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그 따뜻한 봄날은 시작부터 유독 이상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몸 이곳저곳이 땅기는 건 유별난 일도 아니었는데, 그 날은, 묘하게도 ‘그날따라’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피곤했다.
곧장 커피를 내려 들이키는데도 정신이 들기는커녕 이래서 강의를 째는 건가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살면서 한 번도 땡땡이 같은 걸 해본 적 없는 고신재다.
그게 하필 교양 두 개에 세 시간짜리 실기 전공이 들어있는 유독 빡빡한 하루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
고신재의 하루는 긴 한숨 한 번과 함께 시작됐다.
하지만 100퍼센트의 체력에서 시작부터 60퍼센트 정도로 깎인 채 시작한 탓일까.
어디 가서 체력이라고 하면 단 한 번 밀린 적 없는 고신재는, 시간표의 마지막에 있는 세 시간 연강 전공 실기가 끝났을 때쯤엔 전에 없이 기진맥진한 상태가 됐다.
아니 어쩌면 기진맥진을 넘어서 기묘할 정도로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뼈가 녹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는 게 정확할 거다.
심지어는 그렇게나 힘든 하루를 내색하지 않으려고 웃는 얼굴을 만드느라 몇 배는 더 힘들었다.
그런 자존심 센 남자가 간신히 한숨을 터트린 건 동기들과 인사하고 나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캠퍼스의 인적 드문 길을 묵직한 추를 하나씩 달아놓은 것 같은 다리로 터덜터덜 걸어 나올 때였다.
「……후우.」
집에 가자. 집에 가서 뜨거운 물에 씻고, 침대에서 한숨 자자.
자고 일어나면 오늘은 맛있는 걸 먹어볼까.
아니면 하마한테 연락해서 엊그제 출시됐다는 게임이나 같이 하자고 할까.
내일은 공강인 금요일이니 벌써 주말이나 다름없었다.
고신재는 제 느린 걸음만큼 천천히 움직이는 머릿속에서 나른한 휴식을 계획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독 길고 힘든 하루가 어떻게든 잘 끝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달콤한 상상은 채 몇 분을 가지도 못했다.
후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저만치에서 서 있는 익숙한 비서의 얼굴을 보는 순간 왠지 오늘 하루가 지독히 힘들었던 이유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신재 도련님.」
「…….」
「수고하셨습니다.」
비서는 참 많은 일을 한다.
그는 고신재의 대학 생활 일체를 돕고 조율하기도 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주상복합에 방문해서 집안을 관리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스무 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저 차가운 인상의 남자가 맡은 가장 주된 일은 바로 부모님의 메신저다.
문자 하나, 전화 한 통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대에게 연락하고 연락받기 위한 수단.
고신재는 차가운 인상의 남자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구예요. 엄마?」
「대표님은 이틀 전에 출국하셨습니다.」
남는 건 하나다.
고신재는 작은 소음조차 없이 열린 뒷좌석의 어둠이 꼭 끝도 보이지 않는 구덩이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고급 세단의 뒤로 천천히 올라탔다.
두 달 만에 만난 ‘아버지’, 고정현 중장은 참 여전했다.
신문으로 반쯤 가려진 얼굴 너머로 보이는 깊게 주름이 진 이마, 짙은 눈썹, 진한 쌍꺼풀. 흐트러짐 하나 없이 딱딱하게 각이 진 뻣뻣한 자세.
대문 밖에서만큼은 모두가 그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지만, 이 거대한 저택 안으로 들어오면 서재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영토인 거구의 남자. 그는 언제나 이곳에 처박혀 있다.
고신재는 신문 너머로 저를 흘끗 곁눈질하는 남자에게 가볍게 묵례하며 자리에 앉았다.
잘 지냈냐느니 하는 살가운 인사 같은 건 없었다.
아니, 저녁 시간에 만난 자식에게 밥 한 끼를 먹이는 것 대신 차 한 잔을 대접하는 거리감이 오히려 마음 편했다.
「몇 살이었지?」
…심지어는 남을 대하는 게 더 살가울 것 같은 저 태도도.
고신재는 제가 자리에 앉아 히비스커스 차를 한 모금 삼키기 전에 먼저 흘러나온 무뚝뚝한 물음에 하하, 사람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스물넷이요.」
「학년은?」
「2학년입니다.」
물론, 속으로는 ‘나이도 모르고, 학년도 모르고. 이름이라도 알아주니 참 대단도 하셔라’, 하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최소한 얼굴 가죽 위에는 오늘 하루의 어떤 피로 한 자락도 드러내지 않았다.
집안의 큰 행사가 아니면 얼굴 볼 일조차 없는 ‘아버지’가 굳이 저를 손수 불러다 앉힌 이유가 고작 나이와 학년을 묻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뜸 들이는 것조차 없는 질문이 곧장 이어졌다.
「대학원 생각은 어디로 하고 있고?」
사실 고신재는 아버지가 저를 부르는 가정 아래 꽤 여러 전개를 상상했었다.
다소 위험한 서류에 사인을 시키려는 걸까? 제 명의로 빼둔 지분이라도 옮겨야 하나? 하다못해, 친가의 행사에 얼굴을 내밀 그럴듯한 마네킹?
하지만 대학원이라니.
정말로 실질적으로 저와 연관된 일이라니!
저 웃음기 한 점 없는 중년 사내의 입에서 나온 물음이 솔직히 꽤 얼떨떨했다.
덕분에 입 밖으로 조금 삐끗한 대답이 흘러나온 신재다.
「대학원…요?」
「그래.」
「글쎄요. 지금 생각하기에는 조금…, 이르지 않나 싶은데요. 이제 복학하기도 했고.」
「이르기는! 너는 진영이를 옆에 두고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드는 게냐?」
물론, 역시 방심해선 안 되는 상대였다.
신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들을 일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이름 앞에서 저도 모르게 살랑이듯 웃으며 매끈하게 유지했던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 말았다.
하지만 낮고 걸걸한 문장을 이어가는 사내에게 그런 동요는 신경 쓸 것이 아닌 듯했다.
「……형은 또 왜요.」
「오냐오냐 키웠더니 기껏 한다는 게 월급쟁이지.」
「하하, 세상 사람들 다들 월급 받고 사는걸. 군인도 크게 보면 월급쟁인데요.」
「어떻게 군대까지 다녀와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한심한 녀석!」
형식적인 자리에서 함께 있다가 다시 만난 건 두 달 만.
이렇게 길게 대화를 한 건 반 년 만.
철천지원수와 이야기를 해도 이보다는 더 말이 통할 텐데.
고신재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쥐며 토해내는 숨까지 참았다.
한편, 걸걸한 목소리를 토해내는 사내의 입에서는 고작 몇 초 나마 풍선처럼 부풀었던 마음이 얼마나 우스운 것이었는지 알려주는 문장이 쉼 없이 이어져 나왔다.
「지금부터 제대로 준비해라.」
「…….」
「학부를 모자란 것으로 갔으니 복수전공을 하든, 다른 경력을 쌓든! 대체 예닐곱 살에 시작한 소꿉장난을 언제까지 할 셈이야?」
「…죄송합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최선 따위로는 안 돼! 그따위 광대짓으로 백날 최선을 다해봤자, 대체 뭘 하겠다고!」
사실, 그래도 여기까진 참아볼 만했다.
정말 여기까진 이 악물고 실실 웃으며 듣고 나와 혼자 삭혀볼 수도 있었다. 제가 하는 걸 무시하는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까. 신선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었다.
여느 때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지나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쯧, 노골적으로 혀를 크게 차며 이어진 말은 고신재 그에게 떨어졌던 긴 하루의 한계를 분명히 했다.
「-어쨌거나, 둘 중 하나라도 정상적인 미래를 그려야 할 게 아니냐!」
……둘 중 하나라도, 정상적인 미래를, 그려야 한다.
제가 들은 말을 천천히 곱씹는 고신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저 문장에 담긴 의미를 모두 안다.
짜증 날 정도로 정확히, 또 분명하게.
그래서 더 심사가 뒤틀렸을지도 모른다.
이건 이미 한계까지 치달은 하루의 무게와는 별개의 구역질에 가깝다.
묵은 종이의 냄새가 나는 서재 안은 잠시나마 끔찍하리만치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고요는 그리 길지는 않았다.
「군인들 사이에서 무용과 아들은 역시 좀 우습나요?」
웃는 얼굴 그대로 툭, 말을 자르고 끼어드는 매끄러운 목소리는 그 내용을 덜어내고 들으면 엄한 아버지에게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장난기 가득한 어린 아들처럼 다정했다.
신재는 저를 보는 사내의 짙은 눈썹이 작게 꿈틀한 걸 보면서 더욱 나긋나긋하게 맘을 이었다.
「뭐?」
「엄마는 제가 무용하는 거 영 마음에 안 들어는 해도, 어디 가서 자랑하는 건 또 좋아하던데. 왜. 보기 좋잖아. 미술 장사하는 엄마에, 무용하는 아들. 소위 그림이 되지. …그런데 그게 좀 낯부끄러우신가 봐요. 그렇죠?」
「…….」
「주변 별 단 집 아들들은 하나같이 군인 아버지 하늘같이 떠받들고 존경하면서 자기도 군복 입겠다고 아우성인데. 명색이 쓰리스타나 되어서 아들을 둘이나 뒀는데 군복은커녕 춤춘다고 구니.」
「아는 놈이 그따위로 행동해!」
「아니까 더 재밌더라고요.」
애초부터 화기애애할 수 없는 관계였다.
부른 사람도, 불려온 사람도 모두 그걸 알고 있는 만남이었다.
고신재 역시 이곳으로 오는 내내 최악에 최악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그리며 제가 할 말을 다듬었었으니 새삼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고신재 역시 오늘 이 이상은 물러날 수도, 듣고 있을 수도 없었다.
정확히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런 말은 하늘 같은 ‘강서진 대표님’도 같이 있을 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하고요. 하하, 왜 엄마 있을 땐 입도 벙긋 못하시잖아요. 그러면서 해외 나가자마자 나만 잡아다 정상적인 미래니 어쩌니 하는 거. 솔직히 좀 치졸한 것 같기도 하고-」
--퍼억!
점점 속도가 붙던 고신재의 말은 끝까지 다 이어지지 못했다.
나이가 무색하게 마디마디가 두껍고 거친 손이 곧장 말끔한 얼굴을 있는 힘껏 후려치며, 반듯하던 몸이 크게 휘청였기 때문이었다.
「이 시건방진 새끼!」
헤드 기어 없이 곧장 주먹을 얻어맞은 것처럼 골이 울리며 이명이 뒤섞이는 와중에도 뒤집힌 노호 만큼은 귓가에 곧장 내리꽂혔다.
「네놈이! 네놈이, 내 집에 들어와서 그렇게 실실대고 의뭉스럽게 웃을 때부터 소름이 끼쳤지!」
「…….」
「아주 진절머리 날 만큼 늘 그랬어! 이 뱀 같은 새끼. 이 독사 같은 새끼!」
고신재는 윙윙 울리는 머리를 느릿느릿 움직이며 툭툭 끊어지는 한숨을 간신히 토해냈다.
뺨은 얼얼하고, 치아에 짓이긴 입술은 찢어져 역겨운 쇠맛이 느껴졌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초점이 정확히 맞지 않고 뒤틀렸다.
하지만 고신재는 그 어떤 것도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24년간 아버지의 이름을 달고 있던 남자의 얼굴은 뿌옇게 변해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저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짚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내 그와 눈이 마주쳤다는 걸 확신한 고신재는 찢어져 피가 맺히며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고집스레 움직여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내 집은 무슨. 」
어찌나 세게 얻어맞았는지 뒤늦게 얼얼하게 올라오는 통증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 앞에서 그걸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휘청한 어지럼증을 드러내는 것 대신, 고신재는 그 단정한 얼굴을 이죽대고 웃는 쪽을 택했다. 심지어는 크게 얻어맞고 순순히 물러나지만도 않았다.
「여기 아버지 집 아니잖아. 웬 생색이신지. 아, 혹시 내년이 퇴역이라 좀 예민하신가.」
「너, 고신재, 너…!」
「차 잘 마셨습니다.」
사실 고신재 역시 한때는 군복을 입은 제 아버지를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저를 향한 냉담을 무뚝뚝함이라고 착각하고, 귀에 박힐 만큼 들은 저 혀 차는 소리가 사실은 형 말처럼 다 걱정 어린 관심이라고 믿을 땐 그랬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씩.
어머니의 눈 밖에 있을 때마다 기어이 폭발하듯 터지는 저 분노를 만날 때마다. 영영 제게 향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지 오래인 애정의 갈구가 얼마나 굴욕적으로 다가왔었는지 모른다.
고신재는 꼿꼿하게 흐트러짐 하나 없는 걸음걸이로 익숙한 지옥을 걸어 나왔다.
심지어는 심상찮게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게 느껴지는 오른쪽 뺨을 보고 건조한 목소리로 병원에 갈 것을 묻는 비서의 질문에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건 높다란 자존심이 만든 허세에 불과했다.
유독 길이 막히는 도로를 한참이나 달려 오늘 온종일, 아니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간절히 기다렸던 진짜 귀가를 한순간부터 볼품없이 무너지고 말, 고작 그 정도의 허세.
「…….」
긴 하루의 끝.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두꺼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 흔한 기계음조차 들리지 않는 컴컴한 집 안에서 고신재를 반기는 건 마치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 같은 밝은 주황색의 현관등 뿐이었다.
고신재는 차마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석상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자 몇 초 지나지 않아 어설픈 환대는 빛을 잃고 남은 건 어둠 속에서 가빠지는 숨뿐이었다.
정상적인 게 있나?
나한테 정상적인 미래라는 게, 있기는 한 건가.
있지도 않은 걸 잡으려고 굳이 이렇게 아등바등 할 필요가 있을까.
고신재는 저 자신에게 물었고, 답은 금방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