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아기를 만나기까지 (17/20)

17. 아기를 만나기까지

출산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하빈은 세원의 가족들과 다시 한번 식사를 하기로 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집을 정리했다. 오늘은 무려 세원과 자신이 사는 집에서 저녁밥을 먹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며 세원과 집을 치우고 장을 보러 마트를 다녀왔다. 뭘 준비해야 할지 몰라 미리 메모장에 사야 할 것들을 잔뜩 써 놨는데 너무 긴장한 탓에 메모를 들고 가지 않아 집에 한 번 더 왔다 가야 했다.

마트에 간 세원과 하빈은 우선 시식 코너를 한 바퀴 돌며 만두며 소시지를 집어 먹고 쇼핑을 시작했다. 뭘 만들려는 건지 하빈은 각종 양파며 파프리카, 가지, 당근 등의 채소를 사고 소고기를 카트에 집어넣었다. 월남쌈도 찾아 넣고 시중에 파는 소스도 열심히 골라 넣었다.

이 정도면 됐나? 하빈이 다시 메모를 확인했다.

“다 샀어? 그러기에 왜 귀찮게 집에서 먹자고 했어. 그냥 나가서 먹으면 편하잖아. 안 그래도 임신해서 더 힘들 텐데.”

“그래도 직접 해서 드리면 잘 보이고 좋잖아요. 맛도 있고. 아니다, 맛이 없을 수도 있으려나?”

어색하게 웃는 하빈에 세원은 절대 아니라며 뭘 해도 맛있을 거라는 응원의 말을 보탰다.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하빈은 그래도 이왕 하는 거, 그 누구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세원의 부모님께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요리를 준비했다.

집으로 돌아와 주방에 서서 채소를 다듬으려 하자 세원이 이 정도는 자신이 해 주겠다며 하빈을 앉혀 두고 칼을 집어 들었다. 하빈은 의자에 앉아 세원을 부려먹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이것저것 곧잘 하는 세원 덕분에 하빈은 가만히 앉아서도 요리를 할 수 있었다.

“그거 세로로 썰어 주세요.”

“이렇게 썰라는 거지?”

“네.”

“알았어. 근데 뭐 만들려는 거야?”

“비밀이에요.”

하빈이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요리는 내가 다 하고 있는데 뭐가 비밀이라는 거야? 세원이 중얼거리며 칼을 움직였다. 한참 지지고 볶던 세원이 준비를 다 해 두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하빈이 이제 다 돼 간다며 프라이팬을 잡았다. 세원은 그 옆에 서서 하빈을 지켜봤다.

“이거는 그냥 볶을 거고…….”

“그게 끝이야?”

“네.”

“그럼 왜 나 안 시키고?”

“그래도 조금은 해야지 제가 한 요리가 되죠.”

“그런 거야?”

세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하빈이 고운 손으로 월남쌈을 싸서 접시 위에 예쁘게 올려 놓았다. 맛있겠네. 세원의 말에 하빈이 하나 더 만들어 입에 넣어 주고는 어때요? 하고 물었다. 잠시 맛을 음미하던 세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맛있어. 역시 내가 해서 그런가 맛있네.”

“제가 했어요!”

“내가 했지.”

“아닌데!”

자기가 했다고 고집을 부리는 하빈에 세원은 결국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밥상을 차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오셨다! 하빈이 서둘러 손을 씻고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세원의 부모님이 들어오며 집안을 한 번 둘러봤다.

“잘 지내고 있었나 보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아버님 어머님.”

하빈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세원의 아버지가 괜찮다며 어깨를 붙잡았다. 어지러울 텐데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말에 하빈은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고는 두 사람이 들고 온 물건들을 받아 들었다.

“이건 뭐예요?”

세원이 물었다. 하빈은 보자기에 쌓인 물건이 궁금해 요리조리 살폈지만 도통 알 수 없었다. 세원의 어머니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너희 먹으라고 간장게장하고 양념게장 좀 해 왔다.”

“우와…….”

하빈이 놀란 얼굴로 세원의 어머니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소파에 겉옷을 벗어 놓고는 손을 씻고 오겠다며 욕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하빈은 게장을 주방에 가져다 놓고 밥을 퍼 식탁 위에 놓았다. 세원의 부모님이 좋아하실지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뒤로한 채 모두 자리에 앉았다.

“이걸 다 준비했어?”

“하빈이가 어머니랑 아버지 드린다고 했어요.”

세원의 말에 세원의 어머니는 하빈을 쳐다보고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애도 있으면서 그렇게 많이 움직이면 힘들어서 어떡해.”

“괜찮아요. 많이 드세요.”

“너희들도 어서 먹어라.”

세원의 아버지가 먼저 숟가락을 들고 뒤이어 다들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은 자신이 한 것치곤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하빈은 괜히 기대하며 세원 부모님의 반응을 지켜봤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밥을 먹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맛있네. 간도 딱 맞고. 준비하느라 애썼다.”

“그러게, 잘했네.”

세원 아버지의 말에 세원의 어머니도 가볍게 맞장구를 쳤다. 잘했다는 칭찬에 하빈은 기쁜 마음으로 해맑게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 하빈도 안심하고 맛있게 밥을 먹었다.

“아기방도 꾸몄다면서?”

“네. 이따 보여드릴게요.”

“준비는 잘 해 뒀어?”

“알아서 잘 해 뒀어요.”

“매번 알아서 잘 한다고만 해서 걱정이야. 그래놓고 사고 치는 게 한두 번이니?”

“아기방 꾸미는데 무슨 사고를 치겠어요. 괜찮다니까요. 제가 애도 아니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어머니의 말에 세원이 투덜거렸다. 아이 같은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늘 어른스러운 세원 씨도 부모님 앞에 있으면 어리게 느껴지네. 하빈이 부럽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행복이었다.

세원의 가족들은 식사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끼어들기 어려운 대화에 하빈은 그저 바라보며 밥을 먹었다. 세원의 회사 이야기도 하고 가족 이야기도 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지나가 버렸다.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커피를 내려 거실로 가져갔다.

세원은 다 먹은 식탁을 정리하고 거실로 나와 함께 커피를 들었다. 그가 없는 동안 하빈은 세원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며 주스를 홀짝였다. 세원의 부모님이 집안을 둘러보는 모습은 오랜만에 오는 듯해 보였다. 하빈이 입을 열까 말까 고민하다 정적을 깨고 물었다.

“오랜만에 오시는 것 같으신데 세원 씨네 집에 잘 안 오세요?”

“얘도 다 커서 혼자 잘 살겠거니 하고 잘 안 오지. 집안일 봐주시는 분도 계실 테고.”

“나도 본가 잘 안 가니까 가족들 만날 일이 별로 없지.”

“아아, 그렇구나…….”

생각해 보면 세원과 이 집에서 함께 지내던 꽤 긴 시간 동안 세원 부모님의 방문이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세원을 믿고 있다는 뜻이겠지. 하빈이 세원을 바라보고 있는데 세원의 아버지가 하빈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아기 낳을 때 다 되어가서 걱정되겠네.”

“네? 네……. 조금 무서워요.”

울상을 하고 대답하자 세원이 손을 붙잡아 왔다.

“아기 낳을 때 우리도 가야겠다. 그치?”

“……그러게요.”

세원의 부모님이 오신다는 말에 하빈은 놀라 손을 저었다. 안 오셔도 되는데! 세원의 어머니는 그런 하빈을 쳐다보곤 말했다.

“세원이도 걱정되니 가 봐야지. 물론 너랑 아기도 걱정되고.”

“그러시면 오셔도 되는데……. 정말 부담 안 가지셔도 괜찮아요. 괜히 죄송해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자 세원이 왜 그러냐며 하빈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고개를 들자 세원은 괜찮다며 하빈과 눈을 맞췄다. 올곧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언제나 좋았다. 품을 파고들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꾹 참은 하빈이 세원의 부모님을 바라봤다.

“세원이 너, 친구들이 다 알게 됐다면서.”

“네? 뭘요?”

“아기 생겨서 결혼하는 거.”

“아아, 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하여간 처신을 똑바로 했어야지. 다른 집에 부끄러워서 혼났네.”

세원 어머니의 타박에 괜히 자신이 눈치가 보여 하빈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세원은 뭐가 어떻냐며 대꾸했다. 태연한 태도에 화가 난다는 듯 세원의 어머니는 짜증을 내며 잔소리를 했다. 끊이지 않는 잔소리에 세원도 그만하라며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말하면 좀 들어.”

“듣고 있어요. 듣는데 말을 너무 많이 하시잖아요.”

“내가 지금 잔소리 많이 한다고 뭐라고 하는 거니?”

“잔소리 많이 하시잖아요. 하빈이 앞에서 저한테 잔소리하시면 제가 뭐가 돼요.”

“뭐가 되긴, 잔소리 듣는 애 아빠 되는 거지. 넌 왜 그렇게 매사에 제멋대로야.”

“제가 언제 그랬어요.”

“그만해, 그만. 그러다 싸우겠어.”

세원의 아버지가 중재하고 나서야 입이 닫힌 두 사람은 씩씩거리며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이 똑 닮아 어쩐지 웃음이 났다.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데 세원이 이렇게 앉아 있지 말고 아기방이나 구경하자며 지난번에 꾸며 놨던 아기방으로 안내했다. 침대도 있고 아기 옷장도 있었다. 세원의 어머니는 방을 둘러보며 뭐는 샀냐, 뭐는 안 샀냐 묻기 바빴다. 하빈은 열심히 대답하며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잘했네.”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괜찮게 준비했어.”

“그래요? 이제 아기만 낳으면 될 텐데.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뭐가 걱정이야.”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세원의 엄마가 새삼 존경스러워지는 하빈이었다. 세원 씨랑 세원 씨 형제들이 이렇게 클 때까지 임신부터 출산, 육아를 여러 번 하신 거잖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를 따라가는데 세원이 왜 그러냐며 다가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빈은 웃으며 대답했다. 차마 제 생각을 말할 순 없었다.

세원의 부모님은 집을 조금 더 둘러보다가 더 늦어지기 전에 집에 가 보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더 있다 가시지…….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어 하빈이 입만 벙끗거리고 있는데 세원은 기다렸다는 듯 조심해서 가시라고 부모님 등을 떠밀듯이 내보냈다. 하빈은 그런 세원이 마음에 들지 않아 팔뚝을 퍽퍽 때렸다.

“왜.”

“좀 더 있다가 가셔도 되잖아요.”

“근데 지금 가신다잖아.”

“그래도 더 계시라고 하면 되지 그렇게 가라고 할 필요는 없잖아요.”

“내가 언제 가라고 그랬어.”

“그랬거든요?”

투덕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세원의 부모님은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다 집을 나섰다. 하빈은 자리에 서서 꾸벅 인사를 하고 세원은 집 밖까지 나와 부모님을 배웅했다.

소파에 풀썩 앉아 숨을 들이마신 하빈은 테이블 위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보며 긴장을 풀었다. 와, 힘들었다……. 축 늘어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에 세원이 집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부모님 가시면 그렇게 편하게 있을 거면서 뭘 더 계시다 가라고 해.”

“그래도 더 계시면 좋은데.”

“그게 뭐가 좋아. 하나도 안 좋아. 설거지할 테니까 쉬고 있어.”

“내가 해야 하는데 피곤해서 손가락도 못 움직이겠어요.”

“괜찮아, 내가 할게. 네가 무슨 설거지를 해.”

“그래도…….”

“언제부터 설거지했다고.”

“저도 설거지했거든요!”

하빈이 짜증을 내며 소파에 엎어져 다리를 버둥거렸다. 귀여운 모습에 세원이 다가와 얼굴에 입을 맞추며 알겠다 속삭이고는 커피잔을 챙겨 주방으로 사라졌다. 하빈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잔뜩 피곤했던 몸이 가라앉자 졸음이 쏟아졌다.

“너무 졸린데…….”

“졸리면 들어가서 자.”

“움직이기 싫어요.”

“그러면 거기서 자. 내가 옮겨 줄게.”

몸을 뒤척이며 돌아누워 잠을 청했다. 배가 너무 많이 나와 자세가 불편했다. 하빈이 혼자 작게 짜증을 내다 잠들고 나서야 설거지가 끝난 세원은 하빈을 안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올려놓고 이불을 덮어주자 꼬물거리며 더욱 파고드는 몸짓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 * *

예정일이 가까워 올수록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언제 양수가 터질지 모를 일이었다. 진통이 시작되면 바로 병원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가방도 챙겨 침대 옆에 놓아뒀다. 마음의 준비가 다 되고 나서 낳을 수 있게 예정일에 수술하고 태어나면 좋겠는데……. 하빈의 작은 바람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예정일을 이틀 앞둔 토요일 밤, 하빈의 배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자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깨어난 하빈이 어쩔 줄 모르고 배를 붙잡은 채로 끙끙 앓으며 세원을 깨웠다. 자다 깬 세원은 괴로워하는 하빈을 보고 잠시 상황파악을 하지 못해 허둥거렸다.

“아파? 어디가 아파, 응?”

“배 아파요……. 배 아파…….”

“배 많이 아파? 병원 갈까?”

“응…….”

세원이 마른세수를 하며 놀란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걷어 냈다. 아직 양수는 터지지 않은 것 같은데 땀에 옷이 잔뜩 젖어 있었다. 아파 움직이지도 못하는 하빈을 부축해 일으키자 굳이 옷을 갈아입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아프다며, 그냥 그 옷 입고 가.”

“싫어요…….”

“왜, 다들 그러고 그냥 와.”

“싫어요, 옷 갈아입을래.”

“그래, 그래라.”

잔뜩 투정을 부리며 옷을 갈아입겠다고 짜증을 내는 하빈을 이기지 못하고 세원이 옷을 받아 들었다. 하빈의 옷을 갈아입힌 세원은 가방을 챙겨 하빈을 붙잡고 조심조심 집을 나왔다. 그새 진통이 나아졌는지 또 얼굴이 조금 펴진 모습에 세원이 괜찮냐며 하빈을 살폈다.

“아팠다가 또 금방 안 아팠다가 해요.”

“원래 그렇대.”

“다시 아프면 어떡해…….”

“얼른 가서 언제 수술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

“네…….”

세원이 병원으로 운전을 하고 가는 동안 하빈은 핸드폰으로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지환은 늦은 시간에 왜 전화냐며 짜증을 냈다가도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간다는 소리에 어느 병원이냐며 놀란 목소리로 물어왔다.

[나 지금 옷만 갈아입고 출발할 테니까 가서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 빨리 와…….”

[어. 조금만 참아.]

“형 나 무서워.”

[야, 무섭긴 뭐가 무서워. 괜찮아.]

괜찮다며 달래 주는 형의 말에 하빈이 창밖을 바라보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세원도 부모님께 전화를 넣고, 병원에 도착하기 무섭게 다시 진통이 시작됐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듯이 주저앉자 사람들이 놀라 하빈을 쳐다봤다.

세원이 하빈을 안아 들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부터 계속 진통이 와서 아기 낳아야 할 것 같은데 수술하기로 했었거든요.”

“잠시만요, 확인해 드릴게요.”

그동안 세원은 하빈을 앉혀 놓고 등을 쓸어내리며 숨을 가다듬게 도왔다. 간호사는 의사 선생님이 안 계셔서 지금 당장 수술은 할 수 없고 일단 주사부터 맞아야 한다며 하빈을 데려오라 말했다. 세원은 다시 하빈을 안고 병실로 뒤따라 들어갔다.

“산모님, 많이 아파요?”

하빈은 간호사의 물음에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인상을 쓰며 몸을 웅크렸다.

“의사는 언제 오는데요?”

세원의 물음에 간호사는 잠시 시계를 보더니 삼십 분 정도 걸린다며 링거를 놔주고 사라졌다. 하빈은 팔에 링거 바늘을 꽂은 채로 숨을 헐떡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임신 안 하는 건데. 하빈이 울며불며 세원을 찾았다. 세원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하빈에게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많이 아프지, 의사가 지금 오고 있대.”

“아파…….”

“주사 맞다가 수술하러 들어간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참자.”

진통의 주기가 점점 더 짧아지고 있었다. 눈이 뒤집힐 것 같은 통증에 하빈이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 정신을 반쯤 놓은 채 끙끙 앓고 있었다. 아직도 의사는 오지 않은 건지 간호사는 소식이 없었다.

짜증이 난 세원이 잠시만 기다리라며 나가서 보고 오겠다는 말에 하빈이 손가락 끝을 잡으며 가지 말라 그를 붙잡았다. 하빈의 손에 세원은 움직이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섰다.

“보고 있는 것도 힘든데 넌 얼마나 힘들까.”

“너무 아파…….”

아프다는 말만 중얼거리는 하빈에 세원이 땀으로 잔뜩 젖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금방 수술하러 들어가면 괜찮을 거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보다 지환이 더 빠르게 도착했다. 정말 날아서 오기라도 한 건지 병원으로 허겁지겁 뛰어들어온 지환이 하빈을 찾아 댔다.

하빈이 누워 있는 병실로 들어온 지환은 아파서 울고 있는 동생을 보고 놀라 다가왔다.

“하빈아! 많이 아파?”

“형, 나 아파…….”

“좀만 참아. 조금만 더 참아. 금방 괜찮아질 거야.”

지환이 하빈을 끌어안고 눈물을 훔치며 몸을 토닥였다. 하빈은 그의 품에 안긴 채 끅끅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뒤따라 들어온 지환의 남편을 마주한 세원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서서 하빈과 지환, 두 사람을 지켜봤다.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좀 떨어져.”

세원의 말에 지환이 짜증을 내며 세원을 밀쳐냈다.

“지금 그게 중요해? 애가 아픈데?”

“그러니까 보호자인 내가 데리고 있겠다고. 넌 나가서 기다려.”

“어떻게 나가서 기다려!”

“어차피 곧 있으면 수술 들어가야 해. 얼른 비켜.”

억지로 하빈에게서 지환을 떼어낸 세원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작은 몸을 품에 안고 쓰다듬으며 지환을 쳐다봤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에 왜 그러냐며 세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환은 짜증을 내며 침대에 걸터앉아 하빈의 손이며 발을 주물렀다.

“사문 씨도 애한테 한 마디 좀 해 봐! 여기까지 와서 한마디도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애가 이렇게 아파서 끙끙대고 있는데.”

“둘이 붙어 있길래 잠깐 기다렸지. 처제, 금방 아기 낳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멀찍이 떨어져 눈치를 보며 말하는 사문에 지환은 짜증을 내다 다시 안쓰럽다는 얼굴로 하빈을 바라봤다. 훌쩍이던 하빈은 진통이 조금 나아졌는지 언제 의사가 오냐며 헐떡이는 숨으로 세원에게 물었다. 세원은 일어나려다 말고 발로 지환을 툭툭 건드려 말을 걸었다.

“아, 왜 건드려!”

“야, 김지환. 나가서 의사 언제 오는지 좀 물어봐.”

“그걸 왜 내가 해. 네가 갔다 와.”

“나도 하고 싶은데 하빈이가 안 보내주니까 못 물어보고 있어. 하빈이가 궁금하대.”

“……기다려.”

지환이 밖으로 나가고 하빈은 다시 찾아온 진통에 고통스러워하며 세원을 붙잡았다. 밖에서는 지환이 잔뜩 짜증을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 세원이 사문을 바라보고 가만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나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세원의 말에 사문은 고개를 저었다.

“알아서 하겠죠.”

이미 체념한 표정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두 사람은 다시 하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토록 아파하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까지 마음이 아팠다. 둘째는 절대 못 낳겠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환이 잔뜩 성을 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거칠게 문을 쾅 닫은 지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무슨 병원이 이래!”

“왜.”

“24시간 한다면서 왜 의사가 없어!”

“담당 의사한테 수술받아야 해서 그래. 퇴근했다가 지금 오고 있대.”

“그냥 아무한테 받아! 애 다 죽어가잖아!”

“그래서 어디래. 그거 물어보러 갔었잖아. 묻는 말에나 대답해.”

“아, 몰라!”

뭐가 어떻게 됐는지 의자에 앉아 씩씩대는 모습을 본 세원이 지환을 불렀다.

“야, 하빈이 좀 데리고 있어. 내가 물어보고 올 테니까. 뭐하는 거야, 그거 하나 물어보고 오는 게 뭐가 어렵다고.”

“말을 안 해 주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입으로는 화를 내면서도 손으로는 조심스럽게 하빈을 받아 안은 지환이 침대에 걸터 앉았다. 세원은 서둘러 병실을 나와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았다.

“김하빈 산모 담당 의사 언제 오신다고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아, 잠시만요. 확인해 드릴게요.”

“네. 빨리 부탁드립니다.”

세원이 기다리는 동안 간호사가 의사와 통화를 하는 듯 수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병실 안에 있는 하빈이 신경 쓰여 빨리 들어가고 싶은데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간호사는 전화를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원이 다시 간호사를 부르자 간호사는 그제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전했다.

“십 분이면 도착하신대요. 오시면 검사하고 바로 수술 들어가신다고 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검사도 해야 합니까?”

“네, 검사도 해야 하고 주사도 맞아야 하니까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빨리 좀 해 주세요.”

“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태평한 얼굴로 기다리라는 간호사의 말에 속이 타들어 가는 쪽은 세원이었다.

다시 병실로 들어오자 하빈은 그새 또 진통했는지 잔뜩 지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지환에게 기대 있었다. 세원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 지환을 밀어내고 옆에 앉아 하빈을 챙겼다. 지환은 뭐라고 하냐면서 세원에게 물었다.

“십 분 정도 걸린대. 근데 오고 나서 검사도 하고 주사도 맞고 수술해야 해서 더 시간 걸린다네.”

“그게 뭐야! 담당 의사면 빨리빨리 와야지, 왜 이렇게 늦게 와.”

“너라도 조용히 하고 앉아 있어. 시끄러우니까 더 머리 아파.”

세원의 타박에 지환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하빈의 손을 붙잡았다. 하빈은 더 짧아진 진통 주기에 신음만 흘리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시간이 어서 지나가길 바랐다.

“김하빈 환자, 검사 들어갈게요.”

얼마나 지났을까. 간호사가 들어와 하빈을 불렀다. 침대째로 이동하는 하빈을 바라보며 세원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각종 검사를 거친 하빈이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가족들은 하빈의 얼굴을 보기 위해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가 수술실 앞으로 왔을 때 세원이 하빈의 손을 붙잡고 잘 하고 오라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뒤로는 형도 보였고 어느새 도착한 세원의 가족들도 보였다. 하빈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너무 아프지만 지금이 지나면 다 괜찮을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만 잘 지나면 되겠지. 하빈이 눈을 감았다.

수술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았지만 세원에게는 일 분 일 초가 그저 억겁의 시간 같았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던 세원의 아버지는 초조하게 수술실 앞을 서성이는 지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빈이 형 되시는 분인가요? 저는 세원이 아빠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사돈어른.”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리 자리를 마련했어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만나네요.”

“그러게요. 제가 신경 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에 세원의 어머니가 다가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이 와중에 인사를 하는 세 사람을 보고 있자니 답답한 마음이 드는 세원이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리는데 수술실 안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세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기 태어났나 본데?”

“아기 잘 태어났나?”

가족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수술실 문 앞으로 달려가 기웃거렸다. 한참 뒤에야 수술이 끝났다는 표시가 뜨고, 뒤이어 수술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의사가 나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스크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아 하빈이 어떤 상태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세원은 의사를 붙잡고 수술은 잘 끝난 거냐며 물었다.

“수술도 잘 끝났고 아기도 건강합니다.”

“산모는 괜찮은 거죠?”

“네. 회복실로 옮기실 거니까 깨어나시면 그쪽에서 만나시면 됩니다.”

의사의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된 세원이 잔뜩 긴장했던 몸을 풀며 한숨을 내뱉었다. 세원의 부모님은 아기가 보고 싶다며 간호사를 찾았다.

“아기는 병실 가 계시면 보여드릴게요. 가서 기다려 주세요.”

“네.”

다들 하빈이 있을 병실로 자리를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취가 다 풀리지 않아 잠들어 있는 하빈이 눈에 들어왔다. 세원은 재빨리 다가가 하빈의 얼굴을 쓰다듬으려다 잠에서 깰세라 만지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불룩 솟아 있던 배가 어느새 푹 꺼져 있었다.

세원의 가족들과 지환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 간호사가 아기를 데리고 들어왔다. 포대기에 싸여 있는 아기의 머리는 세원의 주먹보다도 작았다.

세원이 조심스레 아기를 안아 들고 가족들에게 데려갔다. 지환은 사진을 찍어야겠다며 핸드폰을 꺼내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세원의 부모님도 아기가 예쁘다며 웃음꽃을 피워냈다.

“어쩜 이렇게 작고 귀엽지.”

“진짜 작다.”

“그러게……. 한 손에 다 잡히겠다.”

간호사는 다시 아기를 받아 안고 산모가 깨어나면 연락을 달라고 말을 남긴 뒤 사라졌다. 세원은 손에 남아 있는 아기의 온기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하빈을 바라봤다. 오늘은 단지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 * *

눈을 뜨자 한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춥고, 배가 허전했다.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들어 배를 만지작거렸다. 푹 꺼진 배에 그제야 아기를 낳은 게 실감이 났다.

하빈이 정신을 차리자 가족들이 다가와 괜찮냐며 하빈에게 말을 걸었다. 어지러운 정신에도 괜찮다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아기는?”

“아기 잘 태어났어.”

“아기 건강해? 손이랑 발 다 있어?”

“다 있지. 건강해.”

울컥 감정이 북받친 하빈이 훌쩍이자 세원이 눈물을 닦아 주며 하빈을 끌어안았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하빈은 세원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그런 두 사람을 가족들은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간호사에게 연락하자 다시 아기를 데려와 하빈의 품에 안겨 주었다. 처음 만나는 아기의 모습에 하빈은 놀란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너무 예쁘네.

하빈이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자 세원이 사진을 찍어야겠다며 하빈과 아기를 함께 두고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하빈은 지금 못생겨서 사진 찍히기 싫다고 짜증을 냈지만 세원은 가볍게 무시하고 잔뜩 사진을 찍었다.

잠시 후 간호사와 함께 아기가 나가고, 그제야 투덜거리는 하빈에게 세원이 웃으며 배경화면을 자랑했다. 세원의 어머니는 그런 세원을 보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지환 역시 왜 저러냐는 얼굴로 세원을 쳐다봤다. 세원은 주변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자랑을 하고 있었다.

“배경화면 해야지.”

“아, 하지 말아요!”

“왜.”

“못생겼는데 배경화면 하면 어떡해요!”

“뭐가 못생겼어. 예쁜데?”

“짜증 나, 진짜…….”

움직일 수 없어서 핸드폰도 뺏을 수 없었다. 얄미운 세원을 그저 바라보고 있는 수밖에 없는 하빈이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보며 웃고 있는데 지환이 다가와 하빈의 손을 붙잡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법 형다운 모습으로 말을 걸어 왔다.

“아기 낳으라 수고 많았어. 너 하는 거 보니까 진짜 나는 아기 못 낳을 것 같아. 너 큰일 했어.”

“아냐, 나도 그냥 주사 맞고 누워만 있었는데.”

“그래도 열 달 동안 아기 품고 있는 게 보통 어려워?”

“막상 임신하면 또 좋다?”

“됐어, 난 싫어.”

손을 휘휘 내젓는 형의 모습에 하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세원의 부모님도 다가와 하빈에게 한마디씩 수고했다며 말하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살아생전 받아본 적 없는 제 부모님의 손길 같아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근데 배가 납작한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느낌이 이상했다. 남산만큼 불렀던 배가 푹 꺼지자 허전하기도 했지만 너무 시리고 추웠다. 핫팩을 올려놓고 있어도 뼈마디가 시큰거리고 아려 왔다. 하빈이 이불을 끌어 올려 턱 끝까지 올려 덮자 세원은 춥냐며 하빈에게 다가와 볼을 쓰다듬었다.

“조금 추워요.”

“병실에 난방이 되려나.”

난방을 켜 주는 세원을 바라보다 하빈이 물었다.

“수술 얼마나 오랫동안 한 거예요?”

“한 시간 정도 한 것 같아.”

“그래요? 그렇게 길게 한 건 아니네.”

“그래도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데. 걱정 많이 했어.”

세원의 말에 하빈은 푸스스 웃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수술이 끝나고 병원에서 잠시 머물다 아기를 데리고 산후조리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사람을 시켜 시설이 가장 좋은 곳을 찾아 예약했다고 하더니 정말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온갖 최신식 설비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스파부터 시작해 마사지 서비스도 있었고 족욕 시설에다 요가와 필라테스 수업도 진행하고 있었다. 방은 호텔 스위트 룸처럼 침대 방과 소파가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었다. 커다란 소파는 어른 한 명이 자기에도 충분했지만 이미 침대만으로도 세원과 함께 지낼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아기가 자는 곳을 CCTV로 관찰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세세한 시설까지 전부 신경 써서 준비해 놓은 게 눈에 들어와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데서 편하게 지내다 가는 거구나. 하빈은 다른 아기 엄마들과도 친해져 이런저런 육아 팁을 얻었다.

“식사는 잘 나오네.”

“다 맛있어요.”

“간식도 괜찮아?”

“네. 낮에는 간식으로 죽 나왔어요.”

“죽? 무슨 죽 나왔어.”

“흑임자 죽이었나…….”

“맛있었어?”

“먹을 만했어요.”

퇴근한 세원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함께 조리원에서 생활하는 덕분에 세원은 이곳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괜히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게 아닐까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세원은 그저 괜찮다며 쉴 수 있을 만큼 쉬라는 말을 해 왔다.

“그리고 또 뭐 했어?”

“오늘 족욕하는데 다른 아기 엄마랑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그랬어요.”

“무슨 얘기 했는데?”

“그 아기 엄마는 자연분만했는데 엄청 힘들었다고…….”

종알종알 이야기를 늘어놓는 하빈의 말을 들으며 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치지도 않는지 저녁 식사를 마친 그는 하빈을 씻겨 주겠다며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부끄러운 마음에 매번 혼자서 하겠다고 말했지만 세원은 언제나 자신을 가만히 놔두질 못했다.

결국 오늘도 가만히 앉아 그의 손에 몸을 맡긴 하빈이었다.

“마사지 매일 받으니까 어때?”

“좋아요. 몸도 풀리고 아픈 것도 덜하고.”

“다행이네.”

“여기로 오길 잘한 것 같아요.”

“그러게.”

하빈이 웃으며 세원이 뿌려 주는 물에 세수를 했다. 세원까지 샤워를 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아기를 데리고 들어왔다. 잠들기 전에 아기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요 며칠 동안은 안기만 하면 울던 터라 하빈은 아기를 만지기만 해도 미안했었다. 하지만 안는 방법을 제대로 배웠으니 오늘은 실수하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다시 아기를 안아들었다.

“안 울릴 수 있겠어?”

“네!”

“잘해 봐.”

세원이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지켜봤다. 하빈이 어색한 포즈로 아기를 안아 들었다.

아기는 불편한지 엄마의 품에 안겨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직원은 불안한 마음에 손을 거두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한 채 옆에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하빈은 괜찮다며 아기를 다시 끌어안고 엉덩이를 토닥이다 등을 쓰다듬었다.

“오늘은 안 우네?”

“그쵸!”

“잘하네.”

칭찬하는 목소리에 하빈이 좋아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빈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는 졸음이 오는지 눈을 깜빡거리며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직원이 다시 아기를 데려가고 세원은 하빈에게 다가와 잘했다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세원 씨도 아기 안아 보지.”

“난 내일 하지 뭐.”

“그래요! 오늘은 내가 했으니까.”

“잘했어.”

그날 밤, 잘 시간이 다가오고 두 사람이 침대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주제는 아기 이름이었다. 하빈은 자신이 낮에 적어 놓은 리스트를 세원에게 보여주며 이 중에 고르는 게 어떻냐 물었다. 세원은 쭉 읽어 보고는 전부 별로라며 고개를 저었다.

“치……. 그럼 뭐가 좋은데요?”

“네 이름하고 내 이름하고 하나씩 섞어서 하자.”

“어떻게요?”

“세빈이 어때.”

“강세빈? 예쁜 것 같아요.”

“그치.”

“세빈이 좋다!”

하빈이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자 세원이 온종일 생각한 보람이 있다며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서 일도 안 하고 이것만 고민했어요?”

“어. 아무것도 안 하고 세빈이 이름만 정하고 있었어.”

“일을 해야죠!”

“일이 손에 안 잡히는 걸 어떡해.”

“으이그…….”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하빈이 세원의 볼을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입술을 쪽쪽이자 세원이 다가와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우응…….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세원의 손이 몸을 훑고 올라갔다.

아직 관계를 할 순 없었지만 몸이 자꾸 달아올랐다. 하빈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세원의 몸에 다리를 치댔다.

“이쯤 하고 자자.”

“이잉……. 세원 씨.”

“나도 하고 싶은데 못 하는 걸 어떡해. 네가 빨리 나아야지.”

“얼른 집에 가고 싶다.”

“그러게, 집에 가고 싶네.”

하빈이 입을 삐죽 내밀고 세원의 위에 엎드려서는 입술을 앙 깨물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허리를 감싸 끌어안고 뽀뽀를 하며 눈을 마주쳤다. 다시 키스가 이어졌다. 지금 당장 섹스할 수 없어도 좋았다. 키스하면 되지. 두 사람에게는 그 무엇보다 황홀한 키스였다.

며칠 뒤. 아기 엄마들 사이에서 하빈이 대기업 그룹 사모라는 소문이 돌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하빈은 그저 좋다며 마사지를 받고 다른 엄마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러 족욕실로 향했다. 다들 바쁘게 입을 놀리고 있다가 하빈이 등장하자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어요?”

하빈의 인사에 엄마들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들이었다. 서로서로 눈치를 보며 하빈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하빈과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엄마 한 명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하빈 씨.”

“네?”

“하빈 씨네 남편 일하는 곳이 꽤 유명한 곳이라면서요.”

“아……. 네? 네. 유명하긴 한데…….”

갑자기 세원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에 하빈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왜 이러지? 하빈이 무어라 묻기도 전에 엄마들이 달려들어 묻기 시작했다.

“그럼 그 기업 이사라는 게 맞아요?”

“우리 남편이 그 회사 다니는데 하빈 씨 남편이 이사님이라던데.”

“진짜로? 이사면 돈도 많이 벌겠다.”

“근데 그 그룹 막내아들이 이사로 있다고 하지 않았나?”

자기네들끼리 별별 이야기를 다 꺼내놓는 엄마들 속에서 하빈이 눈알을 굴리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극성맞은 대화 사이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직 어리기만 한 하빈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있었다. 여기서 한 마디라도 잘못 꺼냈다가는 그대로 먹잇감이 되어 버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래서 뭔데, 말 좀 해 봐요. 응?”

“어……. 저도 남편 일은 잘 몰라서…….”

적당히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엄마들이 아쉽다는 얼굴로 하빈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하빈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나와 방으로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하빈이 놀란 가슴을 안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당장 누군가에게 전화해 지금 이 상황을 알리고 싶었다.

“누구한테 전화하지? 세원 씨? 세원 씨는 바쁠 것 같은데……. 형? 형도 바쁘려나…….”

하빈이 잠시 고민하다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원은 어차피 저녁이 되면 만날 수 있으니 그때 말하면 되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한참 신호음이 간 끝에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고 있었는지 잠긴 목소리였다.

“형, 잤어? 오늘 평일인데 출근 안 했어?”

[나 오늘 감기 기운 있어서 휴가내고 잤어.]

“몸은 어때. 많이 아파?”

[아니, 괜찮아. 조금만 더 괜찮았으면 너 보러 가는 건데 감기 옮을까 봐 가지도 못했어.]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형 건강이나 잘 챙겨.”

[그래. 근데 왜 전화했어? 심심해서 전화했어?]

“아니, 나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면…….”

하빈이 조잘조잘 방금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지환은 가만히 듣고 있다 벌컥 성을 냈다.

[아니, 그 인간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길래 남의 남편이 뭘 하건 말건 그렇게 관심이 많아?]

“그치. 나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나와 버렸어. 앞으로 얼굴 어떻게 보지?”

[얼굴 어떻게 보긴 뭘 어떻게 봐. 그냥 얼굴 보지 마.]

“어떻게 안 봐. 여기 앞으로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한단 말이야.”

[일주일이나 더 있어? 지루하지 않냐?]

“아냐, 재미있어. 내가 형보다 더 좋을걸.”

[그건 그렇겠지. 출근도 안 하겠다, 얼마나 좋겠냐.]

부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하빈이 웃음을 터뜨렸다가, 다시 눈앞의 문제로 돌아왔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하빈이 목소리의 웃음기를 지우고 타박하듯 말했다.

“얼른 나한테 뭔가 해결책을 줘 봐.”

[무슨 해결책? 그냥 무시해.]

“무시한다고 무시가 돼?”

[그 사람들은 너 나갈 때까지 뒤에서 쑥덕거릴 사람들이야. 만나도 그냥 대충 인사만 하고 말아.]

“그럼 진짜 말 안 걸까? 나 친한 사람도 만들고 싶었는데…….”

[나중에 진짜 친한 사람 만들 수 있을 거야. 지금은 때가 아닌가 보지, 뭐.]

지환의 말에 하빈이 시무룩해져 옆에 있는 베개를 퍽 때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래. 사람이 때로는 포기도 할 줄 알아야 해.]

“이게 내가 포기한다고 되는 일인가?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거지?”

[그건 그렇지. 그러기에 왜 강세원 같은 사람을 만나? 나처럼 평범한 사람을 만나든가.]

“왜? 난 세원 씨 좋은데.”

[어휴……. 너희들끼리 잘 살아라, 그래.]

세원의 편을 들자 지환이 바로 짜증을 냈다. 하여간 형도 웃긴 사람이네. 하빈이 웃으며 지환에게 몸을 잘 챙기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지환과 이야기를 나누면 걱정했던 일들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도 덕분에 개운해진 하빈이 침대에 벌러덩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세원이 올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그동안 뭐 하지…….”

하빈이 핸드폰을 꺼내 게임도 해 보고 티비로 영화도 봐 보고 요가도 따라해 봤지만 도통 시간이 가질 않았다. 결국 하빈은 참다못해 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세원 씨…….”

[하빈아, 목소리가 왜 그렇게 시무룩해.]

“세원 씨 어디에요?”

[나 당연히 회사지. 넌 어딘데?]

“저도 당연히 지금 조리원에 있죠.”

[근데 왜 물어봤어?]

“그냥 세원 씨 보고 싶어서…….”

웅얼웅얼 말끝을 흘리자 세원이 웃으며 그래? 하고 즐겁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빈이 세원에게 칭얼거렸다.

“오늘은 몇 시에 끝나요?”

[글쎄, 모르겠는데.]

“왜 몰라요…….”

[언제 끝날지 봐야 알겠는걸.]

“힝……. 빨리 보고 싶은데.”

[나 빨리 보고 싶어?]

“네.”

[알았어. 빨리 갈 수 있으면 빨리 갈게.]

세원의 말에 하빈이 알겠다 말하고 넓은 침대에 그대로 엎어져 눈을 감았다. 졸리지도 않은데 너무 심심해서 잠이라도 자야 할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새 깜빡 졸았는지 누가 깨우는 느낌에 눈을 뜨자 세원이 웃으며 머리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빈이 놀라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뭐예요?”

“보고 싶다고 할 때 바로 짐 챙겨서 나왔지.”

“우와, 세원 씨 짱이다!”

“귀엽기는.”

세원이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을 받으며 하빈이 품을 파고들었다. 둘은 침대에 걸터앉아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하빈이 오늘 산후조리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세원은 별일 아니라며 무시하라 말했다. 지환에 이어 세원까지 무시하라니 무시할 수밖에 없었지만 앞으로 퇴원할 때까지 계속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계속 만날 텐데 신경 쓰여요.”

“뭐하러 신경 써. 괜찮아. 그것보다 이제 저녁 나올 때 됐지? 배고프겠다. 얼른 밥 먹어야지.”

“네. 세원 씨도 배고프죠?”

“나도 밥 같이 먹어야지.”

식사를 챙겨 주는 직원이 다녀가고 하빈이 소파에 앉아 밥을 먹으며 티비를 봤다. 티비에서는 정치 뉴스가 한창이었다.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티비를 보고 있는데 세원이 밥부터 먹으라며 숟가락을 뺏어가 손수 밥을 떠먹여 줬다. 아, 해. 세원의 손길에 하빈이 입을 벌리고 아기새처럼 고분고분 받아먹었다.

“잘 먹네.”

“집에 가면 밥 해 먹어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도우미 아줌마 쓰면 되잖아.”

“그래도…….”

“뭐가 걱정이야. 나도 같이할 건데.”

“세원 씨 없을 때 혼자 아기 볼 생각하니까 겁나서요.”

“도와줄 사람 데려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

세원의 말에 하빈이 그제야 안심하고 다시 밥을 먹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아기를 만날 시간이 되자 하빈은 행복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건강하게 있었으려나. 하빈이 아기를 품에 안고 얼굴에 볼을 비비적거리자 아기가 손을 움직이며 하빈을 붙잡았다. 그 모습에 하빈은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귀엽다.”

“예쁘네.”

“이렇게 보고 있으면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생각도 드는데.”

“그래? 자신감이 생겨?”

“조금은 생기기도 하고…….”

아기를 다시 건네고 나서야 몸에서 힘을 뺀 하빈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어요. 여전히 육아의 길은 어렵고 험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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