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11화 (11/65)

11

하마

가나얌!! 오전 9:08

응 오전 9:08

하마

오늘 점심 뭐먹을거임??? 오전 09:08

글쎄 고민 중

그런데 아침 9시부터 점심 고민해? 오전 09:09

하마

아 당연ㅋ

빨리골라ㅋㅋ 나도 같은거 먹을래 오전 09:09

교양 <사진으로 바라보기>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첫 번째. 같은 학과의 사람과는 함께 조를 이룰 수 없다.

두 번째. OT 주차와 마지막 기말고사 발표 주차를 제외한 총 13주간, 매주의 주제에 맞게 총 열세 장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서로를 찍은 사진은 발표까지 비밀에 부친다.

“어때, 한빈아?”

제 카메라의 스위블 액정 안에 담긴 남자의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백한빈은, 옆에서 들리는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가 천천히 되물었다.

“그냥 뭐…. 넌?”

“…음…, 하하. 이런 커다란 카메라로 누구 찍는 건 처음이라는 것만 알아둬.”

백한빈은 고운 눈썹을 곤란한 듯 휘며 웃는 남자를 보며 아주 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제가 저 무용과 남자, 아니 무용과 고신재의 렌즈 속에서 어떻게 보였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한숨을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고신재는 예의 그 다정다감하고 끔찍하게 좋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다시 찍어야 하면 말해줘. 나 어차피 오늘 일정도 없어서.”

“……아냐. 잘 나왔어.”

“와. 이게 전공의 자신감인가.”

짝사랑에 빠진 지 오래인 청량한 웃음소리가 곧장 옆에서 들리는 건 좋지만도 않다.

그게 당사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도 이미 한 번 자체 망상 필터를 낀 뇌는 또다시 심장에 시동을 걸어 대니까 말이다.

덕분에 한빈은 왠지 귓가로 훅 열이 오르는 것 같아 괜히 애꿎은 카메라만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고신재는 최고의 피사체였다.

틈날 때마다 신문사나 방송사의 사진기자 공고를 들여다보는 저널 지망이래도 제 카메라 렌즈 안에 담긴 남자가 어느 분야에서도 환장해 달려들 모델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늘 오가는 예술대 건물 근처인데도 저 남자가 들어가 있으면 완벽한 배경이 된다.

포근한 햇빛과 그늘 사이 걸쳐진 채 서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어색함조차 잊은 채 저도 모르게 “잠깐만. 그대로!” 소리가 나왔을 정도니.

“한빈아. 너 혹시 다음 일정 있어?”

“……왜?”

“없으면 같이 밥이나 먹자.”

“…….”

한국대학교 무용과와 사진과는 같은 예술대학 소속이기는 해도 쓰는 층이 아예 다르다. 사진과는 예술대 건물의 5층을, 무용과는 지하와 3층을 주로 쓴다.

엘리베이터라도 같이 타면 모를까 사진과는 주로 단과대 좌측 후문으로 다니고, 무용과는 곧장 지하에서 뛰어다니거나 중앙 엘리베이터를 주로 이용하다 보니 그렇잖아도 늘 복작거리는 예술대 건물 안에서 마주치기 쉽지 않다.

고신재와 백한빈도 여느 무용과와 사진과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휴학 기간을 제외하고서라도 3학년 딱지를 달기까지 서로 마주친 기억 한 번 없다. 한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별거 아닌 술자리에서 멀찍이 마주 앉았던 게 그들이 같은 공간에 제대로 함께한 시작이었다.

그렇게나 접점이 없던 두 사람이 이제는 예술대 건물 근처의 교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일정을 묻는 건, 그들 스스로가 생각해도 꽤 기묘한 조합이었다.

어쨌거나 고신재는 본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학교의 유명인사다.

집안 배경이 없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넘치게 눈에 띄는 남자라는 거다.

“…그, 글쎄. 난 별로.”

백한빈은 제 입에서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에 깜짝 놀라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도, 제대로 마주보지도 못했다.

사실, 3학년이 될 때까지 ‘무용과 걔’에 대한 소문 따윈 들어본 적도 없는 백한빈은, 그와 나란히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호기심 가득한 시선의 먹잇감이 되어야 한다는 게 퍽 억울하기까지 했다.

특히 학과 선배가 옆자리의 남자와 무슨 사이냐며 푸름에게까지 찾아가 물었다던 이야기가 유독 맘에 걸렸다.

또 누가 구상호한테 가서 입 터는 거 아닌가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왔다. 구상호는 백한빈을 눈엣가시로 여기기로 사진과 내에서도 유명한 선배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무용과다.

“뭐가 별로라는 건데?”

“어?”

“나랑 밥 먹는 게 별로라는 거야, 내가 별로라는 거야.”

말투와 목소리는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말하면 화가 잔뜩 나서 묻는 것 같을 문장이, 누군가의 입술에 담기면 온화한 장난처럼 들린다. 고신재는 후자였다. 덕분에 백한빈은 별 의심 없이 대답했다.

“…그, 음. 그냥, 배가 별로 안 고파서.”

“……그래?”

“어.”

그렇지 않아도 엿 같은 목소리에 염소 기능까지 추가라니. 진짜 개 찌질해 보이겠다. 백한빈은 차마 드러낼 수 없는 탄식을 속으로 삼켰다.

지금의 백한빈에게는 상대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하는 대답이 어떻게 보일지, 그게 어떻게 해석될지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저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인 선배 무리가 진저리나게 싫어서 휴학한 거였는데, 복학하자마자 또 엮이기 싫다는 생각이 더 컸다.

숨만 쉬어도 눈에 띄는 무용과 다이아몬드 수저와 학교 근처에서 식사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백한빈은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남자를 자각하는 것보다 다음에는 학교 말고 다른 데 가서 찍자고 해야지, 하는 결심이 훨씬 확고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는 답지도 않은 인내심을 모두 끌어모아 다정한 척, 젠틀한 척 사근사근 말을 잇던 고신재의 마지막 인내심을 툭 잘려나가게 하기 충분했다.

솔직히 이 인내의 끝은 오늘 하루만의 결과가 아니다.

기껏 시간표까지 싹 바꿔서 일주일에 못 해도 세 번을 만날 접점을 만들었다.

그거면 되리라 생각했다.

서로의 사생활까지는 몰랐더라도 어쨌거나 알고 지낸 게 5년이었으니까.

5년, 그건 누군가를 완벽히 알아가기에는 부족할지 몰라도 최소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윤곽을 그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렇게까지 접점을 만들면 제아무리 현실에선 낯을 가리는 백한빈이어도- 최소한, 사람을 똑바로 보고 이야기하겠지 싶었다. 최소한 제가 아는 하마는 그랬다.

그래서 비척비척 저를 피하는 걸 보면서도 그걸 꼬집어 따지지 않고 몇 번을 눌러 참았었다.

늘 먼저 말을 걸고, 늘 먼저 웃고, 늘 먼저 붙잡으면서 입안의 혀처럼 굴었다.

오죽하면 동기인 김유민이 “너 혹시 저 사진과한테 뭐 약점 잡혔냐?” 하고 웃으며 물었던 적도 있을 정도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조금 전 교양 강의 시간에는 혹시라도 제 목소리를 알아들은 건가 싶어서 두 시간 내내 바보처럼…….

“백한빈.”

짜증 나. 알아듣기는 무슨. 혼자서 괜히 등신처럼.

고신재는 가지런한 짙은 눈썹 하나를 살짝 휜 채로 입안에서 터지는 짜증 섞인 헛웃음을 상냥한 외피에 덮어씌운 채로 말을 이어갔다.

“저번부터 쭉 사람 그렇게 무시하면서 얘기하는 둥 마는 둥 하는데. 나쁜 버릇인 거야, 아니면 나랑 하기 싫다고 시위하는 거야?”

“…어?”

“나랑 하는 게 정 그리 불편하면 교수님한테 말해서 바꾸는 게 어떨까. 그따위로 굴지 말고.”

딱 제 옆에 앉은 남자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직해진 목소리는, 뜻을 알 수 없는 외국어였다면 다정한 내용으로 착각했을 거다.

고신재는 순간 제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뿔테 안경 너머 뾰족한 눈꼬리가 동그랗게 보일 정도로 눈을 크게 뜬 백한빈을 향해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얼마나 어르고 달래면서 해줄까. 사람이 말하는데 눈 한 번을 안 마주치는 건 기본에 기껏 호의로 제안해도 기분 나쁜 티 못 내서 안달이고. 그쪽 친구가 내 집안 가지고 떠드는 것까지 못 들은 척 넘어가 주는 거로는 모자라?”

“-아니, 그건!”

멍하게 얼이 빠져있던 백한빈은 고신재가 하는 말이 입력될수록 그 마르고 가느다란 목이 점점 벌겋게 변하더니, 마지막엔 의자에서 작게 들썩이기까지 했다.

“……드, 들었어?”

“‘들었어’? 지금 나와야 할 말이 그걸까. 응?”

“아, 아니. 미안. …미안해.”

차라리 생판 남이었다면 이렇게 열 받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하마다. 5년을 매일같이 떠들고, 놀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우울한 하루를 달래고 또 달래주기도 했던… 친구다.

고신재는 제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백한빈을 일부러 달래지도, 다그치지도 않고 물끄러미 눈에 담기만 했다.

걔가 난데.

네가, 그렇게 좋아한다는 게임 속 ‘가나다라123’이 나인데.

심지어 오늘 아침만 해도 저와 같은 것으로 점심식사를 하겠다며 한참이나 대답을 조르기까지 해놓고. 왜 나랑은 밥 한 끼같이 먹는 것도 죽을 만큼 싫은 티를 내는데.

“아니, 야. 고신재. 신재야. 그게. 진짜 미안.”

“…….”

“뒷담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고신재는 백한빈의 덜덜 떨리고 쉰 목소리에 처음으로 담겨 나온 제 이름 앞에서 살짝 눈썹을 꿈틀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정말 죽어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래도 조금쯤 인정해본다면, 하마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답지도 않은 서운함이 뒤섞여 울컥 머리를 들지도 않았을 거다.

사과 딱 한 번만 더 해.

이제까지 백 번은 넘게 무시했으니까, 딱 한 번만 더 사과해, 하마. 그럼 봐 준다.

고신재는 입 밖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나다를까 백한빈은 다시 한 번 사과하기는 했다.

“푸름이가 평소에 그런 말 하는 다니는 애 진짜 아닌데…. 그, 정말 어쩌다 보니까. 미안.”

“…….”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한 인간을 대변하는 것으로 말이다.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기에 누구보다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었던 온라인 속 친구가 사실은 그래서 인간 고신재의 가장 좋은 부분만 알 수 있었다.

제 뾰족한 부분 같은 건 세상 사람들은 다 알아도 딱 한 사람, 하마만큼은 몰랐다.

아마 하마는 그런 모습만을 보고 반할 것일 테다.

고신재는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쉬려던 걸 겨우 삼키고 애써 평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 이렇게 된 거 궁금했던 것도 물어보자. 한빈아.”

“으, 으응.”

“-내 목소리가 뭐?”

유독 작고 부드러워 보이는 작은 귀로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고신재의 입이 다정스레 이름을 담자 흠칫 작게 튀었던 어깨가 이어진 문장 앞에서 움츠러든 자세 그대로 굳었다.

고신재는 그걸 모두 알면서도 양보 없는 상냥한 다그침을 이어갔다.

“그 ‘평소에는 그런 말 안 하고 다니는 친구’한테 뭐라고 하다 말았었지. 역시 목소리 빼곤… 뭐?”

“…….”

“왜. 집안 품평보다 더 대단한 뒷담화를 하려고 했어?”

“아니! 그게…, 그러니까.”

하마의 이름을 달고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좋게 말하면 낯을 많이 가리는 거고, 솔직히 말하면 방구석 여포였나 싶기까지 하다.

제가, 아니 가나다라123이 욕 한마디라도 먹으면 곧바로 전쟁 시작이었던 녀석은 어디로 갔을까.

고신재는 창백하기만 했던 얼굴에 처음으로 혈색이 확 도는 게 제 추궁 때문이라는 게 입이 썼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번 학기 끝날 때쯤에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기세인 백한빈에게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럴 거면 조 바꿔. 나는 우리 과 김유민한테 연락할 테니까, 백한빈 너는 그 잘난 친구한테 연락해. 서로 파트너 바꾸는 거로 합의만 보면 되겠지. 교수한테는 시간표가 안 맞아서 같이 과제하기 힘들다고 하면 될 거고….”

“-고신재, 야, 잠깐만!”

이래서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모양이다.

늘 짤막한 단답만 툭툭 던지던 저 작은 입이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는 듯 제 이름을 자꾸 부르니, 못된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그렇게밖에는 말 못하겠다.

고신재는 일부러 딱딱하게 대답했다.

“뭐.”

“그런…게 아니라. 진짜 좀 한심한… 바보 같은 이유라.”

“그 한심한 바보 같은 이유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

딱, 딱, 딱, 딱.

백한빈이 초조하게 손가락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쩔쩔매며 말을 더듬는 모습은 무심하게 건성으로 툭툭 끊기던 이전의 목소리와는 다른 초조함을 품은 채다.

보아하니, 첫 고지가 멀지 않았다.

모든 몰이에는 여유가 필요한 법이다. 그걸 아는 신재는 상대가 잠시 숨 돌릴 틈을 줬다.

그러자 짧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 백한빈의 입이 재촉하기도 전에 알아서 이어 열렸다.

“-내, 내가!”

“내가?”

“…내가….”

사실 이때까지 고신재는 답지도 않게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한참이나 뜸을 들이는 백한빈이 어떤 말을 할지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인터넷 속의 저를 좋아한다며 술주정까지 해대더니 코앞에 있는 제 목소리를 알아듣지도 못한 채 저를 껄끄러워하는 티를 팍팍 내는 하마에게 기도 차고, 서운하기도 하고, 조금은 짜증도 났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좋…, 아하는, 사람이랑… 목소리가 비슷해서.”

“…….”

“그래서…. 그게 조금 신경 쓰이길래….”

대답을 얻어내려고 괴롭힌 만큼, 업보처럼 한 방 먹었다.

고신재는 작지만 오똑하게 빠진 코끝마저 붉은 물이 들 정도로 뻣뻣하게 얼어붙은 백한빈을 보며 이번에는 그가 할 말을 잊었다.

“……진짜 미안.”

가면 갈수록 저 멀리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도 묻힐 만큼 작아지는 백한빈의 중얼거림은 고신재 그가 기다렸던 저 자신만을 향한 사과로 끝이 났다. 한편으로는, 살며 들어본 그 어떤 사과보다 고백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건 참 이상했다.

정확히는 이상한 기분에 빠지게 했다.

그렇게나 분할만큼 무뚝뚝했던 시선이, 비뚤어진 채 거리를 둔다 생각했던 목소리가 사실은 신경 쓰이는 걸 감추지 못해 기어이 얼굴 위로 드러났던 것이라 생각하니 왠지 저마저도 표정관리가 잘 안 되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백한빈처럼 티 내면 다 실패다.

고신재는 괜히 뒷목을 주무르는 척 고개를 느슨히 기울인 채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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