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30화 (30/65)

30

“…후우우….”

백한빈을 거실에 혼자 내버려두고 곧장 침실과 연결된 가장 먼 화장실까지 도망친 고신재는, 이미 몇 번째인지도 모를 긴 한숨을 다시 한 번 내쉬었다.

하지만 가슴께가 빠듯할 정도로 크게 들이켰다 내뱉은 숨에도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25년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손꼽힐 만큼 볼썽사나운 꼴을 한 채인 건 말할 것도 없다.

갑자기 쏟아지는 폭풍우에도 코앞에서 택시를 타며 머리카락 한 올 안 젖었던 고신재는 인제 와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다.

지금 이곳에 처박힌 이후로 얼마나 세수를 험하게, 또 많이 했는지도 모르겠다.

셔츠 앞섶이 엉망으로 젖는 것 따위는 신경도 안 썼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이 오른 머리를 식히려는 생각밖에 없어서였다.

“…술, 때문이지. 그래, 당연하지. 술 말고 뭐가 있겠어.”

저 자신에게 세뇌하듯이 중얼거려보지만 사실 이게 얼마나 웃긴 핑계인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고작 맥주 반 캔에 취할 정도로 알코올에 약하지도 않다.

살짝 긴장이 풀리고 느슨해지기는 했지만, 그건 함께 한 사람이 백한빈이어서다. 밖이었으면 그 정도엔 자세조차 흐트러지지 않았을 거다.

술은 무슨. 얼굴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의 움직임조차 소름 돋을 만큼 선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맨정신이다.

……키스하려는 줄 알았다.

하마가- 아니 백한빈이 제게로 확 가까워지는 순간, 제 앞에서 장난이라는 듯 웃는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대로 입을 맞추는 상상을 했다.

백한빈은 꿈에서 했다지만 저는 솜털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얼굴을 잡아당기는 상상을 맨정신으로 했다.

얼굴에 부딪히는 안경을 벗기면 어떨지 생각했다.

입술에 스친 따뜻한 숨이 입안으로 들어오는 생각을 했다. 불가능하리라 생각해서 단 한 번도 떠올린 적 없었던 가정을 했다.

지금도 그렇다

진짜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 저 자신에게 욕을 쏟아내면서도 머리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삐걱삐걱 소리가 난다. 그건 차마 백한빈에게 쏟아내지 못한 문장들의 잔해다.

…내 얼굴을 한 가나다라123라는 건, 그냥 나라는 말이잖아.

하마, 아니 백한빈, -아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넌, 다시 말해 나랑 사귀는 상상을 했다는 거잖아.

너는 그게 됐다는 거잖아. 진짜 나를 눈앞에 두고도!

고신재는 거울 속에서 울긋불긋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볼썽사나운 남자를 향해 속이 답답하게 막힌 헛웃음을 토해냈다.

“이제 와서 무슨……,”

그에게 같은 동성을 향한 마음은 꽃병에 담긴 생화 같은 거였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예쁜 일이다. 꽃이 담긴 꽃병을 깨트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꽃병의 꽃은 언젠가 시든다.

땅에 뿌리내린 것과는 달리 가장 흠 없고 화사한 시기에 빛나다 언젠가 악취를 풍기며 시들고 만다.

아무리 지극정성으로 물을 갈고, 이파리 하나하나를 매일같이 닦으며 지켜보려고 발버둥 쳐도 끝은 정해져 있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 게 ‘친구’였다.

제가 아무리 혼자 소중히 여겨도 반드시 끝이 오는 관계 말고, 욕심껏 손에 쥐어도 티가 나지 않는 안전한 관계를 골랐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백한빈이 멋대로, 제가 꼭꼭 숨겨뒀던 꽃병을 찾아냈다.

아니, 찾아만 냈을까.

그걸 바닥에 내던져 깨버렸다.

그러고는 정말 멋대로 단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는 어떤 가정을, 어떤 상상을 그 위에 심기까지 했다.

고신재는 자꾸 슬금슬금 머리를 드는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거울 속의 한심한 남자에게 세뇌하듯 입을 열었다.

“-너무 놀라서 그래. 맞아. 너무 놀라서.”

저는 백한빈에게 목소리가 비슷하다느니 하는 말을 듣고는 너무 놀란 거다. 너무 놀라서 그렇게 심장이 뛴 거다.

……너무 놀라서, 그렇다.

고신재는 거울 속 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마치 다짐이라도 하듯 생각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 같은 남자인데 절대 안 된다.

잘 알고 있는데 잠시 실수를 한 거다.

…심지어는 그걸 확인할 방법도 있다.

남자의 입에서 긴 한숨이 다시 한 번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 한 번 괜한 세수를 더 하는 것 대신 이곳에 도망쳐 들어왔을 때보다 더 힘주어 걸어나가는 쪽을 택했다.

대체 화장실에서 얼마나 처박혀 있었는지.

거실로 나오자 한빈은 안경을 벗고 소파에 뒤로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술기운이 올라 발갛게 물들었던 얼굴은 딱 보기 좋은 혈색이 돌았다.

고신재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 곁으로 다가가서 조금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빈아.”

“…….”

“백한빈.”

“…으응…?”

확실히 오늘 하루는 꽤 길었다.

평소에도 그리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닌 녀석이 몇 시간이나 넓은 백화점 여기저기를 다니며 쉼 없이 떠들기까지 했는데 늘어지지 않기란 어려울 거다.

고신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백한빈의 옆, 소파 위에 천천히 앉았다.

그러자 푹 가라앉는 느낌 때문일까. 소파를 등받이로 쓴 채 머리를 젖히고 있던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작은 입도 천천히 열렸다.

“안녕.”

흔하지만 한편으로는 묘한 인사였다.

고신재는 그 짤막한 단어 앞에서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응, 안녕.” 하고 중얼거렸다.

또 순간 생각하기도 했다.

망했다. 정말 망했다.

술도 아니고, 너무 놀란 것도 아니고, 그저 눈만 마주친 것만으로도 다시 속이 시끄러워지다니. 안경을 벗어서 그런가.

기껏해야 안경 닦을 때 말고는 그리 볼 일 없던 얼굴이라, 그래서 그런가. 그래서.

고신재는 저도 모르게 손등 위로 하얀 뼈가 그려 보일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그때, 옅은 술기운이 올랐을 때보다 더욱 정신없이 이어지던 생각의 연쇄를 끊은 건 백한빈의 나른한 물음이었다.

“…왜 그래?”

“…….”

“왜애.”

평소에 이렇게 달래듯 묻는 건 늘 고신재였다.

할 말을 꾹꾹 눌러 참다 내뱉는 건 늘 백한빈의 몫이었다. 고신재와 백한빈이 아니라 가나와 하마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단정한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로 한참이나 말을 고르는 건 신재 쪽이다.

고신재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보는 백한빈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 다정하게 따라오는 걸 느끼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혀로 한 번 훔친 다음, 답지 않게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는 거……, 아니, 미친 소리인 거 아는데.”

“응.”

“그거… 한 번만 더 해 보면 안 될까.”

“그거?”

“-네가 했던 거.”

이미 심장은 조금 전 온갖 핑계를 댔을 때처럼 시끄럽게 뛴다.

숨을 작게 삼킨 다음 그걸 내뱉는 것에 섞어 변명하듯 말을 잇는 문장이 자꾸 볼품없이 작아지는 게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입술……, 진짜, 닿지는 않게 할 게.”

“…….”

“……딱 한 번만 더 해 봐도 돼?”

놀라 도망칠 때는 언제고, 뒤늦게 돌아와서 하는 말치고는 뜬금없다는 걸 고신재 역시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그가 제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선 따위 좀 넘으면 어떠냐고 웃으며 호언장담해놓고, 정작 백한빈이 겨우 한 발짝 떼자 바보같이 휘둘린 지금 이 상태가 그저 술과 밤에 취한 실수라는 걸 저 자신에게 증명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길이었다.

고신재는 백한빈이 했던 걸 저도 똑같이 해보면 이 모든 동요가 별거 아니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으리라 감히 믿었다.

물론, 제 요청을 한빈이 이상하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거절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싶었다.

하지만 백한빈의 선택은 그 둘 모두 아니었다.

드물게도 쩔쩔매는 남자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한빈은, 머잖아 활짝 터지듯 웃었다. 그건 요 몇 달 누구보다 백한빈과 붙어 지냈던 고신재 그조차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백한빈은 살짝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조심조심 말해. 놀랐잖아.”

“…그래?”

“너 오늘 진짜 이상해.”

들은 말을 돌려줄 수 있다면 좋았을 거다.

하지만 본 적 없던 나른하게 풀린 미소를 건 한빈 앞에서 고신재는 입을 떼는 것 대신 괜히 주먹을 말아 쥐며 몰아치는 긴장을 부정하느라 바빴다.

또, 이어서 보란 듯이 제 허벅지로 머리를 기대오는 무게감에 온 신경이 집중되는 걸 인정하기도 싫었고 말이다.

“…자.”

쌍꺼풀은 없지만 크고 시원하게 빠진 뾰족한 눈.

얼굴의 반은 가리던 커다란 안경을 벗자 더욱 작고 오밀조밀하게 보이는 코와 입.

늘 창백했던 콧잔등과 뺨 위의 작은 주근깨 몇 개. 덥수룩했던 앞머리가 헝클어지며 예쁘게 드러난 이마.

고신재는 제 앞에서 완전히 무방비해진 예민한 남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이 모든건 갑작스럽게 기습당했던 때와는 다르게 제가 고삐를 쥔 행위였건만 상태는 호전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이 순간 가장 큰 방해가 기어이 머리를 채우기까지 한다.

……백한빈은 ‘가나’와 늘 이랬을까?

제 얼굴을 한 남자 앞에서 지금처럼 예쁘게 웃고, 머리를 기대고, 입맞춤을 기다리며 저 끝이 가는 눈을 가늘게 떴을까?

고신재는 제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고 젖힌 작은 얼굴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감싸고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순간까지도 새로 돋아나기 시작한 물음을 지워내지 못했다.

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반드시 아무렇지도 않아야 했던 행위를 되감은 결과마저 엉망진창이었다.

“…….”

“…….”

백한빈을 다시 눈에 담을 때부터 슬슬 들뜨던 심장은 첫 입맞춤을 앞둔 애송이처럼 시끄럽게 제 위치를 알리며 도로 망가졌다.

허벅지에 걸쳐진 이 작은 머리가 걸쳐졌을 때부터 묘하게 당기던 아랫배는 또 어떤가.

말도 안 된다고 헛웃음 칠 수조차 없게 슬슬 위험한 경계에 가까워지고 있다.

절대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머릿속 무언가가 간신히 중얼거렸다.

물론, 그 하찮은 충고는 내내 꾹 닫혀있던 창백한 입술에서 또렷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짤막한 물음에 곧장 짓이겨졌다.

“끝이야?”

“…….”

해봤자 여기서 뭘 더 하겠냐고 태연하게 되물어야 한다. 그게 맞다.

하지만 척추를 타고 올라와 머릿속에서 떠돌기 시작한 작은 균열은 자꾸 이제까지와는 정반대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정말 안 되는 게 맞아?

절대 안 되는 거, 확실해?

고신재는 스스로를 비웃듯 이어지는 확인에 저도 모르게 손을 말아 쥐었다.

심장은 그 어떤 때보다 시끄럽게 뛰는데 정작 그 기능은 제대로 못 했다.

이렇게나 세차게 뛰는 데도 어느 때보다 숨이 안 쉬어졌다.

낯선 웃음기를 건 백한빈 역시 들끓는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다시 한 번 물었다.

“진짜 안 할 거야?”

누군가는 저 작고 창백한 입술을 볼품없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신재는 저 입술에서 나오는 문장을 그 소란스러운 술집에서 처음 들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단 한 번도 저것에 휘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백한빈이 이제껏 제겐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은 표정을 짓고, 상상하지 못했던 말을 건네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떠올릴만한 여유는 없었다.

오히려 절대 현실의 제겐 향할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저 예쁘고 또 아까운 것이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에 속이 더 들끓기만 했을 뿐이다.

고신재가 대답 대신 저를 충동한 욕심의 이름을 되짚지도 못한 채로 마른 몸을 곧장 제 무릎 위로 끌어올리는 순간, 백한빈이 작게 소리 내 웃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키스만.

그래. 딱 키스만 해 보자.

그러면 정말 알 수 있을 거다. 절대 안 된다는 걸 배우게 될 거다.

입술을 떼어내고 나서는 술 핑계를 대자.

나도 백한빈도 어색해지지 않게끔 그렇게, 장난이라고 웃자. 고신재는 제 품에 가두어 앉힌 남자에게 입을 맞추기 직전까지 저 자신에게 되새기듯 생각했다.

……그 마르고 가는 팔로 제 목을 휘감는 감각 하나에 거창한 다짐 따윈 모조리 휘발될 줄도 모르고.

[작품후기]

<원래 계획>

: 이 뒤로 노블편까지 붙여서 챕터3 마지막끼지 안 끊고 연참하며 흐름이 끊기지 않게 하겠다는 원대한 플랜

<현실>

: 며칠간 붙잡혔던 급한 일이 오늘 오후에야 끝나서 다 못 썼어요... 흑흑. ㅠ ㅠ 결국 원대한 계획은 계획으로만 두고 ㅠ ㅠ 써둔 것까지 올려요.

왠지... (지각까지 한) 양치기가 된 것 같아서 죄송스러워요.

다행히 내일은 휴가예요!!

잠 좀 자고 욕심껏 더 써서 오겠습니다 *^ ^*

정말로 내일은!! 노블과!! 계획 했던 챕터3의 끝으로 뵈어요, 꼬옥.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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