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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32화 (32/87)

32화

세르미네는 잠시 가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어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 몰랐다.

“뭐라고 했나?”

“마족과 꼭 싸워야만 하는지, 다 같이 평화롭게 살 수는 없는지 궁금해요.”

가연은 진심이었다. 세르미네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깊게 탄식했다.

“…….”

세르미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 뒤, 가연이 어렵게 입을 떼었다.

“요즘 그런 기분이 들어요. 자꾸 제 것인지 아닌지 모를 기억이, 감정이 올라와서 혼란스러워요. 그런데 그 감정은 싸우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요.”

세르미네는 직감했다. 그건 다른 것이 아니었다. 리슈아, 전생의 기억과 감정이 틀림없었다.

“네 그런 마음은 리슈아임이 틀림없다는 증거 중 하나다. 전생의 너는 줄곧 그런 소리를 하곤 했지.”

“그런가요? 그럼 세르미네 씨도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 건가요?”

가연은 기대에 찬 얼굴로 세르미네를 보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 대답도 똑같다. 다른 건 모든 받아줄 수 있어도, 그것만큼은 안 돼.”

“어째서요? 아직 대화를 시도해 본 것도 아니잖아요.”

“대화가 된다고 생각하나? 저들은 침략자고, 우리는 막아설 뿐이야. 저들에게 의지가 없는 대화를 어째서 우리가 해야 하는 거지?”

“마족은 왜 지구를 침략하는 거죠? 이유가 있을 것 아니에요. 우주에서 보면 작고 별것 없는 별인데, 왜 이곳을 노리는 거예요?”

서로의 대화가 쉴 새 없이 오갔다. 가연은 약간 격양된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 모습을 세르미네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세르미네는 다디단 타르트를 한 입 베어 먹었고, 가연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이었다. 가연이 고개를 홱 들고 화가 난 표정으로 세르미네를 향해 물었다.

“세르미네 씨,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흔들리는 눈동자로 세르미네를 향해 묻는 가연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세르미네는 의아했다.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난 가만히 있었다. 왜 그러지?”

“방금 ‘너의 그런 어중간함이 신물 나.’라고 하셨잖아요!”

“뭐라고?”

세르미네는 억울했다. 아무리 가연의 의견에 반대해도 자신은 결단코 저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너야말로 네 말을 들어달란 마음은 알겠다만, 그런 식의 방법은 틀린 것 같지 않나?”

세르미네는 가연이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고 하기 위해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역시 서툰 말을 입 밖에 내었고, 결국 가연의 화를 돋우고 말았다.

“너무해요, 세르미네 씨. 어떻게 그런 말을….”

결국 가연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차마 밖이라 큰 소리로 울지는 못하고 흐끅거리며 우는 그의 앞에서 세르미네는 안절부절못했다.

“미, 미안하다. 미안해. 울지 마라.”

가연을 달래던 세르미네의 눈에 갑자기 하얀 무언가가 들어왔다.

‘재?’

그는 눈을 비볐다. 다시 한번 보아도 틀림없는 재였다. 회색 재가 마치 안개처럼 붕 떠서는 어디론가 빠르게 흘러갔다.

세르미네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범한 쇼핑몰 안, 인파 속에서 언뜻 마이데의 뒷모습이 보였다.

*

그날 오후를 꼬박 어르고 달래며 세르미네는 가연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그가 마음에 들어 하는 물건도 전부 사주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저녁 식사도 사주고 난 뒤에야 가연은 마음을 풀었다.

해가 지고, 모두가 함께 먹을 케이크까지 사서 돌아온 세르미네를 맞은 것은 다름 아닌 치르티티샤였다.

“마이데는 뭐 하고 있나?”

있어야 할 모습이 보이지 않자 세르미네는 의아해 물었다. 물론 마음 한편으로는 오늘 내내 얼굴을 비추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는 중이었다.

“심부름 보냈어요. 식사 준비할 재료가 부족해서 말이죠.”

가연이 쇼핑백을 잔뜩 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치르티티샤가 대답했다. 가연의 방문이 탁, 닫히자 그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 세르미네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건 왜 묻지?”

세르미네의 물음에 치르티티샤는 약간 짓궂은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아니, 연인 사이인데 크리스마스에 정말 아무 일도 없을까 싶어서 말이죠.”

“전생의 기억이 아직 다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래요. 지금의 ‘주가연’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죠. 언제 기억을 찾아줄 건데요?”

치르티티샤는 은근히 아픈 곳을 찌르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세르미네는 반박할 수가 없어 그저 말을 얼버무릴 뿐이었다.

“그렇게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으니 언젠간 기억을 되찾겠지.”

“맞아요. 당신이나 가연 씨나 노력하고 있죠. 하지만 당신들만 노력해서 될 일인가요?”

갑자기 치르티티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무슨 소리지?”

“그저 둘만 발버둥 치고, 주변에서 전혀 협조를 안 하는 게 불만이라는 거죠. 그렇지 않아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렇다고 한다면,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않나?”

세르미네의 말에 치르티티샤는 작게 웃더니 조리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난 당신 편이에요. 잊지 말아요.”

세르미네는 그런 치르티티샤의 등을 잠시 빤히 바라보다 이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치르티티샤의 말에 석연찮은 구석은 있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리레시아는 그저 가연에게 적개심만 보일 뿐이었고, 폴라로이아는 늘 그렇듯 무심했다. 그나마 조력자라고 한다면 루아를 들 수 있었지만, 세르미네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특히 문제는 마이데였다. 자신이 일궈놓은 것들을 그저 가로채려는 존재. 그는 리슈아마저 가로채려 하고 있었다.

그리 생각하니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아까 보인 마이데가 무언가 일을 꾸미는 게 틀림없었다. 카페에서 가연이 들은 목소리도 그가 꾸민 일일 것이라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한 번 마음이 부정적으로 흐르니 모든 게 곱게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날 저녁, 세르미네는 엉망이 된 기분으로 크리스마스 만찬에 자리했다.

마이데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그가 유난히 가연에게 친근하게 굴며 달라붙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치르티티샤는 제 솜씨를 최대한 발휘해 멋들어진 요리를 차려놓았다. 흔히 먹는 후라이드 치킨이 아닌 칠면조 통구이에 세르미네가 사 온 삼단 케이크가 테이블의 중앙에 놓여 있었다. 그 좌우로 쇠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넣고 끓인 비프스튜와 연어, 올리브를 올린 카나페, 반으로 갈라 생크림을 넣고 산타 모양으로 만든 딸기까지 없는 게 없었다.

산타 모양의 딸기만 연신 집어 먹는 가연의 접시 위에 세르미네는 두툼하고 윤기 흐르는 칠면조 다리를 하나 얹어주었다.

“이야, 세르미네. 인심 좋은데?”

가연을 사이에 놓고 세르미네와 마이데는 좌우로 앉아 있었다. 가연의 왼쪽에 앉은 마이데가 익살맞게 말을 던졌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이건 내가 실례하지.”

“앗, 마이데 씨! 저기 접시에 많이 있잖아요.”

마이데는 가연의 접시에 하나 남아있던 딸기를 집어 먹었다. 가연이 장난처럼 부루퉁하게 볼을 부풀리는 모습에 세르미네는 가슴이 쿡쿡 아파져 왔다.

그런 식이었다. 세르미네가 기껏 가연에게 점수를 따면 마이데는 가연에게 장난을 걸며 그 점수를 은근슬쩍 가로채 갔다. 그런 방식이 전부터 세르미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겉보기엔 평화로웠지만 세르미네에게 있어서 저녁의 파티는 엉망진창이었다. 마음만 잔뜩 졸인 채 방으로 돌아온 그는 길고 긴 하루를 마무리할 준비를 했다.

“세르미네 씨….”

침대에 걸터앉아 하루 일과를 노트에 정리하던 그의 방에 누군가 찾아왔다. 다름 아닌 가연이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식사 내내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길래….”

세르미네는 마음속에 약간 화가 올라왔다. 마이데 때문에 가연을 신경 쓰게 만든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다. 아무 일도 없어.”

세르미네는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다. 모처럼의 기회였다. 이렇게 말하면 곧 가지 않을까 생각한 세르미네는 가연을 붙잡기 위해 꺼낼 말을 속으로 골랐다.

하지만 다행히 가연은 아직 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문을 닫고 방 안으로 성큼 들어오더니 세르미네에게 대뜸 말을 꺼냈다.

“저, 저기… 그럼 혹시 같이 자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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