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한밤 동안 내내 상처가 아파 끙끙 앓다 겨우 잠든 세르미네는 다음 날 가연의 감탄 섞인 큰 소리에 눈을 떴다.
“우와. 이게 다 뭐에요?”
보아하니 부엌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리고 뒤이어 치르티티샤의 말이 들려왔다.
“뭐긴요. 당신들 아침 식사죠. 자, 이거나 세르미네에게 가져다줘요.”
아직 그의 방은 어두웠지만 문틈 사이로는 부엌의 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아직 다섯 시 반. 이 계절이면 해도 뜨지 않을 시간이었다.
세르미네 또한 철저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했기에 곧 눈을 떴겠지만, 상처 탓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그였다. 그나마 조금 통증이 가라앉아 눈을 붙이려는 중이었으니, 이 휴식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뭘 또 가져오려고?’
귀찮음을 예견한 세르미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가연이 문을 열고 가져온 건 다름 아닌 잘 끓인 전복죽이었다.
“세르미네 씨! 이거 봐요! 치르티티샤 씨가 만든 거래요!”
어째서인지 신나 있는 가연이 내민 그릇을 세르미네는 받아들었다. 냄새를 맡아 보니 꽤 그럴싸했다.
“이런 건 보통 비싸지 않나?”
“그러니까 대형 마트의 폐점 시간을 노리는 거죠. 지하에 마트라니, 이런 좋은 입지 조건을 왜 못 살리는 거죠?”
앞치마를 하고 한 손에는 국자를 든 치르티티샤가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마이데가 급히 어딘가로 나갔다는 걸 세르미네는 기억해냈다. 분명 치르티티샤의 심부름이었을 것이다.
“아직 거동이 힘든 거라면 제가 먹여드릴게요.”
가연은 침대 모서리, 세르미네의 옆에 걸터앉아서 예쁜 꽃무늬 그릇에 담긴 죽을 한 숟갈 떴다.
“아, 아니 손은 쓸 수 있다만….”
절로 올라오는 부끄러움에 세르미네는 말끝을 흐렸지만, 사실 싫지 않았다. 그는 예의상 한 번 거절해보고는 가연이 떠 준 죽을 냉큼 받아먹었다. 죽은 설마 맛까지 있겠나, 싶었지만 예상외로 상당히 맛있었다.
“리슈아 네가 먹여주니 제법 먹을 만하군.”
시중에서 파는 인스턴트의 맛이 아니었다. 놀람과 만족감을 섞어 세르미네가 칭찬하자, 가연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무, 무슨 소리예요!”
“끓인 사람은 여기 있는데, 칭찬받는 사람은 따로 있네요.”
치르티티샤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전복 손질부터 쌀을 불려 끓이는 것까지 전부 제가 했어요. 그 정도는 기본이죠.”
“그래. 기본도 안 되어서 미안하다….”
세르미네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치르티티샤는 못 들은 척했다.
“다 먹으면 그릇은 옆에 놔요. 가지러 올 테니까. 가연 씨, 당신은 나와서 밥 먹고 세르미네 간호를 하는 게 어떨까요?”
치르티티샤는 말을 남기고는 마이데를 깨우러 몸을 돌렸다. 그의 뒤를 따라 가연이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섰고, 겨우 조용해진 자신의 방에서 세르미네는 얌전히 죽을 떠먹었다.
‘기분이 이상하군.’
어쩐지 그런 생각이 퐁 떠올랐다 사라졌다.
*
꿈이었다. 꿈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세르미네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리슈아가 죽던 날이었다. 정신계 마족이 보여준 것과 똑같은 풍경이 눈앞에 보였다.
저 고성 안에 리슈아가 들어가고, 그리고는 곧….
세르미네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구하러 가야 했지만, 중력에 묶인 것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이어 귓가를 날카롭게 찌르는 비명이 들리고, 세르미네는 눈을 떴다.
“헉. 여, 여긴…!”
“세르미네 씨. 괜찮아요?”
세르미네가 고개를 홱 돌리자 물수건을 들고 엉거주춤 서 있는 가연이 눈에 들어왔다.
“리슈아. 무사한가?”
“네? 네. 저야 괜찮아요. 치르티티샤 씨가 청소를 한다기에 여기로 쫓겨났지만….”
그렇군, 하고 세르미네는 납득했다. 그와 동시에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그의 감각은 차츰 현실로 돌아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아, 이거요? 청소기 소리예요. 치르티티샤 씨가 청소기를 돌리나 봐요.”
“청소기?”
세르미네는 거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궁금했다. 문득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소등했음에도 방 안은 환했고, 그는 자신이 상당히 오래 잤음을 알았다.
세르미네는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상처도 아직 아팠지만 지나치게 누워있던 탓에 온몸이 뻐근했다. 그런 그를 가연이 부축해 방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이, 이건….”
거실로 나온 세르미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자신이 애써 청소하려 해도 수포로 돌아갔건만, 치르티티샤가 청소기를 돌리는 거실은 그야말로 새집 그 자체였다.
물 자국에 먼지투성이라 실내용 슬리퍼를 신어야 했던 바닥은 반들반들 윤이 났다. 환기를 시켜 먼지를 뺀 거실의 가구와 잡기들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거기에 더해 드레스룸에 멋대로 쌓아둔 짐은 각각 제 자리를 찾았으니 세르미네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걸 네가 다 했나?”
“그럼 나 말고 누가 하겠어요? 마이데는 심부름을 보냈고, 가연 씨는 당신 간호에 붙여줬으니 집안일은 내가 해야죠.”
세르미네도 치르티티샤의 이런 면모는 처음이었다. 아틀란티스의 잡일은 전부 정령이 맡아 하고 있었고, 기사들은 워낙 전투에 바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 소파 치워놨으니 적당히 앉아있든 누워있든 해요. 자신이 환자라는 걸 잊지 말아요.”
세르미네는 먼지 한 톨 없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가연이 그 옆으로 다가와 앉자 세르미네는 그를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리슈아. 시험공부는 안 해도 되나?”
애초에 지난밤의 사건들은 자신이 버린 노트가 원인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미안함이 올라와 세르미네는 가연에게 물었고, 가연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시험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절 구하려다 다치신 분을 어떻게 그냥 내버려 둬요.”
“그, 그래. 고맙다. 그럼 가서 뜨거운 차라도 한 잔 주겠나?”
“차 말이죠. 알았어요!”
드디어 할 일이 생겨 기쁜 것인지 가연은 얼른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쭉 지켜보던 치르티티샤는 세르미네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좋을 텐데요?”
“네가 알 바 아니야.”
세르미네는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가연이 페퍼민트 차가 담긴 머그컵을 가져왔고, 가연의 수준급 솜씨로 우려낸 차는 상당히 달콤했다.
*
그 후로 이틀이 지나자 그들의 생활은 안정 궤도에 접어들었다. 깨끗한 집과 양질의 식사를 갖추니 그 누구도 생활에 불만이 없었고, 치르티티샤와의 동거를 진심으로 반기는 분위기였다. 은연중에 경계심을 내비치던 마이데도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치르티티샤를 대했다.
세르미네의 상처도 순조롭게 나아 이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겁고 복잡했기에 그는 내킬 때마다 옥상정원으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휴우….”
이제는 상당히 찬 공기 탓에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모락모락 새어 나왔다. 넓은 옥상정원에는 추위 때문에 사람이 없었고, 덕분에 그곳은 이틀 동안 가연과 세르미네가 전세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추우세요? 역시 담요라도 가져오는 편이 나았을까요?”
한 손에 공부할 노트를 든 가연이 세르미네를 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찬 공기를 쐬니 머리가 식는 게 차라리 잘됐어.”
“그렇군요.”
그들은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낮은 나무를 심어둔 화단 앞 벤치에 앉았다. 겨울이 다가온 시기라 그런지 화단의 식물들은 마른 가지가 앙상했다.
가연은 자신의 학교가 내려다보이는 그곳에서 노트를 펼쳐 들고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세르미네는 그런 가연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리슈아도 이렇게 내 옆에서 책을 읽곤 했지.’
추억이 떠오르자마자 세르미네의 머릿속에 이어진 것은 요즘 꾸고 있는 꿈이었다. 정신계 마족에게 당한 이후로 그는 내내 같은 꿈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실 그 때문에 괴로워서라도 가연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를 볼 때마다 되살아나는 마음의 상처는 몸의 상처보다 더욱 감당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서 사라지면 또 보고 싶어지니, 세르미네는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응?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가연을 바라보는 표정에 그런 혼란이 드러난 모양이었다. 다행히 눈치 없는 가연은 세르미네가 고뇌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 아니다. 그래, 시험공부는 잘 되어가나?”
세르미네가 화제를 돌리자 가연은 노트를 탁 덮더니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이래 봬도 강의 시간에 졸지 않고 잘 듣는다고요.”
“그래. 장하다.”
세르미네는 가연에게서 시선을 떼고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푸른 초겨울 하늘 아래 펼쳐진 이 나라에서도 제일가는 번화가가 펼쳐져 있었다.
“저기, 세르미네 씨….”
가연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세르미네를 불렀다. 그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가연에게로 시선을 옮겼고, 가연 나름대로 결의에 찬 표정을 보았다.
“왜 그러나? 할 말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해 봐.”
그러나 세르미네의 말에도 가연은 우물쭈물할 뿐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세르미네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뒤이어 가연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세르미네는 적지 않게 놀랐다.
“저 기억을 찾고 싶어요! 아틀란티스에 대해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