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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10화 (10/87)

10화

“수호석은 우연히 생겨났다지만, 각성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

마이데의 물음에 세르미네는 점원이 가져다준 맥주를 한 잔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때문에 그 사실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지.”

“그래도 수호석이 나타난 건 상당한 성과야. 그 말은….”

마이데는 잠시 말을 멈췄다.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말을 고르는 모습을 세르미네는 묵묵히 지켜보았다.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저 기분이 어떤 기분일지 그 또한 굉장히 잘 알았다.

“곧 리슈아의 기억이 돌아올 거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래.”

리슈아의 기억, 그 말은 각성의 때를 이야기했다.

온전한 리슈아가 돌아오기를 얼마나 바라 마지않았는지, 세르미네 역시 들뜨는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힘들었다.

“그런데 고작 그 말을 위해 나를 이 시간에 여기까지 불렀나?”

세르미네는 미간을 좁혔다. 리슈아의 각성이 기쁘긴 하지만, 자신도 다 아는 사실을 굳이 듣기 위해 생활 패턴까지 방해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것도 마이데에게는 더더욱.

“당연히 아니지. 네 의견을 듣고 싶어서 불렀어.”

그사이 안주로 주문한 모둠 튀김이 나왔고, 마이데는 오징어튀김을 포크로 푹 찍어 입에 가져갔다.

“음, 맛이 좋군. 그래서 말인데, 가연이도 곧 전투에 투입해야 하지 않겠어? 마족을 처치하는 인력은 늘 부족하니까.”

“아직은 아니다. 리슈아의 기억이 돌아오는 게 먼저야. 지금의 불완전한 리슈아가 전투를 해야 할 정도로 내가 무능력하지는 않다.”

세르미네는 여기서 선을 그을 생각이었지만, 마이데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가연이도 잡혀만 가는 상황을 원하진 않을 거야. 몸을 지킬 방법은 알려주는 게 좋다고 생각해.”

“지금 낮의 일이 내 탓이라고 책임을 묻고 싶은 건가?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지.”

“왜 그렇게 꼬아서 듣는 거야. 루아도 네 탓은 하지 않았어. 물론 가연이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안 되겠지만.”

마이데의 말에도 세르미네의 기분은 풀어질 줄 몰랐다. 그는 보란 듯이 새우튀김에 칠리소스를 가득 찍어 입에 넣었다. 매운맛이 입 안에 퍼지자 세르미네는 인상을 쓰며 맥주를 마셨다.

“거참. 오늘 일은 그냥 잊어버려. 그보다 루아가 걱정하던 건 각성이 꼭 단번에 일어나진 않을 거란 점이었어.”

“그게 무슨 말이지?”

“기억, 능력, 혹은 기사로서의 자격. 어떻게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대. 그러니까 결국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거고, 그때까지 가연이에게 호신술 정도는 알려주자는 거지.”

환생에 전례가 없으니 루아조차 짐작을 못 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 사실에도 세르미네의 의견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면 더더욱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내가 지켜줘야겠군. 그 때문에 동거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세르미네. 때문에라도….”

마이데는 말을 이어가며 세르미네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싫으면 아틀란티스로 돌아가. 이 일은 내가 혼자 맡겠다.”

하는 수 없이 마이데도 더는 의견을 펴지 않았다. 말없이 맥주잔을 비운 세르미네는 계산을 맡긴다는 말만 남기곤 가게를 나서 집으로 향했다.

*

새벽 깊은 시간, 세르미네는 갈증에 잠에서 깼다. 아무래도 술을 마시고 바로 잠이 든 탓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꿀을 넣은 미지근한 물이라도 마시고자 세르미네는 부엌을 향했다. 그러다 좁은 복도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우선 컵에 물을 담아 갈증부터 해결한 그는 빛의 근원지로 향했다. 다름 아닌 조금 열린 가연의 방 안이었다.

‘또 이 시간까지 잠을 안 자는군.’

뭐라도 잔소리를 좀 해야겠다 싶어 세르미네는 다가갔다. 하지만 안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발을 우뚝 멈춘 세르미네는 얼른 벽에 붙어 몸을 숨겼다.

“하지만 마이데 씨. 세르미네 씨는 언제나 절 어린아이 취급하기만 해요.”

“그래.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 있지. 좀 전에 대화를 해봤지만, 영 들어주질 않더라.”

그리고는 잠시 말이 끊어졌다. 문틈으로 엿볼 수가 없어 그들이 지금 무얼 하는지 세르미네는 알지 못했다. 다만 음료수 캔이 책상에 놓이는 소리와 마이데의 담배 냄새로 미루어보아, 단순히 대화를 하고 있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저도 전투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아직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또 잡혀가서 구해달라고 하는 건 사양이에요.”

“그렇겠지. 가연이 네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으니까.”

“이 돌이 기사의 상징이라면서요. 이게 나타났는데 왜 싸우면 안 된다는 거죠?”

그러면서 가연은 볼멘소리를 이었다.

“세르미네 씨는 늘 혼자서 다 감당하려고만 하고 말이에요. 저번에도 마이데 씨와 협력을 했으면….”

“세르미네는 원래 그래. 가연이 네게 유난스러운 것이 아니야.”

“조별 과제도 말이죠. 협력 안 해주는 조원도 힘들지만 혼자서만 다하려는 사람도 힘들다고요. 그러다가 일이 틀어지면 꼭 남의 탓하면서 힘든 자신의 처지만 늘어놓고….”

세르미네는 순간 가슴에 비수라도 꽂힌 것 같았다. 당장 저 방에 들어가서 아니라고, 자신은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괜히 더 입지가 안 좋아질까, 스스로의 처지가 더욱 나락으로 떨어질까 싶어 그만두었다.

“게다가 제 생활이나 행동도 하나하나 지적을 하시니…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세르미네가 인간 생활에 대해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가연은 아무래도 속에 담아둔 말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오히려 마이데가 세르미네를 변호하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답답했다. 왜 자신의 의도를 몰라주는지. 모든 게 다 리슈아를, 가연을 위해서인데 어째서 몰라주는지. 자신이야말로 한탄하고 싶었다.

“휴우… 이렇게 뒤에서 말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건 알아요. 그냥 시험 때문에 지쳤나 봐요.”

“그래. 그럴 거야. 게다가 마족에게 잡혀가면 무서울 수밖에 없지.”

마이데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가연을 위로하며 신나게 점수를 따고 있었다. 그런 마이데의 의도가 뻔히 보여 세르미네는 분했지만,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세르미네는 조용히, 두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다시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후로 며칠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세르미네는 그날 밤 들었던 마이데와 가연의 대화를 굳이 가연의 앞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속상한 것과 더불어 그런 식으로 뒤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못마땅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굳이 가연과 입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연 또한 그 이후로 세르미네에게 특별히 불만을 표하는 일은 없었다. 그보다 가연은 눈앞에 닥친 시험이 더욱 문제였다.

학교도 종강했겠다, 가연은 방에 틀어박혀 시험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여전히 서툴게나마 집안일을 하려 했고, 마이데는 뭐든 돈으로 해결하고 싶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세르미네는 결국 우려하던 메시지를 받고 말았다.

[세르미네. 요즘 지출이 크게 늘었습니다. 리슈아를 위해 쓴 것보다 다른 곳에 더욱 많은 지출이 있더군요. 아틀란티스의 재정이 어디서 나오는지에 대해선 잘 알고 계시겠지요. 돈을 허투루 써서는 안 됩니다.]

다름 아닌 루아로부터의 메시지였다. 세르미네는 한숨을 쉬며 거칠게 뒷머리를 헝클였다.

‘젠장, 마이데 그 녀석….’

“세르미네 씨!”

그가 속으로 마이데를 욕하려는 순간, 가연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는 수 없이 세르미네는 짧게 메시지를 남겼다.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세르미네는 가연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방 안을 마구 어지럽히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세르미네 씨. 제 노트 못 봤어요? 여기 있던, 고양이 두 마리가 그려진 노란 색의….”

“아, 그거 말인가. 폐지인 줄 알고 오늘 아침에 내놨는데.”

“네?”

가연은 크게 놀랐지만 이내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떡하지… 그거 이번 시험 필기 노트인데….”

“미, 미안하다….”

하지만 가연은 세르미네를 더 이상 탓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시계를 보더니 이내 웃옷을 걸치고 현관문을 열었다.

“찾으러 다녀올게요. 혹시 아직 있을지도 몰라요.”

달려나가는 가연의 발은 몹시 빨라 세르미네가 말릴 틈은 없었다. 그보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던 게 가장 컸다. 가연이 제 탓을 하지 않자 오히려 미안함이 배로 올라왔다.

생각이 꼬리를 물자 결국 그는 따라나서는 것을 포기했다. 세르미네는 소파에 앉아 어두운 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마이데와 가연이 며칠 전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이걸로 또 점수를 잃고 말았군.’

그때 이래로 통 되는 일이 없는 날들이었다.

그러나 세르미네의 악몽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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