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세르미네는 누가 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데없이 집 안에서 튀어나와 세르미네의 한쪽 팔에 매달린 건 가연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턱선까지 오는 분홍색 머리가 부드럽게 말려서는 소년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연보라색 롤리타 양복을 입은 그는 빨간 눈동자를 한껏 빛내며 세르미네를 향해 친숙하게 말을 걸었다.
“세르미네 님, 집은 마음에 드세요? 제가 열심히 골랐어요!”
“이, 이 사람은 누구예요?”
가연도 적잖이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으며 세르미네를 향해 물었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마이데 또한 옆에서 어깨를 으쓱하며 의미심장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당신이 리슈아의 환생이야? 흠… 여전히 볼품없네.”
“뭐라고?”
방금 전까지 밝게 미소 짓던 표정을 굳히며 소년이 말을 툭 내뱉었다. 그러자 가연은 갑작스럽게 바뀐 소년의 태도와 무례한 말에 저도 모르게 발끈해 언성을 높였다.
“리레시아.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결국 보다 못한 마이데가 나서서 한마디 했다. 세르미네도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매달려있는 소년, 리레시아를 한 걸음 뒤로 밀어냈다.
“마이데, 여전히 리슈아에게 무르구나?”
밀려난 리레시아는 팔짱을 끼고 마이데를 올려다보며 한껏 그에게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마이데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익숙한 듯 태연하게 받아칠 뿐이었다.
“뭐, 그렇지.”
“달라붙지 말고 저리 가라. 그보다 너는 왜 온 거지?”
세르미네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리레시아에게 물었다. 그러자 리레시아는 몸을 홱 돌리더니, 언제 마이데를 비웃었냐는 듯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대답했다.
“여기는 제가 고른 집이잖아요. 세르미네 님의 마음에 드시는지 신경이 쓰일 수밖에요.”
말은 세르미네를 위한다고 했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고른 집이니 당연히 올 자격이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을 여과 없이 파악한 세르미네는 슬슬 짜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마음에 드니까 이제 돌아가, 리레시아.”
그나마 가연을 의식한 세르미네는 최대한 부드럽고 완곡하게 리레시아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리레시아는 물러설 줄 몰랐다.
“아침 식사도 차려놨으니 함께 식사라도 해요.”
“저기요. 말씀은 알겠는데, 손에 짐이 많으니 이것부터 내려놔도 될까요?”
옆에서 마치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가연이 물었다. 그러자 리레시아는 싹 굳은 얼굴로 가연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당신 아직도 있었어? 마음대로 해. 내가 볼일이 있는 건 세르미네 님뿐이니까.”
“리레시아!”
결국 세르미네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그가 리레시아에게 호통치자 가연은 어쩔 줄 몰라 했고, 리레시아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칫하면 싸움이 날 수 있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가연의 말이 맞아. 일단 정리부터 해야 하니까 환영 인사는 다음에 하자.”
그나마 눈치가 빠른 마이데가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리레시아도 괜한 싸움을 일으키긴 싫었는지 스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쳇, 할 수 없지. 세르미네 님은 여전히 리슈아에게만 다정하군요. 하지만 그런 면도 전 사랑할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리레시아는 마이데에게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리더니 이내 세르미네에게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세르미네 님.”
그는 순간이동을 사용해 스륵,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지만 저 순식간에 변하는 표정이 세르미네는 신기할 정도였다. 안면 근육이 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진 건지 연구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애써 누른 그는, 가연을 데리고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뒤에는 말하지 않아도 마이데가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꽤 값이 있어 보이는 아파트는 집 내부도 나쁘지 않았다. 넓은 거실과 바로 마주하고 있는 부엌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기 충분한 식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마이데가 세 개의 방을 둘러보러 간 사이, 세르미네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서서는 눈만을 굴려 집을 훑어보았다.
그의 바로 앞에서 가연이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눈을 빛내며 보는 중이었다. 세르미네도 그에 맞춰 식탁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샌드위치와 가벼운 파스타, 그리고 샐러드와 마늘빵 옆에 음식점 로고가 적힌 냅킨이 잘 접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리레시아가 요리를 할 리가 없지….’
내심 생각에 빠져있던 세르미네의 옆에서 가연이 냅킨에 적힌 가게 로고를 보고 놀란 소리를 냈다.
“여긴 비싸기로 유명한 곳이잖아요? 세상에… 전 갈 엄두조차 못 낸 곳인데….”
그러면서 더더욱 식탁에 놓인 음식을 금괴 보듯이 바라만 보는 가연이 세르미네는 안쓰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랑스러웠다. 그는 몸을 일으켜 식탁으로 가더니 샌드위치 두 개를 냅킨으로 감싼 후, 하나는 자신이 먹고 다른 하나를 가연에게 건넸다.
“네가 이렇게 돌아왔으니 뭐든 해주고 싶은 게 내 마음이야. 걱정하지 말고 먹어라.”
“고, 고마워요….”
세르미네는 가연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과는 달리 가연은 제법 야무지게 샌드위치를 들고 먹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마저도 세르미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어, 가연아. 입가에 뭐가 묻었네. 닦아줄게.”
식탁에 앉아 마늘빵을 집어 먹으며 가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마이데가 갑자기 냅킨을 들고 일어섰다. 가연의 입에 샌드위치에서 묻어나온 소스가 약간 묻어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세르미네는 얼른 자신의 손가락으로 가연의 입가를 살살 닦아주었다.
“까, 깜짝이야. 고마워요, 두 분 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가연은 채 거절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무방비 상태로 호의를 받은 그는 작은 소리로 고맙다고 중얼거렸고, 마이데는 쳇, 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같이 사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진 않겠군.’
가연의 모습에서 옛날 리슈아의 얼굴을 세르미네는 겹쳐 떠올렸다. 애틋한 감정이 가슴을 간질였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그 감정에 세르미네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내심 마이데까지 섞여 함께 생활을 해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세르미네였다. 귀찮은 것은 질색인 세르미네로서는 그저 가연의 안전만 지켜주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때문에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이 못마땅했지만, 가연을 계속 보고 있자니 이 또한 틀리진 않았다는 마음도 들었다.
‘여차하면 마이데를 내쫓으면 되겠지.’
그리 생각하며 세르미네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고자 마음먹었다. 어차피 가연이 제 옆으로 온 이상, 각성까지만 기다리면 되었다. 그 이후는 자신의 수중이었다.
*
“일어나라, 리슈아. 해가 떴다.”
“세르미네 씨…. 잠 좀 자게 해 줘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웅크린 가연을 보며 세르미네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그는 리슈아를 깨울 때 쓰던 방법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세르미네는 웅크린 가연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쳐 안았다. 무겁지 않게 적당히 힘을 실어 누르자 가연이 억누른 신음 소리를 작게 냈다.
“으응… 세르미네 씨, 5분만, 5분만요….”
잠에 취한 가연은 제가 내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가연의 앙다문 이빨 사이에서 나오는 신음 소리를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내가 뭘 하고 있는 거람.’
절로 머쓱해진 세르미네는 도망치듯 부엌으로 빠져나왔다. 식탁의 의자를 하나 빼 걸터앉은 그는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빈 거실을 바라보았다. 다 식은 커피를 마시던 세르미네의 머릿속에 지난 며칠이 스쳐 지나갔다.
첫날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하지만 그 때문에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던 세르미네는 다음 날부터 골치를 썩이기 시작했다.
마이데는 지독하게 생활력이 없었다. 가볍게 청소라도 하자는 가연의 제안에 마이데는 이렇게 대답했다.
“청소? 아틀란티스에선 정령이 다 해줘. 여기로 데려오면 안 될까?”
“무슨 말 같잖은 소리를 하나. 정령은 아틀란티스의 힘을 동력으로 루아가 통제하고 있다. 대륙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걸 모르나?”
세르미네가 짜증 섞어 대꾸하자 마이데는 ‘아 참, 그랬지.’ 하더니 이내 마족이 나타났는지 보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가연이 자신에게 맡겨달라며 팔을 걷고 나섰다. 세르미네는 리슈아를 떠올리며 못 미더운 티를 냈지만, 그래도 자취까지 한 가연은 다르지 않을까 싶어 한 번 맡겨보았다.
그러나 역시나, 가연에게 있어 청소는 그저 물건을 한 곳에 밀어놓고 쌓아두는 것이었다. 바닥을 청소해도, 먼지를 닦아내도 도무지 청소를 한 것 같지 않았다.
“이거 보세요. 깨끗하죠?”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하는 가연을 뒤로하고 세르미네는 물걸레를 손에 쥐었다.
“깨끗하긴 뭐가 깨끗해. 저리 가 있어.”
가연이 머뭇거리다가 이내 옆의 작은 의자로 몸을 옮겼다. 그러자 세르미네는 열심히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이데의 말대로 정령이 잡일을 도맡아 하는 아틀란티스에서 세르미네 또한 청소를 해 본 기억은 없었다. 그나마 대륙이 멸망하기 전, 기사단 생활을 하던 때의 경험을 살려 보았지만 나무 바닥과 벽지는 완전히 청소법이 달랐다. 결국 돌아온 마이데가 물이 흥건한 바닥을 보더니 한소리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낫겠네. 루아에게 말해서 돈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겠어.”
하지만 세르미네는 자신의 손으로 해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지체할 것 없이 그는 대형 마트로 달려가 온갖 청소 도구를 사 오더니 청소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라리 청소만 미숙했으면 다행이었다.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그들에겐 큰 난관이었다.
요리에 있어서 세르미네는 가연을 믿고 있었다. 비록 리슈아는 처참하게 요리를 못했지만, 가연은 달랐다. 그의 김치찌개를 먹어봤으니 어느 정도 실력을 키웠을 거라 세르미네는 짐작했다.
때문에 식사도 주문해서 먹자는 마이데를 밀어내고 그는 부엌을 가연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것 또한 세르미네의 실수였다.
“하지만 가연아. 사흘 동안 꽁치 김치찌개와 소시지볶음만 먹는 건 조금 아닌 것 같아.”
나흘째 되던 날의 아침 식사 때, 참다못한 마이데가 세르미네의 마음을 대신해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전 이거밖에 할 줄 모르는걸요. 밥이야 냉동식품을 데워먹으면 되고….”
“지금까지 김치찌개만 먹고 살아온 건가?”
세르미네는 황당했다. 이쯤 되니 마이데의 말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겠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어차피 그는 가연의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큼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화가 난 루아의 얼굴을 떠올리자 세르미네는 몸서리가 쳐졌다. 루아는 아틀란티스의 재정과 실무를 관리하는 무녀이자, 세르미네가 유일하게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며칠 동안 나아질 게 없는 생활에 세르미네의 속은 타들어 갔다. 게다가 가연은 요즘 해가 뜰 무렵 잠이 들어 늦잠을 자곤 했다. 그 때문에 헐레벌떡 학교로 뛰어가기 일쑤였고, 물건을 한두 개씩 잊어버리곤 했다.
“예나 지금이나 덜렁대는 건 변함이 없군. 누굴 닮은 건지….”
생각에서 빠져나온 세르미네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셔 기분을 전환했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의자 끄는 소리와 함께 부루퉁한 가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야 부모님을 닮은 게 당연하잖아요. 전 리슈아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요. 게다가 당장 2주 후에 기말고사라고요.”
세르미네의 가슴에 가연의 말이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조금 전 리슈아를 깨우듯 자신을 대한 것 때문에 가연은 더욱 날이 선 모양이었다. 세르미네는 몹시 억울했지만 일단 한 번 참기로 했다.
“일어났나.”
짙은 파란색 컵에 담긴 커피로 손을 녹이는 가연을 보며 세르미네가 인사를 건넸다.
“그럼 그렇게 깨우는데 잠이 오겠어요. 하루 종일 강의가 없어서 모처럼 잠 좀 자려 했더니.”
가연이 장황하게 투덜거리려는데 건너편 방에서 갑자기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함께 들렸다.
“이게 뭐야!”
틀림없는 마이데였다. 가연과 세르미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나 그에게 달려갔다.
마이데는 책을 돌돌 말아 들고는 벽에 붙은 벌레를 힘껏 내리치고 있었다.
“엄마야, 지, 지네다!”
가연이 함께 비명을 지르며 세르미네의 뒤에 숨자, 그는 한 손으로 지네를 집어 베란다로 가더니 밖으로 던져버렸다.
“리슈아는 그렇다 치고, 너는 대체 왜 지네를 보고 놀라는 거지?”
“너라면 침실에 벌레가 나타났을 때 안 놀라겠어? 마족과는 다른 문제야. 놀랄 수밖에 없다고.”
마이데의 말에 가연이 동의한다는 표시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미네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마이데를 한 번 보더니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매정하긴. 그보다 좀 나갔다 올게.”
“어딜 가?”
“루아가 불러서 아틀란티스에 다녀오려고 해. 혹시 마족이 나타나면 연락해. 꼭이야.”
청재킷까지 갖춰 입은 마이데는 인사를 남기고 순간이동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러자 가연도 마이데가 사라진 자리를 한 번 보더니 세르미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도 도서관 다녀올게요.”
“나도 가겠다.”
“네?”
세르미네의 말에 가연은 놀라 반문했다. 그리고는 얼른 말을 덧붙이며 손을 세차게 저었다.
“아니에요. 하나도 재미없는 곳이라고요. 일찍 들어올게요.”
가연 딴에는 공부에 매진하느라 세르미네를 제대로 신경 못 쓸 것이 미안해서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세르미네 또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마족이 나올지 알 수가 없지 않나. 나도 도서관이 무얼 하는 곳인지 정도는 안다.”
그는 진심으로 가연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었는지 가연도 계속 억지 부리지 않고 순순히 그와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늦은 아침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도서관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두 정거장 정도 가면 되기에, 그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가연은 걷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책을 보며 걷고 있었다. 원래는 꽤 무거웠을 책을 분철해 언제 어디서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소책자였다. 가연이 책에 열중하자 세르미네는 그가 행여나 넘어지지 않도록 다른 손을 꼭 붙잡았다. 마치 귀족을 에스코트하는 기사와도 같은 역할이었다.
세르미네는 왼손의 작은 온기를 느끼며 자신도 한때 치러야 했던 기사 시험을 떠올렸다.
‘그래. 시험이라는 게 쉽지는 않지.’
생각과 동시에 가연이 작게 재채기를 했다. 춥다며 코를 훌쩍이는 가연에게 세르미네는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둘러주었다.
“세르미네 씨는 안 추워요?”
“됐다. 이 정도로는 춥다고 할 수도 없지.”
“고, 고마워요.”
가연은 붉어진 얼굴로 작게 인사하고는 다시 시선을 피해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이내 다음 순간, 눈앞에 보이는 지하 역사 안에서 갑자기 회색 손이 길게 뻗어 나왔다.
“으악!”
가연이 비명을 지른 것과 동시에 회색 손은 가연의 몸을 붙잡았고, 가연의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이런, 마족이…!”
세르미네는 얼른 검을 뽑아 들었다. 주위에서 놀라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의 목적은 오로지 가연의 안전이었다.
그러나 회색 손은 어찌나 재빠른지 가연을 붙잡자마자 그를 역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세르미네 씨!”
한 마디만을 남긴 채 회색 손과 가연은 함께 역 안의 검은 이공간으로 사라졌다. 실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