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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불편’.
요 며칠, 고신재의 상태를 묘사하기에 이 네 글자보다 적절한 건 또 없을 거다.
“…….”
오늘 그의 휴대폰은 꽤 조용하다.
좀 더 정확히는 몇 안 되게 메시지 수신 알람이 켜진 사람에게서 연락이 없다.
습관처럼 걸던 미소 하나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바닥만 한 기계를 내려다보던 신재는, 가득 쌓여있는 학과 사람들의 연락을 건조하게 지나친 다음 엊그제 밤 이후로 꽁꽁 얼어붙은 한 대화창을 툭 눌렀다.
[하마].
평소 같았으면 진작에 무슨 말이라도 했을 녀석이다.
과제가 많다느니 저녁은 뭘 먹는다느니 하는 것들을 조잘대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걸 볼 때마다 꼬박꼬박 링크를 남기기도 한다.
가끔 바빠서 휴대폰을 늦게 확인할 때면 혼자서 몇십 개의 메시지를 보내놓고 떠들고 놀다가, 제가 읽었을 때 ‘오 왔다 왔다’ 하며 반기기도 했었다.
하지만 하마는 이틀 전부터 말이 없었다.
하루는 그렇다고 쳐도, 이틀이나. 이런 적은 근 2년 간 없었다.
“무슨 바보짓인지….”
고운 입에서 드문 한숨이 작게 흘러나왔다.
무용과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허여멀건 한 인간이 하마일 리 없다고 자꾸 저 자신에게 새기듯 말해 봐도 근본적인 답답함은 하나도 해결이 안 됐다.
개강 첫날, 술집에서 엿들었던 그 카랑카랑한 주정의 당사자인 백한빈에게 그날 밤 고백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니 말이다.
웅얼거림 같은 고백이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귓가에 아른거렸다.
「나 걔가 너무 좋은데. 걔가 나한테 맨날 하마야, 하마야, 그러거든? 맨날 넌 힐 먹는 하마라고 웃는단 말야. 근데, 난 그 웃는 게… 그게, 난 너무….」
고신재는 그걸 떨쳐내려는 것처럼 이전보다 더 긴 한숨과 함께 “아, 진짜.” 하고 신경질적으로 컴퓨터를 켰다.
스무 살, 처음 게임을 시작한 이후 그는 아직까지도 습관적으로 힐러를 골랐다.
힐러가 없는 게임이라면 서포트형 캐릭터를 했고, 가장 하지 않는 건 딜러였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것처럼 고신재도 몇 년의 게임 경력 속에서 제가 딜러를 잡으면 필패라는 것을 익히 학습했기 때문이었다.
신재에게 온라인 게임은 드물게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손가락 몇 개만 움직이면 끝나는 휴식이었다.
누군가 게임에서 ‘원챔충’ 같은 단어로 한 캐릭터만 한다고 욕하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5년 동안 서툰 실력으로 손댔던 모든 게임을 함께한 친구이자 눈높이 선생님인 ‘하마’가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된다며 오냐오냐해서다.
하마와 저는 꼭 같이 게임만 했던 것도 아니다.
음성채팅 프로그램을 켜두고 과제를 하거나 책을 읽기도 했고, 어떤 날은 서로 컴퓨터 책상 위에 같은 간식거리를 두고 같은 영화를 보며 시답잖은 감상을 실시간으로 주고받았다.
이름도 얼굴도 모른 채 그저 모니터 앞에 앉아 시작한 관계라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편했다.
하마는 고신재의 유치한 투정을 다 받아줬다.
가끔은 ‘오늘 진짜 별로였어.’ 하면 폭탄이라도 떨어진 양 요란하게 무슨 일이냐며 호들갑을 떨며 무조건 제 편을 들었고, 고된 연습으로 지쳐서 잠마저 오지 않는 날에는 듣기 편안한 음악을 찾아 보내주기도 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어도 친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먼 언젠가는 직접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끔은 상상하기도 했다.
……지금은 힘들지만, 정말 언젠가는.
“아. 이 거지 같은 서버는 언제 바꿔.”
수강정정 마지막 날이기 때문일까.
고신재는 제 앞에 700여 명이 대기 중이라는 창만 뜨고 꼼짝도 하지 않고 다운된 수강정정 페이지를 미간을 찌푸린 채 노려보았다.
답을 물어볼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눈앞에서 치워버리려고 했던 신재다.
시간표가 보기 좋게 정리되는 딱 좋은 시간대의 교양이기는 했지만, 이걸 같이 듣자며 저를 조르고 졸랐던 김유민과 같이 과제를 진행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 미련 없이 버릴 생각이었다.
보고 듣고 고민하고 의심했던 모든 것에서 멀어지면 되리라 생각했다.
백한빈이라는 이름도, 그 파리하게 질린 얼굴도 눈에서 멀어지면 언젠가 잊게 될 거고. 그냥 제가 ‘아는’ 하마하고만 어울리면 그만일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때, 멈췄던 인터넷 창이 다시 매끄럽게 움직이며 수강정정 페이지가 떴다.
“…….”
많이 잡아 두 번만 누르면 됐다.
취소 버튼 한 번, 그다음 뜨는 ‘<사진으로 바라보기>의 수강을 취소하시겠습니까?’ 라는 팝업에 확인 버튼 한 번.
그렇게 클릭 두 번이면 요 며칠 제 일상을 뒤흔든 그 음울한 남자를 눈앞에서 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고신재가 왠지 곧장 커서를 옮기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잠잠했던 채팅 프로그램에 누군가 접속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프로그램에 등록된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물먹는하마 - 온라인]
신재는 그 몇 글자 안 되는 알림을 몇 번이다 다시 읽으며 생각했다.
닉네임이 하마인 백한빈은, 게임 친구를 좋아한다.
그것도 개강파티에서 술에 취한 채로 그 온라인 속 누군가에 대한 마음을 기어코 입 밖으로 토해낼 만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데 만약에.
정말 만약에, 백한빈이 저 하마가 맞다면. 그 둘이 동일 인물이라면.
언젠가 터질지도 모르는 발화점을 모르는 척 꾸역꾸역 살다가 어느 날 그 마음을 툭, 털어놓기라도 한다면….
“……내가 하루아침에 게이가 되지 않는 이상 그쪽도 게임 끝이다, 이건가.”
고신재는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가 이내 헛웃음쳤다.
설령 제가 게이여도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백보 양보해서 같은 남자라는 건 둘째치더라도 사람이 취향이라는 게 있는데 그 창백하고 예민한 남자라. 해도 너무했다.
실없는 생각 때문일까.
한없이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이 반동으로 축 늘어지듯 느슨해졌다.
신재는 슬쩍 눈썹을 휜 채로 온라인 목록에 유일하게 떠오른 단 한 명의 이름을 노려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늘 접속하기가 무섭게 인사를 하곤 했던 하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틀간 메시지 한 번 안 보낸 것으로도 모자라, 컴퓨터를 켠 걸 뻔히 아는 데도 인사 한 번 없다.
…이것 봐라?
공연히 책상 위를 손톱으로 두드리던 고신재는 어울리지도 않는 한숨을 한 번 짧게 내쉰 다음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가나다라123 : 안녕]
오랜만의 채팅이었다.
여전히 느린 타자 때문에 과제할 때가 아니면 채팅으로 대화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헤드셋 마이크를 켜서 말을 거는 건 도저히 내키지가 않았다.
한편, 하마는 어울리지도 않는 망설임을 품은 고신재의 인사가 우스울 정도로 빨리 화답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빠를 수밖에 없는 답을 보냈다.
[물먹는하마 : 가나님 ㅎㅇ]
온종일 휴대폰을 붙들고 답지도 않게 끙끙댔던 고신재와는 달리 해맑기까지 한 인사였다.
신재는 속으로 전혀 ‘하이’하지 않거든, 생각하면서 한숨 반, 헛웃음 반의 꽉 막힌 답답함을 길게 내뿜었다.
[물먹는하마 : ㅇ?? 뭐야 오늘은 마이크안켜?]
[가나다라123 : 어]
[물먹는하마 : 왜???]
근 이틀 만에 대화하는 상대는 평소와 다를 게 하나 없었다.
솔직히 그 때문에 조금쯤은 맥이 빠지기도 한 고신재다.
정말 백한빈과 하마는 아무런 관련 없는 생판 남인데, 술집에서 엿들은 대화 하나로 혼자 신경 썼다가, 짜증도 냈다가, 울컥 기분 상하기도 했다가 하며 근 일주일 정도를 바보처럼 보냈나 싶어 괜히 목구멍까지 뜨거워지기도 했다.
한참을 뭐라 쓸지 고민하던 신재는 이내 느릿느릿 손가락을 움직였다.
[가나다라123 : 감기 기운이 있어서]
하마 네가 5년간 들어왔을 제 목소리를 눈치채지도 못하는 그 우울한 새끼라고 생각하니 왠지 배알이 꼴려서 헤드셋을 벗어뒀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대충 둘러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흔하디흔한 변명에 돌아온 반응은 꽤 격렬했다.
[물먹는하마 : 헐 말도못하게 아프면 쉬어야지 컴터는 왜하냐!!!]
[가나다라123 : 그 정도는 아니야]
[가나다라123 : 너도 감기 조심하고]
[물먹는하마 : 너나챙겨!! 나야 건강하지 헐 야 그냥 쉬어!]
[가나다라123 : 별거 아냐]
평소보다 유독 빠르게 이어지는 하마의 문장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김유민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대놓고 그러는 건 아닌데. 혼자 계속 중얼중얼하더라고. 몸도 약한 애가 오랜만에 복학한 건데, 저쪽도 과제 진행 잘 되겠죠 어쩌고 하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마와 그 음울한 사진과 사람은 하등 관련 없는 사람이여야만 한다고 세뇌하듯 생각했건만 다 소용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더 먼저 떠오르는 건 어디가 아픈 걸까, 하는 문장이니.
품이 넉넉한 옷 너머로도 바짝 마른 몸을 그릴 수 있는 백한빈이라는 사람은 말 한 마디 안 나눠 봐도 예민하기 짝이 없을 남자라는 건 어렵지 않게 예상 가능했다.
그 파리하게 질린 안색을 두고 어디 하나 안 아프고 멀쩡할 걸 기대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다.
/물먹는하마 님이 입력하고 있어요.../
고신재가 잠시 그 무심하기 짝이 없었던 뾰족한 눈매를 떠올리며 단어를 고르고 있자, 고작 감기 하나에 펄쩍 뛰던 하마는 한참이나 무슨 문장을 썼다, 지웠다 했다.
기본적인 맞춤법을 틀리지는 않는다지만 자음을 꽉 채워 도배하는 것도 거리낌 없고 띄어쓰기는 더욱 대충 생략하는 하마다.
그런 녀석이 저렇게 한참이나 문장을 만드는 건 정말이지 드문 일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대화창 위로 전에 본 적 없는 또박또박한 문장이 올라왔다.
[물먹는하마 :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고 신경 써. 개강해서 술 마시고 뭐하고 하면서 아프나본데, 그러다 한 학기 시작부터 삐끗하면 좀 그렇잖아. 내가 괜히 내 꼴 날까봐 유난 떠는 거라는 생각은 하는데 그래도 아플 땐 잘 쉬어!!!]
[물먹는하마 : 꼭!꼭!꼭!]
“…….”
대체 무슨 말을 할까, 일분 정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진지한 문장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신재는 잠시 얼이 빠졌다.
만약 이게 손글씨였다면 한 글자 한 글자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게 보였을 정도로 심각한 조언은, 근 5년간 하마가 그의 시답잖은 얘기부터 크고 작은 고민을 에둘러 털어놓았을 때조차 본 적 없던 거다.
[가나다라123 : 내 꼴 날까봐는 무슨 말이야]
덩달아 뻣뻣해진 신재는 서툰 타자 때문만은 아닌 이유로 천천히 문장을 이어갔다.
하마에게서 망설임이 전염된 것처럼 단어 하나하나를 잇는 게 쉽지 않았다.
[가나다라123 : 어디 아파?]
늘 재깍 대답하던 하마의 침묵이 길어진다.
그저 심술로 마이크를 켜지 않은 걸 둘러대기 위한 변명이었을 뿐인데.
고작 그 별 거 아닌 핑계에 낯선 모습을 보이는 하마가 속을 심란하게 했다.
매일같이 대화하면서도 서로의 개인사에는 무뎠던, 혹은 제 쪽에서 철저히 무뎌진 채 이어지기를 강제했던 5년을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못하는 말들을 뭐든 다 지껄이면서 맘 편하게 지냈는데, 너는 왜.
고신재는 후우, 하고 오늘 하루 몇 번을 쉬었을지 모를 한숨을 다시 길게 내쉬었다.
그때였다.
한동안 침묵하던 하마가 머뭇머뭇 타이핑을 시작했다.
[물먹는하마 : 그냥]
[물먹는하마 : 조금 오래 아팠어]
[물먹는하마 : 유전..병??..같은게 있어서]
“뭐?”
물론 그 내용은 평소처럼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상대가 듣지 못할 대답을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까지 꺼냈던 신재는, 급한 마음과는 정반대인 느려 터진 속도로 타이핑을 시작했다가, 얼마 안 가 제 성질을 못 이기고 던져뒀던 헤드셋을 급하게 집어 들었다.
-야. 하마.
[물먹는하마 : 헉시바 깜짞이야]
-……미안. 너 지금은? 지금은 괜찮아?
[물먹는하마 : 가나 너감기로 힘들담서 마이크켜도 ㄱㅊ?]
감기는 무슨. 멀쩡하다 못해 쌩쌩하다.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폭염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마스크를 끼고 다니기 참 힘든 날씨라서 걱정스럽네요. 더더욱 건강 관리 잘 하시는 하루 되세요.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기쁜 마음으로 확인하고 있어요!
가능한 이따 저녁쯤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