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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 힐, 힐!-26화 (2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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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날 때가 있다면, 분명 오늘 같은 날이 좋을 거다.

날씨는 좋고 몸은 너덜거리고 마음엔 쉴 틈 하나 없다.

웃기지만,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고 버티려고 했는지 무색할 정도로 정리가 쉬웠다.

고신재는 피로에 절어서 축축 늘어지고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움직여 몇 개 안 되는 설거지를 하고 집을 청소했다.

최소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이곳에서 저라는 인간이 살았던 흔적이 남지 않으면 해서였다.

하지만 이 집에서 딱 하나 고신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있었다.

「…….」

바로 안 쓰는 방에 몰아넣어 둔 제 형, 고진영의 옷가지와 물건들이다.

고신재는 평소에는 발도 딛지 않던 외딴방의 물건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내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서 나왔다.

내려놓기로 다짐했는데도 결국엔 4년 전의 형이나 지금의 아버지나 같은 말을 한 거나 다름없었다는 걸 상기하는 건 왠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쓸고 닦고 버리며 시간을 보낸 새벽 2시.

길다면 긴 정리의 여정은 어느새 산더미처럼 쌓인 옷가지로 향했다.

제가 남긴 그 어떤 것도 여러 번 손이 가는 짐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지막 단계였다.

고신재는 제 옷이란 옷은 다 챙겨서 제 허리를 넘을 정도로 커다란 바구니에 넣고 주상복합 1층의 코인 세탁소로 향했다.

새벽의 코인 세탁소는 기묘하게 따뜻한 탁한 공기만 돌 뿐,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했다. 500원짜리 동전을 몇 개 넣고 빨래를 돌리자 옅은 세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고신재는 커다란 세탁기 안에서 돌아가는 제 옷가지들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뒤늦게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제 오른쪽 얼굴은 욱신거리는 것으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몰골이 되어가고 있었다.

……와. 진짜 꼴불견이다.

신재는 왠지 슬슬 감각마저 없어지는 뺨을 손가락 끝으로 쓸면서 멍하게 생각했다. 습관적으로 들고 내려온 휴대폰 위의 액정이 켜지며 깜박인 것 역시 그 때였다.

[가나야~~]

[자??]

하마였다.

고신재는 끔찍했던 오늘 하루와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그 천진하기까지 한 문장을 보며 순간 아, 얘도 있었지. 하고 힘이 탁 풀린 채 생각했다.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있으려니 오래된 게임 친구는 우는 이모티콘을 세 개쯤 찍어 보냈다.

…그래. 뭐 대단한 짓을 하겠다고 씹어.

고신재는 아직 다 되려면 1시간은 더 남은 세탁기를 흘끗 보고는 푹 한숨을 내쉰 다음, 짤막하게 답장을 보냈다.

[아니]

[오!!! 그럼 컴터 가능?]

[아니]

힘이 빠진 손가락은 자꾸 엇나가서 고작 짤막한 두 글자를 치는데도 몇 번이나 오타가 났다.

[ㅠㅠ뭐하는뎅??]

[빨래]

[빨래?? 이시간에???]

[코인 세탁소]

[아~~~~]

그래 봤자 몇 단어를 치지도 않았는데 제 게임친구는 벌써 조잘조잘 나도 계절 바뀔 때 엄마 심부름으로 큰 이불을 돌리러 간다느니, 섬유유연제 향을 좋아한다느니 하고 묻지도 않은 수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고신재는 하마가 이렇게 조잘조잘 사소한 것들을 떠드는 걸 꽤 좋아했다.

아홉 살 땐 친구들의 스케치북을 곁눈질하는 것으로 훔쳐보던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매일매일 듣고 있노라면, 가지지 못할 것을 한 번이나마 품에 안아본 양 기분이 좋아졌다.

빨래를 돌린다는 말 한마디에 ‘아 그런데 난 요새 섬유유연제 대신에 건조기에 드라이 시트 넣는 게 좋더라’까지 폭발적인 혼잣말이 진전된 걸 물끄러미 눈으로 읽고 있던 고신재는, 천천히, 하지만 꾹꾹 힘주어 휴대폰 액정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ID : wotls01234 / PASS : g!753951]

고민할 것도 없는 간결한 내용이건만, 혼자서도 잘 놀던 하마가 몇 초나마 조용해진 건 그때였다.

심지어 대답은 10초쯤 뒤에 왔다.

[뭐야?]

[내 거 아이디랑 비밀번호]

고신재는 제 느린 답변을 재촉하지 않는 하마 덕분에 더더욱 천천히 문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너 쓰라고]

[뭘?]

[무슨 게임이든 아이디랑 비밀번호 다 이거니까 너 마음대로 쓰고 가져갈 아이템 있으면 다 빼 가]

사실, 신재는 이때까지만 해도 별 고심도, 고민도 없었다.

그저 이건 드물게도 순수한 호의에 불과했다.

스무 살에 처음 알게 된 이후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던 제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유일한 환기가 되어 주었던 랜선 너머 누군가를 위한 사소한 감사 인사였다.

하지만, 받는 상대는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채팅창 가득 물음표를 길게 도배한 하마는, 이어서 연달아 메시지를 보냈다.

[????]

[아니 대체 뭔소리야]

[네 계정을 왜 줘??]

[가나야 너 게임 접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궁극적으로는 예스다.

하지만, 이미 물음표가 넘칠 만큼 많은 상대에게 괜한 질문을 더 안겨줄 필요는 없었다.

고신재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친구를 향한 거짓말을 했다.

[아니]

[그런데 왜????]

[그냥 주고 싶어서]

고신재의 상식에서 이건 소위 말하는 ‘꽁’이었다.

무엇이든 대가가 필요한 세상에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저 얻을 수 있는 조금은 갑작스러운 선물.

그래서 별 의심 없이 이쯤에서 고맙다, 하고 받을 줄 알았다.

최소한 고신재는 그렇게 생각했다.

[야 너 누구냐]

설마하니 의심 많은 게임 친구의 반응이 이렇게 튈 줄은 모르고 말이다.

[누구냐고]

고신재는 눈을 끔벅, 끔벅하며 대답을 고르다가 이내 자각도 없이 가장 못 미더운 선택지를 눌렀다.

[난데...?]

[너 해킹이냐?? 폰도둑??]

그냥 게임 아이디 주겠다는 건데 그게 그렇게 의심스러운 일인가.

신재는 제 입가가 찢어진 것도 깜박하고 몇 시간 만의 헛웃음을 치다가 이내 살짝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상상력 풍부한 하마의 추리 극장은 이제 막 문을 열었다.

[야 됐고 딱대]

[뒤지고 싶지]

……빨래 다 하고 그러려던 참이긴 했는데.

고신재는 차마 꺼낼 수 없는 대답을 속으로 하면서 그가 지금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액정을 두드렸다.

정말이지 덕분에 몽롱했던 머리에 카페인을 쏟아 부은 것처럼 정신이 퍼뜩 든 신재다.

[하마야 나 맞아]

[거짓말!!!!!]

[왜 의심하는데?]

[우리 가나는 어제까지 나랑 잘 놀았거든!!!!]

[힐 먹는 하마야. 나 맞아]

힐 먹는 하마는 평소에 고신재 그가 탱커를 주로 잡는 제 게임친구에게 곧장 하는 농담 같은 말이었다.

「…….」

이정도면 뜬금없는 의심이 가라앉을까 싶어 던진 문장이었건만, 하마는 그 이후로 한참이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휴대폰 채팅으로 떠든 게 다였는데도 새삼스러운 침묵이 훅 몰려오며 혼자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게 신기했다.

잠든 게 아닐까.

고신재는 까맣게 꺼진 채로 다시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제 휴대폰 액정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분명 그건 꽤 합리적인 가설이었다.

흉하게 피멍이 올라오기 시작하며 붓기까지 시작한 얼굴을 담던 까만 화면 위로 메시지 팝업이 연달아 떠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려 20분 만의 답장이었다.

[대체 뭔데]

[왜 갑자기 계정 정리를 하는데?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어’라니.

누군가에게는 너무 흔해서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는지 기억조차 못 할 빈 문장이겠지만, 최소한 고신재에게는 팔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오랜만에 만나는 질문이었다.

피딱지가 앉은 입술에서 따끔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도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일은 무슨. 무슨 일이 있겠어. 별일 아냐, 하마.

고신재는 뻔하디뻔한 문장을 쉼 없이 그려냈다.

대충 둘러내고 넘어갈 수 있는 효율적인 말들이 많았다.

지금 당장 이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볼 일도, 한심할 만큼 너무 오래 숨을 헐떡이느라 끔찍하게 쉰 따가운 목소리를 들을 일도 없는 남자를 달랠 수 있는 문장은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고신재는 하마의 오랜 침묵이 제게 옮은 것처럼 액정 위에 새겨진 듯 떠오른 말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심지어 한참이나 그러고 있다가 멍하게 움직인 손가락은 머릿속에 떠올린 문장이 아니라 다른 걸 적어내기까지 했다.

[내가]

고작 딱 두 글자였는데, 하마는 그것에 꼬박꼬박 응, 하고 대답해줬다.

제아무리 뻔뻔한 고신재이지만 차마 거기에 대고 ‘죽으려고 하고 있어’ 라고 솔직한 문장을 이을 수는 없었다.

덕분에 신재는 한참이나 문장을 썼다 지웠다 했다.

컴퓨터였으면 제가 몇 번이나 말을 고치는 걸 들켰을 텐데, 휴대폰을 붙들고 하는 바보짓이라 다행이었다.

한편으로는 저 자신이 참 우습기도 했다.

꼴에 아직까지 지키고 싶은 자존심은 남아서, 이 역겨운 인생을 털어놓는 건 싫은 주제에.

……그러면서 제가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이 새벽에 붙잡고 마지막으로 뭐라도 말하고 싶어 끙끙대는 꼴이라니.

얼마나 그렇게 단어를 골랐을까.

고신재는 이내 아주 가까스로 한 문장을 완성했다.

[내가, 24년 동안 알았던 생일이 잘못된 거였대]

문장 옆의 숫자 1은 제대로 떠오르기도 전에 곧장 사라졌다. 빠릿빠릿한 회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일이? 태어난 날이?]

[응]

[그래서 진짜 생일이 언젠데?]

[모르겠어]

[허어........]

제가 친 말이지만 다시 읽어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건, 하마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분명히 술에 취했다고 생각할 거다.

이 야심한 시간 제 헛소리를 들어주던 남자가 곧장 한 번 되물은 이후로는 쭉 대답이 없는 것만 봐도 그렇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한심해.

고신재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얼굴을 감쌌다.

살짝 누르는 것만으로도 얼얼한 뺨이 정신을 차리라는 것처럼 유독 뜨끈뜨끈하게 열이 올라 있었다. 부은 눈가가 조금은 쓰라린 것 같기도 했다.

그때였다.

<하마님이 선물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선물함으로 가기

-감동카드 보내기

-나도 선물하기

「…….」

어느새 빨래가 다 끝난 세탁기는 요란한 모터 소리도 없이 고요해져 있었다.

하지만 고신재는 제가 한가득 가져와 넣은 빨래 같은 건 떠올리지도 못한 채 저와 하마 사이의 채팅방 화면 전체를 별안간 채우는 길쭉한 이미지와 글을 내려다봤다.

한참이나 그저 그걸 눈에 담고만 있던 남자의 손가락이 뻣뻣하게나마 움직인 건 못해도 꽤 나중의 일이었다.

[뭐야?]

[치즈케이크!!]

그건 안다.

[이거 맛있다!!]

맛있을 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케이크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고신재는 그런 사소한 식성 투정 대신 그 노란 케이크의 사진을 거의 노려보듯 뚫어져라 눈에 담았다.

배송 상품이다.

주소를 입력하고 나면, 오는 데 못해도 이틀은 걸리겠다.

휴대폰 위쪽에서는 하마가 스팸처럼 연이어 보내는 메시지가 연달아 깜박거렸다.

[가나야 이거 케이크 도착하는 날을 생일이라고 하면 안 됨??]

[나도 이거 사다가 너랑 같이 먹으면서 생일축하 짠!! 할게!!! 응??]

[응? 응? 응?]

……그런 게 어딨어. 엉터리잖아.

심지어 치즈 케이크 가지고 하는 생일축하에 짠이 왜 들어가.

고신재는 채팅방 대신 텅 빈 배송지 입력 창을 띄워둔 채로 하마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쏟아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하마의 메시지 세례는 멈출 기미가 안 보였다.

[가나야~~ 가나야~]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가나의~~~ 생일 축하합니다~]

[내가 이거 해 줄게 랜선 실시간으로!! 응? 응? 응?]

새벽의 바보 같은 게임친구 녀석은 얼마나 채팅을 쉼 없이 보내는지 잠시 눈을 비비기만 해도 문장 몇 개는 놓칠 지경이었다.

[그니까 게임 접지 마, 응?]

읽지도 않고 대답도 안 하는데 얜 기분도 안 상할까. 솔직히 감탄이 나오기도 했다.

[가나야~]

[우리 겜존잘 가나야~]

[듣고는 있는 거니... 보고는 있는 거니... 똑똑똑...]

「겜 존잘은 뭐야…….」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얼마나 어이없을 만큼 끔찍한지. 고신재는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혼잣말을 끝까지 다 잇지도 못했다.

[오!!! 읽는다 읽는다]

하마의 이른 축하는 어느새 스크롤이 한참은 생겼을 정도로 길었다.

심지어 제가 다시 채팅을 읽기 시작한다고 혼자 이모티콘을 도배하며 축제를 열고 있기까지 했다.

얜 진짜 바보다.

스물 네 살의 고신재는 생각했다.

하마에게는 미안하지만, 정말 바보라는 말 외에는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게임 친구가 오늘따라 술이라도 마시고 헛소리를 하는구나 넘어가면 되는 것을. 새벽 3시도 넘은 이 시간에 뭘 위로하고 뭘 달래야 할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부여잡고 쩔쩔매는 건, 정말 바보나 할 짓이다.

왠지 한숨이 날 것만 같다.

손에서 힘이 빠지면서 놓칠 뻔한 휴대폰을 간신히 낚아채듯 움켜쥔 고신재는, 한동안 답장 대신 거대한 드럼 세탁기 안에서 빙빙 구겨진 채 엉켜있는 제 옷가지들을 눈에 담았다.

그러자 깜박, 하고 휴대폰 액정이 한 번 더 불이 켜졌다.

고신재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걸 확인했다.

[가나야 내가 내년에는 더 좋은 선물 해줄게]

「…….」

알싸한 뺨의 통증에서부터 시작된 열이 목구멍으로 넘어간 듯 뜨뜻미지근했다.

그 열을 간신히 크게 삼킨 고신재는 왠지 저릿저릿한 손가락 끝으로 휴대폰 액정 위를 두드렸다.

[좋은 거 뭐 해줄 건데]

[.........으으음]

오늘 죽으려고 했는데.

정말, 오늘 죽으려고 그랬는데.

……이게 뭐야.

봄. 스물네 살의 고신재는 그렇게 딱, 케이크가 도착하는 이틀만 더 살아보기로 마음먹었었다.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 선작,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 또, 후원 쿠폰 보내주신 gomphrena 독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나름의 과거편이 끝났네요.

이제 본격적으로 두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가능한 내일... 늦어도 내일 모레는 와 볼게요. ^ ^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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