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낸 치르티티샤와는 대조적으로, 세르미네는 소스라치게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너, 너까지 같이 살 거라고?”
“그래요.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세르미네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할 말을 찾아보려 했지만 타당한 이유를 댈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리슈아와 단둘이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마음과는 반대로 마이데가 같이 살면서 사사건건 방해하는 것도 넌더리가 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더해 치르티티샤까지 있으면 둘만의 시간 따위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이 속내를 말할 수는 없었다. 이미 큰 도움을 받은 뒤였기 때문이었다.
“그, 그렇지만 더 이상 방도 없는걸요. 어디서 묵으시려고요?”
가연의 물음에 치르티티샤는 작은 옷방을 가리켰다. 말이 좋아 옷방이지, 사실상 세 사람의 채 풀지 못한 짐들을 넣어둔 곳이었다. 짐들만 정리한다면 다소 작긴 해도 지내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저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렇긴 한데….”
가연은 세르미네를 올려다보았다.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것을 읽은 치르티티샤는 잔을 조용히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생각해봐요. 환영해줄 마음이 들면 다시 올 테니까.”
말을 남긴 치르티티샤는 마이데나 세르미네가 사용하는 순간이동 기술을 사용해 모습을 감췄다. 아마도 아틀란티스에 돌아간 것이라 세르미네는 짐작했다.
“저 사람은 누구예요? 아틀란티스라는 곳의 기사인가요?”
가연의 물음에 세르미네는 그제야 제대로 치르티티샤를 소개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대지의 기사 치르티티샤다.”
“대체 거기에는 기사가 몇 명이나 있는 거예요? 저번의 그 건방진… 아, 아니 이상한 남자애도 기사라면서요.”
가연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리레사아임에 틀림없었다. 세르미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말하는 사람은 불의 기사 리레시아. 기사는 총 여섯 명이다. 리슈아까지 합해서 말이야.”
“뭐에요. 생각보단 별로 없네요.”
가연의 말에 세르미네는 소파로 다가가 몸을 푹신한 쿠션에 맡겼다. 자연스레 가연이 옆에 와서 앉자 세르미네는 눈을 감고 옛 기억에 잠겼다.
“원래는 기사단이 존재할 만큼 기사의 수도 많았어. 거기에 더해 일반 주민들과 그들을 모두 통치하는 왕, 그리고 그 후계자까지…. 대륙이자 하나의 나라였지.”
“그런데 어쩌다 멸망한 거예요?”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어. 본래 무녀들이 설치한 결계로 보호하는 대륙 본토에 마족이 들어왔다. 그들은 일반 시민들을 인질로 잡고 기사들을 전부 무참히 죽였지. 그리고 끝내 모든 게 사라졌어. 왕도, 기사도, 시민들도…. 오로지 거기서 살아남은 건 나와 후계자였던 리슈아, 그리고 예비 무녀였던 루아뿐이다.”
세르미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처음 보는 그 표정에 가연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런 가연을 돌아보며 세르미네는 처음으로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너도 궁금한 게 많겠지. 기억이 없으니까.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 줄 테니 오늘은 가서 자라.”
하는 수 없이 가연은 방으로 돌아갔다. 세르미네를 몇 번이나 돌아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얼굴을 했지만, 세르미네는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그보다 세르미네에게는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다. 가연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마족의 기척이 뒷산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잔챙이가 더 남아있단 말인가? 이상하군. 왜 같이 공격해오지 않은 거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아직 힘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최소한 힘의 반이라도 돌아오고 난 뒤 출발하고자 세르미네는 소파에 앉아 선잠을 청했다.
*
두어 시간 후, 세르미네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번쩍 떴다. 지독한 악몽에 시달린 탓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또 그 꿈인가….’
가연에게 과거 이야기를 들려준 탓에 다시금 옛날의 아픈 기억이 꿈으로 나타난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지, 하고 세르미네는 얼른 꿈에 대해 잊어보려 했다.
다행히 힘은 절반보다 더욱 많이 돌아와 있었다. 예상보다 좋은 성과에 세르미네는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마족의 기척이 느껴져.’
마이데는 어디를 갔는지 아직도 집에 오지 않았고, 가연의 방은 불이 어둡게 꺼져 있었다.
세르미네는 가연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소리를 내지 않으며 집을 나섰다.
초겨울의 이른 아침은 한밤중만큼이나 어두웠다. 쌀쌀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세르미네는 최대한 인적 드문 길을 골라 산을 올랐다.
날개를 펴면 자칫 흔적을 놓칠 수도 있겠다 싶어 그는 조금 느리지만 발로 걷는 방법을 택했다.
가연이 묶여 있었던 산꼭대기에는 마족의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부식액으로 얼룩덜룩 검게 변한 땅을 밟으며 세르미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냐. 나와라!”
그러나 세르미네의 외침만 허공을 맴돌 뿐 적은 당장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한 번 더 외쳐보려는 순간,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거기냐?”
세르미네는 거칠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건 마족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가연이 숨어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 저, 저기! 그게….”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나!”
아마도 방금 소리는 가연이 낙엽을 잘못 밟아 낸 소리일 거라 세르미네는 짐작했다.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던 가연은 모습을 들키자 허둥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가 변명조차 하지 못하자 세르미네는 한숨을 쉬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보다도 어두운 산속에서 용케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따라온 것이 대단했다.
“그래. 이미 온 걸 어쩌겠나. 거기 가만히 있어라.”
가연에게 신신당부를 한 세르미네는 다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검기에 다 타서 밑동만 남은 나무에 이상한 안개가 서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개라는 표현이 제일 적당하긴 했지만, 완전히 기체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눅눅하고 끈적이는 액체와도 닮은 느낌이었다.
세르미네는 잠시 망설였다. 분명 함정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조사를 위해 손끝을 가져다 대 보았다.
“이런…!”
세르미네의 예상이 적중했다. 마족이 설치해 놓은 결계였다.
안개에 손이 닿자마자 갑자기 공간이 쭉 세로로 찢어졌다. 검은 내부 속에서 세르미네의 손을 무언가 붙잡더니 안으로 쑥 끌고 들어가려 했다.
“세르미네 씨!”
놀란 가연이 나무 뒤에서 뛰어와 세르미네의 다른 한 손을 잡았다.
“저리 가! 위험해!”
세르미네는 황급히 외치며 가연이 잡은 손을 탁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찢어진 틈 사이로 세르미네를 삼킨 검은 공간은 가연까지도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세르미네 씨. 여긴 대체 어디죠?”
사방이 온통 깜깜했다. 신기하게 자신과 세르미네의 모습만 환하게 보이자 가연은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정신 계열 마족의 결계군.”
“정신 계열 마족이라면 예전 제집에 나왔던 그 뱀 같은 사람인가요?”
“정확히 말하면 가장 두려운 기억이나 내면에 잠재해 있는 공포를 보여주는 거지. 두려워하는 실체는 아니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이용해 적을 약화하는 거야.”
정신 계열 마족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세르미네는 자연스레 마음의 준비를 했다.
자신의 기억에서 찾을 수 있는 약점이라면 두 가지였다. 리슈아, 그리고 멸망하는 아틀란티스 대륙이었다.
“젠장. 정신 계열 마족을 느끼자마자 감지할 수 있는 건 폴라로이아와 루아뿐이란 말이야. 눈앞에 닥치고 나서야 정체를 깨달으니 무슨 소용인지.”
“폴라로이아라는 사람도 기사예요?”
“그래. 전투 능력은 거의 없지만 정신 계열 마족을 찾아내거나 상대하는 일, 그리고 루아와 함께 이 별을 감시하고 마족의 침입을 찾아내는 역할을 하지.”
“그럼 그 사람을 데려오면 되잖아요!”
“안 돼. 이미 늦었어.”
세르미네의 말 대로였다. 갑자기 귓가가 아닌 온몸으로 전해 듣는 듯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세르미네.]
“네가 날 불렀나?”
세르미네의 물음에 가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 또한 목소리를 들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뇨. 저는 아니에요. 누구죠?”
[세르미네, 세르미네!]
조금 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확실히 가연은 아니었다. 이 목소리는 그를 ‘세르미네 씨’라고 부르지도 않았을뿐더러, 가연은 이렇게 세르미네를 다정하게 부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한 사람뿐이었다.
어둠 저편에서 발소리가 탓탓, 하고 들렸다. 누군가 뛰어오고 있었다.
“설마, 설마…!”
예상은 했지만, 두려움과 아주 조금 기대감이 앞섰다.
이 보폭, 부츠가 부딪히는 소리. 그 어느 것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세르미네의 예상대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 달려오는 건,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
그의 기억 속 그대로의 리슈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