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 * *
세상에는 확실히 업보라는 게 존재한다.
종교적인 의미를 다 떠나서, 개인이 과거에 한 선택이 현재가 되고, 그 현재의 책임은 미래의 결과로 이어지는 커다란 원에서만큼은 세상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콰당, 타아앙!
스스로 걷고 말하게 된 이후부터는 단 한 번도 문을 크게 소리 내어 닫아 본 적 없는 남자가 쿠당탕, 시끄러운 발소리를 내며 뛰어와 철문을 뜯어낼 듯 열고 들어온 건, 백한빈이 이곳에 두었던 자신의 물건을 모두 챙겨 가방에 넣었을 때였다.
물론 감히 편하게 택시를 잡아타거나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캠퍼스부터 이곳까지 곧장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온 남자의 거친 숨소리 역시 그 굉음을 뒤따랐다.
“-후우우, 하아…, 하….”
백한빈이 짝사랑 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현실에서 처음 들었던 날 깜짝 놀라 인생에서 매우 드문 전력 질주를 하고는 숨을 골랐던 상황을, 이유는 다르지만 오늘의 고신재가 고스란히 돌려받게 된 건 참 얄궂은 일이었다.
고신재는 머리카락 안이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살며 본 적 없는 난장판이 된 채인 집 안을 멍하게 둘러보았다.
물론, 그건 잘 정리된 박물관 같던 그의 공간이 엉망이 되어서는 아니었다.
“뭐야. 빨리 왔네. 그냥 가버리려고 하니까.”
“……한, 빈아.”
“뛰어온 것처럼 헉헉대도 하나도 안 미안하니까 적당히 하지. 고신재 너 잘나서 운동할 때 아니면 발소리도 안 내잖아.”
“…….”
고신재는 따끔할 만큼 세게 입술을 깨물며 거칠어진 숨소리를 간신히 집어삼켰다.
늘 깨끗하던 집이 도둑이라도 든 듯 뒤집힌 것 따위야 중요하지 않다.
지금 고신재 그는 대체로 심드렁하기는 했어도 단 한 번도 노골적인 적의를 내보인 적은 없던 백한빈의 목소리가 그깟 것보다 훨씬 더 심장을 서늘하게 했다.
커다란 안경알 너머로 바라보는 뾰족한 눈매에는 웃음기라고는 하나 없었다. 백한빈은 소리를 내지 않고 숨을 고르려 부단히 애쓰는 장신의 남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사실 고신재는 언제나 흠잡을 데 없던 이 집이 엉망진창이 된 것만큼이나 그 역시도 전에 본 적 없는 꼴을 하고 있었다.
슬슬 후텁지근해지는 날씨에 얼마나 뛰어온 건지 이마까지 벌겋게 열이 올랐고, 늘 단정하던 머리는 엉망진창에 셔츠도 땀에 젖고 주름이 가 있다.
뛰어온 척하지 말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한 건 다 알면서도 일부러 세운 날이었다.
제 말에 고신재가 눈 하나 깜박할까 싶어 겨우겨우 꺼내본 서툰 가시다.
백한빈은 숨을 토해내는 것조차 필사적으로 참는 남자를 보며 왠지 눈가가 시큰해지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얼른 선수 치듯 말을 이어갔다.
“그래, 고신재. 끝내기 전에 사람 하나 등신 만든 소감은 어떤지 들어보자.”
“한빈아. 그러니까…, 그게.”
“왜. 하마야, 그러지그래. 솔직히 백한빈보다는 하마로 알고 지낸 세월이 더 길지 않냐? 5년인데.”
달뜬 숨을 감추는 것과 대답을 동시에 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울컥한 채 빠르게 쏘아붙이던 백한빈은 그 역시도 손을 말아 쥐면서 자신의 애인, 아니 애인이자 친구였던 남자에게 시간을 내주었다.
그러자 잠시 뒤에 여전히 다 사그라지지 않은 숨을 애써 누르는 와중에도 분할 만큼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는 거 알아.”
“알았다고? 알았다니까 더 어이없네. 안 되는 거 알면 대체 왜 그런 건데?”
거칠게 변한 숨소리를 잘 참던 노력이 무색하게, 고신재는 이어지는 질문들 앞에서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듯 후우우, 하고 어찌할 바 모르는 한숨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게. 한빈아, 사실 내가 게이…, 가 아니었거든. 그래서.”
“-아, 이것부터 정리하고 넘어가자. 고신재 너, 개강 첫날에 내가 술 취해서…….”
사실 게이가 아니었다고 하면 놀랄 줄 알았는데 백한빈은 그것마저도 예상했다는 듯 놀라는 기색 하나 없었다.
사실 그 순간 고신재는 그 어떤 변명조차도 다 포기해야겠다 생각했다.
빠르게 쏟아낼수록 바들바들 떨리는 백한빈의 목소리가 유독 귓가를 아프게 찌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술, 취해서, 너 좋아한다고 헛소리하던 거… 다 들었지.”
“……어.”
“그래서 사진 교양 들었어?”
“아니. 그건 김유민 따라서 한 거라, 정말 우연이었어.”
“‘그건’ 정말 우연이면, 나머지 교양은 나 따라서 바꾼 거 맞지.”
“…응. 맞아.”
“대체 왜 그랬어?”
“백한빈 너랑…… 친해지려고.”
자포자기 같은 응수였지만 정말 모든 걸 포기해서는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거짓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행위임을 알아서였다.
하지만 백한빈은 그 순순한 인정이 이어질수록 창백했던 얼굴이 조금은 검붉게 보일 만큼 열이 올라서는 그렇지 않아도 마른 몸을 어찌할 바 모르고 옅게 떨기까지 했다.
“나랑 친해져? 게이도 아닌데 나도 남자 좋아한다고까지 해가면서? 대체 왜? 내가 게임에서 만난 애 좋아한다고 꼴갑 떠는 거 바로 구경하려고? 아니면 마이크 켜고 너랑 처음으로 벌벌 떨면서 이야기한 다음 곧장 전화해서 칭찬하는 거 듣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한빈아, 절대.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아니야? 그것도 아니면, 이름만 봐도 멋있지 않냐면서 ‘박종우’한테 줄 선물 사는 거 구경할 때는 대체 무슨 생각 했어?”
“…….”
“아, 내가 보낸 건 어차피 잘난 너는 코웃음 칠 하찮은 것들이라, 감히 여기에는 들여놓을 수도 없어서 ‘박종우 비서님’이 가지고 계신가?”
고신재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혀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참 수없이 다양한 불행을 상상했지만, 백한빈의 입에서 ‘박종우 비서님’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거라고는 떠올리지 못한 탓이었다.
방법은 알 수 없지만, 백한빈은 감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었던 거다.
그걸 깨달은 고신재는 그저 단순한 미안함을 넘어선 수치에 가까운 마음에 입이 말랐다.
이 모든 걸 아는 백한빈에게, 제 고백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렸을지 모르기 어려웠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날 바보로 만들어야 했는데! 대체 왜!”
파열음 섞인 절규 같은 외침이었다.
목소리가 콤플렉스인 백한빈은, 웬만해서는 크게 소리 내는 일이 없었다. 낯선 사람이 있을 때는 무조건 바짝 거리를 붙여 앉아 작게 소곤거렸고, 애초에 단둘이 있을 때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조금 성량이 작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한빈이, 소리를 질렀다.
그건 얼마나 처절하기까지 한지 꼭 몸과 마음의 어딘가가 찢겨 나간 사람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고신재는 차마 그걸 오래 견디지 못했다.
“……처음엔 그냥 궁금했을 뿐이었어.”
“뭐?”
“정말 바보 같지만, 정말 끔찍하게 한심하지만……. 난 내가 같은 남자를 좋아할 일 같은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땐, 감히…, 그랬어. 그래서 처음에는 별 죄책감도 없었어.”
백한빈의 옅은 떨림이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떨리는 손을 말아 쥐어 뒤로 감추고는 가장 두려워했던 고백을 이어가는 고신재의 목소리는 몇 번이고 끊기고, 목이 멘 듯 갈라졌다.
“저 사진과 사람이 정말, 내가 아는 그 애가 맞나. 대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날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왜 나한테는, 있지도 않은 동생이며 동물 핑계를 대면서 말 한마디 안 걸까.”
“…….”
“솔직히 그땐, 백한빈 널 속인다는 미안함보다는 그 생각만 했어. 현실의 백한빈과 친해지고 나면 그 궁금함이 해결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만 했어. 한빈이 널 바보로 여겼다거나, 놀리려고 감춘 게 아니었어. ……정말이야.”
사실 고신재는 문장 하나하나를 힘겹게 이어가는 그 순간마저도 내가 여전히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하고 문득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치고 화를 내도 여전히 무른 구석이 있는 백한빈은 그 말을 의심하는 것 대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떨리고 일그러지는 제 얼굴을 감춰버렸다.
짝사랑 상대에게 크고 작은 사소한 거짓말을 이어가는 죄책감에 대한 고민은, 다른 누구보다 백한빈 그 자신 역시 마찬가지로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이어갔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 대답만큼은 마냥 뭐라고 탓하고, 욕하고, 화낼 수가 없었다.
침묵은 길고도 짧았다.
목 뒤쪽을 뻣뻣하게 만들 정도로 긴장 가득한 대화 와중의 침묵치고는 길었지만, 객관적으로는 1분이 채 못 되는 정적이었으니 말이다.
잠시 뒤 그 고요를 깬 건, 차마 고신재를 마주 보지도 못한 채로 후우우, 긴 한숨을 터트린 백한빈이었다.
“-고신재.”
“응.”
“너 나보고 가나한테 고백하는 거 도와준다고 했잖아. …그럼, 그건 뭐였어?”
“…….”
“남자 좋아할 일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며. 그런데 왜……, ‘가나’한테 고백하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냐고. 진짜 나랑 친해졌으면 됐잖아. …대체, 그건 왜 그랬던 거야?”
고신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백한빈에게서 웅얼웅얼 흘러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제 피부에 유리조각처럼 박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올 게 왔다.
이제 이 이야기 중 가장 최악인 부분이다.
이제껏 한빈이 하는 말에 최대한 꼬박꼬박 늦지 않게 대답하던 고신재는, 처음으로 곧장 입을 열지 못하고 턱밑까지 올라온 한숨을 꾹 눌러 삼켰다가 내뱉는 숨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신재’로 친해지는 대신, ‘가나’로는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렇게 하면, 너랑, 안전한… 친구로 남을 수 있을 줄 알고.”
한편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백한빈의 손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백한빈은 순간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이었다.
고신재는 그 표정이 제 목을 옭아매는 것 같아, 괜히 마른 침을 한번 크게 삼키며 타는 듯이 아리는 목을 달랬다.
‘그게 무슨 말이야?’하고 소리 내어 묻지는 않아도, 예쁜 까만 눈동자가 자세한 답을 묻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속을 저미도록 깨닫는 방법으로는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때 어차피 나는… 어떤 식으로든 네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고, 감히 생각했었어. 그런데 한빈이 너는 친구들 앞에서 술에 취한 채로, 나를, 아니, 그러니까… ‘가나’를, 좋아하는 거 같아서….”
“…….”
“…그래서….”
“-그래서?”
한동안 멍하게 침묵하던 한빈이 처음으로 고신재의 말을 고장 난 인형처럼 반복해 물었다.
그 순간, 아주 잠시나마 둘러댈 다른 이유가 없을까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걸 입 밖으로 꺼낸 뒤의 상황이 상상조차 되지 않아서, 감히 살며 느낄 일 없었던 겁마저 덜컥 났다.
하지만 더 이상 늦을 수는 없었다.
속이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
고신재는 이 순간마저도 백한빈은 상상도 못 하고 있을 끔찍한 문장을 저 안쪽에서부터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빈이 네가 ‘가나’한테 고백하도록 부추긴 다음, 그걸 거절하려고 했어.”
“…….”
“……차이고 나면 ‘가나’쪽은 볼 일 없어질 테니까. 그렇게 되면, 온라인 속의 가나가 아니라-.”
나직하게 이어지던 목소리는 기어이 조금 삐끗한 채로 갈라져 끊겼다. 고신재는 원치 않게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이미 몇 번이고 쓰린 후회를 한 지 오래인 자신의 선택을 고백했다.
“지금의 내가, …대신, 친구가 될 수 있을 줄…… 알았어.”
지금 이 순간 내뱉는 단어가, 문장이, 제가 살면서 입 밖으로 내뱉은 것 중 가장 역겨운 것이 아닐까. 고신재는 생각했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고신재 그가 사랑하는 남자 역시 이제껏 들어본 적 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연거푸 물었다.
“……친구?”
“…….”
“친구…, 라고?”
차라리 한 대, 아니 원 없이 분이 풀릴 때까지 얻어맞기라도 했다면 되레 마음이 편해졌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살며 들은 적 없던 욕과 비난 정도는 들어야 했다.
정말이지 그러기를 바라 마지않았다.
하지만 하나뿐인 연인은 화가 난 채로 주먹을 휘두르지도 않고, 그 어떤 힐난 한 마디도 내던지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시들어 오그라드는 식물처럼 움츠러든 채 떨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긴장에 바짝바짝 속이 타던 고신재가 정말 딱 미치겠다 싶어진 건, 저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는 연인이 눈에 띄게 떨면서 마른 다리가 휘청이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차마 염치가 없어서 말조차 더 못 붙인 채로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백한빈의 주위에 널브러진 책이나 가구들의 모서리를 보면서 전에 없이 초조해졌다.
“한빈아. 있잖아, 우리….”
“-가까이 오지 마!”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딱 한 발짝 떼었던 고신재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백한빈에게서 단 한 치도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어.”
“내가 잘못했어. 정말 내가 다 잘못했어. 이딴 말로 용서 안 될 거 알지만, 백한빈. 전부 다, 내가 멍청해서. 내가, 미친 새끼라-.”
“나한테…, 손, 대지…, 마…. 너는, 고신재, 넌….”
“…제발. 한빈아. 백한빈. 잠깐만-, 저쪽, 소파라도 가자. 응? 제발, 부탁할게.”
고신재는 혹시라도 시선이 높은 제 키가 백한빈을 더욱 거슬리게 하는 것일까 싶어 몸을 낮추다가 기어이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앞에서 꿇은 적 없던 무릎까지 꿇은 채로 백한빈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지금 횡설수설 사과를 쏟아내는 고신재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쏟아질 비난과 관계의 붕괴가 아니었다.
그 자신도 제가 그걸 가장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끔찍한 악몽 같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고신재 그를 애원하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떨리기 시작한 백한빈의 마른 팔다리가 그대로 무너질까 봐.
창백하게 질린 저 얇고 부드러운 피부에 생채기 하나라도 날까 봐.
……헛구역질하듯 빠르게 헐떡이기 시작한 저 숨이 그대로 멈추기라도 할까 봐.
정말, 무서워졌다.
“--백한빈!”
그리고 그 공포가 현실이 되는 순간.
고신재는 겨울나무가 꺾이듯 그대로 푹 쓰러져 무너지는 마른 몸을 아주 간발의 차로 품에 안았다.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드디어(?) 작품 키워드 중 하나인 부메랑업보를 달성하는 화 같은데요. 오늘도 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
아!! 후원 쿠폰 보내주신 ida0803님, naruya님, gomphrena님!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소중히 사용하겠습니다!!
저는 내일 다음 편을 들고 오겠습니다.
포근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