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50화 (50/65)

50

소위 심증만 겹쳐지고 물증은 하나 없는 상황에서 백한빈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얼마 없었다.

물론 가장 명확한 방법은 진작에 나와 있었다.

바로 ‘고신재 너 혹시, 가나다라123이야?’라고 곧장 직구로 물어보는 거다.

하지만 그건 쉽지도, 편하지도 않은 길이었다.

물론 시도를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번번이 “신재야.” 하고 이름을 부르는 데만 성공하고 끝내는 다른 이야기만 늘어놓기는 했지만, 어쨌든 물어보려고는 해봤다.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다.

“한빈이 너도 이제 지필은 다 끝났지.”

“응.”

“내일은 나랑 같이 사진 교양 발표 있고…, 모레 리포트 제출 하나 있나?”

“으응.”

“얼마나 썼어?”

“거의 다. 한두 장 더 쓰면 될 거 같아.”

결국 이도 저도 못한 상황에서 백한빈이 선택한 건 의미심장한 떠보기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컴퓨터를 몰래 손대다 들켜 속이 덜컹 내려앉은 김에 간신히 입만 조잘대본 거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다.

어쨌거나 그건 꽤 유의미한 결과를 낳았다.

……고신재가 달라진 건, 그때부터였으니 말이다.

“…그럼…, 음, 아. 커피라도 타다 줄까?”

“괜찮아. 오늘만 커피 두 잔 마셨어. 그리고 잠깐 쉬려고.”

백한빈은 제 눈치를 보고 있는 게 역력한 남자를 모르는 척 일부러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고 있다가, 노트북을 탁 소리 나게 덮고는 소파 헤드에 눈을 감은 채 머리를 기대버렸다.

아니어야 했다.

고신재와 가나다라123이, ‘가나’가 같은 사람이라니.

그것만큼은 절대 아니어야 했다.

이제까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쏟아낸 마음이 한둘이 아닌데 그걸 당사자가 제 앞에서는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면서 다 듣고 있었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됐다.

백한빈은 소파의 바로 옆이 살짝 아래로 꺼지더니 이내 따뜻한 체온이 옆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는 걸 알면서도 꿋꿋이 무시하다가 한참 뒤에야 눈을 떴다.

그러자 고신재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입을 열었다.

“한빈아. 편하게 침실에 들어가서 자. 응?”

“…….”

“많이 피곤해? 안아서 데려다줄까?”

매일 같이 심증을 더해주는 인생 첫 애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

대답조차 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저를 향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은 또 어떤지.

반듯한 이목구비와 간지러운 눈웃음은 아직도 새삼스레 멍하게 바라보게 될 만큼 근사하기만 했다.

한빈은 제 대답을 기다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고신재의 초조함을 방치했다.

솔직히 이런 남자가 세상 제 ‘2순위 애인’을 자처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저를 무슨 민들레 홀씨처럼 대하며 조금만 늘어져 있어도 별 낯부끄러운 제안을 술술 내뱉는다는 게 영 믿기지 않는다는 생각은 늘 했었는데, 요즘은 그 문장이 정말 사실이 됐다.

…믿을 수가, 없다.

“한빈아?”

“별로 안 피곤해. 그냥 쉬는 거야.”

백한빈은 제 입 밖으로 튀어나온 문장이 생각보다 너무 퉁명스러워서 내심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무뚝뚝한 대답에도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한 번 할 일 없었을 고신재의 반응은 “그래. 그럼 다행이고.” 하는 맥없이 상냥한 대답과 미소였다.

속이 부글거렸다.

하지만 한빈은 이번에도 원점에 절대 닿지 못한 채 빙글빙글 도는 콤파스처럼 저와 조심스레 시선을 맞추는 남자를 고요히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끔찍할 만큼 눈가가 뜨거워졌다.

죽을 만큼 자존심이 상했다.

백한빈에게 ‘고신재와 가나다라123이 같은 사람이다’라는 전제는 단순히 대학 친구와 게임 친구가 사실 같은 사람이었다, 정도의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건 살며 단 한 번도 연애대상으로 생각한 적 없던 동성의 남자인데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과, 점점 벼랑으로 몰리는 것만 같았던 제 마음을 유일하게 터놓을 수 있었던 세상에 유일한 사람, ‘두 사람 모두가’ 저를 철저히 속였다는 의미다.

“……왜?”

말 없는 백한빈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연 남자의 목소리는 이 와중에도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이제 심증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넘쳐난다.

죄 없는 비서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는 빌어먹을 이름이 된 ‘박종우’부터 시작된 물음표는 어느새 느낌표가 된 지 오래다.

고신재는 ‘하마라고 부르는 게임 속 친구’를 좋아한다며 술주정을 늘어놓았던 저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

사진 교양에서 만난 제게 접근해 같은 조가 된 다음엔 시간표를 의도적으로 따라 했고, 그다음에 어떻게 흔들어댔는지는 되새기고 싶지도 않다.

심지어 여기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답을 알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바로 고신재가 정말 그 상냥하고 다정한 가나다라123이었다면, 대체 왜 제 짝사랑을 돕겠다고 접근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사실 가나다라123도, 너도, ‘하마’를 좋아해서 그랬을까?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을 텐데.

백한빈은 아직도 예쁜 꿈을 꾸는 저 스스로가 정말 지겨울 만큼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재야.”

“응.”

“할래?”

“…….”

차라리 뻔뻔하려면 처음처럼 쭉 뻔뻔하면 좋았을 거다.

이제와서 모르는 척하는 게 힘들 정도로 쩔쩔매는 건 또 뭔지.

덕분에 하루에도 기분이 열 번은 왔다 갔다 하는데, 고신재는 그 열 번을 다 맞췄다.

지나가듯 뭐가 먹고 싶다고 말하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걸 사 왔고, 울컥 화가 치밀어올라 괜히 짜증을 내면 단 한 번 맞받아치지 않고 사과만 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여야만 할 수 있을 애인의 말을 하면 눈조차 못 마주친다.

차마 그럴 염치조차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백한빈은 퍽 정답에 가까운 짐작을 하면서 툭 연이어 물었다.

“왜. 하기 싫어?”

“-아니. 그럴 리가.”

몇 초간의 침묵을 변명하듯 대답은 곧장 나왔다.

한빈은 그 힘이 들어간 문장 앞에서 조금은 안도하기도 했고, 또 조금은 우울해지기도 했다.

* * *

언젠가 백한빈이 “무용하는 사람 중에서 고신재 네 키는 큰 편이야, 보통이야?”라고 물었을 때, 고신재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평균보다는 큰 편이지. 189니까.” 라고 대답했었다.

백한빈은 그때 고신재의 키를 처음 알게 됐다.

사실 그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나보다 18cm나 더 큰 남자가 보는 세상은 대체로 내려다볼 일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퍽 일차원적인 짐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고신재는 캠퍼스를 같이 다니다 보면 매번 전세 버스를 타고 다니는 농구부 정도가 아니고서야 그보다 더 큰 사람을 찾기 힘들기도 했다.

그러나 고신재와 몇 달이나 붙어 다닌 이후로 백한빈은 그의 키를 처음 알았던 때보다 조금 더 풍부한 감상을 하게 됐다.

예컨대 언제나 그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제 애인이자 친구인 남자는, 애초에 고개를 숙일 필요조차 없는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는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하아, 읏…!”

하지만 이 순간.

그 한 걸음 나아간 감상은 소파에 앉은 다리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고개를 깊게 처박은 남자의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다른 쪽으로 슬금슬금 가지를 뻗고 있었다.

“-흐, ……아, 으응.”

아무런 마음도 없는 사람에게 이럴 수 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신재가?

백한빈은 간간이 짧게 끊어지는 숨을 삼키면서도 제 성기를 그 키만큼이나 커다란 입안으로 곧장 밀어 넣고 끄트머리가 살짝 쪼개진 귀두 끝부터 기둥 전체까지 미지근하고 두툼한 혀로 핥고 빠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자진해서 무릎을 꿇은 건 고신재였다.

무릎을 꿇는 행위에 흔한 관용어구로서의 의미가 통용될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빈은 다른 이들은 저 단정하고 그린 듯한 남자의 얼굴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조차 없는 음탕한 광경을 가지런한 속눈썹의 작은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물론 그 구경이 마냥 여유롭기만 한 건 아니긴 했다.

갸름한 뺨이 기둥을 힘주어 빨 때마다 쑥 꺼지고, 중간중간 더운 숨을 뱉어낼 때마다 유독 붉고 도톰해 보이는 입술에 담긴 성기로 피가 몰렸다.

그리고 또 이렇게, 지금처럼 사탕을 핥듯이 끝만 혀로 할짝거릴 때면 허벅지 안쪽이 간지러운 이유가 달아오른 중심을 삼키는 따뜻하고 축축한 점막 때문인지, 한 올 한 올 유독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흑갈색 머리카락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근질근질했다.

“…잠깐, 고신재, 왜 꼭, 그렇게 핥는데.”

“왜. 이건 싫어?”

“시, 싫기보다는… 계속 거기만 그러니까 간지럽기도 하고…, 좀 그래.”

하지만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제 사타구니 깊숙이 고개를 숙인 고신재가 제 성기를 입에 문 채로 평소엔 들을 수 없는 뭉개진 발음으로 말을 거는 순간의 울림이었다.

흥분으로 부풀어 오르고 타액으로 젖어 한없이 민감해진 중심에 가지런한 이가 닿지 않도록 노력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혀 이상으로 달아오른 얇은 피부 위를 긁어댔다.

작게 웃음을 흘릴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순간적으로 성기가 담긴 입안의 공간이 좁아지며 가벼운 압박감이 느껴질 때마다 저도 모르게 엉덩이 안쪽까지 바들바들 힘이 들어가고 무릎이 잘게 튈 만큼 짧고 선명한 자극이 뱃속을 들끓게 했다.

한빈은 결국 제 마른 허벅지에 오뚝한 코가 닿을 만큼 고개를 처박은 남자의 어깨를 밀면서 먼저 자포자기한 목소리를 냈다.

“그거 그만하고…, 빨리해.”

“한빈이 너 아직 싸지도 않았는데?”

“왜 맨날 나만 먼저 해야 돼.”

“…그래야 더…, 말랑말랑해져서.”

“……….”

“잘…… 들어가니까?”

이제 백한빈은 어디가 말랑말랑해지는 거고, 뭐가 잘 들어가는 거냐며 불분명한 문장요소를 되물을 필요도 없게 됐다.

조금 전까지 제 성기를 물고 있던 입에서 흘러나온 문장을 이해하자마자 뒤에서부터 시작된 찌릿한 긴장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어깨를 움츠리게 했으니 말이다.

벡한빈은 이 기대 어린 긴장을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더운 한숨 같은 문장을 천천히 내뱉었다.

“-괜찮아. 그냥 해.”

천장의 조명을 받은 고신재의 흑갈색 눈동자가 꼭 스모키쿼즈처럼 반짝거렸다.

하지만 한빈은 그 예쁜 눈을 마주 보면서도 감탄하기는커녕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일 같은 건 여태까지, 또 앞으로도 절대 익숙하지 않을 남자가 이 순간 저를 신중한 애정이 흘러넘치는 눈으로 바라본다고 느끼는 게 망상이 아니길 바라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잠시 어떤 대답도, 행동도 없이 그렇게 바라보던 고신재가 작게 한숨을 내쉰 건 그때였다.

“……후우.”

그건 고작 작은 한숨일 뿐이었다.

작은 자극에도 예민한 피부 가까이 고개를 두고 있는 자세가 아니었다면 차마 짚어낼 수조차 없었을, 아주 작은 한숨에 불과했다.

하지만 백한빈은 고작 그 스쳐 간 한숨 하나에 그렇지 않아도 포화상태인 머릿속에 답조차 구할 수 없는 새로운 질문을 구겨 넣기 시작했다.

한숨은 왜 쉬는데?

나랑 하기 싫어? 얘랑 뭐 하는 건가 싶어서 현타라도 왔나?

“……그래. 잠깐만.”

한빈은 제 다리를 몇 번 쓰다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침실로 발걸음을 옮긴 남자의 뒷모습을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바라보았다.

저 대단하리만치 멋진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며 웃어주고 입 맞출 때의 기묘한 만족감은 이제 오히려 독이 됐다.

사실 백한빈이 정말 견딜 수 없는 건 속을 들끓는 배신감보다도 다름 아닌 질릴 만큼 멍청한 저 자신이었다.

같은 건 목소리뿐이었다.

현실의 고신재는 사사건건 부딪치기만 했었지, 온라인 속의 남자와 비슷한 게 하나 없었다. 그 목소리에 휘둘릴 게 아니라 거리를 뒀어야 했다.

아니, 이 현실의 고신재가 학기 초에 제게 몇 번이나 물었던 것처럼 ‘대체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게임 속에서 만났을 뿐일 사람을 좋아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애초에 하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보다시피 결과는 처참하다.

상대는 저를 손바닥에 올려두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른 채 한숨 한 번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사실은 나를 정말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 바닥을 보여줄까 궁금해서 곁에 있는 것일까 봐 두렵다.

초조하게 손바닥을 말아쥐고 있던 백한빈이 기어이 터져버린 건, 침실의 작은 협탁을 열어보던 고신재가 이번에는 조금 더 뚜렷한 한숨을 다시 한 번 내쉬었을 때였다.

“한빈아. 미안한데, 콘돔이 다 떨어져서 오늘은 그냥-”

“상관없다니까!”

“…….”

“내가, …상관없어. 그러니까 그냥 하자고, 빨리.”

그렇지 않아도 쉰 듯이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거의 찢어진 파열음에 가깝게 터져 나왔다.

그건 누가 들어도 몸이 달은 흥분에 애인을 붙잡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을 거다.

그 뾰족하고 혼란스러운 목소리에 굳이 색을 찾아 이름 붙인다면 ‘화’나 ‘신경질’이 가장 적합하다.

하지만 백한빈은 요즈음 늘 이 상태였다.

애초에 단단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자존감이 물렁해지다 못해 반쯤 으스러진 채로 너덜거려서, 날 것의 감정이 자꾸 울컥 새어 나오고 말았다.

한빈은 토해내자마자 밀려드는 후회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요즘의 백한빈’이 이럴 때마다 ‘요즘의 고신재’ 역시 꼭 짠 듯이 똑같은 반응을 내보였다.

“…그래. 천천히, 안 아프게 할게.”

“…….”

“힘들면 꼭 말해. 응?”

요즘의 고신재는 이렇게 웃는다.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그 온화한 눈매를 예쁘게 접는다.

그 할 말 다하기로 악명 높은 무용과 남자는 어디에도 없다.

그는 날 선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걷는 듯한 한빈의 모든 것을 받아주기만 한다.

지금도 그랬다.

살며 제 입술을 누군가의 즐거움을 위해 움직여본 적 없을 높다란 남자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움직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기꺼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맞추겠다고 한다.

한빈은 이제 익숙하다 못해 당연하게까지 느껴지는 단단한 팔이 제 몸을 아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 널찍한 소파 위로 슬며시 내려놓는 감촉에 왠지 눈가가 시큰해졌다.

이미 발목 부근에 걸치는 수준으로 매달려 있던 속옷과 바지가 하나씩 끌어 내려질 때마다 약하게 튼 에어컨의 찬 바람에 팔뚝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 올라왔다.

“-흐읏….”

고개를 묻고 한참이나 타액으로 적셔둔 탓인지, 덩달아 조금은 습해진 엉덩이골 사이에 적당히 체온으로 달궈진 젤이 닿았다.

고신재는 아주 얇고 부드러운, 하지만 조금은 생기 없게 느껴질 정도로 창백한 가죽이 덧대진 듯한 몸이 팽팽하게 긴장으로 당겨지는 곳곳에 입 맞추면서 좁은 입구가 있는 젖은 틈새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신체 중 가장 은밀하고 또 예민한, 점막과 가까운 외피 위를 크고 단단한 손이 원을 그리듯 움직일 때마다 한빈은 허리와 고개를 동시에 뒤로 꺾으며 한껏 예열된 숨을 터트렸다.

마른 배에 훅 힘이 들어가면서 작은 물결이 이듯 가느다란 뼈대가 일렁이는 건 고신재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 중 하나였다.

“…하아, 읏….”

백한빈을 품에 안게 된 뒤로는 늘 손톱이 손가락 끝 위로 올라오는 일이 없도록 둥글고 부드럽게 다듬는 남자의 침입은 야한 행위의 전조답지 않게 정중하고 부드러웠다.

한빈은 저도 모르게 눈을 꽉 감은 채로 푹 젖은 자신의 뒤를 벌리는 감각에 집중했다.

손가락들이 느리게 앞뒤로 움직이며 깊게 벌리기 시작할 때마다 뒤에서는 낯설지만 익숙해진 젖은 소리가 났다.

젖은 구멍으로 손가락이 하나, 또 두 개.

그러다 좁은 곳을 길들이기 가장 좋은 개수인 세 개까지.

한빈은 이 순간 음탕한 소리가 나는 건 저를 꿰뚫고 짓누를 굵은 기둥을 받아들이기 위해 열심히 움찔거리는 좁은 구멍과, 너무 깊지도, 또 너무 얕지도 않은 부분을 꾹 누를 때마다 기어이 열리고 마는 자신의 입술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조용히 할 수 없었다.

뒤가 완전히 젖을 때마다 벌름대는 저 자신의 입구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따뜻하고 또 축축한 뒤를 파고든 손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면, 같은 움직임이 반복될 때마다 꽉 다물어졌던 것이 얼마나 벌어지는지,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백한빈은 한참이나 젖은 소리를 내며 들쑤셔지던 손이 빠져나가는 순간 날카로운 한숨을 삼켰다.

그때, 고신재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한빈아. 허리 받칠 게 없어서 엎드리는 게 더 편할 거 같은데.”

“…응? 으응….”

한빈이 몽롱하게 내놓은 대답은 입안에서 뭉그러진 채라 혼잣말 수준조차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용케도 잘 알아들은 고신재는, 한빈을 다시 한 번 조심히 안아 들어 제가 한참이나 벌린 뒤가 온전히 벌어져 보이도록 뒤로 눕혔다.

하얗고 창백한 피부 사이 푹 젖은 구멍의 입구는 연이어진 마찰 때문인지 유독 짙은 분홍빛이었다.

“-후우우, 흐, …으읏….”

한빈은 제 벌어진 엉덩이 사이의 입구를 쫙 벌리고 들어오는 빠듯한 침입에 허리를 작게 들썩이면서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

이미 수차례나 몸을 섞었지만 이 묵직한 부피감이 제 몸을 파고들 때마다 여전히 우응, 하고 터지는 신음을 참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괜찮아? 하아, 안, 아파?”

“응, -으응, 응…, 아!”

정확한 의사소통을 위한 대답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천천히 옅고 여린 분홍빛으로 변하는 하얗고 창백한 피부는 백한빈이 고신재가 의도했던 대로 통증 대신 쾌감으로 푹 젖어들고 있다는 좋은 증거였다.

아프지 않게 하겠다는 고신재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허풍도 없었다.

한빈은 서서히 더, 더 깊게 들어가는 성기가 제 뒤로 푹푹 쑤셔질 때마다 굳이 참으려고도 하지 않는 신음을 흘렸다.

물론 고신재 역시 그 모습을 보고 들으며 흥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니, 사실 그는 제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 무심한 연인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의 성기를 입에 물었을 때부터 바지 아래가 팽팽히 당겨질 만큼 피가 몰린 채였다.

자신의 욕망 같은 건 완전히 잘라낸 사람인 양 움직이고 있지만 사실 이제 고신재 그는 이제 백한빈이 저를 부르는 말 한마디, 손가락 끝이 턱에 스치는 정도의 접촉만으로도 눈가까지 뜨거워질 수 있었다.

‘가나다라123’이 소위 백한빈의 로망이었고, ‘고신재의 외모’가 그 애정에 기인한 보기 좋은 이미지였다면, 이제 고신재에게 백한빈은 그 자체가 완전한 욕구가 됐다.

물론, 지금 고신재의 품에 안긴 백한빈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응, 으읏, 아, 아아, --흐아앗!”

사람이 쾌락을 느낄 수 있는 부위는 많지만, 온전히 하반신에 집중된 자극은 인간을 가장 쉽게 짐승에 가까운 형태로 만들었다.

반쯤 삽입한 채로 움직이던 몸이 가까워지면서 이내 이어진 부위가 퍽, 퍽 부딪치는 살 소리가 날 정도로 깊어지자 한빈은 고신재가 제게 기꺼이 처박기 편하도록 엉덩이만 쳐든 채로 그를 아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소리를 냈다.

좁디좁은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지게끔 깊게 처박으면서 단단해진 백한빈의 성기를 허리를 붙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잡아 흔드는 남자의 움직임 역시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히이익-! 아, 후읏…, 흑….”

“후우……. 한빈아, 잠깐, 만.”

이제까지의 관계에서는 대체로 백한빈이 앞선 사정을 하는 편이었지만, 시작부터 지금까지 쭉 의도적으로 흥분을 이끈 오늘은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사정했다.

사실 고신재는 백한빈의 안에 제 것을 한껏 쏟아낸 그 순간 축축하고, 따뜻하고, 또 좁디좁았던 안에서 제가 잠시 잊었던 것을 깨닫기도 했다.

예컨대 늘 챙겼던 콘돔의 부재 같은 것 말이다.

한빈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작게 혀를 차며 여전히 흥분이 식지 않은 기둥을 삽입 때보다 더욱 느리게 빼내자, 채 다물어지지도 않는 분홍빛 입구에서 하얗고 끈적한 액체가 주욱 함께 타고 흘러내렸다.

분명 그건 뺨이 열기로 얼얼해질 만큼 야한 광경이었다.

고신재는 두피까지 뜨끈하게 열이 오른 머리를 쓸어 올리며 저와 마찬가지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야하게 들썩이는 백한빈의 모든 것들을 눈에 담았다.

사실 그건 단순한 탐욕을 넘어 노골적인 집착마저 느껴지는 눈이었다.

혹시라도 백한빈이 지금처럼 엎드려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런 고신재를 보고 조금은 겁을 먹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 관찰 아닌 관찰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신재의 머릿속에서 등줄기가 쭈뼛해질 정도로 치달은 욕구과 충동보다 한 발 더 앞선 건 한 손에 다 잡힐 듯이 마른 이 몸에 제가 토해낸 것이 줄 영향이었다.

그의 우선순위는 이제 한 사람을 중심으로 보기 좋게 재정립되는 중이다.

고신재는 뒤로 제 정액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마른 등허리를 살살 손으로 쓸면서 입을 열었다.

“한빈아. 미안한데 바로 씻어야 할 거 같은데. 욕실 데려다줄게. 내가, 실수로 안에…, 해서.”

흥분으로 갈라진 목소리는 헛기침으로 슬쩍 감춰도 영 티가 났다.

엎드린 채로 더운 숨을 몰아쉬던 백한빈에게서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온 건 그때였다.

“……신재야.”

사실 백한빈은 제가 요즈음 고신재를 단 한 번도 이름만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늘 그걸 알고 있는 건 이름의 당사자뿐이다.

“-어, 어어?”

“나 좀…, 일으켜 줘.”

“응, 그래. 미안, 잠시만.”

고신재는 허둥지둥하는 일 같은 게 없다.

그래야만 했던 가정환경과는 별개로 그 자신이 정돈되지 않은 걸 싫어한 천성에 가까운 성격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온갖 체액에 그 말끔했던 몸을 더럽힌 채로, 누구도 좋아한 적 없던 목소리에 반해 그 말 한마디에 어찌할 바 모르게 됐다.

고신재는 늘 제가 끌어당기는 대로 움직여서 가끔은 무섭기까지 할 정도로 마르고 가벼운 몸을 조심조심 당겨 안아 자신과 마주 보도록 끌어안았다.

뒤에서 흘러내린 젤인지, 정액인지 아니면 그 모두가 섞인 것인지 모를 것이 허벅지에 한껏 묻어났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라고는 없었다.

“…….”

“…….”

매일같이 만나고, 함께 붙어있던 건 변함이 없건만 이렇게 온전히 눈을 맞추는 건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펠라치오부터 시작해서 모든 템포를 백한빈에게 맞춘 섹스까지, A부터 Z까지 오롯이 원하는 대로 쏟아진 쾌감 때문일까.

백한빈은 늘 창백했던 얼굴이 울긋불긋하고 머리도 잔뜩 헝클어진 백한빈은, 안경도 벗겨져 소파 위로 나뒹굴고, 평소보다 훨씬 더 멍하게 풀린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나른한 얼굴에서 나온 문장은 섹스 후 한껏 늘어진 분위기를 순식간에 팽팽하게 잡아당기기 충분했다.

“…있잖아. 나 궁금한 거 있어.”

고신재는 저 자신이 “응.” 하고 작게나마 대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순간 너무 긴장한 그의 입에서는 작은 달싹임만 있었을 뿐,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었다.

한빈은 그걸 문제 삼지 않았다.

차마 무릎 위에 앉힌 저를 세게 끌어안지도, 버릇 같은 눈웃음도 걸지 못한 연인이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백한빈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갈라지고 쉰, 한숨 섞인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신재 너, 나…, 정말 좋아하는 거 맞아?”

고신재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그건 제 애인의 질문에 반대되는 생각을 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한빈의 질문이 그 몇 초간 떠올린 여러 최악의 상황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고신재는 제 어깨가 순간 긴장이 풀리며 훅 처졌던 것을 들키지 않았기를 바라며 얼른 힘주어 대답했다.

“응.”

“정말로?”

“……정말, 좋아해.”

“진짜-, 진짜, 좋아해?”

고신재는 그제야 작게 한숨 쉬듯 웃었다.

섹스 후 애인을 품에 안고, 서로 나는 체온이 다 식기도 전에 얼마나 좋아하는지 따져 묻는 건 어딜 봐도 보통의 연인 사이에서 하는 대화 같았기 때문이다.

너무 이른 안도였다.

하지만, ‘뭔가를 들킨 걸까’하는 불안한 생각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었기에 더욱 무방비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백한빈은 그 안도를 분명히 엿봤다.

애초에 고신재가 저를 너무나 가까이서 따뜻하게 안아주고 있어서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정말 많이 좋아해. 한빈아.”

한빈는 귀에서 다디단 꿀처럼 휘감기는 고백을 곱씹었다.

‘너 무용과 걔랑 어떻게 친해?’

요 몇 달 백한빈은 참 많은 사람에게 이 질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항상 어쩌다 교양이 많이 겹쳤다는 뻔한 말을 반복하면서도 사실은 얼마나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었는지 모른다.

“……한빈아?”

“…….”

“한빈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떻게,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하게, 아니 멍청하게 그 둘을 모두 좋아하게 됐을까. 심지어 그러면서도 다른 둘을 모두 좋아해서 미안하다고 사과 따위를 했었다.

백한빈이 제 속을 진정할 수 없는 순간 역시 이때였다.

-그때, 내 사과를 들으면서 고신재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의심과 고민을 따라 끝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는 순간, 한빈은 언제나 기어이 후회하고 말 날 선 목소리와 짜증을 내고 말았었다.

차라리 왜 짜증을 내는 거냐고 받아치기라도 하면 되레 안심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고신재는 언제나 몸을 낮추기만 했다.

정말로 잘못한 사람처럼.

그것도, 정말 큰 잘못을 한 사람처럼 말이다.

“백한빈. …한빈아. 왜 그래. 응?”

“…….”

“좋아해. 아니, -사랑해. 거짓말 아니야. ……왜 울어.”

한빈은 저를 품에 안은 이 반듯하고 완벽한 남자가 드물게도 쩔쩔매며 형편없는 고백을 토해내는 것을 들으면서야 제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보통 울음이라고 하면 큰 소리가 나고 저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지는 거로 생각했는데, 최소한 이번은 아니었다.

젖어든 얼굴을 멍하게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있자니 부드러운 입술이 곧장 얼굴 여기저기로 떨어졌다.

하지만 백한빈은 더운 숨과 입술 한 번에 꿈속에서나 듣던 일방적인 애정 앞에서도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어찌할 바 모르다가 결국엔 저를 안은 남자의 어깨로 푹 고개를 파묻고 코만 훌쩍였다.

“내가…, 미안해. 미안, 한빈아. 울지 마. …사랑해. 응? 울지 말고, 제발….”

“-흑, …흐윽.”

이 와중에도 이 남자의 애인이 되고 싶은 저 스스로가 끔찍하게 한심했다.

다른 건 다 거짓말이어도 좋으니,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것만이라도 진짜이길 바라는 마음이 죽을 만큼 비참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싫은 건 살며 온전한 타인에게 처음으로 듣는 사랑한다는 고백에 요동치는 마음 한구석이었다.

다른 모든 게 거짓말이어도 저를 좋아하고 또 사랑해주는 것.

정말 그것 하나만 사실이라면.

그거라도, 거짓말이 아니라면.

애초에 저는 같은 사람의 두 그림자에 모두 반한 바보이니, 문득문득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르는 굴욕감도, 수치심도, 이글대는 화도 다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유독 파란만장했던 한 학기의 마지막 날이 오기 전까지는, 정말 그랬다.

[작품후기]

본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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