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13화 (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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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통정리

물먹는하마와 가나다라123은 그때 그때 하는 게임은 달라도 고르는 직업군이나 닉네임은 항상 비슷한 변주를 이룬다.

짠 것도 아닌데 하마는 탱커를, 가나는 힐러를 주로 고르고, 가끔 이미 있는 닉네임이라고 뜬다면 뒤에 숫자나 단어를 몇 개 붙이더라도 서로를 부르는 호칭인 ‘하마’와 ‘가나’만큼은 꼭 유지했다.

그러나 이렇게나 서로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에게도 한 가지 비극 아닌 비극은 존재했다.

바로 게임 실력이었다.

농사짓는 게임이 아니고서야 늘 초면인 유저들에게 틈만 나면 부모님의 안녕과 지능 여부를 재차 확인받는 가나와, 심심하면 킬로그 전광판을 도배하며 버스 잘 탔다는 덕담을 듣는 하마는 하늘과 땅 차이인 실력 격차를 자랑했다.

물론 5년이라는 햇수가 쌓이며 가나도 뭘 하든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이 아무리 좁아진대도 절대 맞닿지는 못하는 것처럼 이 둘은 기본 능력치가 까마득히 달랐다.

……하지만.

[도리도리뽀짝 : 아 왜자꾸]

[도리도리뽀짝 : 노빠꾸닥돌 탑신봉자새끼랑 같은팀이지????]

어째 오늘은 좀 달랐다.

[도리도리뽀짝 : 시_발]

[도리도리뽀짝 : 또또또또 꼴아박네]

[rideonhush : gg]

이 순간 아군의 입에서 걸쭉한 쌍욕과 게임 종료 선언을 끌어낸 건 패작의 상징 가나다라123이 아니었다.

도리도리뽀짝의 표현을 빌려 적팀에게 ‘꼴아박으며’ 게임을 차곡차곡 말아먹고 있는 건 언제나 묵묵히 게임을 이끌던 하마, 백한빈이었다.

심지어는 저렇게나 욕을 먹는데도 한 마디 반박조차 없다.

그 때문일까.

언제나 누구보다 과묵한 게이머였던 가나다라123의 짤막한 실드가 아주 오랜만에 채팅창 위로 올라왔다.

[가나다라123 : 특)정글 차이^^]

[도리도리뽀짝 : ?]

[도리도리뽀짝 : 와 이걸?]

[22:48] 국산야스오 님이 적이 사라졌다고 알림

[22:48] 국산야스오 님이 적이 사라졌다고 알림

[22:48] 국산야스오 님이 적이 사라졌다고 알림

현명한 게임 운영법을 장문으로 토로하는 아군에게 ‘그게 뭔데 씹덕아’라고 단 한 문장으로 극한의 효율을 자랑하는 딜을 교환한 가나다라123은, 헤드셋으로는 “하마, 저런 말 신경 쓰지 마.” 하고 세상 다정한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폭탄은 저 자신이 폭탄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법이다.

백한빈은 엉망진창이었던 게임 한 판이 끝나자마자 거의 키보드를 반쯤 부수듯 두들겼다.

[물먹는하마 : ㅠㅠ 나오늘 너무 트롤했다]

-하마야.

[물먹는하마 : 미안 오늘은 날이 아니다ㅜ 일찍 자러가볼게ㅂㅂ]

[물먹는하마 : 가나님 안녕]

-……그래. 잘 가.

한빈은 저를 두 번 붙잡지는 않는 귓가의 목소리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곧장 컴퓨터를 껐다. 까만 어둠이 찾아온 모니터 위에 비친 얼굴은 더없이 한심한 표정이었다.

“…에이씨….”

오늘 밤 백한빈은 가나다라123과 대화다운 대화를 단 몇 분도 이어가지 못했다.

짝사랑 상대에게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귀에 감기기만 해도 기분이 들뜨는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았다. 실수투성이였던 매판마다 농담으로도 핀잔 한마디 하지 않고 다정하게 웃었던 건 또 어땠나.

문제는 온전히 제 쪽이었다.

한빈은 침대 위로 푹 쓰러지듯 파묻힌 다음 그 위를 몇 번이나 데굴데굴 굴렀다. 컴퓨터 앞에 앉은 내내 너무 긴장했던 탓일까. 얼어있던 몸이 뒤늦게 해동이라도 되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옅은 전기가 흐르듯 간지러웠다.

제 짝사랑 상대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사실 백한빈은 오늘 밤만큼은 저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를 피하고 싶었다.

“왜 성대가 비슷하게 태어난 건데. 우리 가나랑은 세포부터 다른 새끼가!”

그랬다.

조금 전 한빈은 가나다라123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꾸 ‘다른 새끼’가 생각나 집중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생각만 났을까.

그 속 모를 눈웃음이며 녀석과 나눈 대화까지 자꾸 머릿속을 빙빙 맴돌아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진짜 어떡하냐고오! 아, 왜 걔한테 말렸지? 미치겠네!”

어릴 때도 침대에서 발을 팡팡 구르며 먼지를 낸 적 없던 한빈이 스물다섯이 되어서야 늦은 발장구를 시작한 이유를 알려면, 얼결에 입 밖으로 꺼내고 만 짝사랑 상대를 향한 마음과 이어서 누군가의 커밍아웃을 처음 들은 캠퍼스의 그 날로 돌아가야 한다.

* * *

“너, 너, 너, 고신재 네가….”

“…….”

“네가….”

‘그 문장’을 듣는 순간, 백한빈의 머릿속에서 한심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자존심 같은 건 저만치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뿐인가. 어깨에 팔을 두르고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남자와의 거리 역시 대수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 순간만큼은 동기나 선후배가 어디선가 보고 수군대든지 말든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았다.

이렇게 개방된 장소에서 감히 입에 담을 수 있을 거라고는 비현실의 끝을 달렸던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고장난 기계처럼 말을 끝맺지 못하고 몇 번이나 같은 단어를 반복하던 한빈은, 주변에 이 믿을 수 없는 대화를 엿들을 누군가가 없다는 걸 눈을 굴려 확인한 다음에야 간신히 말을 이었다.

“네가…, 정말?”

“정말.”

“어, 어떻게?”

“남자 좋아하는 거에 어떻게가 어딨어.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

“아 쫌! 쉿!”

미친놈이 왜 이렇게 겁도 없어!

백한빈은 캠퍼스 한복판에서 태연한 표정으로 성정체성 선언을 이어가는 고신재의 허벅지를 저도 모르게 있는 힘껏 후려쳤다.

그러자 그 물 흐르는 것보다 더욱 매끄럽게 이어가던 말이 처음으로 끊긴 남자가 간지럽다는 듯 해사하게 웃었다.

“한빈이 너 손 꽤 맵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해!”

“중요한 게 뭔데.”

“…마, 말이 안 되잖아!”

“뭐가?”

백한빈은 덜컥 겁이 날 정도로 혼란스러운 속내를 감추려 괜히 미간을 바짝 좁힌 채로 고신재를 노려보았다.

한빈에게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감정이란 건 솔직히 인정하는 것조차 버거워서 반년을 끙끙 앓았던 마음이었다.

이 마음을 말할 데도, 물어볼 데도 없어서 혼자 한참을 앓으면서도 ‘그걸’ 검색해 기록이 남는 것조차 무서워서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휴대폰의 개인정보보호 모드로 몇몇 키워드를 찾아보는 것도 얼마나 떨었던가.

혼자 무럭무럭 키운 짝사랑에 적응한 요즘에야 좀 나아졌다지만, 처음에는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조차 반가운 것보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았었다.

그런데 그런 비밀을 제 인생에 갑자기 등장해서 끼어든 저 눈에 띄는 무용과 남자가 공유하려고 든다.

아무렇지도 않게 캠퍼스 한복판에서 툭 털어놓기까지 하는 저 당당함은 또 뭔가.

그것도…….

짝사랑 상대와 빼닮은 목소리로 말이다.

아무리 현실이 상상보다 더하다지만 이건 진짜 선을 넘었다.

벤치 뒤로 팔을 둘러 자연스레 제 어깨를 끌어안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된 고신재와의 거리를 그제야 깨달은 백한빈은, 뒤늦게 흠칫하며 엉덩이만 움직여 남자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때였다.

살짝 처진 부드러운 눈매를 접어 방긋방긋 예쁘게 웃기만 하던 남자가 그 결이 고운 눈썹을 묘하게 꿈틀한 건.

“뭐가 말이 안 되는데. 한빈아.”

…진짜 저게 못 미덥다니까!

백한빈은 나긋나긋한 웃음과 어조와는 달리, 고신재의 물음에 딱 한 티스푼 정도의 무언가 다른 감정이 더해진 것을 확신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휴학이랑 복학 반복하면서 학교 다닌 거 5년이야.”

솔직히 이제 긴장한 걸 감출 생각조차 없다. 애초에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 한빈은 종종 떨리다 못해 꽉 메이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학교 다니는 내내 무용과랑은 교양에서 같은 조 한 번 해본 적 없었고, 겹쳐있는 친구 한 명 없었어. 고신재 너랑도 마주치기는커녕 출석부에서 이름 한 번 못 들어봤고. 이렇게 사람 바글바글하고 캠퍼스 넓은 곳에서 다른 과 사람이랑 접점 생기는 거 생각보다 어렵다는 얘기야.”

“…….”

“그래. 교양 하나 겹치는 건 그럴 수 있었어. 2인 1조 조별과제, 그것도 흔해.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속눈썹이 길지.

백한빈은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는 나른한 표정 앞에서 문득 상황에 맞지 않는 감탄 아닌 감탄을 하며 마른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말을 마저 이었다.

“-수강정정 마지막 날 지나고 나니까 교양 세 개를 다 같이 듣게 된다고? 같은 과인 푸름이랑 짜고 맞추려고 해도 그렇게 안 되는데.”

“그래. 그건 나도 신기했었어. 하하, 사실 난 아는 얼굴 하나라도 있어서 잘 됐다 싶었는데. 한빈이 넌 아니었나보네.”

“야. 말 돌리지 마.”

“…….”

“고신재 너… 카페에서 내 시간표 봤잖아. 그것도 엄청 뚫어져라, 한참이나.”

잔뜩 긴장한 채 떨면서도 끝까지 말을 이은 보람이 있는 걸까.

유유히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고신재는 백한빈이 심증만 가지고 혼자 앓다가 기어이 꺼낸 진심 앞에서 처음으로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그건 잠시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정곡을 찔렀다던가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실제로 머잖아 느릿느릿 흘러나온 대답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랬나.”

“그랬거든!”

“그래. 그랬다고 치자.”

차라리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발끈했다면 이렇게 뒷통수가 불신으로 빳빳해지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저 나른하고 여유 가득한 태도라니.

“뭐, 뭐?”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 혹시 내가 시간표를 너 따라 바꿨다는 말이라도 하려는 거야, 한빈아?”

“…….”

“아침 9시에 하는 ‘러시아 문학의 이해’랑, 학교 주4 나올 수 있는 것도 포기하고 금요일 11시부터 1시까지 애매하게 들어서 오전도 오후도 다 버리는 ‘현대 건강 생활’같은 걸…… 한빈이 너랑 같이 교양 듣겠다고 바꿨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구구절절 틀린 말 하나 없다.

왠지 이렇게 문장으로 정리해 듣고 나니 좀 머쓱하니 민망한 열기가 훅 치밀어 오를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내용이다.

한빈도 그걸 모르지 않아서 이제껏 계속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생각 한번 안 했었다.

무슨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사람도 아니고, 꿈으로도 모자라서 1절만 하자고 오히려 저를 달래고 또 달래기도 했다.

하지만 한빈은 왠지 지금만큼은 제 의혹 아닌 의혹을 사과하고 싶지도,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다.

살며 몇 번 느껴본 적 없는 직감 같은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괜한 고집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동요 하나 없이 혼자 제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저 여유만만한 남자를 더더욱 그냥 믿을 수는 없다는 경계만 확고해졌을 뿐이다.

한빈은 왠지 열이 뜨끈해진 것 같은 귀를 괜히 산만하게 만지작거리면서 두서없는 변명을 이어갔다.

“그, 그럼 그건 백번 양보해서 우연이라고 쳐. 하지만…. 살며 한 번도 부딪힌 적 없다가 하루아침에 생활 반경 다 겹치는 거로도 모자라 이제는 너도…, 그, 그렇다고 하는 거. 말이 안 된다고.”

“…….”

“애초에 고신재, 네가 왜 나한테 관심을 갖는데. 내가 누, 누굴 좋아하든 말든. ……너 무용과 다이아수저라며. 다이아수저가 흙수저 삽질이 왜 궁금해. 봐. 이것마저 이상해.”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기쁜 마음으로 확인했습니다. >.< 헤헤.

고신재의 업보 축적을 즐겁게 봐 주셔서 저 역시 재밌었답니다.

아!! 그리고, 무나 님. 후원 쿠폰 정말 감사합니다!

조금 이따 저녁에 한 편 더 들고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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