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세르미네는 행여나 치르티티샤가 잘못될까 봐 얼른 자신도 검을 들고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치르티티샤는 마족을 봐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물론 이 검은 늑대 떼가 마족이라는 것을 모르겠지만, 보통의 인간이라면 늑대나 들개 떼에도 겁먹고 도망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치르티티샤는 아틀란티스의 다른 기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호전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치르티티샤의 전투 방식은 마치 어딘가에서 훈련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군더더기 없는 날렵한 움직임을 보이며, 급소만을 노리는 기술을 구사했다. 게다가 공격과 방어를 적절히 섞어 쓰니, 차라리 그를 아틀란티스로 영입하고 싶을 정도였다.
‘대단한걸. 대체 이 자는 누구지…?’
세르미네는 자신도 마족을 해치우는 동시에 치르티티샤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덕분에 전투는 몹시 수월했다. 리슈아는 아예 나설 틈도 없어 후방에서 마족이 더 나오지는 않는지 감시하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전방, 치르티티샤는 측면의 마족을 맡아 상대했다. 세르미네가 검을 휘두르고, 체술을 사용해 마족을 제압하는 동안, 치르티티샤는 현란한 채찍 기술로 적을 압도했다. 마족의 목과 다리를 채찍으로 조이고, 내동댕이치니 그 힘과 기술을 마족이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긴장의 끈을 늦출 수는 없었다. 이렇게 마족이 무리 지어 나타났다는 것은 우두머리도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세르미네! 마족들 움직임이 이상해!”
뒤에서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던 리슈아가 마족 무리의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전투에 몰입해있던 세르미네가 돌아보니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짙은 어둠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치르티티샤! 뒤로 물러서! 큰 놈이 온다!”
그러나 치르티티샤가 아무리 전투에 익숙하고 호전적이라 해도, 마족과의 대치 경험은 없는 보통 인간이었다. 전투에 열중해 세르미네의 말이 들리지 않았을뿐더러, 이변을 눈치채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운 또한 따라주지 않았다. 마족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급 마족은 치르티티샤와 단 열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타났다.
“아, 안돼!”
리슈아가 얼른 손에서 검은 실을 뽑아내어 치르티티샤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그러나 중급 마족이 조금 더 빨랐다. 세 개의 목을 가진 거대한 늑대 모습의 마족은 덩치만큼이나 큰 앞발을 들어 금세라도 치르티티샤를 누를 기세였다.
세르미네는 얼른 그를 구하러 가고자 했다. 그러나 세르미네 또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젠장! 보통 인간을 이런 데 끌어들이다 못해 죽게 할 수는 없어!’
루아에게 몇 마디 혼이 나는 것쯤은 두렵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기사로서의 책임감과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마족의 발에 치르티티샤가 당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세르미네의 주머니 속에서 노란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곧장 치르티티샤에게 날아가더니 이내 그의 주변을 노란 방어막으로 감쌌다.
“저건, 설마…!”
놀란 마족들은 감히 치르티티샤를 공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의 리더 격인 중급 마족이 두어 걸음 물러서자, 하급 마족들은 꼬리를 내리고 달아나려 했다.
“그렇게는 두지 않는다!”
세르미네는 검을 활로 바꾸어 달아나는 마족들에게 화살을 하나씩 쏘아 보냈다. 그러면서도 치르티티샤에게 생긴 이변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대지의 수호석은 육망성 모양의 노란 보석이었다. 수호석은 치르티티샤의 앞에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주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가 대지의 기사의 자질을 가진 자인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보통 사람이라면 놀라며 주위를 둘러볼 법도 했다. 하지만 치르티티샤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저 그는 자신 앞에 떠 있는 수호석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죠?”
[나는 대지의 수호룡. 대지의 기사와 함께 싸우는 자이다.]
세르미네는 끼어들 수가 없었다. 기사의 자질을 가진 자가 나타난 것은 환영할 일이었지만, 기사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이었다. 만일 거절한다면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사람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주변의 마족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서둘러 잔챙이 하급 마족을 모두 처리한 세르미네는 초조하게 치르티티샤 쪽을 바라보며 중급 마족을 상대하고 있었다. 리슈아도 사태의 심각함을 알고 옆에서 견제하며 세르미네를 돕는 중이었다.
[그대, 기사가 되어 마족을 물리칠 사명을 이어가겠는가?]
수호룡의 물음에 치르티티샤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휘게 하고는 옅게 웃었다. 그리고 수호룡에게 대답했다.
“난 내게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아요.”
[그런가….]
수호룡은 그것이 거절이라 생각했는지 강하게 내뿜던 빛을 점점 줄여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잠깐만요. 나는 하지 않겠다는 말은 안 했어요.”
[그게 무슨 뜻인가?]
“기사가 되는 것이 무슨 이득이 될지는 몰라도, 재미는 있겠네요. 좋아요. 그걸로 이득이 되는 셈 치죠.”
[…좋다.]
수호룡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치르티티샤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수호석에서 빛이 휘몰아치며 치르티티샤를 감더니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외관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세르미네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막 대지의 기사가 되었다.
*
생각에서 빠져나온 세르미네는 옆에 놓인 술을 조금 마셨다.
그 뒤의 일은 순조로웠다. 마족은 대지의 기사가 된 치르티티샤 덕분에 쉽게 잡혔고, 목적을 모두 달성한 세 사람은 아틀란티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았던 일이 갑자기 세르미네의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그때 우리를 미행하던 여행자가 기사의 자질을 갖춘 자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어차피 기사가 되는 자들을 알고 만나는 게 아니었다. 다들 우연히 만나 사정을 듣고, 일이 얽혀 기사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마치 다 아는 듯 자신들을 미행한 자가 기사가 되다니, 이럴 수도 있는 걸까?
게다가 그는 이상했다. 수호룡의 목소리를 들으면 대개 위압감에 눌리기 마련인데, 치르티티샤는 마치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게다가 ‘재미’를 위해 기사가 되겠다니, 그런 말을 수호룡 앞에서 한 것도, 그걸 용인한 수호룡도 이해할 수 없었다.
수호룡들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흔하진 않지만, 저마다 다른 형체와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지의 수호룡은 세르미네가 아는 여느 수호룡들 가운데서도 특히 고지식하고, 원칙주의자였다. 생김새 또한 하늘을 날 수 없는 만큼, 한때 지상을 지배했던 난폭하고 거대한 폭군을 닮은 용이었다.
세르미네는 생각을 접고 다시 책에 시선을 돌렸다. 고민만 해 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사이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
그 후로 약 닷새가량을 세르미네는 그 도시에서 보냈다. 치르티티샤에 대한 단서가 손에 잡힐 듯 영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집착인지….’
어쩌면 마이데에게 쌓인 화를 이런 식으로 해소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신경을 돌릴 곳이 없으면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나 참,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뭔지 모르겠군.’
세르미네는 그저 가연과 단둘이서 동거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마음에 맞지도 않는 마이데나 수상하기 짝이 없는 치르티티샤와 함께 지내는 것이 싫었다.
그 닷새 동안 가연과 세르미네는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가연은 한국에서 변함없는 일상을 보내면서도 세르미네를 보고 싶어 했고, 세르미네 또한 가연이 그리웠다.
‘루아와 한 번 더 대화를 하러 가야겠어.’
더는 이 도시에서 얻어낼 정보도 없겠다 생각한 세르미네는 그리 결심했다. 치르티티샤에 대한 정보도 신경이 쓰였지만, 가연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 꼬박꼬박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전화를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세르미네는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정리해서 방을 나왔다. 한산한 호텔을 내려가 로비에서 체크아웃을 한 뒤, 바로 아틀란티스를 향했다. 며칠 전에도 들렀던 루아의 거처를 향하는 그의 표정에는 담판을 짓고 말겠다는 결연함이 담겨 있었다.
그가 떠났던 날과 마찬가지로 아틀란티스는 여전히 맑고 푸른 하늘 아래였다. 이제 막 중천에서 기울어가는 태양 아래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세르미네는 정원을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그날처럼 성 옆에 높이 솟은 벽돌탑이었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 기도실로 들어서니 오늘도 루아는 홀로 넓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폴라로이아나 리레시아가 없어 다행이라고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어서 오십시오.”
세르미네를 보자 루아는 정중하게 인사부터 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마음이 급해 마주 인사할 겨를이 없었다.
“이봐, 루아.”
“네.”
다짜고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루아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말을 해 보라는 듯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을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마이데와 동거는 힘들겠어. 그리고 치르티티샤와도.”
“….”
루아는 말이 없었다. 그것을 거절이라고 생각한 세르미네는 조금 더 강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치르티티샤도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고, 마이데와 더는 함께 싸울 수 없어. 그 녀석을 기사로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리슈아는 내가 맡겠다.”
하고 싶은 말을 속사포처럼 꺼내놓은 세르미네는 루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후련하면서도 그녀의 대답이 두려운 것 또한 사실이었다.
“세르미네.”
모든 감정을 빨아들일 것 같은 검은 눈동자로 세르미네를 응시하던 루아가 작은 입을 열었다.
“삼위일체의 힘을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