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겁낼 것 없다. 나도 옆에서 같이 뛰어주겠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열 바퀴라니, 불가능해요!”
가연이 필사적으로 항의했지만, 세르미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기사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바로 기초 체력이다. 이 조그만 공원 열 바퀴 정도는 시작에 불과해.”
“여, 여기가 작아요? 열 바퀴 뛰면 족히 10km는 될 텐데요!”
“인간들은 마라톤도 하지 않나. 자, 가자.”
더는 가연의 말을 들어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세르미네는 앞장서 달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 틈에 도망이라도 가면 좋으련만, 가연은 그런 성격이 되지 못했다. 결국 울상을 지으며 가연도 세르미네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세르미네는 가연이 뒤따라오는지 이따금씩 돌아보며 천천히 공원을 달렸다. 그 역시 부상 때문에 근 며칠 누워만 있느라 좀이 쑤시던 참이었다.
‘아틀란티스 밖에서 이렇게 단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군.’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달리던 세르미네는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가연이 그를 추월해 앞으로 쭉 달려 나갔다.
“리슈아, 그렇게 막무가내로 달리면 안 된다!”
세르미네는 당황해 큰 소리로 경고했지만, 가연은 그런 세르미네를 돌아보며 혀를 쏙 내밀었다.
“그렇게 느리게 돌아서 언제 열 바퀴를 돌아요! 빨리 해치우고 돌아갈 거예요!”
“저 바보가…!”
세르미네는 기가 찼다. 하지만 굳이 가연의 실수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저 가르칠 게 산더미라는 생각뿐이었다.
‘스스로 직접 터득하는 편이 좋겠지.’
그는 페이스를 늦추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한 속도로 천천히 달릴 뿐이었다.
가연은 그를 앞질러 가더니 다시 세르미네에게로 돌아왔다. 자신은 벌써 두 바퀴째라며 자랑하던 가연은 그러나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공원 벤치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헉, 헉… 진짜, 못 하겠어요….”
“그러게 누가 그리 빨리 달리라고 했나. 네 발이 빠른 건 알겠다만, 마족과의 싸움에선 한 수 앞을 읽고 자신의 호흡을 조절하는 게 필수다.”
입으로는 가연을 혼냈지만 세르미네는 얼른 가방에서 이온 음료가 담긴 수통을 꺼내 가연에게 건넸다. 가연은 고맙다고 작게 인사하고는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고, 세르미네는 또다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음료를 들이켜면 안 된다. 천천히 마셔.”
“세르미네 씨, 잔소리가 너무 심해요.”
다시 수통을 건네준 가연이 볼을 부풀리며 토라진 목소리를 냈다. 세르미네는 흥, 하고 작게 코웃음 치고는 이번엔 자신이 음료를 마셨다. 오랜만의 운동으로 갈증이 났던 참이었다.
“세, 세르미네 씨. 그거 방금 제가 입을 대고 마신 건데…”
그 모습을 본 가연이 허둥대며 세르미네를 말렸지만, 그는 반쯤 빈 수통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으며 되물었다.
“뭔가 문제가 있나?”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연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세르미네는 순간 자신이 뭔가 실수했나 싶었지만, 잘 생각해봐도 딱히 그런 점은 없었다.
“몸이 안 좋으면 말을 해. 자신의 상태를 모르고 무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세르미네 씨는 정말 바보예요!”
가연은 벌떡 일어서서 다시 공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세르미네는 그저 가연이 괜찮아 보여 다행이라 생각하고는 그의 옆에서 보조를 맞춰나갔다.
해가 서서히 떠오를 무렵이 되어서야 간신히 그들은 목표했던 거리를 달릴 수 있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벤치에 또다시 널브러진 가연은 그야말로 땀으로 샤워를 한 모양새였다. 세르미네는 또 무슨 소리를 들을까 싶어 손수건 하나만 건네고는 제법 늘어난 공원 안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걸 매일 하라니, 절대 못 해요. 못한다고요.”
정신을 차린 가연이 몰아쉬는 숨 사이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세르미네는 그걸 듣고는 무심하게 한마디 툭 대답할 뿐이었다.
“할 수 있다.”
세르미네 딴에는 어젯밤 훈련 매뉴얼까지 전부 짜놨던 참이었다. 아침에 해야 할 일들은 미루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아직도 밖이에요? 아침 식사 차려놨어요. 어서 들어와요.]
치르티티샤의 메시지였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싶어 세르미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둡던 하늘은 서서히 옅은 푸른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일곱 시였다.
가연의 호흡이 진정되자 세르미네는 그를 데리고 돌아가려 했다.
“가자. 치르티티샤가 부른다.”
그러나 가연은 일어서려다 이내 힘이 풀려 비틀거리더니 다시 벤치에 쓰러지고 말았다.
“으… 다리가 너무 아파요.”
“리슈아. 언제부터 그렇게 약한 소리를 했나.”
“세르미네 씨, 전 평범한 문과생이라고요. 운동과는 담쌓고 살았는데….”
가연이 또다시 투덜거렸다. 오늘따라 가연이 무척 친근한 듯 자신을 대하자 세르미네도 그 볼멘소리가 싫지 않았다. 그는 몸을 낮춰 돌리고는 가연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혀라.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치르티티샤가 또 뭐라 할 거다.”
“네? 어, 업히라고요? 저 무거워요! 그리고… 사람들 많은 데서….”
“그럼 걷지도 못하는데 어떡하란 말인가. 여기 널 내버려 두고 가란 말인가?”
세르미네는 진심이었다. 그걸 알았는지 가연도 더는 뭐라 하지 못하고 순순히 그의 등에 업혔다.
가연은 스스로가 무겁다고 했지만, 세르미네에게는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그는 등에 업혀 자신의 어깨를 꽉 붙잡고 있는 가연의 감촉을 생생히 느끼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 외로 사람들은 그들에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세르미네 씨.”
한참 말이 없던 가연이 조용히 입을 떼었다.
“왜 그러나.”
“이전에도 이렇게 리슈아를 업어준 적이 있어요?”
의외의 질문이었지만, 답하지 못할 내용은 아니었다. 세르미네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꽤 자주 업어주곤 했지. 뭔가 문제가 있나?”
“아뇨. 문제가 아니라… 굉장히 익숙한 기분이 들어요. 이렇게 업혀있는 것이나, 세르미네 씨한테서 풍기는 포도 향. 전부 말예요.”
세르미네는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아주 잠깐이지만 저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려 했다. 애써 그 감정을 참은 세르미네는 조금 더 느려진 걸음으로 묵묵히 발을 옮겼다. 가연 또한 말하고도 부끄러웠는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리슈아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는 건가.’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기뻐해야 했지만,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옛날의 소중한 기억은 가연의 안에서만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었다. 세르미네 또한 그 시절의 애틋함이 다시금 떠올랐다.
겨우 마음을 눌러가며 집에 도착한 세르미네는 가연을 내려주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행여나 눈물 자국이라도 묻어 있으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마이데에게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게 뻔했다.
*
아침 식사 후 세르미네는 마이데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아틀란티스의 기사단 훈련소에서 연습용 무기를 몇 개 가져다줘. 날붙이가 아닌 걸로.”
그제야 세르미네가 가연의 훈련을 맡아 하고 있는 것을 마이데는 눈치챘다.
“웬일이야? 내가 그렇게 가연을 실전에 투입하자고 할 땐 반대하더니?”
“시끄러워. 당장 실전은 무리다. 천천히 훈련부터 시작하는 게 먼저야.”
“흠…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지. 좋아. 적당한 걸 찾아 저녁까지 가지고 오도록 할게.”
세르미네가 서서히 마음을 바꿔가자 마이데도 제 의견을 한 수 접었다. 그가 아틀란티스로 사라지자 가연이 방에서 불쑥 몸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에요?”
“별거 아니다. 네 훈련용 무기를 가져다 달라고 한 거야. 몸은 괜찮나?”
그러자 가연은 느릿느릿 방을 나오며 힘없이 대답했다.
“아직도 온몸이 뻐근해요.”
“걸을 수 있는 걸 보니 괜찮은 모양이군.”
세르미네는 수첩을 펼쳐 들었다. 거기에는 세 페이지에 걸쳐 가연의 훈련 프로그램이 적혀 있었다.
“자, 이제 근력을 기르는 운동을 해야 한다.”
“네? 또요? 그렇게 달리고 나서 또 운동을 해요?”
가연은 이제 정말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때마침 그들 곁을 지나가던 치르티티샤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세르미네, 그러다 가연 씨 미움 사겠네요.”
치르티티샤는 웃으며 자리를 떴지만, 세르미네는 진심으로 그 말을 받아들이고는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지, 진짜냐, 리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