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가연과 세르미네가 아침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니 치르티티샤가 일 인분의 아침 식사를 차려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늘 한 박자 늦게 일어나던 마이데는 멀끔한 차림으로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가연 씨, 이야기는 들었죠?”
그들이 돌아오자마자 치르티티샤가 대뜸 가연에게 물었다. 아틀란티스에 다녀오는 일이라면 이미 세르미네에게 들었기에, 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세 분 다 조심하셔야 해요.”
“우리 걱정은 하지 마. 가연이야말로 혹시 마족이 나타나면 꼭 연락해야 한다, 알았지?”
세르미네가 했던 당부를 그대로 마이데가 한 번 더 반복했다. 가연은 걱정을 끼치기 싫었는지 이번에는 힘차게 대답했다.
“잊지 않고 연락할게요.”
그러자 마이데는 컵을 탁,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소리를 신호로 세 사람은 제각각 순간이동을 사용해 아틀란티스로 돌아갔다. 넓은 집에 남겨진 건 치르티티샤가 차린 아침 식사와 가연뿐이었다.
가연은 몸을 씻고 나와 노트를 펼쳐 들고 식탁에 앉았다. 잘 구운 토스트와 달걀프라이, 그리고 베이컨과 살구잼이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었다. 가연은 오늘 있을 시험 범위를 필기한 부분을 읽으며 토스트에 잼을 듬뿍 발라 먹기 시작했다.
그날은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갔다. 가연은 아침 일찍부터 시험이 있어 식사를 끝내자마자 뒷정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추운 날씨에 코를 훌쩍이며 강의실에 들어온 그는 시험지를 받아들고 잠시 좌절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게 시험을 치렀다. 마침 그날의 시험은 딱 하나뿐이었기에 가연은 시험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 크로스백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작은 가방에 노트 두 권과 지갑만을 챙겨 상가 층으로 내려온 그는 마음껏 쇼핑을 즐겼다.
혼자 쇼핑몰을 누비던 가연은 눈독 들이던 곰 인형 열쇠고리를 산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가고 싶던 카페에 들렀다.
“몽블랑, 고구마 라떼, 그리고 레몬 커스터드 타르트와 우유푸딩 하나씩 주세요!”
세르미네가 옆에 있었으면 절대 주문하지 못했을 메뉴들을 전부 주문한 가연은 몹시 만족스러웠다. 야외 테라스의 가장 햇볕 잘 드는 곳에 앉아 디저트들을 실컷 먹은 그는 이따금 노트를 펼쳐 공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가 질 무렵 식당에서 커다란 오므라이스를 먹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제야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불이 다 꺼진 집, 따뜻함이 없는 공기. 어딘가 이상했다.
“에, 에이. 아니야. 무서워서 그런 거야. 문 잘 잠그고 불도 켜야지!”
가연은 온 집안의 불을 다 환히 밝혔다. 그리고 치르티티샤가 늘 듣던 클래식 방송이 아닌, 최신 유행하는 아이돌 그룹의 댄스곡이 나오는 방송을 켰다. 빠르고 신나는 음악이 나오자 그제야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
그러나 다음 날에도 어색한 기분은 계속되었다. 아침 운동도 거르고 늦은 시간까지 잠에 빠져있던 가연은 겨우 일어나 부엌으로 나왔다. 어제 전부 켜고 잔 전등 불빛이 부엌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치르티티샤가 미리 만들어둔 음식들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까지 끝낸 가연은 소파에 앉아 햇살이 스며드는 집 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늘 북적거리고 때로는 성가시단 생각도 조금 들던 일상이었지만, 이렇게 혼자 있고 보니 세 사람이 떠난 게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어제는 모처럼 느낀 해방감에 잊고 있었지만, 벌써 보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오자 가연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지?’
가연은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해서 세르미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만 했다.
‘그분들은 놀러 간 게 아니야. 무서운 마족과 싸우고 있을 테니 방해하면 안 돼.’
생각할수록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껏 근 일 년을 혼자 자취해오던 가연이었다. 딱히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고, 혼자 살면서 큰 불편함 또한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고작 몇 주를 같이 살았다고 금세 이렇게 의존적인 생각이 올라오다니. 가연은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학교에 가서 공부라도 하자.”
그는 일부러 입 밖으로 말을 내뱉으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옷을 입고 가방을 챙기는 그의 몸짓은 마치 마음먹고 과장한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외로움이 스멀스멀 마음속에서 밀려들 것 같아 가연도 어쩔 수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인사를 한 가연은 문을 잠그고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오랜만에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크게 들으며 그는 외로움을 잊으려 애썼다.
그나마 번화가에 접어들고 학교에 도착하자 북적거리는 사람들, 그리고 학생들이 많았다. 생각할 곳을 겨우 돌린 가연은 강의실의 가장 뒷자리에 앉아 노트를 펴고 다시 공부에 매진했다.
[철학과 신화, 그리고 전설]
이것이 그가 오늘 시험을 치를 과목 이름이었다. 학기 초에 필기해둔 부분을 짚고 넘어가던 가연은 익숙한 단어를 발견했다.
[아틀란티스]
대서양에 있었다고 하는 전설의 섬, 그렇게 시작된 필기 내용은 노트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연은 그 부분을 두 번, 세 번 읽으며 자연스레 세르미네를 떠올렸다.
‘세르미네 씨… 괜찮겠지?’
기분이 가라앉은 가연은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초겨울의 푸른 하늘이 창문 너머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어?”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주던 가연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하늘에 무언가 검고 작은 것이 서서히 가까워 오고 있었다.
“저게 뭐야?”
“벌레 아냐?”
그 검은 물체는 하나가 아니었다. 수가 급격하게 불어난 그것은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가연뿐만 아니라 학교 내의 학생들 또한 그것을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일 선두에서 내려오던 검은 물체의 모습이 보이자 사람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다름 아닌 마족이었다.
“저, 저건…!”
가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복도를 달렸다. 아직 시험 시작 전인데다가 복도는 이미 마족을 발견한 학생들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어 가연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우선 건물 밖으로 나와 마족의 동향을 살폈다. 다행히 마족이 몰려오는 곳, 가연이 현재 있는 건물은 대학의 넓은 캠퍼스에서도 꽤 외진 곳이었다. 평소에는 인문학 배척이라며 긴 통학 거리에 투덜거렸지만, 이럴 때는 천만다행이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형태를 한 마족은 크기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꽤 위협적이었다. 보라색이 감도는 검은 등딱지를 가지고, 긴 꼬리를 여섯 가닥 휘날리며 사방을 누비는 마족은 여기저기에 에너지를 응축한 광선을 쏘아댔다. 덕분에 나무 몇 그루가 쓰러지고, 땅이 헤집어진 그 사이로 사람들이 도망치기 바빴다.
가연은 그 와중에도 세르미네의 말을 상기해냈다. 마족이 나타나면 연락하라던 말을 지키기 위해 그는 급히 근처의 철문 뒤로 몸을 숨기고는 세르미네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세르미네 씨, 마족! 마족이 나타났어요!”
“뭐?”
그의 말과 동시에 세르미네 또한 놀랐고, 그 옆에 있던 마이데와 처음 듣는 목소리가 무슨 일이냐며 묻는 소리도 들려왔다.
“기다려. 곧 갈 테니까 안전한 곳에 숨어있어!”
전화가 끊어졌다. 하지만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가연은 세르미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다른 주머니에 잘 넣어둔 수호석을 꺼내 이리저리 흔들며 눈을 꼭 감았다.
“변해라!”
그러자 보라색 빛이 팟, 하고 터지며 가연은 리슈아의 모습으로 변했다. 손에 긴 낫이 쥐어졌지만, 이제는 무기의 감각이 제법 익숙했다.
그때 갑작스레 터진 빛에 가연을 발견한 마족 하나가 슬금슬금 걸어왔다. 가연은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쳤다.
“마족… 어, 어쩌면 혼자 퇴치할 수 있을지 몰라!”
상대는 아무리 봐도 하급 마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깥에는 그 수가 제법 많았지만 가연의 앞에 당장 버티고 서 있는 건 한 마리뿐이었다.
[안전한 곳에 숨어 있어!]
세르미네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가연은 그럴 수 없었다.
‘세르미네 씨, 미안해요! 곧 오실 거라는 걸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마족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요!’
여전히 무서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막지 않으면 누군가 피해를 볼 거라 가연은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는 무기를 두 손으로 꽉 쥐고 세르미네가 가르쳐 준 것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낫의 날이 자신을 향하자 선전포고로 받아들인 마족은 먼저 뛰어올라 가연을 몸으로 찍어 누르려 했다.
검고 커다란 그림자가 가연의 머리 위에서 그를 향해 빠르게 하강했다. 무거운 마족의 몸에 눌리면 필시 살아남지 못할 게 자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