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12화 (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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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 목소리랑 비슷해서 그 유난을 떨었다… 이 말이야?”

“……유, 유난까지는 아니지!”

“너 그랬거든. 얼마나 비슷한데?”

어떤 가냘픈 움직임마저 모두 짚어낼 수 있던 백한빈이 잠시 숨 쉬는 것마저 멈춘 건 그때다.

하얗고 마른 손등 위로 하얀 뼈가 그려 보여질 만큼 꽉 힘이 들어간 긴장감이 제 목덜미로 옮아와 덩달아 입을 마르게 하는 것도 같았다.

“-말할 때 얼굴도 못 쳐다볼 만큼 비슷해?”

이어진 물음이 저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심드렁했다.

그 무심한 가장 때문인지, 백한빈은 처음으로 어설프게 시선을 피하거나 빙빙 돌리지 않고 또렷하게 고신재를 눈에 담았다.

당혹이 어린 까만 눈이 얼마나 저를 피하기만 했는지 잘 기억하는 만큼, 고신재는 그것에 똑바로 담기자 뒷골이 당길 만큼 신경이 빳빳해졌다.

때로 침묵은 무엇보다 많은 대답을 품고 있다.

물론, 그 함의의 대부분은 긍정이다.

고신재는 저를 바라보기만 할 뿐 작은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뭐라 대답을 하지 못하는 백한빈을 지긋이 눈에 담다가, 이내 비밀을 속삭이듯 가까이 고개를 기울였다.

숨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그렇지 않아도 움츠러든 마른 어깨가 더욱 위로 올라가 굳는 게 보였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

“…….”

“한빈이 넌 분명히 좋아하는 사람 목소리라고 했는데….”

사탕을 입안으로 굴려도 이보다 더 다디달 수 없을 것 같은 목소리가 한빈의 고백 같던 사과를 흉내 내듯 작아졌다.

하지만 백한빈은 여느 사람이라면 놓쳤을 그 숨소리 같은 문장의 끝을 분명히 짚어낼 수 있었다.

‘-나는 남자거든?’.

두 음절의 덧붙임이 머리에 입력된 그때.

사실 백한빈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대처법은 손에 든 카메라로 저 여유만만한 남자의 뒤통수라도 내리쳐 기절시킨 다음 도망치는 극단적인 전개였다.

쇠고랑 엔딩은 둘째 치고, 지금 저와 고신재가 있는 곳이 예술대 앞 벤치만 아니었더라도 미친 척 그렇게 하고 나중에 저를 찾아올 남자에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발뺌했을지도 모르겠다.

“걔, 걔, 걔가, 조금, 목소리가, 그- 쫌, 허스키해!”

“우와. 조금 허스키한 게 아닌데!”

“하하, 하하하, 하! 하! 하! 그렇지? 걔, 걔가, 그 친구가, 원래 그래서 나도 아주 깜짝 놀랐-”

“……후우. 백한빈.”

그 끔찍하게 좋은 목소리가 작은 한숨과 함께 반 톤 떨어진 채로 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 백한빈은 저도 모르게 크게 흠칫하며 혀까지 깨물었다.

재학생 전체를 탈탈 털어 한 곳에 몰아놓아도 그중 가장 눈에 띌 남자가 제 바로 옆에 앉아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것도 망상 대잔치의 연장선 같은데, 뺨을 스치는 찬바람은 등줄기로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한 게 어딜 봐도 현실의 그것이었다.

진짜 조졌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아, 어떡하지.

눈을 뜨고 있는데도 눈앞이 캄캄해진 백한빈은 잠시 숨 쉬는 것마저 잊고 바짝 얼어붙었다.

기계적일 만치 곱게 반달모양으로 휜 고운 눈매 속의 짙은 흑갈색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단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다시 물어볼게, 응?”

“…….”

“내 목소리가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그렇게 비슷해?”

바로, 어설픈 거짓말은 안 통한다는 거다.

백한빈은 입을 열어 대답하는 것 대신 위아래로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상의 모든 다디단 것들로 엮어 만든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남자?”

무슨 소리냐며 넉살 좋게 웃으며 발뺌할 수 있을 정도로 뻔뻔했으면 좋았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이어진 고신재의 질문에 단 한 방울의 혐오라도 짚어졌다면, 그랬다면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신재의 목소리는, 그러니까- 이제껏 정말 제 귓가에서 숨소리와 함께 들리는 걸 상상만 했던 짝사랑 상대의 목소리는 감히 의심과 부정을 품는 것조차 죄스러울 정도로 상냥하기만 했다.

“……응.”

이런 걸 게임에서는 상대에게 말렸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찌르르 손가락 끝이 저릴 정도로 긴장한 채로 기어이 내뱉고 만 최초의 인정은 생각보다 체념이나 공포보다는 기묘한 후련함을 먼저 끌고 왔다.

백한빈은 고신재가 나른하게 눈을 휘어 웃으며 벤치 옆의 몸을 더욱 가까이 붙이며 제 등 뒤로 팔을 두르는 걸 피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피할 수 없던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내가 도와줄까, 한빈아.”

목소리는 다정한 온기가 가득한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잡아먹을 듯이 비꼬던 남자가 갑자기 태세를 전환해서 기분 좋은 티를 팍팍 내니 대체 이게 무슨 감정기복인지 알 리 없는 한빈이다.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인지, 악마의 얼굴을 한 천사인지.

백한빈은 제게 떨어진 달콤한 제안 앞에서 까칠해질 정도로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사실 고신재는 백한빈이 경계하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두 개의 배드엔딩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서 기존에 없던 새로운 선택지를 제가 직접 만들기로 이 순간 온전히 결심한 것에 불과했다.

“…뭘, 어떻게…?”

“글쎄. 연애 상담?”

그 선택지의 첫 단계는 현실의 ‘백한빈’과 가까워지는 거다.

물론 쉽지는 않을 거다.

우연히 게임상에서 만나 같이 놀던 사이에서 시시콜콜한 일상을 미주알고주알 말하고, 심지어는 좋아하는 마음으로까지 번지는 데 걸린 시간을 따라잡는 게 만만한 일일 리가 없다.

고신재는 그걸 요즈음 뼈저리게 느꼈다.

백한빈과 쉬이 친해지느니, 화분을 하나 키우는 게 더 마음 편할 거다.

“연애 상담?”

“왜. 나쁠 거 없잖아. 목소리 하나 비슷하다고 바짝 힘 들어가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거 보니 그리 잘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 그야-!”

“남자랑 사귀려면 같은 남자한테 조언을 구해야지. 아니다. 그것도 이미 ‘평소에 그런 말 하고 다니는 애 아닌’ 네 친구랑 같이 고민해? 그런 거 치고는 영.”

“……야!”

이렇게 크게도 말할 수 있었구나.

고신재는 순간 귀 옆에서 탄약이 터진 것처럼 크게 터진 백한빈의 외침에 줄줄 이어가던 매끄러운 문장을 멈춰 세웠다. 그뿐일까. 저쪽에서 지나가던 몇 명이 고개가 이쪽으로 휙 움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주변 시선을 끔찍하게 신경 쓰던 백한빈은 이 순간 그 무엇도 신경쓰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야, 너. 고신재, 너….”

창백한 얼굴은 혈색이 좋다기보다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사람 같다.

숨은 제대로 쉬나 걱정될 정도다.

쯧. 고신재는 작게 혀를 찼다. 채찍은 그만할 때다.

“말 안 해. 걱정하지 마.”

백한빈이 그렇게나 저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던 이유가 이 목소리가 짝사랑 상대의 것과 ‘빼닮았기’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렇게나 좋아하는 이 목소리를 그 어떤 때보다 달게 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

“응? 나 좀 믿어줄래, 한빈아.”

아니, 그뿐일까.

고신재 그의 목표는 더더욱 명료해지기까지 했다.

그는 제 까다로운 게임 친구 하마와 하루씩 더 가까워지면서 가나다라123에 대한 마음을 부추길 거다.

직접 말도 못 걸고 채팅으로나 이야기하는 상대를 향한 마음을, 술에 취해 혼자 떠들던 것에서 하루하루 발전시킬 거다.

저 얼굴도 이름도 모를 남자를 향한 숫되고 자신 없는 짝사랑을 확신으로 만들고야 말 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신재가 그가 노리는 건, 온전한 짝사랑 상대로 자리매김한 가나다라123의 자리다.

시시콜콜한 일상을 떠들던 친구. 답답한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실없는 농담도 하고, 가끔은 바보 같은 짓을 해도 그것을 약점으로 삼기는커녕 앞서서 덮어주는 친구.

하마가, 아니 백한빈이 가나다라123에게 하던 그 이유도 조건도 없는 호의의 대상이 현실의 제가 되게 할 거다.

한참이나 작은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하던 백한빈의 천천히 입을 연 건 그때였다.

“네, 네가…, 고신재 네가, 네가 뭔데.”

“응?”

“네가 왜 나를 도와줘? 내가 너를 어떻게 믿어, 대체.”

조금 전의 외침과는 달리 속삭임처럼 작아진 채로 흘러나온 백한빈의 의심 가득한 질문에 고신재는 기다렸다는 듯 청량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현실의 고신재가 가나다라123의 친구 자리를 온전히 차지하게 되는 날.

그 날, 고신재는 ‘하마’가 온라인 속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게 할 거다.

그럼 가나다라123은 오래된 게임친구의 마음을 정중히 거절하고, 그 성의 없는 익명의 이름을 가상의 공간에서 천천히 정리하다 어느 날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지게 될 거다.

하마, 아니 백한빈의 곁엔 현실의 제가 있으면 그만이다.

온라인 속 인연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한탄할 때면 나란히 같은 영화를 켜놓고 술을 마셨던 과거의 어떤 날처럼 친절하고 다정한 친구가 되어 위로해줄 생각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온라인 속 존재는 어차피 제 일부이니까. 목소리뿐인 자리쯤은 쉽게 정리할 수 있을 거다.

“걱정하지 마. 나도 남자 좋아하거든.”

이건, 그걸 위한 작은 거짓말이다.

백한빈의 저 높다란 경계심을 풀고, 절대적인 아군임을 보여주는 첫 번째 카드일 뿐이다.

봄의 끝자락에서 고신재는 감히 그렇게 생각했었다.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확인하고 있어요!

챕터 1이 끝났습니다.

덥디 더운 날씨에 참 심란한 상황까지 마음에 여유를 찾기 힘든 요즘, 아주 잠시라도 기분 전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ㅠ ㅠ

아마 하루 쉬고 그 다음 날 올 것 같아요!!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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