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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을 가장 투명하게 보여주는 거울 중 하나다.
물론, 상황에 따라 인테리어나 가구는 본인의 취향과는 동떨어질 수도 있다.
특히 본가를 나와 학교 앞에서 나와 사는 입장이라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런 모든 크고 작은 변수들을 다 제쳐놓고서라도 집이라는 공간은 개인의 성향을 고스란히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건 형과 함께 살던 주상복합 아파트에 혼자 남았던 고신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고신재의 라이프 스타일은 세 단어로 정리 가능했다.
조용한. 정돈된. 결벽적인.
-쿠당탕, 쾅!
하지만 지금.
고신재의 공간은 조용하지도, 정돈되지도 않은 채 손 닿는 곳마다 들쑤셔지고 뒤집히는 중이다.
언제나 완벽하리만치 각이 잡혔던 물건들은 하나같이 제자리를 잃었고 그 어디에서도 예민한 결벽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물론 그건, 이 보안이 살벌한 주상복합 아파트 27층까지 단 한 번의 방해도 없이 곧장 들어올 수 있었던 외부인- 백한빈 때문이었다.
“…개새끼가….”
거실을 벌컥 뒤집은 것에 이어 부엌과 옆에 딸린 펜트리의 수납장의 서랍 하나하나를 열어 그 안을 뒤지던 한빈의 입에서 거의 숨을 헐떡이는 것에 가까운 짓눌린 욕이 흘러나왔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꿈에서까지 나오던 목소리로 또박또박 흘러나오는 문장들이 돌림노래처럼 무한반복 되는 중이다.
잘못 걸린 사진 교양 덕분에 한 고생만으로도 충분해?
‘그럭저럭’ 같이 놀기에는 좋아?
……‘보기에는 그래도’, 꽤 착하고 순진해?
“-아, 씨!”
거칠게 손을 움직이던 백한빈은 기어이 펜트리 구석에 있던 잘 포장된 플라스틱 케이스에 손을 살짝 베였다.
하지만 그건 별문제도 아니었다.
지금 백한빈의 두뇌는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을 인식하는 것보다 그 위를 너울대는 분노와 치욕을 절대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한빈은 피가 맺힌 손을 부엌 구석에 있는 키친타올로 대충 감싸 쥐고는 덜 확인한 찬장 구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그러나 거실과 드레스룸, 침실, 다용도실에 이어 부엌까지 뒤지고 뒤져도 백한빈이 찾는 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받고 버렸나? 그랬으면 죽어, 진짜!”
백한빈은 개새끼에 이어 다시 한 번 욕을 중얼거리면서 신경질적으로 수납장을 쾅 닫았다.
지금 그가 눈에 불을 찾고 있는 건, 부산에 사는 ‘박종우’에게 보냈던 선물이었다.
가나다라123에게 보내겠다며 몇 시간이고 백화점에 처박혀 고르고 고른 지갑과 온갖 자질구레한 간식들.
그건 지금 백한빈이 현실의 고신재를 인터넷 속 가나다라123과 엮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의 하나였다.
하지만 군것질을 거의 하지 않는 고신재의 집안 어디에서도 백한빈이 하나하나 골라 보낸 간식도, 한참이나 돈을 모아 사 보냈던 검은 가죽 지갑도 보이지 않았다.
“사진도 교묘하게 찍었어, 새끼가….”
한빈은 가나가 선물 인증이라면서 보낸 수령 사진 너머 삐쭉 보이는 배경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사진에서는 상자 틈새로 바닥이 아주 조금 보이는 게 전부라, 이 사진을 찍은 곳이 이곳 아파트라는 확증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때, 제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백한빈의 표정은 퍽 기묘해졌다.
“…….”
백한빈은 자신의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
멀게는 초등학교 때 처음 샀던 동물 캐릭터 다이어리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부터 해서, 늘 익숙한 케이스에 리필을 사서 채워 넣고 옷 한 벌을 사도 손수 관리해 한참을 입는다.
그렇게 오래된 익숙함을 좋아하는 백한빈에게 매해 신제품이 쏟아지는 휴대폰은 관심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중 하나다. 깨지거나 고장 나지 않는 이상 한빈은 제 휴대폰을 바꾸는 일이 없다.
즉, 지금 쓰는 휴대폰은 못해도 4년 이상은 된 메시지 창고라는 뜻이다.
잠시 머뭇대던 백한빈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자신의 메시지함 가장 상단에 고정된 ‘가나다라123’과의 채팅창을 꾹 힘주어 눌렀다.
“…첫 대화는 3년 전 6월….”
‘가나다라123’과의 3년.
눈에 보이는 물건과 증거는 숨길 수 있어도 함께 쌓아온 이 온라인 속 공동구역의 대화만큼은 숨길 수도, 지울 수도 없다.
모든 답은 이 안에 있을 거다.
백한빈은 천천히 스크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 학기도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방학 잘 보내요.”
“감사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홀가분했을 한 학기의 마지막 날을 두고, 전공 세 시간이 어찌나 길디길게 느껴지던지.
고신재는 교수의 목소리에도 허리를 대충 숙이는 둥 마는 둥 하며 가장 먼저 강의실에서 튀어나왔다.
사실, 들뜬 마음을 뚝 잘라 내놓고 보면 지금 그가 백한빈이 있을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서는 안 됐다.
이건 몇 년간의 우정을, 추억을, 그리고 기억을 지난 몇 달간 완벽하게 기만하는 행동을 한 저 자신을 고백하러 가는 길이다.
백한빈이 무언가를 눈치챈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식어서는, 감히 용서해 달라는 말을 꺼낼 엄두조차 못 냈던 일을 앞두고 있다는 거다.
객관적으로는 빙빙 돌아서 가거나 잠적을 해도 모자를 판국이다.
하지만 고신재는 그 어떤 때보다 발을 빠르게 움직이며 한 손으로는 제 애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빈아. 뭐 먹고 싶은 거라던가 필요한 거 있어? 사 갈게]
자고 있는걸까.
고신재는 숫자 1이 없어지지 않는 메시지창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사실 당장 얼굴을 마주하면 정말 한심할 정도로 떨릴 것 같은데, 그 긴장을 훨씬 웃도는 건 빨리 그 부루퉁한 이목구비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원래는 게이가 아니었다는 말부터 해야 하나?
고신재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실려 나오는 은근한 긴장 어린 한숨을 내쉬면서 잠시 뒤 제가 꺼내야 할 문장들을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백한빈에게 연락이 올까 싶어 손에서 꽉 붙든 채로 놓지 않던 휴대폰이 작게 진동한 것도 그때였다.
퍼뜩 정신이 든 고신재는 얼른 휴대폰 화면을 바로 보았다.
그 위에는 예쁘장한 이름 석 자 대신 사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보고 싶지 않던 이름이 떠올라있었다.
‘박 비서님’.
솔직히 고신재는 전화를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정말 하필, 오늘, 이때 오는 전화라니. 이렇게나 운이 없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이걸 안 받았다가 백한빈과 함께 있을 때 찾아오는 건 더 끔찍했다.
고신재는 터져나오는 한숨을 숨기지도 못한 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후우, 네.”
-작은 도련님. 통화 가능하십니까?
“네에, 네에.”
제발 부모님이 부르는 것만 아니어라.
고신재는 영혼 없이 대답하며 바라 마지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소원은 곧장 이루어지기는 했다.
-다름이 아니고……, 일전에, 친구분에게 받으셔야 할 물건이 있으시다고 해서 제 주소와 연락처를 빌려 가셨던 일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네?”
-친구분 성함이 ‘백한빈’ 님, 맞습니까?
“…….”
빠르게 걷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지면서 고신재 그는 어느새 캠퍼스 한가운데에 섰다.
작은 기계 너머로 들리는 문장을 완전히 이해했을 때 고신재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제게 전화를 건 발신자의 이름을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하는 일이었다.
제가 온종일 백한빈 생각을 하다가 휴게실 같은 데에서 깜박 잠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까지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박 비서님’이라는 네 글자가 떠오른 휴대폰 액정 속에서는 통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종강의 기쁨을 누리며 더없이 신나 있을 뿐이다.
더 볼 것도 없이 현실이다.
고신재는 정말 그답지 않게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데요?”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백한빈’이라는 분께서 수령지에 썼던 제 개인 휴대폰으로 계속 전화를 거시고, 또 메시지까지 보내고 계십니다.
“…….”
-아, 물론 아직 어느 쪽으로든 응대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너무 상황 파악이 안 되는 폭풍 속에 갑자기 떨어지면, 문제의 심각성이 눈에 안 띄는 법이다.
고신재는 비서에게 대답하는 것 대신 저 역시 마지막으로 백한빈에게 보낸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숫자 1은, 여전히 있다.
-지금처럼 답변하지 않는 게 나을지, 아니면 차단하는 게 좋을지 확인 차 연락드립니다.
“……메시지 내용이 어떻게 되는데요, 박 비서님.”
매끄럽게 말을 이어가던 비서가 처음으로 침묵했다.
그건 정말로 드문 일이어서, 고신재는 그 고작 몇 초간의 침묵이 정말 못 견딜 만큼 길게 느껴졌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비서는 고신재가 그를 알아왔던 시간을 다 통틀어도 들은 기억 없는 망설이는 목소리로 느릿느릿 대답했다.
-그……, 굳이 요약하자면 주로…, ‘나 백한빈인데, 전화 받아. 박종우.’ 입니다만.
“…….”
-감히…… 말씀드리자면, 꽤 화가 난 상태 같습니다.
사실 그 순간 고신재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백한빈이 눈치챈 게 아니었나?’ 하는 자문이었다.
그건 백한빈에게 모든 걸 털어놓기로 마음먹은 결심이 흔들려서 튀어나온 물음은 아니었다.
만약 백한빈이 저와 ‘가나다라123’과의 연결고리를 어떻게든 알게 된 것이 아니었다면, 대체 요즈음 제 애인이 그렇게 힘들어했던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따… 보자고 했었는데.
고신재는 멍하게 제가 마지막으로 봤던 백한빈의 얼굴을 떠올렸다.
저를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고, 또 멋진 남자로 사진을 찍어준 애인은, 제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을 때 그걸 기다렸다는 듯한 눈을 했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여전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또 이제야 말하는 거냐고 따지려는 것 같기도 했지만, 단 한 가지 확실했던 건 백한빈 역시 대화하고 싶어 했다는 거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고신재는 차마 당사자에게 묻지 못하는 질문을 떠올리며 그림자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 같은 불길함에 마른 침을 삼켰다.
그때였다.
여전히 없어지지 않는 숫자 1을 내려다보던 고신재의 휴대폰 상단으로 팝업 하나가 떠올랐다.
/[PC버전 자동로그인] DESKTOP-673D3P6에서 잠금모드로 자동로그인 했습니다./
확실히 이건, 무언가 이상하다.
“박 비서님. 죄송한데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휴대폰 너머의 비서는 뭔가를 더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였지만 지금은 그걸 한가하게 다 들을 여유가 없었다.
고신재는 비서가 전화를 끊자마자 제가 방금 작게 확인한 알림을 눌러 확인했다.
“…….”
컴퓨터를 켠 사람이 백한빈이 아닐 다른 사람일 확률은 없다.
고신재는 제가 보낸 메시지를 읽는 것 대신 컴퓨터를 켜는 쪽을 고른 백한빈의 선택 앞에서 꼭 찬물이 끼얹어진 사람처럼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오늘의 공포 영화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ID : wotls01234 / PASS : g!753951]
고신재는 제 휴대폰에 떠오른 누군가의 메시지 앞에서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었다.
메시지가 떠오른 곳은 현실 세계로 치자면 먼지가 하얗게 올라올 정도로 저만치 하단으로 내려간 지 오래였던 단 하나뿐인 오픈 채팅방이었다.
고신재는 잠시 석상같이 굳은 채로 그걸 내려다보다가, 가장 상단으로 올라온 그 채팅방을 손톱 끝이 하얗게 될 정도로 힘주어 눌렀다.
“…….”
난데없이 휴대폰에 누군가 내가 오래 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보낸다면 누구라도 꺼림칙할 거다.
하지만 지금, 이 난데없는 메시지가 고신재 그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익숙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채팅방 위로 써낸 사람이 ‘저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때, 채팅방 위로 노란 문장이 하나씩 더해지기 시작했다.
[재신0123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밀히 따지자면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키읔 세례는 여러 줄이기는 했지만, 고신재는 제가 아닌 저 스스로가 쓰는 문장을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바라보았다.
[컴퓨터랑 현관도 다 753951?]
[무슨 배짱ㅋㅋ;]
[아니다 걱정할 거 없었겠네??]
[컴퓨터 포맷 깨끗이 다 했으니까? 그치 가나야]
백한빈이 제 짝사랑 상대와 서로 연인이 되는 꿈을 꾸었다면, 고신재 그의 꿈은 한 학기가 끝나고 하루의 끝에 차분하게 서로 마주 보고 앉아서 죄를 고백하는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고신재]
[변명이라도 하려면 빨리 오는 게 좋을걸]
[오늘 이후로 볼 일 없을 테니까 이 개자식아]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든 한 주의 시작이지만, 옷도 따뜻하게 입으시고 힘내셨으면 좋겠어요!
남겨주신 코멘트들 모두 소중히 확인했습니다. 너무 오랜만의 연재였는데도 잊지 않아주셔서 ㅠ ㅠ 감사했습니다.
저는 그럼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