신분증과 카드를 모두 꺼냈다. 그러고는 군말 없이 지갑을 재하에게 건네주었다.
* * *
연우는 동아리 내 소문을 긴밀하게 체크했다. 동방 문에 일부러 귀를 대 보기도 하고, 간이 커튼에 자객처럼 숨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들을 두고 이상한 소문이 도는 낌새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우의 신경 과민 증세도 서서히 옅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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