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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나 속을 알기 힘들더니,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한가지는 잘 알겠다.
고신재는 무용과 다이아수저라는 자신의 뒷별명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들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으면서, 의외로 살면서 몇십, 몇백 번은 더 들었을 듯한 저 표현은 눈에 띄게 떨떠름해 했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하하. 그야 나도 이렇게 가까이서 만난 ‘그런’ 사람은 처음이거든. 게다가….”
그리 눈에 띄지도 않았던 작은 균열을 봄날처럼 살랑이는 미소로 순식간에 얼굴에서 싹 지운 고신재는, 곧이어 그 다정하고 꿀 떨어지는 목소리와 말투로 자기가 받은 만큼 돌려주었으니 말이다.
“정말 어지간히 음침하고 기분 나쁜 사진과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내 목소리가 좋아하는 남…, 아니 좋아하는 사람이랑 비슷해서 그런 거였다고 하니 재밌기도 하고. 그래서 그렇다면?”
“…….”
…음침하고 기분 나쁜…?
듣기 좋은 청량한 목소리는 말로 얻어맞고도 실감이 안 나게 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백한빈이 잠시 제가 들은 표현을 얼이 빠진 채 곱씹고 있자, 다시 주도권을 잡은 남자의 느긋한 장난 같은 말이 계속됐다.
“내가 너랑 같다는 거 어떡해야 믿을래, 백한빈.”
“……못 믿어! 안 믿어, 새끼야!”
“뭐든 할게.”
“어이가 없어서! 뭐든? 진짜 뭐든?”
“상식적인 선에서는, 뭐든.”
“골때리는 새끼네. 야, 너 딱 대기해. 인증 못 하기만 해.”
‘다이아수저’랑 ‘음침하고 기분 나쁜 사진과’ 둘 중에서 뭐가 더 딜이 세게 박혔는지 묻는다면, 게이머 열에 아홉은 다 후자라고 할 거다.
한빈은 불과 어제만 해도 눈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무뚝뚝하게 단답으로만 간신히 대꾸할 수 있던 남자에게 아직 방법조차 찾지 못한 으름장을 놨다.
물론, 백한빈이 그러거나 말거나 고신재는 꽤 흡족해 보이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아직 달래지지도 않은 한빈의 속을 한 번 더 뒤집는 데도 성공했다.
“나 궁금한 거 또 있는데.”
“뭐! 궁금한 것도 많아, 진짜!”
“나랑 목소리 비슷하다는 그 사람. 어떤 사람이야?”
당연히 한빈은 그 갑자기 치고 들어온 직구에 펄쩍 뛰었다.
“그, 그, 그, 그건 왜 물어봐!”
“궁금하잖아. 어떻게 생기고 뭐 하는 사람이길래 목소리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나한테까지 쩔쩔매는데.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싶어서.”
그렇지 않아도 25년 평생 연애 경험이라고는 전무한 백한빈이다.
단순히 신경 쓰이는 걸 넘어 정말로 ‘좋아한다’라는 이름이 붙은 감정으로 불붙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그게 동성의 남자가 될 거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못 했었다.
다시 말해, 가나다라123을 좋아하는 감정과는 별개로 마음 한구석에서는 본인의 성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없는 초심자 중 초심자가 백한빈이라는 뜻이다.
그런 상태로 제 짝사랑 상대에 대해 자신 있게 떠들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고신재는 순간 말문이 막힌 채 입도 벙긋 못하고 굳은 백한빈을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응? 목소리 때문에 나한테 그렇게 까칠하게 굴었으면 이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지 않아?”
“…….”
“왜. 뭐 하자 있어?”
“야!”
말 한마디 못 하고 쩔쩔매면서도 짝사랑 상대를 욕하는 것만큼은 기죽지 않고 받아치는 백한빈은 커다란 능구렁이 옆에서 겁도 없이 깡깡 소리를 치는 포메라니안이나 다름없었다.
고신재는 그런 틈새를 교활하리만치 능숙하게, 또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럼 왜 말을 못해.”
“……직접 만난 적은 없어.”
“뭐?”
작은 입을 우물쭈물하는 백한빈은 제가 ‘또 다시’말려들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런 여유가 있었다면 이런 대책 없는 짝사랑의 열병을 앓지도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게임에서 만나서…, 목소리만 알아, 나도.”
“얼굴은?”
“…….”
“아니 하다못해 이름은?”
“…….”
좋아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연달아 이어지는 따끔따끔한 질문 앞에서 그나마 조금 식었던 한빈의 창백한 뺨이 다시 슬슬 붉은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남자의 마지막 쐐기가 박혔다.
“그런데 뭐가 좋다는 건데. 어떻게 좋아질 수가 있는데?”
“네가 알아서 뭐 하시게요!”
“뭐. 됐어. 네가 좋다는데.”
“그래. 내가 좋다는데! 걔가 얼마나 친절하고, 상냥하고, 멋진 앤데! …씨이, 안 좋아할 수가 없다고!”
백한빈은 의도치 않게 저를 가지고 놀던 고신재에게 한 방 먹였다.
하지만 대체로의 비기너즈 럭이 그렇듯, 초심자 백한빈은 제가 저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있던 남자에게 예상치 못한 공격을 적중시켰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물론 순간 벙찐 채로 답지도 않게 표정이 풀린 고신재를 눈치챘을 리도 만무하다.
지금 한빈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우리 가나가 나 때문에 뭐 하자 있냐는 말 들을 애가 아닌데’라는 울컥함과 미안함이 뒤섞인 생각뿐이다.
덕분에 고신재는 별안간 휙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패배를 들키지 않고 승자의 앞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백한빈. 나 전공 모임 있어서. 내가 어떻게 인증해야 할지는 네가 결정해서 톡 해.”
“뭐?”
“간다. 안녕.”
전교생이 모여있는 강당 한가운데 던져놓아도 대번에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늘씬하고 길쭉한 뒷모습은 성큼성큼 빨리도 멀어졌다.
“완전 어이없어! 언제는 스케줄 없다고 같이 점심 먹자면서. 그것도 다 뻥카였나봐, 저 새끼, 저거!”
백한빈은 멋대로 제 속을 뒤집고는 유유히 자리를 뜨는 고신재의 뒤에 대고 그가 듣지도 못할 욕을 뒤늦게 터트렸다.
자각도 못한 승리를 했지만, 사실 한빈 역시 타격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름은 알아? 얼굴은?」
「그런데 뭐가 좋다는 건데. 어떻게 좋아질 수가 있는데?」
누구라도 같은 질문을 할 거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고, 그래봤자 게임에서 만나 알고 지낸 사람이- 그것도 같은 남잔데 어떻게 좋아질 수가 있냐며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을 일임을, 백한빈 역시도 잘 안다.
오히려 그 질문이야말로 백한빈이 저 자신에게 누구보다 오래전부터 수없이 이어왔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여느 짝사랑이 그렇듯 한빈 역시 작은 호감의 시작은 지극히 평범했다.
* * *
-4년 전.
「어딜 선배, 선배 하고 있어? 어?!」
한국대학교 예술대 건물 5층.
불이 환히 켜진 사진과의 실기실 한 쪽에서는 이른 저녁부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시 막 군대에서 복학해 아직은 그 악명을 널리 알리지 못한 사진과의 폭탄, 구상호의 목소리였다.
「선, 배, 님! 선배님이라고 해야지! 아, 이번 XX학번 애들 진짜 역대급이다. 야, 너희 우리가 예술대에서 제일 풀어주는 거 알지. 무용과는 입학하고 한 달이나 명찰까지 차고 다녀, 선배님들 보기 편하라고. 근데 우리는 얼마나 너네 편의를 봐주냐. 어?」
구상호가 입학한 지 이제야 갓 한 달이 되어가는 신입생들을 제 앞에 일렬로 세워두고 이리도 목소리를 키우는 이유는 하나였다.
‘상호 선배님’이 아니라 ‘상호 선배’라고 불러서.
그래서였다.
물론, 그 꼴깝을 모두가 다 조용히 지켜만 보는 건 아니었다.
「저 새끼는 왜 또 발작 왔어?」
「내가 알겠어. 구상호 저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래도 이번 학기 하고 휴학한다더라.」
「또 휴학? 미친놈. 졸업은 언제 한대.」
「어우, 야. 알고 싶지도 않다.」
구상호와 마찬가지인 3학년 몇 명은 혀를 쯧쯧 차면서 저희들끼리 혀를 찼다.
물론, 딱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학번이 같다고 해도 삼수생인 구상호는 현역 학번보다 세 살이 많았다.
동기들에게도 오빠와 형이라는 소리를 칼같이 챙기는 진상의 말을 잘라 귀찮은 상황을 만들고 싶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호랑이 없는 곳에서는 여우가 왕이라고, 나이 때문에 몇 학번 높은 선배들까지 모두 어려워하는 구상호의 목소리는 더더욱 커져갔다.
「특히, 백한빈. 너!」
「…….」
「야 인마. 2학년인 네가 그러니까 신입생 애들도 보고 똑같이 따라하는 거 아냐. 어? 하여간 빠져 가지고. 이래서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으휴, 됐다. 내가 너한테 뭐라고 하겠냐.」
사실 구상호 그가 정말로 쥐어 흔들고 싶던 상대는 이번 신입생이 아니라 작년부터 호시탐탐 구상호의 눈 밖에 났던 백한빈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 사실은 이제 막 입학한 1학년들조차 알게 된 일이다.
구상호가 백한빈을 눈엣가시로 여기기 시작한 건 싹싹하지 못한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전에도 빠릿빠릿하게 인사를 안 한다며 탐탁지 않게 여기기는 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건 작년, 1학년 이론 강의를 재수강하던 구상호와 같은 조가 되어 발표를 준비하며 생겼던 트러블이 가장 큰 이유다.
백한빈은 신입생 때 조별과제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발표라면서 자기는 발표자를 할 테니 자료조사, 발표준비에 대본까지 완벽하게 마쳐서 최소 이틀 전에 선배인 자신에게 ‘검사’를 맡으라던 구상호의 말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었다.
물론, 그만한 헛소리를 듣고도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래도 조금만 도와주시면 안 되냐며 산만한 덩치의 남자에게 내키지도 않는 구슬림을 할 만한 성격도 못됐다.
꽉 막힌 바위에게 부딪친 계란의 결과 역시 정해져 있었고 말이다.
「헐. 야, 백한빈 군대 안 가?」
「몰랐냐? 면제래.」
실기실 뒤편에 앉아 농담하듯 말을 주고받던 고학번 몇 명의 시선이 품이 넉넉한 옷을 입고도 마른 몸이 다 감춰지지 않는 선이 가는 뒷모습을 무심히 훑었다.
백한빈이 그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둔했다면 좋았을 거다.
「면제? …아, 하긴.」
아니면 쯧, 혀를 차면서 흘러나온 ‘아, 하긴.’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를 만큼 멍청했다면 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예민했던 한빈은 순간 제게로 쏠린 관심을 따갑다 못해 아릴만큼 선명히 짚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작은 잡담에 계속 신경 쓰기에는 구상호는 만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한빈아. 우리 후배니임. 작년부터 내가 너랑 잘 지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기는 하냐? 대학 졸업하고 필드 나가면 다 선배가 끌어주고, 후배가 밀어주고. 그렇게 우리 한국대 사진과가 더 커지고 그러는 거라고 몇 번을 말해?」
「……네.」
「네, 네에, 아주 대답은 잘하지. 맨날 그렇게 뚱~하니 서서 혼자 삐죽대면 단합이 되겠냐고. 너부터가 선배님을 그렇게 대하니까 신입생들이 보고 배우잖아. …어? 야. 대답 안 해?」
「죄송합니다.」
후배들 앞에서 군면제라고 쪽을 준 것으로도 모자라 기어코 죄송하다는 말까지 뽑아낸 구상호의 입술이 만족한 듯 비틀려 올라갔다.
평소보다 더욱 핏기없이 하얗게 질린 한빈의 얼굴 역시 그에게 적잖은 만족을 주었을 거다.
「잘 좀 하자. 어?」
한편, 제 어깨를 두드리는 두툼한 손의 감촉을 느낀 순간 백한빈의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은 단 하나였다.
……정말, 자퇴할까.
백한빈은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대학 자퇴’와 ‘반수’를 쉼 없이 검색했다.
구상호 하나만 문제였다면 버틸만했을지도 모른다. 어디에나 엿 같은 사람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라며 눈 딱 감고 견딜 수 있었을 거다.
「…씨이…. 나 자퇴하면 그 다음은 누가 될 줄 알고.」
하지만, 골치 아픈 폭탄이 딱 하나 정해놓고 일점사하는 상대가 있는 편리를 즐기는 모두가 한빈의 설 자리를 잃게 했다.
선배들은 자신들보다 나이 많은 삼수생에 성격까지 괄괄한 구상호를 껄끄러워했고 동기들은 그 구상호의 먹잇감이 제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다.
심지어 후배들 중 눈치 빠른 녀석들마저 목소리 큰 구상호를 쫓아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슬슬 백한빈을 무시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신입생 때부터 선배에게 찍혀 고생하던 한빈이 간신히 대학 생활을 이어가게 된 건 동기인 김푸름과 푸름과 친한 몇 명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무리가 함께 군휴학을 하고 혼자 나고 나자, 제아무리 넓어도 갈 곳은 많지 않은 캠퍼스 안에서 마음 붙일 것 하나 없게 됐다.
그냥 사진 찍는 게 좋아해서 온 대학이었다.
입시사진 학원에서 작업을 할 때도 오래 앉아 있는 게 힘들어서 매번 편하다는 방석이나 쿠션을 바꿔가며 쩔쩔매고 가끔은 학원 뒤편에 쪼그려 앉아 울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대학 들어가면 다 끝나’라는 흔한 거짓말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수능에서 자신 있던 한 과목을 삐끗해 까마득한 상향지원이 됐던 한국대 사진과에 붙었을 때만 해도 구질구질한 생활이 모두 끝날 줄 알았었다.
TV에서도, 영화에서도 다들 그랬으니까.
하물며 명절 때 가끔 보는 사촌 형마저도 대학 들어가더니 말끔해져서 친구도 많이 생기고 그린 듯한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던데, 저라고 안 될 게 뭔가 싶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하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이 모양 이 꼴이다.
눈 딱 감고 졸업장만 따자, 하기엔 남은 길이 까마득한 2학년 1학기다.
집에 도착해서 저녁 식사도 마다하고 방에 처박힌 백한빈이 할 수 있는 건 얼마 없었다.
잠을 자거나, 과제를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하지만 오늘은 그 어느 쪽도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러니 마지막 선택지는 그저 관성적으로 컴퓨터를 켜서 하릴없이 모니터만 멍하게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뉴스 기사는 다 눌러보고, 커뮤니티라는 커뮤니티는 다 떠돌면서 이 시궁창에 처박힌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빌면서.
-하마. 어째 오늘 왠지 힘이 없다?
한빈은 헤드셋 너머로 들리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초점이 멍한 눈을 크게 몇 번 깜박였다.
[온라인 1 - 가나다라123]
언제 들어왔대.
한빈은 채팅 프로그램에 접속한 익숙한 닉네임을 보며 얼이 빠진 얼굴을 몇 번 크게 마른세수 한 다음 키보드 위로 손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