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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20화 (20/87)

20화

“무슨 생각이냐고? 그건 왜 묻지?”

세르미네는 기댔던 몸을 바로 하고 앉았다. 그에 맞추어 마이데도 꼬았던 다리를 풀고 그를 향해 몸을 굽혔다.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져 있었다.

“가연이를 전투에 투입하지 않겠다면서, 어째 쓸데없는 옛날이야기에 성의를 들이니 무슨 영문인가 싶었지.”

“기억을 찾기 위해서 옛일에 대해 알려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알려주기만 하고, 네 품속에는 숨기고 싶다 이거지?”

“너…!”

세르미네는 화가 나 하마터면 책을 집어던질 뻔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이성을 잡았다. 마이데가 자신에게 그다지 호감이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날이 선 언행을 하는 건 드물었다.

“세르미네. 아까부터 리슈아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는 해주면서 가장 중요한, 각성에 필요한 핵심 기억들은 이야기해주지 않았어. 물론 시간이 없었다곤 해도… 정말 기억을 찾길 바라는 거야?”

세르미네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은연중에 자신은 리슈아에게 상처가 될 기억을 배제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마이데는 여과 없이 눈치채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일 터였다.

“리슈아는 어린애가 아냐. 네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를 한 사람의 기사로 존중해줘.”

“하지만 굳이 지금 그가 죽었을 때를 세세하게 알려줄 필요도 없지 않나?”

“어차피 언젠간 알게 될 거, 네 입으로 말하는 게 두려운 것뿐이잖아. 안 그래, 겁쟁이 세르미네 씨?”

“시비 걸 거면 나가고, 아니면 할 말을 똑바로 해.”

세르미네가 인상을 찌푸리자 마이데는 굽혔던 몸을 바로 펴고 쭉 기지개를 켰다.

“별거 아냐. 네가 가연이에게 과거를 알려주기에 난 또 실전에 대해서도 알려주려나 싶었지. 하지만 네 모습을 보니 그건 한참 멀었군.”

“그 녀석은 아직 일러. 마족 앞에서 당황해 아무것도 못 하던 것을 너도 봤지 않나.”

“하지만 알려주면 또 다르지. 전력은 하나라도 부족해. 우리가 언제나 완벽하게 지켜줄 수는 없고 말이야.”

세르미네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잘 생각해 봐. 네가 그렇게 머리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마이데는 몸을 돌려 거실로 나가버렸다. 세르미네는 그 등을 가만히 노려보다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

그날 오후부터 맑은 하늘에 구름이 끼나 싶더니, 저녁이 되자 비가 제법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세르미네는 거실 소파에 앉아 치르티티샤와 가연이 빨래를 걷어 개는 걸 쭉 지켜보았다.

그의 머릿속엔 마이데가 남긴 말이 떠나갈 줄 모르고 맴돌았다. 세르미네는 인상을 찌푸렸다 펴기를 반복하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자신은 나아가길 두려워하고 있었다. 가연이 리슈아로 각성해주길 바라는 것도 전력이 필요해서가 아닌, 리슈아가 자신을 사랑했던 마음을 떠올려주길 바라는 것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픈 기억을 굳이 떠올려 마음의 상처가 되느니, 차라리 그 부분만 도려내면….’

‘아니야. 리슈아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어쩌면 괜찮을지도 몰라.’

서로 다른 생각이 우위를 번갈아 점했다. 세르미네는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밀물의 바닷물이 들어오듯 어떤 생각이 불쑥 그의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네가 언제까지 리슈아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네 몸을 날려 지키는 것도 한계가 있어.’

그와 동시에 자신의 무력함이 온몸을 지배했다. 세르미네는 순간 강하게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정말?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생각이 아니었다. 누군가 말을 걸고 있었다. 그것도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은, 마음에서 말을 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누구냐!’

세르미네는 그리 마음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영문을 모를 말만이 들려왔다.

-회색의 순례자 여행을 하네. 어두운 밤의 바다를 건너, 종을 들고. 짤랑, 짤랑….

“누구냐, 너는!”

이번에는 목소리가 되어 세르미네의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냐고요? 무슨 소리예요. 아직도 상처가 아파요?”

다름 아닌 치르티티샤였다. 그는 손에 가득 잘 개킨 빨래를 든 채 세르미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치르티티샤? 너도 방금 그 목소리를 들었나?”

“잠이라도 들었어요? 들리는 거라곤 켜놓은 클래식 음악 소리뿐이에요. 정신 차리고 당신 빨래나 가져가요.”

치르티티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들고 있던 빨래를 넘겨주었다. 세르미네가 주위를 둘러보니 치르티티샤의 뒤에서 가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들리는 거라곤 음악 소리뿐이었다. 텔레비전 방송 대신 켜놓은 오디오의 음악 소리, 비탈리의 샤콘느를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역시나 조금 전의 목소리는 그가 생각에 골몰하다 깜빡 잠이 들어 꾼 꿈인 모양이었다. 세르미네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차라리 움직이자 싶어 빨래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가 옷장 안에 차곡차곡 넣어놓았다.

“세르미네 씨, 정말 괜찮아요?”

뒤따라온 가연이 세르미네의 등에 대고 조용히 물었다. 세르미네는 몸을 일으키고 가연을 향해 돌아서서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마치 옛날 리슈아에게 했던 것처럼, 그때와 똑같았다.

“괜찮다. 걱정하지 마.”

하지만 가연의 얼굴에서는 걱정이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세르미네는 방 한 쪽에 놓인 푹신한 소파에 그를 앉히고, 자신은 나무 의자를 하나 가지고 와 그 옆에 앉았다.

“네가 못 믿는 걸 보니 하는 수 없지. 내일부터는 마족 퇴치라도 재개해야겠어.”

그러면서 세르미네는 옷을 들어 상처가 있던 자리를 보여주었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몇 달은 걸려야 다 나을 중상이었지만, 그는 아틀란티스의 기사였다. 인간보다 월등한 회복력을 가진 몸은 단 며칠 만에 상처를 깨끗이 낫게 했다.

“세르미네 씨. 왜 그렇게 마족을 물리쳐야만 해요?”

가연은 세르미네가 안쓰러웠는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세르미네는 아무렇지 않게 나온 질문에 적잖이 놀랐다.

리슈아 또한 그런 질문을 자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자신이 들려준 대답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별이 멸망하기 때문이야.”

“꼭 그러리란 법은 없지 않아요? 그들도 뭔가 사정이 있을 수도….”

“처음엔 아틀란티스였다. 두 번째는 지구가 될 거야. 막지 못하면 멸망뿐이야.”

세르미네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프더라도 알아야 할 진실이 있는 법이었다. 그것을 제 기억을 들춰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는 것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아까 전에 내부의 배신자로 인해 아틀란티스가 멸망했다는 이야기를 했지? 그 말대로다.

너도 봐서 알겠지만 마족은 저마다 급이 있어. 우리는 하급, 중급, 고위 마족으로 나누지. 그중 고위 마족은 스스로 생각하고 말을 하며 움직일 수 있다. 개체 수는 드물지만, 그 녀석들에게 걸리면 몹시 까다로워.”

“그럼 그 고위 마족과 내부 사람이 결탁이라도 한 건가요?”

“그래. 아틀란티스는 마족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있었고, 기사가 아닌 일반 백성들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이어갔지. 그게 의미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나?”

세르미네의 물음에 가연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르미네 씨는 아틀란티스 사람들이 불로불사의 삶이라 하셨죠. 영원히 평화로운 삶을 산다면… 권태에 빠진 자들이 나올 수 있겠네요.”

“그래, 그거다. 게다가 왕마저 불로불사라면 어떻겠는가. 자연스레 아래에서 불만이 속출할 수밖에 없어.”

“역사에서도 그런 게 있어요. 폭군이면 민심이 돌아서지만, 성군이면 사람들은 태평성대를 당연한 줄 알아요. 누리는 것에 대한 감사를 모르면 자연스레 불만이 나오고, 오만에 젖은 자신 스스로가 세상을 지배하려 들죠.”

“잘 아는군.”

세르미네가 모처럼 칭찬하자 가연은 헤헤, 하고 웃었다.

“아틀란티스도 그 수순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만한 정예 기사들은 자신이 폐하보다 더욱 잘 할 수 있을 거라 믿기 시작했고, 결국 실행에 옮긴 자가 있었어.”

세르미네는 이야기를 잇다 말고 이를 으득, 깨물었다. 아직도 그날의 분이 풀리지 않은 세르미네였다.

가연은 불안한 눈초리로 세르미네와 눈을 마주하며 천천히 물었다.

“그, 그게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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