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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11화 (11/87)

11화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금세 돌아올 거라 믿은 가연은 세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쯤 되자 지난번 마족에게 납치된 가연이 머릿속에 떠올라 세르미네는 견딜 수 없었다. 하필 마이데도 아틀란티스에 간 상황이었다.

“젠장, 찾으러 가야겠군.”

어차피 엇갈려봐야 세르미네만 고생할 뿐, 가연에게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현관문을 잠근 후 재활용품을 모아놓는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연은 거기에 없었다. 대신 그곳에 가연이 왔었다고 말이라도 해주듯 어지러이 놓인 폐지들이 세르미네를 반겼다.

‘어딜 간 거야.’

혹시나 또다시 마족이 나타난 게 아닌가 싶어 세르미네는 경비실을 향해 달려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람 좋아 보이는 초로의 남성이 세르미네를 맞았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인사를 나눌 만한 경황이 없었다.

“CCTV 좀 보여주시오.”

다짜고짜 들어온 낯선 사람의 황당한 요구에도 경비원은 침착하게 되물었다.

“어디 말씀이십니까?”

“재활용품 분리하는 분리수거장. 빨리!”

“흠, 꽤 급한 일이신가 보군요.”

세르미네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어지간히 곤혹스럽고 당황한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본 경비원도 예삿일이 아니라 판단했는지 순순히 CCTV를 보여주었다.

이윽고 작은 화면에 가연의 모습이 나타나자 세르미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작은 손으로 폐지를 이리저리 헤집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러던 그의 뒤로 낯선 중년 여성이 하나 다가왔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던 가연은 황급히 어디론가 달려갔고, 여성은 반대편으로 걸어가더니 이내 화면에서 모습을 감췄다.

“저 자는 누구지?”

“글쎄요. 이 아파트 주민은 아닌 듯싶고, 외부인인 것 같습니다.”

경비원 또한 아는 바가 없어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더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기에 세르미네는 잠자코 경비실을 나왔다.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리긴 했지만 눈앞이 캄캄했다. 조금 전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며 가연에게 전화도 해보았지만, 역시나 받지를 않았다. 메시지를 남겨도 읽었다는 흔적이 없었다.

세르미네는 다시 한번 분리수거장으로 내려왔다. 아무도 없는 쌀쌀한 지하 주차장에 우두커니 서서 방법을 모색하는 그의 뒤로 눈 부신 불빛이 비쳤다.

인공 불빛, 세르미네가 뒤를 돌아보니 손전등에서 나오는 푸른빛이었다. 그 손전등의 주인은 다름 아닌 경비복 차림의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성이었다.

“당신도 이 아파트 경비원인가?”

세르미네의 물음에 그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당신도’라고 하셨습니까? 경비원은 저 하나뿐입니다.”

“뭐?”

“그나저나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경비원은 손목시계를 보며 세르미네에게 용건을 물었다. 그를 수상한 사람으로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해 세르미네는 얼른 사정을 설명했다.

“폐지를 아침에 내놓았다면 지금쯤 뒤편 산에 있는 창고에 있을 수 있겠군요. 그 가연이란 사람은 거기에 간 거 아닐까 싶습니다.”

그가 채 뒷말을 잇기도 전에 세르미네의 몸은 벌써 뒤편 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산은 다름 아닌 가연의 대학교가 위치한 산이기도 했다. 아마 지리를 잘 안다고 자신해 이 늦은 밤에 거침없이 그곳을 향했을 거라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산 입구에는 친절하게 안내 지도가 놓여 있었다. 중턱쯤에 작은 분리수거 시설이 있는 걸 확인한 세르미네는 인간을 넘어선 능력을 발휘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달해도 가연은커녕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른 건물이 또 있나 싶어 찾아봤지만, 그 근처에는 낡은 컨테이너로 만든 건물 하나뿐이었다.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마당을 보면 확실했다.

‘젠장, 리슈아! 어디로 간 거야…!’

마음이 급해진 세르미네의 머릿속에 문득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지난 미로 사건 때의 기억이었다.

‘기척을 느껴보자.’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머리가 맑아졌다.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은 세르미네는 눈을 감고 가연의 기척을 느껴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느껴진 곳은 바로 옆에 있는 조금 더 낮은 산이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야산인데다가 산이 험준해 사람들은 발을 들이지 않는 곳이었다.

‘리슈아, 대체 왜 거길 간 거야?’

고뇌하던 세르미네의 머리에 퍼뜩 그럴듯한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마족, 마족이 나타난 게 틀림없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근래 이 근방에서 나타나는 마족들의 대부분은 가연을 노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마족이 가연을 납치했을 것이라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시간이 없었다. 세르미네는 남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가장 최선이고, 효율이 좋은 방법만을 택해야 했다. 그리고 마족의 소행임을 간파한 지금은 수호석의 힘을 이용해 날아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세르미네는 검을 불러내 손에 쥐고는 펜던트 속의 수호석을 꺼내 홈에 끼웠다. 그리고 한 바퀴 돌리자 그의 등 뒤로 하얀 날개가 돋아났다.

차가운 밤공기를 가로지르며 그는 하늘을 날았다. 불어오는 맞바람이 꽤나 차가웠지만 차라리 그편이 좋았다. 머릿속은 온통 리슈아에 대한 생각이 가득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윽고 목적지에 다다르자, 상공에서도 상황이 훤히 보였다. 산의 정상에는 조그만 공터가 있었고, 그곳에 가연이 마족에게 붙잡혀 있었다.

“역시나 그랬군. 저 바보가!”

마족의 수는 꽤 많은 데다가 중급 마족도 꽤 많이 포진해 있었다.

세르미네는 반사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찾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고 손을 거뒀다. 그리고는 가연이 잡혀있는 곳을 향했다.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마족의 수는 어림잡아도 수십 마리는 되었다. 세르미네가 보기에 전부 단독으로 행동하는 개체였지만, 이상하게도 누가 의도한 것처럼 거미 형태의 마족뿐이었다.

마족이 집결해있는 곳 한가운데에는 큰 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는 꽤 간격이 넓었는데, 거기에 사람이 여럿 들어가도 될 만한 크기의 거미줄이 여럿 겹친 육각형 모양으로 둘러져 있었다. 그리고 한 가운데에 가연이 양손, 그리고 양다리가 묶인 채 큰대자로 포박된 상태였다.

세르미네는 공중에서 거미줄을 끊으려 했지만, 거미들은 세르미네를 발견하자마자 일제히 거미줄을 쏘아 보내며 그의 동작을 방해했다.

한 마리 한 마리의 공격력도 꽤 강했지만, 이들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단단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겨우 베어 넘기면 독이 어린 체액이 새어 나와 땅을 검게 녹였다. 저기에 몸이 닿으면 어찌 될지는 뻔했다.

게다가 세르미네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세르미네 씨!”

애타게 도움을 구하는 가연을 어서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세르미네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긴 시간 공포에 질려있었을 가연은 세르미네가 자신을 구하러 오자 구원의 빛이라도 본 모습이었다.

그 가연 때문에 세르미네는 화살의 비를 쏠 수 없었다. 멀리서 광역 공격을 하면 가장 효과적이었지만, 가연까지 범위에 들어갔다. 한 발씩 화살을 쏘기에는 장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마족을 베고, 또 베었지만 그 수가 끝이 없었다. 도저히 앞으로 전진을 할 수가 없어 세르미네는 애가 탔다.

사방에서 접근하는 마족은 한 마리씩 공격하지 않았다. 앞에서, 그리고 옆에서 동시에 달려드는 마족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무거운 대검에 속도를 실어 휘두르니 추운 날씨에도 땀이 절로 맺혔다.

그러던 중, 마족이 거미줄을 쏘아 보내 세르미네의 발을 묶었다. 그는 손에 하얀 번개를 만들어내 마족을 공격했다. 간신히 위기를 넘겼지만 거미줄을 단번에 끊는 건 힘들었다.

“세르미네 씨, 마이데 씨는 어디 있어요!”

세르미네가 주춤하는 것을 본 가연이 마이데를 찾았다. 그러나 그건 가연의 실수였다.

세르미네의 마음이 쩍, 하고 갈라졌다. 하필 이 순간 제일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을 가연의 입에서 듣게 되다니. 세르미네는 저도 모르게 노성을 토했다.

“그 남자는 왜 찾나!”

세르미네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 몰랐는지 가연은 놀라 딸꾹질을 했다. 하지만 히끅거리는 울음과 딸꾹질 소리 사이로 가연 또한 마주 외쳤다.

“혼자서는 무리에요! 둘이서 힘을 합치면 되잖아요!”

“네가 마이데와 한 대화를 내가 모를 줄 아는가? 뒤에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니 좋던가?!”

그러자 가연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그날 밤 나눴던 대화를 세르미네에게 들켰으니 움찔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 썩 유쾌한 이야기도 아니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가연 또한 할 말이 있었다.

“그걸 들었단 말이에요? 사실이잖아요! 왜 힘을 합치지 않고 혼자 무리를 하는 건데요!”

“네가 내 마음을 아는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두 번 과오를 범하지 않으려 하는 게 뭐가 나쁘지?”

더욱 매섭게 말을 이으려던 세르미네는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가연의 위로 이곳에서 가장 강한 거미 마족이 느리게 기어 내려오고 있었다.

“젠장,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세르미네는 가연에게 다가가려 애썼다. 아무리 불로불사의 아틀란티스 기사였지만,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늙지 않고, 죽지 않는 것뿐이었다. 치명상을 입거나 병에 걸리고, 독에 당하는 등 외부 요인에 의해선 얼마든지 생명에 위협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가연에게 다가가는 거미는 한눈에 봐도 매우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었다.

거미는 한 걸음, 한 걸음 가연에게 다가갔고, 가연도 거미 마족의 존재를 알아챘다. 그는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고, 세르미네의 마음은 급해졌다.

“안 돼!”

그때, 세르미네의 뒤편에서 검고 긴 그림자가 불쑥 뛰쳐나왔다. 마족은 아니었다. 그 그림자는 가연에게 달려드는 거미 마족을 향해 입을 쩍 벌리더니 이내 마족을 한입에 삼켜버렸다.

“뱀은 거미의 천적이지요. 모르고 있었나요, 세르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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