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산길 멀리서 점점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위기는 겨우 넘겼지만, 가연은 여전히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온 거지, 치르티티샤?”
그러자 이제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는 남자, 치르티티샤는 작게 웃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에 띈 그는, 가연의 주위를 맴돌며 거미 마족을 잡아먹던 뱀을 자신의 옆으로 불러들였다.
“걱정 마요. 이 뱀은 내 소환수니까. 당신은 기억이 없으니 겁에 질리는 것도 당연하죠.”
그는 가연을 향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가연은 아까보다 더욱 안색이 좋지 않았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뱀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가연의 상태가 걱정된 세르미네는 치르티티샤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환수 좀 집어넣어.”
세르미네는 가연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치르티티샤는 기억이 없다고 했지만, 오히려 잠든 리슈아의 기억이 어딘가에서 가연에게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흐음… 뭐, 좋아요. 이 정도면 됐겠지요.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잠시나마 시간이 생긴 덕분에 세르미네는 자신의 발을 묶고 있던 거미줄을 걷어낼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치르티티샤의 소환수 덕분에 마족의 수도 꽤 줄어들었다.
“저, 이것 좀 풀어주세요! 누구신진 몰라도, 세르미네 씨의 편이라면…”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데요.”
간신히 가연이 말을 쥐어짜 냈지만, 한발 물러서서는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던 치르티티샤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엔 목숨이 위험하니 구해준 거지만, 초대받지 않은 싸움에 나서는 취미는 없어요. 그리고….”
그는 세르미네를 한 번 흘긋 보고는 다시 가연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세르미네를 방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요.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니까요.”
여전히 냉정하군, 하고 세르미네는 혀를 찼다. 하지만 마이데처럼 쓸데없이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그는 검기로 단번에 승부를 보고자 마음먹었다. 이전에 가연과 처음 만났을 때 사용한 기술을 쓸 작정이었다.
하얗게 빛나는 대검의 검신에 용의 모습이 일렁였다.
전류처럼 빛의 잔재를 내뿜던 용이 완전히 검에 녹아들자, 세르미네는 검의 끝으로 목표를 가리켰다.
“빛의 수호룡이여, 내 앞을 가로막는 적을 섬멸하고 길을 열어라!”
주문 같은 말이 끝나자 하얀 용이 세르미네의 검에서 튀어나왔다.
용은 빛의 힘으로 가연의 발밑까지 포진해 있는 마족을 전부 불태웠다. 아까 전에는 마족의 수가 너무 많은 데다가 후를 생각해 힘을 아껴둬야 해서 쓸 수 없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법 숫자가 줄어 있어 차라리 일격을 가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길이 열리자 세르미네는 다시 마족이 모여들기 전에 달려가 가연이 묶여 있는 거대한 거미줄을 끊어냈다.
실이 풀린 목각인형처럼 가연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려 하자, 세르미네는 다가가 그를 안아 들었다.
등과 다리를 팔로 받쳐 가연을 안은 세르미네는 날개를 펴고 얼마 남지 않은 마족들 위를 날아갔다. 그가 향한 곳은 치르티티샤의 바로 옆이었다.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 이 녀석, 그래도 보기보다 강하니까 믿어도 될 거야.”
가연은 약간 불안한 얼굴로 치르티티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도 가연을 마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주어진 일이라면 마다할 이유는 없죠.”
세르미네는 치르티티샤가 다른 소환수인 전갈 두 마리를 불러내는 걸 확인했다. 그러나 새롭게 꺼낸 전갈 또한여전히 꺼림칙한 소환수였다.
하지만 실력은 확실한 데다 같은 편을 공격하지는 않았기에 세르미네는 그에게 가연을 맡기기로 했다.
세르미네는 다시 이쪽을 향해 몰려오는 마족을 마주하고 섰다. 검기에 실어 보낼 힘은 딱 한 번 쓸 수 있을 정도가 남아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가 다시 한번 쏘아 보낸 빛의 용은 거미 마족을 모두 꿰뚫고 마지막으로 두 그루의 나무를 불태운 뒤 사라졌다.
온 힘을 다 쓴 세르미네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가연에게 다가왔다.
“아, 저….”
가연은 우물쭈물하며 세르미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그렇게 언성을 높이고 싸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됐다. 신경 쓰지 마라. 그보다….”
세르미네는 괜히 가연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아 말을 돌렸다. 게다가 지금은 치르티티샤에게 할 말이 있었다.
“루아가 시켜서 온 건가?”
세르미네의 물음에 치르티티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꼭 그 무녀님의 지시가 있어야 움직이나요? 나는 내 의지로 온 거에요.”
“그렇군.”
세르미네는 치르티티샤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하나로 짧게 땋아 금색의 리본으로 고정한 검은 머리, 그리고 단정히 차려입은 투피스 세미 정장이 돋보이는 그는 그리 크지 않은 키와 가는 몸매의 소유자였다. 짙은 갈색 피부의 얼굴에 박힌 윤기 나는 까만 눈동자가 세르미네를 보다가 이내 가연의 방향으로 돌아갔다.
“왜 그렇게 쳐다보죠? 대단히 무례하다는 건 알고 있나요?”
치르티티샤가 조금 불쾌한 어조로 말하자, 가연은 시선을 돌리며 우물쭈물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 저도 사학과니까… 라틴 아메리카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가연은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한 말이었겠지만 오히려 치르티티샤의 화를 돋우고 말았다. 게다가 ‘역사’라는 단어가 입에서 나온 순간, 찰나였지만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사서 하면 화를 부를 수 있다는 걸 명심해요.”
“치르티티샤.”
가연이 당황하자 세르미네가 치르티티샤에게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치르티티샤는 몸을 홱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가며 세르미네에게 인사처럼 말을 남겼다.
“그 꼬마 도련님이나 잘 데려와요. 난 먼저 가 있을게요.”
정장 구두가 또각또각, 단단한 흙길을 밟는 소리가 났다. 점차 그 소리가 멀어지자 세르미네는 그제야 이상한 걸 눈치챘다.
“먼저 가 있는다고? 어디를?”
세르미네는 치르티티샤가 사라진 방향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이내 가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단 가연을 집에 데려가는 게 우선이었다. 긴 시간 추위 속에 묶여 있었던 가연이었다. 자칫하면 감기라도 걸릴 수 있었다.
“돌아가자.”
가연은 그 말에 시계를 보았다. 벌써 새벽 세 시였다.
문득 두 사람밖에 없는, 마족 시체가 널브러진 산이 몹시 무섭게 느껴졌다.
“이, 이 산을 내려가요?”
세르미네는 이 산의 산세가 험하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하는 수 없이 조금 회복된 힘을 쓰기로 한 그는 날개를 펴고 가연을 아까처럼 안아 들었다.
“으악! 놔, 놔줘요! 부끄럽다고요!”
마치 동화 속 공주님이 안기듯 세르미네의 품에 안긴 가연이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아까는 잘만 있더니, 왜 그러나.”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요! 이, 이 근처는 대학가라 새벽까지 사람이….”
“시끄럽다. 날아갈 거니 걱정하지 마라.”
하늘을 날아가는 것보다 사람들의 이목이 더욱 무서웠던 것인지 가연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세르미네도 지체해봐야 좋을 게 없었기에 빠른 속도로 그들의 집을 향했다.
이윽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현관에 착지한 그들은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늦은 시간에도 불이 환히 밝혀진 현관의 저편에 세르미네가 좀 전에 찾았던 경비실이 보였다.
“어? 이 시간에 제어실 문이 열려있네?”
“제어실? 저기는 경비실 아니었나? 경비원이 지키고 있던데.”
가연이 꺼낸 말에 세르미네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가연은 얼른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경비원이요? 그럴 리가요. 여기는 주상복합이에요. 그래서 사설 보안업체를 고용하고 있다고 그랬어요. 낮에야 감시 인력이 조금 있지만, 제가 나왔을 때면 이미 다들 퇴근하고 원격으로 제어하고 있다고요.”
가연의 말에 세르미네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가 본 두 명의 경비원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럼 분리수거장에서 너에게 말을 건 그 사람은 누구지?”
세르미네의 물음에 승강기의 버튼을 누른 가연이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와선 뒷산에 가면 제 노트를 찾을 수 있을 거라 했어요.”
“네가 노트를 찾고 있는 줄은 어떻게 알던가?”
“어, 그러게요?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그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스멀스멀 밀려오는 두려움에 입을 꾹 다문 두 사람은 조용히 도착한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의식적으로 거울을 피하는 가연의 옆에서 세르미네는 높아지는 층수 표시만 노려보았다.
다행히 집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익숙하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집 안의 불은 환히 밝혀져 있었다.
“마이데가 왔나?”
다시 올라오려는 공포를 억누르며 세르미네가 혼잣말을 했다. 그러나 그들을 반겨준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이제 오는 건가요?”
부엌의 의자에 앉아 식탁 위의 커피잔을 막 들어 올리던 치르티티샤가 그들을 맞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세르미네의 물음에 치르티티샤는 처음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마치 선언하듯 대답했다.
“그거야, 이제부터 내가 당신들과 같이 살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