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세르미네는 루아의 질문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마이데와의 동거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뿐인데, 갑자기 돌아온 물음에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네가 말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것이 같다면, 그것은 옛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정예 기사들이 사용하던 힘 아닌가?”
세르미네도 직접 그 힘을 쓴 적은 없었지만, 동료 기사들이 사용하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이 별, 지구와 연결된 아틀란티스의 동력부에서 힘을 끌어내 사용하는 비기였다. 워낙 큰 힘인 데다가 별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만큼 부담이 커서 자주 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사용하려면 최소한 정예 기사급은 되어야 했다.
거기다 삼위일체는 또 하나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다.
“맞습니다. 세 명의 정예 기사가 한마음이 되었을 때 나타난다는 힘이지요. 기억하고 계시겠죠?”
이미 정예 기사의 능력을 충분히 갖춘 세르미네가 그 힘을 사용할 수 없는 이유였다. 마음이 맞는 기사 세 명, 삼위일체라는 단어에 걸맞은 조건이었다.
기사의 수가 많았던 옛 아틀란티스에서는 동료애가 돈독한 정예 기사도 있었다. 그들은 고위 마족을 상대할 때 그 기술을 사용해 대륙을 위기에서 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사 수가 적었다. 마이데는 세르미네와, 리레시아는 리슈아와 마음이 맞지 않았고, 치르티티샤나 폴라로이아는 힘을 발휘하기에는 유대감이 느슨했다.
“기억은 하고 있지만, 누구와 힘을 발휘하라는 거지? 기사가 여섯뿐인지라 명맥도 사실상 끊긴 게 아닌가?”
세르미네는 약간 불쾌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검지를 톡톡, 팔에 두드리며 루아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그의 태도는 조금 거만하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루아는 신경쓰지 않고 그녀가 하고싶은 말을 계속 이었다.
“기사가 세 명 있으면 힘을 발휘할 조건을 충족합니다. 마음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요. 세르미네.”
루아는 변함없이 무표정이었지만, 세르미네는 마치 꾸중을 듣는 것만 같았다. 묘하게 움츠러드는 마음에 팔짱은 풀었지만, 그도 반박할 말은 있었다.
“스스로 해결하라니,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거 아니야?”
마이데와 자신의 앙금을 루아가 전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란 뜻이었다. 당사자도, 관련된 사람도 아닌 자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세르미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르미네. 당연히 모두를 사랑할 수도 없고,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힘조차 발휘하지 못할 결속력이라면, 더 큰 위기가 다가올 때 매우 힘들어집니다.”
“하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 상대를 어찌 애정하고, 마음 깊이 신뢰한단 말이지?”
루아는 말이 없었다. 아무리 현명한 무녀지만 그녀 또한 인간이었다. 그 질문에 대해 쉽게 답을 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대신 그녀는 세르미네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삼위일체의 힘을 결정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마음, 힘, 결속….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는 마음을 공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면 기사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게 맞겠지요.”
세르미네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미움, 증오…. 이런 마음들을 그럼 위선과 가식으로 덮어야 한단 말인가. 좋은 것, 싫은 것, 그것이 아니라면 나와 상관없는 것. 모든 것을 구분하고 살던 세르미네였다.
“제가 할 말은 이것뿐입니다.”
루아는 말을 마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아마 자신 역시 생각이 많았는지, 루아는 명상에 들어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방해할 수 없어 세르미네는 기도실을 나와야만 했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세르미네는 한숨을 연거푸 쉬었다. 마음의 짐을 덜러 왔더니 오히려 짐을 한가득 안고 가는 기분이었다.
‘삼위일체의 힘이라니, 내가 쓰는 것도 상상이 가지 않지만… 대체 누구와 써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리슈아와 단둘이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이라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그 어떤 마족도 두렵지 않을 터였다.
세르미네가 무거운 마음으로 탑을 나서려는 순간, 갑자기 주머니에서 진동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가 온 것이었다.
‘가연인가?’
발신자에 찍힌 세 글자의 이름을 확인한 세르미네는 기쁜 마음으로 얼른 전화를 받았다.
“어, 무슨 일…”
“세르미네! 큰일이에요! 큰일! 어서 한국에 와줘요!”
“뭐? 무슨 일인데 그래? 자세히 설명해봐라.”
아무래도 가연은 자신이 보고싶어 전화를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 세르미네는 무언가 나쁜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여기 하늘에 엄청난 게 떠 있어요! 마족 같아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휴대폰에서 짧은 메시지 수신음이 들렸다. 세르미네는 곧 가겠노라고 가연에게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세르미네. 고위 마족이 나타났습니다. 어서 한국으로 돌아가세요.]
다름 아닌 루아였다. 고위 마족이라는 말에 세르미네는 지체할 것 없이 순간 이동을 사용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 한낮일 텐데 집 안은 이상하리만치 어두컴컴했다. 또 겨울인 점을 감안해도 유난히 추웠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잘 정돈된 집안이었지만,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곳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가연아! 어디 있나!”
세르미네는 가연을 부르다가 이상한 낌새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유리로 된 거실의 창문 너머로 향했다.
“저, 저건…!”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마족이 떠 있었다. 기형적으로 큰 마족이 둘이었다. 세르미네는 한눈에 보아도 그것이 고위 마족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우선 가연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르미네! 어디예요? 저는 옥상 정원으로 대피했어요!”
전화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에 세르미네는 달려가는 대신 옥상 정원을 좌표로 지정하고 순간 이동을 사용했다. 그곳에는 가연 혼자 세르미네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간편한 셔츠와 바지만 입은 채, 운동화를 신을 겨를도 없어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달려온 모습이었다.
“너, 춥지는 않나? 지금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추운 것 같은데….”
세르미네는 얼른 자신의 재킷을 벗어 가연에게 입혀주었다. 가연은 세르미네의 하얀 재킷을 두 손으로 꽉 여몄다. 그의 작은 손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세르미네는 안쓰럽게 바라보다 이내 상공으로 고개를 돌렸다.
“추워요. 이상해요. 1월이라지만 이건 너무 추워요. 급히 나오느라 옷을 제대로 챙겨 입을 수가 없어서…”
가연의 말에 세르미네는 고위 마족의 능력을 짐작했다. 주변의 기온을 서서히 낮춰 생명체를 죽이고, 일대를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드는 능력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당장은 버틸 수 있지만, 시간을 끌게 되면 사람들도, 또한 자신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저 마족이 나타난 지 얼마나 되었나?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지?”
세르미네의 물음에 가연은 고개를 저었다.
“저기 마족 중 큰 개체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작고 하얀 마족 보이시죠? 저것에서 이따금 광선이 나와 일대를 파괴하고 있어요. 특히 높은 건물이 표적이 되는 거 같아요. 마족이 나타난 지는 30분 정도 된 것 같고, 지금 지하 주차장에 사람들이 대피해 있어요. 저는 상황을 주시하기 위해 여기 있는 거고요.”
세르미네는 가연의 말을 듣고 멀리 하늘에 떠 있는 마족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꽤 있음에도 거대하게 보이는 마족은 두 마리였다. 겨우 머리와 팔, 다리만 구분할 수 있는 검고 긴 몸의 마족과 그 주변을 마치 자전하듯 도는 하얗고 동그란 구체였다.
"마이데와 치르티티샤는 어디 있지? 아마 리레시아와 폴라로이아는 곧 도착할 것 같은데….”
“그게….”
가연이 우물쭈물했다. 세르미네는 왜 그러나 싶어 대답을 재촉했다.
“무슨 일이지?”
“치르티티샤 씨는 이틀 전에 나간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뭐?”
세르미네는 잠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물론 고위 마족이 나타날 것이라 예측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제 볼일을 보러 가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요 며칠 치르티티샤에 대해 의문이 커지던 세르미네의 머릿속엔 ‘왜 하필 지금?’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마이데는 마족을 상대하겠다며 혼자 뛰쳐나갔어요. 저에겐 세르미네에게 연락한 뒤 여기에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요.”
가연의 마지막 말을 들은 세르미네는 어쩐지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아마 자신이었다면 곧 마족에게 당하는 한이 있어도 마이데의 힘을 빌리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닌 것도 사실이었다. 상대는 중급도 아닌 고위 마족, 그것도 두 마리였다. 보통 때라면 기사들이 전력을 다해 상대해도 승산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나도 마족을 상대하러 갈 테니, 너도 지하에 대피해 있어. 밖에 나오지 마.”
세르미네는 그리 말하며 날개를 펼치고 마족을 향해 날아가려 했다. 시간이 매우 촉박했다.
“저, 저기, 세르미네!”
가연이 다급히 세르미네를 부르자 그는 등을 돌린 상태에서 고개만 살짝 돌려 가연을 바라보았다.
“뭐지?”
어딘가 불안한 예감을 안고 세르미네는 가연의 답을 기다렸다. 가연은 주먹을 꽉 쥐고 결연하게 세르미네를 바라보며 힘껏 외쳤다.
“저도 갈래요! 저도 싸우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