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에잇!”
가연은 온 힘을 양팔에 실어 낫을 휘둘렀다. 번쩍, 하고 은색의 빛이 사선으로 빛났다.
이전 같았으면 마족의 약점이나 움직임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던 가연이었다. 하지만 세르미네에게서 배운 것은 무기를 다루는 법만이 아니었다.
낫의 날카로운 날 끝은 마족의 배를 찔렀다. 떨어지는 탓에 제법 깊게 박힌 날이 몸을 가르자 마족은 키익, 하는 단말마와 함께 바닥에 쿵 떨어졌다.
“으악, 놀라라!”
묵직한 소리와 함께 땅이 가볍게 울리자 가연이 지레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피나 체액이 떨어지지 않아 뒤집어쓴 것은 없었다.
[마족의 약점을 재빠르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급이나 중급 마족은 외관에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경험을 거듭하면 자연스레 몸에 터득하게 되지만, 실전에서 머리를 쓰는 것을 잊지 마.]
‘세르미네 씨 말대로 하니까 됐어!’
등껍질이 딱딱한 만큼 아마 배는 부드럽지 않을까 생각한 가연이었다. 공격을 한 번에 성공한 건 우연이었지만, 이로써 약점을 완전히 파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전투에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가연은 자신이 어떻게든 이 마족 소동을 수습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인명 피해라도 나오면 큰일이었다. 그는 지체 없이 숨어있던 곳에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건물 밖에선 더욱 수가 늘어난 마족들이 광선을 쏘아대고 있었다. 건물에 있던 일부 교수와 고학년 학생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하 대피소로 유도했고, 때마침 면식이 있던 선배가 가연을 발견했다.
“가연아! 뭐해! 얼른 이쪽으로 피해!”
“선배! 제가 저 녀석들을 잡을게요! 전 괜찮으니 다른 사람들을 부탁해요!”
“뭐? 가연아! 너… 그 무기는 뭐야?!”
워낙 크기가 커서 숨길 수도 없는 낫을 등 뒤로 애써 감추며 가연은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선배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는 마족들이 점령 중인 캠퍼스로 서둘러 달려갔다.
하지만 혼자 마족과 싸워본 적이 없는 가연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호기롭게 말은 했지만, 가연은 이제 뭘 어떡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마족을 하나하나 퇴치하면 되나? 아니면….’
“저리 가!”
가만히 선 채 당황하던 가연의 귀에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가연은 생각에서 빠져나와 얼른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아직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가연은 우선 마족이 코앞까지 다가온 사람들 앞에 섰다.
“인문학관 건물로 가세요! 대피소가 있어요!”
마족의 습격을 받을 뻔한 두 학생이 얼른 가연이 시키는 대로 인문학관을 향해 달렸다. 가연은 우선 익숙하게 손에서 검은 끈을 뽑아내 마족의 발을 묶고 그대로 잡아당겼다.
“넘어져라, 제발!”
온 힘을 다해 잡아끈 데다 며칠간의 훈련으로 강해진 가연의 힘, 그리고 리슈아의 능력이 더해지자 마족은 가연의 바람대로 몸을 뒤집고 넘어졌다.
“됐다!”
가연은 재빨리 뛰어올라 낫을 마족에게 내리꽂았다. 이번에도 단말마를 내지르며 숨이 끊어진 마족을 보며 가연은 다시 한번 배가 약점임을 확인했다.
추운 날씨에도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격한 움직임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이 붙었다고 해도 내심 무서운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연은 포기하거나 숨지 않았다. 그는 다른 마족을 찾아 움직였고, 멀리 떨어진 공터에 마족 여러 마리가 사람들을 습격하려는 것을 발견했다.
그중 마족 두 마리가 슬금슬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당장이라도 겁에 질린 사람들을 덮치려는 기세였다. 가연이 달려가려 했지만, 그의 빠른 걸음으로도 계단을 내려가 제시간에 공터에 다다르는 것은 힘들었다.
‘어떡하지, 사람들을 구해야 해!’
가연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또다시 스쳐 지나가는 말이 있었다.
[리슈아는 방어막이 특기였어.]
세르미네에게, 그리고 마이데에게서도 들었던 말이었다. 이전에 마족의 결계에서 펼쳐본 기억을 되살려 가연은 손을 뻗었다.
“나와라, 방어막! 저 사람들을 보호해줘!”
가연은 눈을 꼭 감고 간절히 바라며 외쳤다. 아직까지는 이렇게 말로 형상화를 하지 않으면 기술을 쓰기 힘든 그였다. 세르미네 역시 초보 기사들은 그런 식으로 기술을 쓴다며 가연의 방식을 나무라지 않았다.
이번에도 가연의 의지대로 나타난 방어막은 마족이 덮치기 일보 직전에 사람들을 상자 형태로 감쌌다. 사람들은 마족에게 처음 놀라고, 두 번째로 갑자기 생겨난 방어막에 놀라 가연을 돌아보았다.
“이, 이제 어쩌지?”
살려달라고 가연을 향해 외치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다시 당황했다. 지금 방어막을 풀어 사람들을 도망가게 하면 마족이 뒤따라올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방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가연의 힘은 아직 부족했다.
“이, 이리 와! 나를 봐!”
하는 수 없이 가연은 소리를 질러 마족을 유도했다. 자신은 어떻게든 상대가 될 거란 근거 없는 믿음이었다. 그가 크게 소리를 치자 마족은 전부 가연을 돌아보았고, 이내 한 마리씩 빠르게 공터를 넘어 그에게 달려왔다.
“으, 으악! 어떡해! 그렇다고 한 번에 다 달려오지 마!”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가연은 일단 마족들의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직 실전 경험이라곤 마이데와 세르미네, 두 사람과 함께 결계 속 마족을 퇴치한 한 번이 전부인 그였다. 다수의 마족을 상대로 싸우는 법을 알 리가 없었다.
‘세르미네 씨, 언제 와요!’
가연은 눈을 꼭 감았다. 무서움에 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다고, 그의 앞을 한 그림자가 막아섰다.
“잘 숨어있었어야지, 큰일 날 뻔했잖아!”
세르미네는 하마터면 아찔한 순간을 겪자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자신을 혼내는 목소리임에도 가연은 마음이 놓여 풀썩 주저앉았다.
“너무해요. 전 나름대로 잘 싸워보려 한 건데….”
가연의 모습에 언성을 높였던 세르미네는 이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떡해야 좋을지 방법을 찾지 못한 세르미네는 늘 하던 대로 가연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니, 잘 싸우긴 했지. 그래. 미안하다.”
“세르미네, 너무 혼내지 마. 잘했어, 가연아. 그런데 날아서 피하고 싸웠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마이데의 말에 가연은 아차, 싶었다. 그는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게다가 수호석을 무기에 끼우면 더 강한 힘이 날 수 있다는 것 또한 그제야 기억해냈다.
“거봐. 아직 실전은 이르다니까. 이젠 우리한테 맡겨.”
세르미네는 달려오는 마족 수 마리를 가볍게 검으로 퇴치했다. 가연이 우와, 하고 입을 떡 벌리며 바라보았다. 세르미네는 또다시 올라오려는 우쭐한 마음을 누르려 애썼다.
“하급 마족이지 않나. 리슈아, 일단 방어막을 풀어.”
“괜찮을까요?”
그의 말에 대답한 건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근처에 개체 없음. 전송 마법 시전 가능.”
마이데의 뒤에 어린아이가 하나 서 있었다. 짙은 회색의 곱슬머리를 하고, 두꺼운 로브를 입고 있는 남자아이였다. 손에는 태블릿 PC를 들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소년은 가연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똑같은 말을 했다.
“근처에 개체 없음. 전송 마법 시전 가능.”
“이, 이 사람은 누구예요?”
그러자 마이데가 얼른 나서서 그를 소개했다.
“이 녀석은 바람의 기사 폴라로이아. 치르티티샤가 아직 남아있는 상공의 적을 퇴치하고 있어서 대신 따라왔어. 전투 능력은 거의 없지만, 보조는 탁월하지.”
“전송 마법 준비 완료. 방어막 해제 요망.”
폴라로이아가 다시 한번 간결하게 말했다. 아직 그의 말투에 적응이 되지 않은 가연이 멍하니 바라만 보자, 마이데가 한 번 더 해석해주었다.
“가연아. 주변에 적이 없다고 하니 방어막을 없애. 폴라로이아가 대피소로 사람들을 보낼 거야.”
“아, 네!”
가연이 얼른 방어막을 거뒀다. 그러자 사람들의 모습이 흐려지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가연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 대피소로 보낸 거예요?”
“전송률 100%, 오차율 0%. 전송 완료.”
“그런 거 같군.”
세르미네가 검을 다시 바로 쥐며 조금 날카롭게 대답했다. 방금 멀리서 폭음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폴라로이아. 마족은 얼마나 남았지?”
“상공에 열 마리. 지상에 여섯 마리. 좌표를 메신저로 전송.”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각자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세르미네와 마이데는 도착한 메시지를 보더니 차례로 입을 열었다.
“나는 상공의 적을 처리하지.”
“그럼 내가 지상의 적을 맡을 테니 가연이는 폴라로이아와 함께 대피소로 가서 사람들을 보호해.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그러나 가연은 그 말에도 우물쭈물할 뿐 대피소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가연은 결심했는지 세르미네를 향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저, 저도 전투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실전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