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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37화 (37/87)

37화

아마 평소의 세르미네였다면 마이데가 무엇을 하고 있든 무시하고 제 할 일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왠지 저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다시금 울화가 끓어올랐다.

차라리 평소처럼 능글맞은 모습으로 어쩔 수 없었다며 어깨를 으쓱했더라면 어땠을까. 마이데가 약한 모습을 보이자 오히려 그는 참아야 해, 참아야 해, 하면서도 좀체 감정을 누르지 못했다.

그는 한 발짝, 한 발짝 떼어 마이데에게 다가갔다. 일부러 인기척은 숨기지 않았다.

“그 의기양양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그러시나? 마이데 씨?”

참고 참던 세르미네의 입에서 결국 빈정거리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말로 뱉고 보니 속이 시원했다.

“…너도 내가 우스워?”

한참 만에 마이데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어깨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세르미네의 눈썹 끝이 꿈틀거렸다. 무어라 반기를 들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네 연인은 운이 좋아 돌아왔지만, 내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고, 영영 돌아올 일이 없겠지. 복에 겨우셔서 좋겠습니다, 세르미네 기사님?”

“뭐야?”

세르미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자 마이데도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몸을 돌렸다. 울고 있었는지 뺨은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회색 눈동자는 세르미네를 향한 적의로 활활 타올랐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마이데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세르미네를 비꼬니, 세르미네 또한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말이 마이데를 여지없이 공격했다.

“네 죽은 아내와 리슈아를 혼동하는 주제에, 입만 살았군. 리슈아를 모욕하고 있지 않나.”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세르미네는 황당해 말을 멈췄다. 마이데와 자신을 같은 취급 하다니, 영문은 모르겠지만 몹시 불쾌했다. 그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마이데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지?”

“너 또한 리슈아와 가연이를 혼동하고, 지금의 가연이에게 상처주고 있잖아.”

마이데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작정하고 독기를 품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세르미네 역시 질 수 없었다. 그 또한 할 말이 많았다.

“가연이는 곧 리슈아이니 너와는 다른 상황이지 않나? 세타, 네 아내와 리슈아는 동일인도, 환생도 아니잖나.”

마이데가 발끈해 세르미네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몸싸움이라도 벌이려는 건가 싶어 세르미네 또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작은 드레스룸의 문이 열리고 치르티티샤가 못마땅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당신들, 지금 대체 몇 신줄 알아요?”

갑자기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부엌이 조용해졌다. 세르미네가 흘긋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이웃에 폐가 된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리고 당신 방에서 가연 씨가 아직 자고 있다는 것도 말이죠.”

말을 마친 치르티티샤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문이 탁, 조용히 닫힐 때까지 두 사람 모두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일 분쯤 흐른 뒤, 잠시 식은 화가 다시 올라온 마이데는 결국 참지 못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래도 잠든 가연을 배려하는 것인지 문을 쾅, 닫지는 않았다.

이 새벽에 갈 곳도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세르미네는 차라리 그의 모습이 사라져 속이 시원했다.

‘어디로든 가버리라지,’

그는 독기 어린 생각을 품었다가 이내 지웠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발걸음은 몹시 무거웠다. 세르미네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떼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세르미네?”

아직 눈을 감고 있는 가연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르미네는 놀라 서둘러 가연에게 다가갔다.

“일어났나?”

그 말에 가연이 조금씩 눈을 뜨고 세르미네를 올려다보았다. 아마도 소동 때문에 깨어난 모양이었다.

“네. 밖에서 소리가 들리길래…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이야 있었지, 하지만 세르미네는 그걸 곧이곧대로 가연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가연의 옆으로 가 의자에 걸터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무 일도 아니야. 몸은 괜찮나?”

가연이 보기에도 세르미네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던 모양이었다. 가연은 다소 힘이 없는 얼굴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네.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아픈 곳은 없어요. 그냥 조금 기운이 없을 뿐이에요.”

휴우, 세르미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루아의 치유 마법을 믿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연이 일어날 때까지 걱정을 지울 수 없었던 그였다.

“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나.”

가연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니 이번에는 평소의 그다운 말이 튀어나왔다. 분명 걱정이었지만, 상대를 질책하는 것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세르미네에게 익숙한 가연은 마음 상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순순히 이유를 털어놓을 뿐이었다.

“저도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미안함에 저러는 것이라고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가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죄송해요. 제가 좀 더 강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니다. 네 말대로 효과적인 방법일 수도 있었어. 다만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라.”

세르미네는 자신이 아는 모든 어휘를 동원해 가연을 위로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가연에게 와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연은 표정을 숨길 수 없어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세르미네. 저 한심하죠?”

겨우 고개를 든 가연은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표정이었다. 울 듯하면서도 화가 난 듯한, 기묘한 모습에 세르미네는 대답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가연의 말을 기다려 줄 뿐이었다.

“다 큰 남자가 자기 몸 하나 지키지도 못하고, 명색이 기사라면서 누굴 구하지도 못하고….”

말로 듣고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세르미네 또한 어리숙한 기사 시절 똑같은 고민을 밤새워서 하곤 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가연에게 해 주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잘하려는 건 오만 아니겠나. 최선을 다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위로가 된 것인지는 잘 몰라도, 가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있어요.”

“그게 뭐지?”

“세르미네가 드디어 가연이라고 불러줬잖아요.”

세르미네는 속으로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마이데가 한 말과 통하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평정을 가장한 채 모르는 척 되물었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물론 전 리슈아기도 하니까 세르미네가 리슈아라 불러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세르미네는 절 볼 때마다 어딘가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그제야 세르미네는 깨달았다. 저 또한 마이데와 다를 게 하나 없었다. 아무리 다르다고, 마이데가 더 질이 안 좋다고 우겨 봐도 결국은 똑같았다. 저 눈치 없는 가연에게 그걸 들킬 정도면 이미 주변 사람은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거 알아요?”

잠시 동안의 침묵 끝에 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세르미네에게서 고개를 돌려 방에 켜 놓은 고양이 모양의 전등에 시선을 옮겼다.

“가연이란 이름은 엄마가 지어준 거예요. 노래가 맺어준 인연이라는 뜻이래요.”

세르미네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를 낳았을 때 어딘가에서 노래가 들려왔대요. 그래서 노래가 저와 엄마를 맺어줬다고, 저도 많은 인연을 맺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이름을 지은 거라 하셨어요.”

“그렇군.”

세르미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별다른 감흥은 오지 않았다. 자신도 노래를 즐겨 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리슈아도 무언가를 흥얼거리는 건 좋아했지만 노래를 잘하지는 않았다.

“세르미네는 노래 잘해요?”

갑자기 가연이 묻자, 세르미네는 고개를 저었다.

“주변 사람들이 나는 제발 노래를 하지 말라고 하더군.”

“그렇구나. 그건 어쩐지 좀 너무했지만, 사실 저도 노래를 잘하지는 않아요. 다만 가끔 신기할 때는 있어요.”

가연은 세르미네의 방에 작게 난 창문 너머,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주 외롭거나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면 혼자 나와서 하늘을 봤어요. 그러면 마치 하늘 너머, 아주 어두운 어딘가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면 꽤 위로가 되더라고요.”

“그래. 그건 나도 그렇다.”

세르미네는 대충 얼버무렸다. 사실 자신은 그런 감상에 젖어본 적이 없었다.

밤에는 늘 훈련이나 전투를 마치고 곯아떨어지기 바빴다. 그에게 있어 하늘 너머, 우주는 그저 마족의 소굴일 뿐이었다.

‘지나친 감상은 화를 부르기 마련이지.’

그런 성격 덕분에 고지식하다는 평도 듣긴 했지만, 손해 볼 것은 없었다. 기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명이었다. 풍류는 일반 백성들의 전유물로 남겨두면 충분했다.

“세르미네. 마이데와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면 안 돼요?”

가연은 단순히 묻는 게 아닌 부탁을 하고 있었다. 세르미네도 그걸 알았지만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가연과 괜한 입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뭐, 노력해 보도록 하지.”

대충 얼버무리다 세르미네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뒤에서 옅은 기척이 느껴졌다.

‘마이데인가?’

세르미네는 고개를 홱 뒤로 돌렸다. 방의 문이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 세르미네가 일어나 문을 열어 보니 기척은 사라지고 문 뒤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기분 탓이라고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마이데, 그 녀석이 언제든 돌아와 염탐하고 자신과 리슈아 사이를 갈라놓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강한 의지 탓에 더욱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세르미네는 아직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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