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57화 (57/65)

57

한빈아

오늘도 메시지 보내서 미안

또 뻔한 사과를 하려고 연락했어 오후 10:37

바보 같지

미안해

나도 알아 오후 10:38

정말 내가 다 잘못했어... 오후 10:42

20XX년 7월 16일

보고 싶어 해서 미안해 오후 11:09

백한빈은 제가 읽지 않아 저 아래로 내려간 메시지 창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이내 휴대폰을 아예 꺼 버렸다.

고신재에게서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밤마다 메시지가 온다.

처음에는 하루 한 통, 전화가 왔었지만, 그걸 늘 부재중 전화로 만들다 못해 이내 차단하자 이렇게 메시지가 오기 시작했다.

벌써 이것도 3주가 다 되어간다.

“…….”

사실, 한빈은 처음엔 이마저도 차단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 지겨운 메시지가 일방적으로 안 받으면 그만인 전화와 달랐던 건, 이 문장 몇 줄이 도착할 때마다 상대는 모르게 미리 몇 줄쯤 훑어볼 수 있다는 거였다.

그 날 밤 이후, 고신재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사과를 이어간다.

어떤 날은 ‘가나’때의 추억을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고신재’때의 기억을 말하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메시지의 시작과 끝은 사과다.

백한빈은 직접 메시지 창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그것만 훔쳐본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매일 밤 바뀌는 그 문장을 읽고 또 읽는다.

어차피 방해될 건 하나 없었다.

매일같이 일상을 함께했던 그 어느 쪽과도 연락하지 않게 되자 백한빈의 휴대폰은 허무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그때였다.

“야. 폰은 왜 꺼놓고 있어? 나 너 온 줄도 모르고 저쪽에 있었어.”

“…아, 미안. 잠깐… 정신 놓고 있느라.”

“그치, 그치. 날이 덥긴 하다니까. 7월이 이러면 8월은 생각도 하기 싫은데-! 아. 팝콘이랑 콜라는 내가 사 뒀어. 무료 쿠폰 있어서.”

“으응.”

애꿎은 휴대폰을 꽉 손에 쥔 채로 멍하게 넋이 나가 있던 백한빈을 순식간에 현실로 끌어올린 사람은, 백한빈의 고요한 휴대폰과 일상을 울리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김푸름이었다.

오늘 한빈은 푸름과 영화를 보러 왔다.

고신재가 매일같이 붙어 다니며 “한빈아. 스트레스 받아도 식사 잘 챙겨 먹고 잠도 잘 자야 해.” 라고 말했던 탓일까.

매일 같이 연락하던 ‘애인’도, ‘친구’도 사라지고 나면 하루아침에 세상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았는데, 세상은 생각보다 어떻게든 굴러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다.

가끔은 헛구역질도 나고, 자다가 악몽에 소리까지 내며 깨는 날이 차츰 늘고 있다.

하지만 백한빈은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었다.

그건 평소의 예민한 백한빈이라면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하지만 한빈은 어떻게든 아득바득 이를 갈고 버티고 싶었다.

이미 제 일상을 집어삼킨 남자에게 더는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뭐든 입에 욱여넣고, 매일 잠들 방법을 찾아 헤맨다.

……성공적이지는 않더라도 시도는 한다.

이렇게 평범하게 ‘놀러 나오는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백, 너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거, 언제가 휴가야?”

“…8월 첫째 주에서 둘째 주.”

“오- 그렇군, 그렇군. 고신재랑 어디 가냐?”

한 줌 연애를 달달 꿰고 있는 친구가 있는 건 이래서 안 좋다.

백한빈은 최소한 지금만큼은 떨쳐낼 수 있을 줄 알았던 단정한 이름이 육성으로 흘러나오는 순간, 저도 모르게 손에 쥔 음료를 떨어트릴 뻔했다.

아니, 그뿐일까. 너무 놀라서 그 날처럼 숨이 잘 안 쉬어지기까지 했다.

커플이 헤어지고 나면 그 인연 사이에서 생긴 공통 지인과 친구 때문에 골치 아파지는 상황이 된다는 걸 이렇게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한빈은 제가 너무 오랫동안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를 바라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푸름아.”

“으응?”

“…미안한데, 이제 걔 얘기 꺼내지 마.”

“어어엉?”

정말, 얼마나 웃길까.

한빈은 잔뜩 신경 쓰이게 해 두고는 몇 개월 가지도 않아 끝이 났다는 말을 하는 저 스스로가 한심해서 귓가가 뜨거워졌다.

심지어는 어디 가서 말할 수도 없는 끔찍하고 또 바보 같은 이유라, 애써 무시했던 비참함이 다시 올라오는 것도 같았다.

한편, 그 순간 등줄기로 식은땀이 배어 올라오며 뒷골이 서늘해진 건 별생각 없이 물음을 던졌던 김푸름이었다.

푸름은 오늘따라 유독 속을 알 수 없는 무뚝뚝한 얼굴을 한 제 친구의 눈치를 보면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푸름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사람 좋은 웃음을 걸며 과장스레 크게 웃었다.

“허허, 헛…, 싸…, 웠냐?”

“…….”

“왜애. 뭐 때문에 싸웠는데.”

“…….”

“아휴우, 이래서 애가 멍-하고 볼이 쏙 들어갔었구먼. 고신재 걔는 뭐 네 말이면 다 할 것처럼 그렇게 설설 기어 다니더니, 기어이 너한테 성질 부렸구나!”

…뭐야. 종강 날에는 아주 둘이서 눈만 마주쳐도 좋아 죽더니, 얼마나 됐다고, 분위기 왜 이러냐.

김푸름은 제가 슬슬 달래는데도 이런저런 대꾸 하나 없이 작은 입을 걸어 잠근 친구를 보면서 어떻게든 축축 가라 앉는 분위기를 인양하려 노력했다.

“이놈의 새끼, 이거이거. 안 되겠어. 내가 그러라고 친히 열쇠 전달식을 가졌던 게 아닌데. ……쓰읍, 백. 내가 고신재 걔랑 얘기 좀 해 볼까?”

“…….”

“아니. 그 녀석이랑 어쩌다 싸웠는지는 몰라도…. 고신재 걔가 너라면 끔벅 죽는 건 사실이잖냐. 응?”

물 흐르듯이 술술 이어지는 문장은 여느 때의 ‘김푸름다운’ 배려가 가득했다.

백한빈은 이제껏 제 대학 생활에서 크고 작은 마찰이 있을 때마다 늘 먼저 이렇게 나서서 챙겨주는 다정한 친구의 제안을 단 한 번도 거절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푸름아.”

“으, 으응?”

“나 진짜 그 새끼 이름 듣고 싶지 않아. 다 끝났어. 정말로.”

“…….”

“진짜 걔랑 나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괜히 걱정하지 마. 야, 입장 시간이다. 들어가자.”

친구의 호의를 딱 잘라 거절한 백한빈은, 돌아올 대답을 듣는 것 대신에 일부러 성큼성큼 앞장섰다.

사실 그건 어쩌면 푸름에게도 다행인 일이었다.

늘 서글서글하니 호탕하게 웃던 김푸름이라고 하더라도, 지금만큼은 영 표정관리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아니, 누가 저 꼴을 보고 그 말을 믿냐고.

푸름은 품이 넉넉한 티셔츠 하나에 청바지를 입은 마른 뒷모습이 앞서 걷는 것조차 왠지 휘청휘청 위태로워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혀를 끌끌 찼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크린은 안 보고 자꾸 옆을 흘끗 훔쳐보는 김푸름 덕분에 내용은 하나도 기억에 안 남는 2시간을 채우고 나오니, 백한빈의 휴대폰엔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와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한빈은 제 휴대폰에 떠오른 낯선 번호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애초에 모르는 번호의 전화는 안 받는 편이기도 했고, 유독 해가 길어진 환한 여름 저녁의 따가운 더위 앞에 저를 내던져 심란하게 일렁이는 머릿속의 생각들을 증발시키는 게 더 급했다.

하지만, 안 되는 날은 뭘 해도 안 됐다.

차라리 이대로 녹아내리고 싶은 저녁.

백한빈은 손에 쥔 휴대폰이 작게 진동하는 걸 무심코 곧장 확인했다가 곧장 인상이 구겨졌다.

[안녕하세요. 혹시 백한빈 씨 연락처 맞을까요?]

“…….”

만약 맞춤법이 조금이라도 틀렸다면, 곧장 삭제 버튼부터 눌렀을 거다.

하지만 휴대폰 액정 위로 떠오른 문장은 그냥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정중한 물음이었다.

영 마뜩잖은 시선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한빈은, 속으로 ‘그렇지 않아도 사는 거 힘든데 보이스 피싱이면 죽는다, 진짜.’ 하고 중얼거리며 짤막하게 네 글자 쳤다.

[그런데요]

솔직히 한빈은 답장을 보내놓고도 곧장 돌아오지 않는 회신에 왠지 찝찝한데 그냥 빨리 차단할까 말까, 몇 번을 고민했다.

그건 어찌 보면 참 본능적인 거부반응이었다.

못해도 5분은 뒤에 도착한 답장은, 아니나 다를까 백한빈이 여름 더위에 자학 아닌 자학까지 하면서 머릿속에서 밀어내려고 했던 이름이 보란 듯이 적혀있었으니 말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고신재의 형 고진영이라고 합니다.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잠시 찾아뵙고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 해서, 정말 실례인 걸 알지만 부득이하게 연락 드렸습니다.]

만약 이게 손글씨였다면 분명히 종이 뒷면이 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힘이 들어간 문장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백한빈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의 연락에 슬렁슬렁 걷던 발까지 멈추고는 허, 하는 신경질적인 날선 헛웃음을 터트렸다.

고신재의 형이라니.

몇 달을 고신재와 붙어 다녔지만, ‘형’이라는 단어는 정말이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게 흘러나왔던 주제였다.

어쩌다 형제 이야기로 화제가 흐를 때면 늘 은근슬쩍 거기서 빠져나가는 걸 보며, 어지간히 서로 사이가 안 좋나 생각했을 정도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와는 모든 걸 끝낸 이 판국에 그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고신재의 형이라니.

솔직히 한빈은 이마저도 지능적인 피싱이 아닌가 의심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고진영의 문자는 백한빈의 그런 의심을 지우기에 충분했다.

[장소는 어디든 말씀해 주시는 대로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제 동생이 많이 불편하신 건 알지만, 감히 연락드렸습니다. 거듭 죄송합니다. 한빈 씨.]

“……아, 진짜 뭔데!”

동생 쪽에게 매일같이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받는 것으로 모자라,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 형한테까지 사죄를 받는 건 사절이다.

게다가, ‘제 동생이 많이 불편하신 건 알지만’ 이라는 문장도 신경 쓰인다.

대체 뭘 어디까지 알고 저러는 건지, 대체 무슨 의미인지도 찝찝해 죽겠다.

……하지만 가장 걸리는 건, 저를 알 리 없는 고신재의 형이 연락한 걸 보며 가장 먼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가정이었다.

‘설마 고신재한테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같은 문장이 저절로 떠오르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입이 바짝 말랐다.

그깟 새끼 어떻게 살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겠다고 이를 갈면서도 완전히 잘라내지 못하는 휴대폰 속 연락처럼, 심장이 소란스럽게 덜컹거렸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지, 백한빈….”

한빈은 휴대폰 속 문장을 꼭 고신재의 나른하고 하늘하늘한 얼굴을 노려다 보듯 살벌하게 째려보다가, 이내 이까지 악문 채로 손을 움직였다.

[합정 가능하세요]

[네! 물론입니다. 말씀만 하세요.]

이번엔 답이 금방 왔다.

하지만 그 깍듯한 대답을 보며 백한빈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진짜 그 자식 형 맞긴 해, 이 사람?!’ 하는 의심이었다.

사실 한빈의 의구심이 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 고진영은 이렇게까지 바짝 엎드려 조아리는 문장을 적어본 경험이 그리 없었다.

오늘 이렇게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 일전에 사진으로 남긴 백한빈의 휴대폰 번호를 보면서 몇 날 며칠을 망설였는지 모른다.

심지어 ‘걔’는 네 목소리만 들어도 열 받을 거라는 조언을 먼저 한 게 고진영 그였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살며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생의 모습이 눈에 밟혀 대학 시절처럼 눌러앉은 지 벌써 한 달이 가까워지기 시작한 요즘.

고진영은 목소리만 아는 ‘백한빈’이자 ‘하마’인 남자에 대한 평가가 날로 달라지고 있었다.

그건 꽤 심각해 보이기는 해도 시간이 지나면 웃고 넘어갈 특별한 실연 정도로 생각했던 섣부른 짐작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동생이 그나마 사람 같았던 때는 백한빈의 근황을 전했던 이튿날뿐이었다.

백한빈이 곧장 그 다음 날 아침 퇴원했고, 병원비는 형이 미리 결제하고 왔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소식을 전했던 그 날.

잘 빚은 밀랍 인형처럼 꼼짝도 하지 않던 고신재는 순식간에 생명을 얻은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백한빈 괜찮대? 잘 퇴원했대? 어디 더 아프지는 않은 거지?’ 하고 질문을 쏟아냈었다.

그땐 참 유난이다 싶었는데.

지금은, 차라리 그게 그립다.

“…아주, 연애 두 번 했다가는….”

진영은 차를 가지고 오는 저를 배려한 상점가의 주차장에 차를 대면서 꽉 막힌 혼잣말을 흘렸다.

요즘, 고신재는 학과 교수님의 예술센터에서 하는 공연이 끝나고 들어오면 곧장 씻고 침대 위로 틀어박히기만 한다. 이불을 덮고 웅크린 채로 휴대폰만 손에 쥐고 있다.

심지어, 식사도 안 하겠다는 걸 억지로 먹게 하는 방법은 단 하나다.

‘너 덩치도 커다란데 지금 거기서 체중 더 빠지면 인상 사나워 보일 거 알지. 그 꼴로 걔 볼래?’하고 평소라며 먹히지도 않을 으름장을 놓는 거다.

……실연에는 시간이 약이라고 하던데 고신재는 그 말이 무색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기만 한다.

어차피 같은 학교면 개강하고 나서 서로 화해하든 끝나든 하겠지 생각하려고 해도, 이대로 놔뒀다가는 그전에 정말 입원하는 건 제 동생이 되게 생겼다.

농담이 아니라 오늘 아침만 해도 드레스룸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거의 탈진한 채 웅크려 있는 고신재를 보며, 진영은 제가 회사에 있을 때 무슨 일이 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까지 했다.

“후우우우. ……아직 안 왔나.”

가게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상점가에서 백한빈과 만나기로 한 카페를 곧장 찾아낸 진영은, 그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긴장 어린 한숨을 토해냈다.

동생의 애인을 만나는 일이라니.

살면서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던 일이다.

그것도 카페 앞에 서 있는 낯선 여자들이 아니라 같은 남자들의 면면을 훑어야 한다니!

솔직히, 고진영은 그쪽에 시선을 주면서도 여전히 실감이 안 났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아직은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일행 없이 카페 앞에 서 있는 ‘남자’들 중, 제 동생이 그렇게 울고불고 목맬 정도로 반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고진영은, 감히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동생의 남자 취향은 잘 모르겠지만 평소에 옷에 따라 구두코 모양 하나까지 신경 쓰는 성격에 만나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굉장한 오만이었다.

“저기요.”

그래서 네댓의 낯선 남자 중 가장 먼저 후보군에서 제외했던 깡마른 남자가 제게 성큼성큼 걸어와서 말을 걸었을 땐, 그 흔치 않은 목소리를 곧장 알아듣지 못하기까지 했다.

“……예?”

“고신재 형이세요?”

진영은 저도 모르게 헉, 하고 헛숨을 크게 삼키려던 걸 간신히 숨겼다.

하지만 그렇게 상대의 겉모습에 놀란 건 비단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순간, 백한빈 역시 ‘…뭐냐, 진짜 안 닮았다.’ 하고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 혹시…, 백, 한빈, 씨?”

“네.”

사실 백한빈이 고신재와 닮은 구석 하나 없는 고진영을 곧장 알아본 건, 아직은 환한 여름의 주말 저녁 근심 걱정 하나 없는 사람들 사이 혼자 말끔한 수트를 입고 긴장 가득한 표정으로 오더니 곧장 이쪽을 훑는 집요한 시선 덕분이었다.

……한참이나 사람들 면면을 살피나 싶더니 묘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솔직히 알아보기 싫어도 알아볼 수밖에 없더랬다.

‘당연히 저 사람은 고신재 애인이 아닐 거다’라고 저를 제외한 것이 분명한 시선까지도 말이다.

백한빈은 조금 전 푸름이 저를 묘사하며 ‘볼이 쏙 들어갔다’라고 묘사한 것까지 덩달아 떠오르며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유독 무뚝뚝한 목소리로 곧장 말을 이었다.

“무슨 일로 연락하셨죠.”

“저어, 한빈 씨. 혹시 들어가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들어가서 이야기할 만한 이유면 들어가겠습니다. 저 이제 고신재랑 볼 일 없거든요.”

“…….”

저와 몇 살 차이인지는 몰라도, 백한빈은 동생 친구에게 이렇게까지 냉랭한 대우를 받으면 웬만한 이유가 아니고서야 누구라도 이야기할 생각이 싹 가시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자리를 잡고 심각하게 말해야 할 정도로 큰일이 고신재에게 생기지 않았기를 바람도 조금은……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 애인이었던 남자와 전혀 닮지 않은 진한 쌍꺼풀이 진 눈을 곤란하게 깜박이는 형이라는 사람은, 어떤 그럴듯한 핑계도 얼른 내놓지 못했다.

……별일은 없나 보네. 그럼 됐어.

백한빈은 저도 모르게 그제야 긴장이 풀려서 어깨를 늘어트린 채로 고진영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들어가세요.” 하고 처음으로 정중하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다급해진 건 고진영 쪽이었다.

그는 백한빈의 짐작과는 다르게, 한빈의 이 딱딱한 태도에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사실 고진영 그는 오늘 이 자리에 일종의 고해성사를 하러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 고진영의 머릿속에 있는 건 잡을 새도 없이 자리를 뜨려는 백한빈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저, 한빈 씨! 잠깐만요.”

“할 말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제가, 그 왕자님인데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뭐야, 하는 표정으로 슥 돌아볼 만큼 끔찍한 문장을 입 밖으로 기어이 내뱉고 만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고진영은 제게 꽂히는 낯선 이들의 시선이 아무리 기묘했다고 한들, 그런 건 하등 신경 쓰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저만치까지 성큼성큼 발을 옮기던 창백한 남자가 일순 뚝 멈춰 서더니 저를 돌아본 표정보다 더 살벌한 건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예?”

“그, 그러니까 제, 제가….”

고진영은 음산하게까지 보이는 뾰족한 눈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한참이나 망설였던 그 단어를 가까스로 이어 내뱉었다.

“…그, 청담동 왕자님…, 인데….”

“…….”

솔직히, 그 순간에는 동생의 남자친구에게 칼침을 맞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던 진영이었다.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빙판길에 고생하지 않으셨나 걱정이에요.

부디 포근한 하루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레몬샤벳님! 후원 쿠폰 정말 감사합니다. 소중하게 사용하겠습니다. ㅠ ㅠ!!

저는 그럼 내일 다음 편을 들고 오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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