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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14화 (14/87)

14화

“리슈아. 리슈아….”

분명 가짜라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결심한 게 몇 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저 모습을 보고 어떻게 부정의 말을 내뱉겠는가.

적어도 세르미네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세르미네. 보고 싶었어!”

리슈아는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보라색의 짧은 재킷, 그 안에 입은 검고 딱 달라붙는 상의, 그리고 허벅지가 독특하게 뚫려있는 하얀 바지와 보라색 부츠까지 모두 기억 속 그대로였다. 얼굴 생김새나 눈동자의 색 등은 가연과 똑같았다. 리슈아의 환생이니 당연했다.

“세르미네 씨. 저, 저 사람 누구예요? 왜 저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옆에서 가연이 당황하며 주춤 뒤로 물러섰지만 세르미네는 거기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가짜라도 좋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기억 속의 리슈아가 지금 눈앞에 서서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만이 세르미네에게는 중요했다.

“리슈아. 나도 보고 싶었다.”

세르미네는 한 걸음씩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두 팔을 벌리고 언제든 눈앞의 존재를 안을 태세였다.

“세르미네 씨! 그, 그 사람 이상하지 않아요? 가지 말아요!”

가연이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세르미네는 결국 리슈아로 보이는 그 존재를 끌어안았다.

체온도 똑같았다. 이렇게 따뜻한데, 촉감도 생생한데 어찌 가짜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세르미네는 이제 그가 리슈아라고 확신했다.

“세르미네. 보고 싶었어.”

“그래. 나도다. 이렇게 왔으니 됐어. 이젠 내가 지켜줄게.”

“세르미네. 보고 싶었어.”

“그래.”

“세르미네. 보고 싶었어.”

“리슈아?”

자신에게 안긴 이 리슈아는 오로지 같은 말만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생전의 그 밝은 미소를 띤 채로, 세르미네의 품에 안긴 채로.

그제야 세르미네도 이상함을 눈치챘다.

“세르미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세르미네. 어째서 나를….”

리슈아를 닮은 자의 목소리가 마치 늘어진 테이프처럼 변했다. 소름 끼치는 그 소리에 가연은 주저앉아 귀를 막았고, 세르미네도 안고 있던 존재를 놓으려 했다.

“세르미네, 가지 마. 또 나를 버리고 가려는 거야?”

세르미네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리슈아의 몸이 녹고 있었다. 얼굴이, 몸이, 손이, 발이 전부 자신의 품에서 녹아 바닥에 주르륵 흘렀다. 턱이 녹아내리는 상황에서도 양 입 끝을 올려 기괴하게 웃는 그 존재의 두 눈은 툭 튀어나온 채 세르미네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한 마디만 남은 손가락으로 세르미네의 얼굴을 만졌다. 피와 살과 어둠이 뒤섞여 세르미네의 뺨을 할퀴자 옆에서 가연이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검은 어둠이었던 주변에 풍경이 하나둘 생겨났다.

“아, 안 돼. 리슈아, 리슈아!”

세르미네는 자신의 품에서 사라진 리슈아를 애타게 찾았다. 주변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가연이 세 번쯤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난 뒤였다.

“세르미네 씨! 정신 차려요! 대체 여기가 어디예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은 세르미네는 간신히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하얀 성, 불타는 하늘,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기사들. 이 장면은 옛날에도 본 적이 있었다.

“고대 아틀란티스 대륙….”

“네? 진짜요? 아니, 그보다 세르미네 씨, 저기! 하늘에!”

가연이 검은 먹구름이 낀 붉은 하늘을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서는 마족과 기사들의 싸움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검게 변한 태양에서 불꽃이 튀는가 싶더니 가연과 세르미네가 서 있는 곳을 향해 한 마리의 마족이 추락했다.

“피해요!”

그러나 가연의 다급한 외침에도 세르미네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조금 전 리슈아로 인한 충격이 그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가연은 우왕좌왕 뛰어다니다 이내 세르미네의 뒤에 숨었다. 다행히 그들의 머리 위로 마족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붉은 사자와도 같은 모습의, 하지만 매끄러운 피부와 곤봉이 달린 꼬리를 가진 그 마족은 두 사람으로부터 채 몇십 걸음도 안 되는 곳에 툭, 떨어졌다.

마족이 떨어지며 상당한 충격파가 일어났지만 세르미네와 가연에게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환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위 마족 엘트로눔 사망 확인!”

세르미네의 옆에서 한 기사가 큰 소리로 위치며 어디론가 뛰어갔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모습을 쫒아 가니 그곳에는 잊을 수 없는, 품격 있는 금빛 갑옷을 걸친 노인이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왕이시여! 어서 피하십시오! 이곳은 위험합니다!”

또 다른 기사가 다가오며 금빛 갑옷의 노인에게 청했다. 가연은 그 모습을 보더니 이번엔 세르미네를 돌아보며 입을 떡 벌렸다.

노인에게 말을 거는 건 다름 아닌 하얀 갑옷을 입은 세르미네였다.

“자네는 정예 기사 세르미네였지. 내가 피하면 이 대륙이 어떻게 되겠나. 왕이기 이전에 나 또한 아틀란티스를 수호하는 자일세.”

“하지만…!”

“그보다 자네에게는 부탁이 있네.”

세르미네는 과거의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펼쳐지는 이 장면은 역시 그의 악몽 중 하나였다.

대륙이 멸망하던 날.

“후계자, 리슈아를 동쪽 탑으로 데려가게. 그리고 그 아이를 지켜주게나. 탑에는 예비 무녀가 기다리고 있을 걸세.”

“안 됩니다. 왕께서 위험에 처하셨는데 제가 어찌….”

“명령일세, 세르미네.”

명령이라는 말에 과거의 세르미네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하는 수 없이 단념해야 했다. 그는 동쪽으로 달려갔고, 그 모습이 사라지자 주변의 풍경도 바뀌었다.

재만 남은 성과 숲, 그리고 하얗게 변한 채 깨진 결계가 언뜻 보이는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 살아남은 건 나와 리슈아, 그리고 루아뿐이었지. 결국 나도 도망친 거야.”

독백처럼 세르미네가 내뱉자 가연이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쳤다니, 무슨 말이에요! 저 할아버지가 명령한 거잖아요! 그리고 리슈아 씨를 지킨 거잖아요!”

“아니야. 나는 리슈아조차 지키지 못했어.”

“그게 무슨….”

가연이 다시 한번 반박하려는 찰나에 또다시 주변이 검은 어둠 속에 빠졌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다음에 무엇이 나올지, 무엇이 자신을 절망에 빠뜨릴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보이는 회색 그림자. 차츰 뚜렷해지는 그 형상은 윤곽만 봐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꿈에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세르미네의 원수였다.

“듀믈레….”

가연도 그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이전의 자취방에서 가위에 눌릴 때마다 본 뱀을 닮은 남자. 그 남자가 서서 리슈아를 잡아먹고 있었다.

“저, 저게 대체 무슨….”

입을 틀어막으며 가연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초점 풀린 눈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작전을 제대로 세웠더라면… 저 녀석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았을 텐데….”

“세르미네 씨?”

“리슈아는 나 때문에 죽었어. 내가, 내가 잘못된 작전을 세워서… 모든 게 나 때문이야….”

세르미네는 결국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더는 볼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자신을 괴롭힐 마음의 상처가 무언지 알고, 대비를 하려 했다 해도 실제로 눈앞에 닥치니 아무 소용이 없었다. 상처는 지나치게 깊었고, 아직도 세르미네의 마음에서 아물지 못했다.

하지만 가연은 기억이 없는 데다 세르미네 본인이 아니었다. 가연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예요. 저 남자가 리슈아 씨를 죽인 거잖아요! 세르미네 씨, 정신 차려요!”

오늘 이 녀석에게 정신 차리란 말을 몇 번 듣는 건지, 세르미네는 그리 생각하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지만 뒤이어 가연의 비명이 들리자, 그도 손에 묻은 얼굴을 들고 앞을 보았다. 여전히 뿌옇게 변한 시야였지만, 세르미네도 위험을 감지했다.

“세르미네 씨. 마족이…!”

듀믈레의 뒤에서 검고 커다란 몸집을 가진 마족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지난밤에도 본 거미 마족 중 한 마리였다. 아마 이놈이 우두머리인 듯 몸집이 남다르게 컸다.

마치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환상임을 몸소 증명하듯 뱀 마족이 앞에 버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미 마족은 가차 없이 전진했다.

이윽고 자신의 둥근 몸통으로 환상을 모두 부순 거미 마족은 앞다리를 높이 지켜들었다. 날이 붙은 긴 다리로 노리는 건 다름 아닌 가연이었다.

“악!”

얼굴이 파랗게 질린 가연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세르미네의 뒤로 숨지 않았다.

어쩐지 이제 더 이상 가연이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것 같아 세르미네는 마음이 더욱 아팠다.

하지만 가연이 무방비라는 사실에 변함은 없었다. 그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그때의 잘못을 또다시 되풀이할 수는 없어!’

세르미네는 검을 불러내 손에 쥐고는 가연의 앞에 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미의 앞다리가 세르미네의 앞을 긋고 지나갔다.

검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세르미네 씨, 세르미네 씨!”

울먹임 섞인 목소리로 가연이 세르미네를 초조하게 불렀다. 그의 몸이 서서히 뒤로 쓰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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