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백한빈은 어린아이들이 순수하다던가 하는 말 같은 건 믿지 않는다.
학창시절, 학년이 바뀔 때마다 ‘병원에 자주 실려 가는 몇 반 남자애’의 타이틀을 떼지 못했던 한빈은, 종종 크고 작은 괴롭힘의 중심에 있었다.
쟤는 왜 맨날 아프다면서 힘든 일은 다 빠지냐는 불만이 미약한 따돌림으로 이어진 흔하다면 흔한 경우였다.
그건 너무 은근해서 선생님에게도, 집에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매일 매일 수렁에 빠지는 것 같았던 기분은, 시간이 오래 지나 지금은 꽤 희미해졌지만 그게 남긴 흉터가 어디쯤 있는지는 분명히 짚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알았다.
한빈은 카페 밖에서 저보다도 눈높이가 높았던 남자의 키를 가늠하며 “지금은 건강하시니까 됐죠.” 같은, 드물게도 진심 가득 담긴 응대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빠른 건 고진영의 선명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하필, 그 날. 동생이……, 신재가 그걸 봤어요.”
그건 이제는 따가움조차 잊은 기억이라는 양 풀어내는 담담한 문장이었건만 백한빈은 왠지 그 순간 마음 한 편이 철렁했다.
“유치원에서 열이 나서 일찍 나와 병원에 갔다가, 절 데리러 온 집사랑 같이… 일곱 살 어린애한테는 뭐든 멋져 보이는 자기 형이 병신 취급받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아….”
“동생은 그때부터 자기도 그 여자애가 하는 무용 할 거라고, 내가 걔보다 잘할 거라고 악을 쓰고 졸랐어요.”
“…….”
“뭐.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머니는 어디 가서 지기 싫어하시는 분이셔서. 한창 다들 예체능 하나씩 시키는 분위기에 잘 됐다며 신재를 밀어주셨고…, 그게 지금까지 온 거예요.”
심지어 당사자는 아주 먼 어릴 적의 기억을 회상하며 조금 웃고 있기까지 했건만, 왠지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이 된 한빈은 바짝 마른 입술만 혀로 적셨다.
고진영은 그런 백한빈의 속을 모두 들여다 본 것처럼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진짜 어렸을 때부터 성격 있죠, 고신재. …무용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고집부려 시작해서는 지금까지 하고.”
“정말…… 고신재답네요.”
“시작은 이래도 참 열심히 했어요. 제 동생.”
백한빈은 빙긋 미소를 거는 진한 쌍꺼풀 어린 눈매를 보면서, 처음으로 고신재와 닮은 점 하나 없는 그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몇 번이나 상을 타도 부모님 한 분 보러 안 오고, 대학 실기 시험 보러 가는 날 신입 비서가 깜박하고 안 와서 급하게 혼자 택시 타고 달려가면서도, 기어코 저랑 같은 학교 오겠다는 목표도 이뤘고요.”
“…….”
“한빈 씨. 이런 거 물어봐서 미안한데, 신재랑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게임에서 만난 거였죠.”
“네? ……아, 네. 뭐…, 그런데요.”
“혹시 그때 겨울에, 제 동생이…, 그러니까, 게임 속 신재가, 좀 이상하진 않았나요?”
“……그건 딱히 잘 모르겠는데요. 솔직히 그땐 막 엄청 친하진 않았던 때라.”
사실, 이 순간 백한빈은 고진영의 말에 기분 나쁜 내색 따위도 없이 곧장 대답하면서도 정작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정확히는, 여기에 있지도 않은 사람에게 따지고픈 문장으로 머리가 꽉 차고 있었다.
집에서 구박받고 홀대받는 거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었잖아.
…아무리 어머니가 그런 걸 시켜도,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며.
그런데 이게 뭐야?
사람 속상하게 이게 다 뭐냐고.
백한빈은 차마 당사자에게 따지지 못할 생각을 하면서 손톱 끝이 엄지손가락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그 꽉 막힌 답답함은 퍽 이른 감정이었다.
“신재가 저를 형으로 생각하지 않은 게 그때부터예요.”
“-네?”
“대학교 1학년. 겨울. 동생이 스무 살이었고, 같이 살았던 그때…, 제가 잔뜩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는, 직접 연을 끊었어요.”
멍하게 얼이 빠진 채인 백한빈 그의 속을 정말 뒤집기 시작할 고백은 이제부터 시작할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냐고 저를 달래는 동생한테, 사실 너는 우리 집 가족이 아니니 나한테 손대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
“네가 김신재인지, 박신재인지 나는 모르겠으니 부모님한테 가서 물어보든 하라면서. 대체 너 같은 걸 데리고 들어온 이유를 모르겠다고, 부모님이랑 싸우는 거 잘하는 네가 알아보라며…. 후우, 정말 있는 대로 미친 소리를 지껄였죠.”
“…….”
“제 말을 잘 듣던 동생 아니랄까 봐, 신재는 그때부터 절 형으로 대하지 않았고요.”
한빈은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채로 제게 쏟아져 들어온 문장을 하나하나 이해하려고 애썼다.
사실 고진영의 문장은 빙빙 돌리거나 무언가에 빗대거나 한 것 없이 꽤 직관적이어서 오래 고민할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백한빈은 고진영의 말이 얼른 머리에 입력이 안 됐다.
“-저. 그러니까, 그 말은.”
“…….”
“…그, 말은….”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모든 걸 인정하듯 저를 묵묵히 마주 보는 시선 앞에서 눈이 따가울 정도로 열이 치밀어 올랐다는 쪽이 더 정확할 거다.
덕분에, 마음속 저 아래에 묻어두었던 지난 5년이 역시 하나씩 떠오르기도 했다.
그건 백한빈이 아닌 ‘하마’라는 이름으로 고신재와 함께한 기억이었다.
“…….”
5년이나 알고 지냈는데도, 매일 메시지하고, 컴퓨터만 켜면 이야기하는데도 ‘가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건 모두 가망 없는 짝사랑이기 때문일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렇게까지 다정했던 남자가 조금이라도 사적인 주제가 나오면 거북해 하는 건, 저는 그저 온라인 속 친구일 뿐이라 그렇다며 서운해했던 밤이 많고 많았다.
……하지만 고신재는, ‘가나’는, 그저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최소한 저 시궁창 속에서 살면서도 제게 다정히 말을 걸고 늦은 밤 제 목소리에 몇 시간이고 귀 기울여줬던 남자는 모두 진실이었다.
백한빈은 그 사실을 모든 걸 끝냈다 마음먹은 지금에서야 알게 됐다.
실은,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그렇게 말 잘 듣던 동생한테 왜 그러셨는데요?”
“…….”
“몇 달 만에 먼저 문자 해줬다고 뭐든 그러려니 한 동생한테, 왜요? 남자랑 사귄다고 해도 기겁하기는커녕 이렇게 찾아와 한 번만 다시 만나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아끼는 거 아니었냐고요. ……고신재 걔가 뭘 잘못했는데요!”
“맞습니다. 몇 년을 매일 하는 후회죠.”
그쪽은 5년 내내 고신재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
백한빈은 고진영의 담담한 수긍 앞에서 차마 마지막 이성으로 토해내지 못한 문장을 가까스로 삼키면서 입술을 꽉 다물었다.
하지만 고진영은 내심 그 날 선 반응이 다행스러웠다.
제 동생이 왜 이 남자를 그렇게나 좋아하는지, 왜 절대 못 놓겠다 우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아서였다.
또, 한편으로는 솔직히 고마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동생을 위해 이 자리까지 온 고진영 그였다고 한들, 이어질 말을 꺼낼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거다.
고진영은 그 겨울, 제가 들었던 말을 처음으로 입 밖으로 되감아 내기 시작했다.
“-‘장애’라 군대도 안 간 고진영 친동생이 무용과라더라.”
그 목소리는 작고 또 느렸지만, 저만치 떨어진 테이블에서 들리는 소음에도 묻히지 않을 만큼 선명하기도 했다.
“……종강 날, 형은 잘 뛰지도 못하는데 동생은 무용과라니 참 그것도 못 할 짓 아니냐고 동기들이 떠들던 말을 엿들었어요.”
“…….”
“지금 생각하면 그깟 게 뭐라고 그렇게 눈이 뒤집혔을까 싶은데. 그땐…, 정말 한심한데, 그런 흔한 술자리의 뒷담화 하나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백한빈은 그 자신에게도 묘하게 익숙한 흐름의 문장과 상황 앞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자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고진영은 왠지 쭉 힘이 풀린 듯한 허탈한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네. 고작 그게 이유였습니다. 한빈 씨.”
“…….”
“그 말 한마디에 차곡차곡 쌓여온 불만이, 화가, 억울함이- 한빈 씨 말대로 잘못한 거 하나 없는 동생을 향했어요. 진짜 잘못한 곳에 대고는 말 한마디 못 했으면서.”
‘내가, 24년 동안 알았던… 생일이, 잘 못 됐대.’
고신재가 이 뜻 모를 말을 했던 건 작년의 어느 봄날이었다.
그걸 정확히 짚어낼 수 있는 건 ‘가나’, 아니 ‘5년간 알던 고신재’와의 몇 년 치 대화를 이 잡듯이 다시 읽은 것이 꽤 최근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백한빈은 순간 저도 모르게 까맣게 액정이 꺼진 자신의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그 날 새벽.
고신재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던 온라인 속 친구에게 무언가를 털어놓았었다.
사실 그땐 백한빈 역시 짝사랑이 싹트고 있음을 부정하던 시기라, 늘 다정했던 남자가 답지 않게 취한 듯한 말을 늘어놓더니 하루아침에 저와의 연락 창구를 끊는 것 같아 불안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날의 대화를 다시 읽으면 어떨까.
한빈은 왠지 입이 바짝 말라서 유리컵 겉면에 물이 송골송골 맺힌 에이드를 쭉 들이켰다.
그러나 아무리 차가운 음료를 마신다고 한들 속이 일렁이는 걸 채 억누를 수 없었다.
분명, 신경 안 쓰려고 했다.
원 없이 미워한 다음 고신재라는 이름 자체를 머리에서 지워버리려고도 했다.
하지만 고신재가 ‘고신재로’, 또 ‘가나’로 하나씩 쥐여줬던 조각이 맞춰지면 맞춰질수록, 그게 안 됐다.
결국 백한빈은 그의 형을 앞에 앉혀두고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날 선 한탄을 기어이 입 밖으로 토해내고 말았다.
“-후우우, 그럼, 고신재 걔는, 주말마다 집에 불려갔던 거로도 모자라서 그나마 있는 형까지……. 아. 진짜!”
“…….”
“대체 뭐가 그래, 걔는?! 왜 그렇게 살아? ……진짜, 맘대로 미워할 수도 없게!”
그렇게 어디 내놓아도 아쉬울 거 하나 없는 새끼가. 맨날 빙글빙글 웃으면서 별거 아닌 척 넘어갔었으면서…!
백한빈은 당사자는 듣지도 못할 한탄 같은 문장을 간신히 주워 삼키면서 이마까지 오른 열을 식히려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지만, 맞은편에서 묘하게 가라앉은 나직한 물음이 흘러나온 것도 그때였다.
“……한빈 씨. 미안한데요.”
“네?”
“난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시종일관 담담하게 말을 이었던 고진영은 왜인지 미묘하게 눈썹 하나를 꿈틀하고 치켜뜬 채였다.
백한빈은 그가 제 동생에게 쏟았던 폭언을 사죄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울컥한 마음이 다 가신 건 아닌 탓에, 굳이 뾰족함을 숨기지도 않고 퉁명스레 되물었다.
“……뭐가요.”
“-주말마다 집에 불려갔어요? 신재가, 제 동생이?”
그 순간.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시종일관 정중하고 또 조심스럽기 짝이 없던 남자의 눈빛이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건 백한빈의 착각만은 아니었다.
덕분에 순식간에 기세가 꺾인 한빈은 그 부리부리한 이목구비의 존재감에 눌려 더듬더듬 대답했다.
“가, 같이 살았다면서요. ……왜 모르세요?”
“말했다시피 그 겨울 이후로 서로 대화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보다 한빈 씨. 제 동생이 대체 언제 주말마다 집에 불려갔죠?”
“…어, 그, 그건…. 그….”
아무리 생긴 것이 달라도 역시 형제는 형제였다.
지금도 싱그럽게 웃던 사람이 순식간에 서늘해져서는 기묘한 위압감까지 느껴지는 게 어딜 봐도 ‘누구 씨’의 첫인상이었다.
……아, 씨. 진짜 고신재 형 맞다, 맞아.
백한빈은 역시 사람은 외모만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달으며 긴장으로 뻣뻣해진 허리를 바로 세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끔찍한 날들을 같이 살던 형조차도 알지 못할 정도로 온전히 혼자 삭혔어야 했다는 의미 같아 새로운 불씨가 마음속에 당겨지기도 했다.
“백한빈 씨.”
나한테 잘못하고 이쪽한테 연락한 거 보면, 최소한 여긴 미친 또라이 싸패 패밀리 아니라는 소리지.
……그렇지, 고신재?
한빈은 저를 향해 그 진한 눈매에 힘을 준 채 나직하게 다그치는 고진영을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면서 당사자는 듣지 못할 질문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오늘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하나 남겨주시는 말씀들도 참 즐겁게 읽고 있어요.
함께 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더욱 힘이 나는 요즘이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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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히 사용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저는 내일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