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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나는
그러니까, 모든 비극의 시작은 고진영에게 온 하나의 메시지로부터 시작됐다.
[형 아이디로 게임 몇 판 할게]
고진영은 오전부터 시작된 회의를 막 끝내고 나와 점심을 뭘 먹을지 토론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빗겨나와 제 동생, 신재가 보낸 메시지를 곱씹었다.
그건 제가 받은 짧은 한 줄의 문장의 내용이 이해하기 어려워서도 아니었다.
서너 달, 아니 어쩌면 반년 만에 처음으로 먼저 메시지를 한 동생이 보낸 저 통보와도 같은 말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얼른 이해가 안 갔을 뿐이다.
쌍꺼풀이 진한 눈을 멍하게 끔벅, 끔벅하던 고진영은 머잖아 얼른 휴대폰 액정을 두드렸다.
[??? 너 내 아이디 알아?]
[ㅇㅇ 비번까지]
대체 언제부터? 라는 말이 곧장 떠올랐지만, 이미 당연하다는 듯 계정을 탈취한 상대를 두고 그런 잘잘못을 따지는 건 하나 마나 한 일이다.
그것도 가까워지려고 그렇게나 용을 써도 안 되던 동생과 얼마 만에 하는지 모를 평범한 대화인데 분위기를 그르치고 싶지도 않았다.
진영은 그보다 더 현실적인 물음을 이어갔다.
[맨날 하는 네 아이디 있지 않아?]
[형 요즘 게임 안 하잖아]
[가끔 하기는 하는데..]
[나 지금 친구랑 PC방이야 얘기 오래 못 해]
“……뭐, 친구랑 PC방?”
진영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 같은 탄성을 작게 터트렸다.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더니!
살다살다 제 동생과 ‘친구’와 ‘PC방’이라는 단어가 함께한다. 솔직히 고진영은 그 순간 왠지 모를 찡한 감상 같은 것에 빠지기까지 했더랬다.
그 흔한 하굣길의 짧은 유흥이나 친구집에 놀러 간다거나 하는 평범한 일상 같은 건 고신재가 지나온 시간 중 그 어떤 날도 없다.
고진영은 그걸 세상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집, 학교, 학원, 또다시 집.
누구보다 눈에 띄고, 어디든 손을 뻗으면 닿을 제 동생이 일부러 키를 맞춰 자란 관목 같은 삶을 살아온 데에는 제 책임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늘 하는 진영이다.
…별 주책을 다 떠네, 나도.
고진영은 제 동료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코를 작게 훌쩍인 다음 텀블러 안에서 우러나온 녹차를 한 모금 삼켰다.
애초에 하나뿐인 동생이 어련히 사정이 있어서 게임 아이디를 빌리겠다는데 그거 가지고 투정할 생각은 없었다.
몇 달 만에 먼저 말을 걸기까지 하는데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그것도 ‘친구들이랑 PC방’에 갔다고 하지 않나.
대체 제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어떻게 꿰고 있는 건지 여전히 알고 싶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게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고진영은 그보다 좀 더 궁금한 걸 마지막으로 묻기로 했다.
[그래서 너 티어가^-^?]
고진영은 쪼잔한 형이 아니다.
정말이다.
혹시라도 제가 슬쩍 던지는 이 마지막 질문에 네 살 터울의 동생이 움츠러들기라도 할까 봐 뒤에 상냥한 이모티콘까지 하나 붙였다.
그래도 스무 살에 자기 컴퓨터가 처음 생긴 이후로 신기할 정도로 꼬박 게임을 이어온 동생이니, 모르긴 몰라도 최근 근황은 좀 기대해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은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신재에게서는 곧장 답이 왔다.
그것도 메시지 두 개가 연달아 오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안 나는 자음까지 붙은 채였다.
[이번에 실버 승급함]
[다시 떨어졌지만ㅎ]
한국대 화학과의 학부와 석사를 졸업하고 외국계 제약회사에서 근무하는 고진영은 사내에서 그 화려한 배경을 단 한 번 자랑하지 않으며 지내고 있지만, 동료들 중 남에게 관심 많은 이들은 그가 웬만한 집안의 사람은 아니리라는 걸 어렵잖게 파악한 지 오래다.
스물아홉 살의 사회 초년생이 차는 볼보 플래그십 SUV에, 한결같이 눈이 동그래지는 태그가 붙어있는 수트 위로 김치찌개 국물이 튀어도 하하 웃고 마는 건 웬만한 수저로는 꿈꾸기 어려운 일이어서다.
덕분에 고진영은 그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눈에 띄는 남자가 됐다.
쌍꺼풀이 진한 서글서글한 외모나 싹싹한 성격 역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쉬이 호감을 얻는 플러스 요인이었던 건 당연했다.
고진영과 파티션 하나를 두고 앉는 동료는 한 손에는 텀블러를, 다른 한 손에는 휴대폰을 쥔 그대로 석상처럼 굳은 그를 향해 슬쩍 말을 걸었다.
“진영 씨. 진영 씨는 오늘 점심 어떻게 할 거에요. 구내식당?”
“…….”
“진영 씨?”
“…하아…, 5년간 틈만 나면 게임 하면서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아직도 브론즈….”
“네?”
만약 이 자리에 고신재가 있었다면 소름 끼칠 정도로 뻔뻔하고 당당한 얼굴과 목소리로 “실버 승급했었다니까?” 이라고 제 형의 진심 어린 한숨을 받아쳤을 거다.
동료는 제가 슬쩍 들은 말을 곱씹으며 다시 한 번 되물었다.
“뭐라고요, 브, 뭐?”
“…아! 아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라고 하셨죠?”
“점심이요, 점심.”
“저는 오늘은 그냥 구내식당 갈까 하는데요.”
“하긴. 어디 나가기 귀찮긴 하네. 회사에서 밥 먹고 산책할 겸 커피만 밖에서 사올까….”
고진영은 웃는 눈으로 왠지 다시 한 번 흘러나올 것 같은 한숨을 꾸욱 삼킨 다음 제 휴대폰을 다시 슬쩍 바라보았다.
속이 먹먹해지는 충격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동생은 그 어떤 말도 이어 하지 않는다.
……같이 PC방 갈 친구가 있다고?
그게 누구야, 대체.
진영은 어떤 몰골이 될지 상상도 안 가는 자신의 게임 계정을 애도하며 혀를 찼다.
* * *
PC방은 중간고사가 끝난 뒤 해방감을 찾아 떠도는 대학생들이 곧장 향하기 가장 만만한 장소 중 하나다.
그건 마지막 교양 시험을 막 치른 사진과 둘, 무용과 하나의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조합 역시 마찬가지였다.
“야. 푸. 내 자리 마우스 좀 이상하다. 카운터 가서 바꿔올게.”
“어엉~.”
마우스를 휙 뽑아들고 곧장 발을 옮기는 백한빈은 불량 자리에 걸린 것마저 익숙한 듯 모든 것이 신속했다.
아니, 신속만 할까.
자리에 앉자마자 마우스를 몇 번 휘둘러보고 바로 이상을 눈치챌 만큼 본격적이었다.
“…….”
덕분에 ‘하마’와 함께 얇고 넓은 게임 경력을 쌓은 (혼자 행복한) 즐겜러 고신재의 시선은 그런 백한빈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는 25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방문하는 미지의 장소에서 어울리지도 않게 꽤 경직된 차였다.
종종 소리로만 들었던 신경질적인 타자 소리와 책상을 두드리는 탄식 혹은 탄성, 누가 ‘갱’을 왔고 뭐가 ‘뒤를 돈다’라는 브리핑까지.
그는 낯선 이들이 이렇게 집단으로 모여 실시간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분위기 자체가 낯설었다.
심지어 덩그러니 남은 고신재와 김푸름은 아직 말조차 제대로 놓지 못한 꽤 어색한 사이이기까지 했다.
“그…, 고신재? 가방 여기 걸어두는 곳 있는데, 요.”
“아. 네.”
“우리 진짜 말 놓을까?”
“……그래.”
가운데 백한빈의 자리를 두고 어색하게 떨어져 앉은 두 사람은 저만치에서 보면 남보다도 못했다.
그건 모르는 사람에게도 곧잘 말을 거는 싹싹함의 대명사 김푸름에게는 꽤 힘겨운 소란 속의 고요이기도 했다.
푸름은 PC방에 들어와 앉은 이후 컴퓨터를 건드리기는커녕 가방을 끌어안은 채 굳은 조각상이 된 양 꼼짝 않고 있는 남자를 향해 슬쩍 말을 이어갔다.
“신재 너는 게임 뭐해?”
“그냥 이것저것… 조금.”
“우리 요거랑 요거 할 건데. 너도 해? 아이디 없으면 지금 만들어 둬. 한빈이 쟤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둘 다 아이디 있어.”
“어, 그. 그래. 잘됐네….”
애초에 대단한 친목을 기대하지도 않은 김푸름이다.
게임 뭐 하는 거 있냐는 질문에 ‘이것저것 조금’ 같은 모호한 답이 나왔어도 실망조차 안 했다. 그저 순수히 오오, 저 녀석도 게임을 하는군! 감탄한 게 다다.
그렇게 어색한 대화를 하고 있으려니 새 마우스를 받아 온 한빈이 투덜대며 귀환했다.
“아니 시험 끝나고 다 피방으로 몰렸나. 무슨 마우스가 다 상태가 안 좋대. 신재 넌 마우스나 헤드셋 같은 거 다 괜찮냐?”
“응, 괜찮은 것 같아.”
“불편하면 참지 말고 꼭 말해.”
“응.”
“너 게임은 해?”
“웬만한 건 다 해봤어.”
김푸름은 웹서핑을 하는 척하면서 귀를 쫑긋한 채 제 옆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억울하다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좀 좋은 의미로 기가 차기도 한다.
진짜 과장 않고 딱 30초쯤 전에 제게는 흐리게 웃으며 ‘이것저것 조금’ 정도로 대충 대답했으면서, 이렇게까지 태도가 달라지는 건 또 뭔가.
“여기 시계 보이지. 이게 우리가 선불로 낸 PC방 요금이야. 시간 모자라면 가서 채우고 그러는 거고. 알겠지?”
“응.”
“아이디는 있어?”
“응, 있어.”
조금 전 싹싹하게 말을 붙이며 챙겨줘도 친해질 의욕 한 점 내보이지 않던 남자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 백한빈과 이야기하는 건, 특유의 퉁명스런 말투 앞에서도 그 널찍한 어깨를 구부정하게 기울이기까지 한 채로 곧장 꼬박꼬박 대답하는 ‘그 고신재’뿐이다.
이건 오늘만의 일도 아니다.
중간고사 기간 내내 한시도 떼지 않고 제 친구의 곁에 붙어있던 남자와 좋든 싫든 자주 마주쳐야 했던 김푸름은, 그때마다 이 차별대우를 받았다.
섭섭하지는 않다.
솔직히 저 시종일관 간지러운 눈웃음을 치는 성격있는 미남이 갑자기 사근사근 잘 대해주면 좀 으스스할 것 같다.
“푸. 너도 로그인해. 우선 신재랑 친추부터 하자.”
“…….”
“김푸?”
“…….”
“-야, 김푸름아!”
“어, 어어어?”
잠시 요 며칠을 되짚느라 멍하게 있던 푸름이 찢어지듯 커진 목소리에 그제야 허둥지둥 고개를 움직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덩치가 크고 얼굴도 각져서 별명이 곰인 김푸름이 고개를 펄떡거리자 흡사 동면에서 깬 야생의 그것이라, 한빈은 틱틱대면서도 내심 걱정을 감추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그렇게 멍해.”
“…그…냥. 새벽까지 시험공부 너무 달려서 그런가.”
“그럼 집에 가서 쉬어, 인마.”
“아 그건 선 넘었지. 오늘은 죽어도 놀아야 된다.”
누가 학과 내에서 ‘곰과 뼈다귀’라는 별명까지 있는 콤보 아니랄까 봐, 김푸름과 백한빈은 얼핏 들으면 티격태격하는 것 같아도 그 별거 아닌 대화에 끼어들 틈 하나 없었다.
“…….”
고신재는 공동의 친구 한 명을 두고 모인 모임의 흔한 소외 앞에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 대신, 한빈의 갸름한 옆모습을 흘끗 곁눈질했다.
얼굴형을 따라 울퉁불퉁한 구석 없이 쭉 뻗은 이마, 작지만 낮지는 않은 코, 작은 입술, 거기서 턱으로 이어져 유독 도드라진 목울대까지.
안경에 묻힌 백한빈의 옆모습은 그 특유의 날렵한 이목구비를 첫인상에 곧장 알기 힘들지만. 이렇게 한 번 눈에 들어오고 나면 계속해서 그 선을 몇 번이나 덧그리듯 구경하게 된다.
사실 고신재는 처음 PC방에 들어서서 꽤 당황했었다.
한빈이 “피방 가자” 라고 한 말을 PC방으로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속으로 ‘피방? 피방이 뭐지?’ 하면서 무작정 고개를 끄덕여 따라온 탓이다.
줄지은 모니터 여기저기에서 익숙한 게임 화면들이 보이는데 그제야 ‘피방’이 PC방의 줄임이구나 싶었더랬다.
덕분에 살며 처음으로 발 디딘 이 전자파 가득한 공간에서 전에 없던 식은땀까지 난 그다.
……물론 그건, 절대 말할 수 없는 제 비밀 때문이었다.
“신재야. 너 아이디 좀. 친구 추가 좀 하게.”
“hellogoh0201.”
고신재는 한참이나 저를 두고 떠들던 백한빈의 고개가 이쪽으로 움직이자마자 곧장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이디는 hellogoh0201. 비밀번호는 0203*963.
이건 형인 고진영이 초등학교 때부터 스물아홉인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써 온 조합이다.
이만하면 외국의 이름 모를 해커들 사이에서는 공공재가 되진 않았을까 싶었던 아이디였건만 덕분에 오늘 같은 날 도움이 됐다.
“아이디 뭔데 귀엽고 난리냐. 넌 집에서 게임해?”
“응.”
저게 귀여워?
…뭐가 귀여워. 하나도 안 귀여워.
고신재는 제 형의 아이디를 듣고 그 드물고 귀한 웃음을 피식 흘리는 백한빈을 보며 삐죽, 유치한 생각을 했다.
그때였다.
[친구요청 : 물먹는하마]
커다란 게이밍 모니터의 오른쪽 구석에서 익숙하기 짝이 없는 아이디가 적힌 팝업이 떴다.
고신재는 왠지 그 다섯 글자의 닉네임 앞에서 속이 울렁울렁하기도 하고, 따끔거리기도 해서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검지에 꽉 힘을 주어 수락 버튼을 눌렀다.
띵, 하는 작은 알림음과 함께 낯선 계정의 친구목록에 제 ‘하마’가 추가되는 걸 보는 건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한빈이 너 닉네임이 물먹는 하마야?”
“어. 자몽먹고잠옴은 김푸름이니까 걔도 수락해줘.”
왠지 조금 갈라지기까지 한 목소리로 간신히 꺼낸 질문이었건만, 백한빈은 평소와 별다를 바 없다 못해 한 손으로 헤드셋의 머리 크기를 맞출 정도로 여유롭기까지 했다.
덕분에 고신재는 이제껏 신경 쓸 일 없었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되기도 했다.
“……한빈이 너 친구창에 사람 엄청 많네.”
그랬다.
처음으로 게임 로그인 화면을 훔쳐볼 수 있게 된 ‘하마’는, 소위 게임 친구가 엄청, 엄청, 엄청 많았다.
“어? 어-, 뭐. 여기서 접은 사람도 많아.”
“몇 명쯤 되는데?”
“몰라. 한 80명.”
“어디서 알게 됐는데?”
“그냥 게임 하면서 친추 들어오면 받고 그러는거지.”
중간고사가 막 끝난 대학가의 PC방이 여느 때보다 더 시끄러워서일까. 한빈은 평소보다 조금 집요하니 이어진 질문세례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들도 없지 않았다.
예컨대, 80명의 ‘게임친구’들과 다 놀았다면 5년을 매일같이 저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 시간 같은 게 날 리 만무하다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사실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그 많디많은 사람 중 하마가 유일하게 반한 건 ‘가나다라123’뿐이라는 걸 깨닫는 것보다 친구목록에 백한빈 단 한 명만을 두고 있는 저와의 비교를 하는 게 더 쉽고 빨랐다.
‘게임친구’가 80명쯤 된다고? 나처럼 게임에서 만나 알고 지내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
이제까지 한 번도 그런 말 한 적 없었잖아. 그럼 난 80여 명 중 하나였던 건가? ……나 말고 다른 사람하고도 친했나. 뭐야. 들어오니까 인사하는 저 사람은 누구야? 여자?
……아니면, 남자?
고신재는 순간 풍선처럼 크게 불어나 머릿속을 꽉 채운 생각에 표정관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커다란 손으로 애꿎은 마우스에만 힘을 꽉 주며 고문을 자행했다.
그러나, 저마다 옆자리의 누군가- 혹은 하다못해 컴퓨터 속 누군가와 떠들고 있는 소란스러운 공간에서 기묘한 침묵을 시작한 건 비단 고신재 뿐만 아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이런저런 잡담을 하던 사진과 콤보 역시 조용해진 거다.
“…….”
“…….”
아니, 조용해지다 못해 눈 두 쌍이 물끄러미 이쪽을 향해 있기까지 했다.
그걸 한발 늦게 깨달은 고신재는 이유 없이 부글부글한 속이 들키기라도 한 건가 싶어 간신히 눈매를 둥글게 휘고는 내키지도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
“…어….”
“갑자기 둘 다 왜 그러는데. 뭐 할 말 있어?”
이제껏 고신재의 이 상냥한 외피에 쉬이 넘어오지 않는 이는 그리 없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절대 입 열지 않겠노라 다짐한 그 어떤 비밀이든 술술 내뱉고 싶어질 만큼 간지러웠고, 웃으면 주변까지 환해지는 듯한 눈웃음은 성별을 불문하고 잘 먹혔다.
그러나 일명 곰과 해골, 즉 김푸름과 백한빈은 그런 곱디고운 물음에도 얼른 입을 열지 않고 고신재를 빤히 바라보았다.
좀 더 정확하게는 고신재를 10초쯤 봤다가, 모니터를 2초쯤 흘겨보는 것을 반복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문제 파악을 끝낸 남자의 고개가 그들을 흉내내듯 천천히 움직였다.
사실 처음에는 설마 싶었더랬다.
설마 갓 로그인한 게임 화면 속에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하지만.
게임 화면의 윗편, 계정의 닉네임이 뜨는 곳에 적힌 짤막한 단어는….
[청담동왕자님]
……진짜 미친 거 아닌가?
고신재는 죽고 싶은 마음 반, 죽이고 싶은 마음 반으로 생각했다.
“겜닉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자의식. 난 살면서 어떤 인간들이 저런 닉 달고 겜 하나 했다, 진심.”
“…청담, 크큭, 큭, 왕, 크흑, 컥, 왕자…!”
“왕자도 아니고 ‘왕자님’? 지 입으로 왕자님? 와. 소름 돋아.”
한참을 침묵하다 입을 연 백한빈은 입을 여는 족족 신랄하게 후벼파는 말만을 이어갈 뿐이고, 알게 된 이후로 늘 한발짝 떨어져 조심스럽게 굴던 김푸름은 웃음이 터지다 못해 금방이라도 졸도할 기세다.
감히 어떤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닉네임 앞에서 평소의 그 청산유수 같은 문장들을 모두 잊어버린 고신재는, 살며 몇 번 느끼지 못한 귓가의 뜨거움에 잠시 숨 쉬는 것마저 잊었다.
살며 처음으로 방문한 PC방이라는 곳이 꽤 어둑어둑한 공간이라 다행이었다.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 ^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글을 쓰는 내내 기쁜 마음으로 확인했습니다.
제가 있는 곳도 본격적인 태풍의 북상으로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어요. 어디에서, 언제 이 이야기를 보시든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