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하지만 두 눈으로 보고도 세르미네는 아직 삼위일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대 아틀란티스 시절에도 본 적만 있을 뿐, 스스로 발동해 본 적 없는 힘이었다.
‘기사 간의 유대….’
말이 쉽지, 리슈아면 몰라도 마이데와 유대감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남은 고위 마족, 카스토르는 폴룩스가 사라지고 난 뒤 분노에 찬 모습이었다. 서서히 내려가던 주변 온도는 이제 살을 에는 추위가 느껴질 정도였다. 주택가에 가끔 보이는, 아직 잎과 꽃이 붙어있던 화분도 지금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네놈들이, 네놈들이, 감히…!!]
카스토르는 리레시아와 마이데, 그리고 루아와 폴라로이아가 모여 있는 옥상을 향해 두 주먹을 동시에 치켜들었다. 폴룩스를 없앤 원흉이 모여 있었기 때문인지, 그는 가차 없이 높이 든 주먹을 내려치려 했다.
“내가 있는데 그렇게 둘 것 같나! 리슈아!”
세르미네는 얼른 검을 들고 달려가며 리슈아를 불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던 가연은 세르미네의 부름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네! 준비됐어요!”
“무리하지 말고, 하지만 최대한 방어막을 펼쳐! 뒤에서 폴라로이아와 루아가 엄호할 거야!”
세르미네의 말에 가연은 카스토르의 주먹이 향하는 곳으로 날개를 펴고 날아갔다. 이미 루아는 남은 힘을 쥐어짜 지팡이에 싣고는 가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동쪽 35도, 강도 95% 이상의 방어막 필요.”
“어…,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볼게요!”
가연은 조금 전과 같이 반투명한 검은 방어막을 손에 불러내 카스토르의 주먹을 막았다. 다시 내상을 입으면 어쩔까 우려했지만, 루아의 힘이 섞이면서 다행히 고통스러운 곳은 없었다. 덕분에 가연은 카스토르와 힘겨루기를 하며 주먹을 막아내는 데 전념했다.
그 사이, 마이데 또한 제 할 일을 찾았다. 그는 세르미네가 카스토르의 상반신 부근을 맴도는 이유를 빠르게 찾아냈다.
‘약점을 찾고 있군.’
하늘을 날지 못하는 자신은 곁에 갈 수도 없고, 뛰어올라 공격해봐야 방해만 된다고 그는 판단했다. 대신 마이데는 카스토르의 발을 공격해 마족의 주위를 분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도끼에 수호룡의 힘을 담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카스토르의 발과 다리를 공격했다. 워낙 마족의 몸이 물컹해서 치명타를 주지는 못했지만, 마이데의 의도대로 카스토르는 세르미네에게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벌레 같은 녀석이…!]
세르미네는 마이데를 내려다보며 고마움이 뒤섞인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아직도 그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은 맞지만,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고 고위 마족과 싸우겠다는 마음은 차츰 옅어졌다.
‘그래. 삼위일체인지 뭔지, 어떻게 쓰는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혼자서는 힘들겠군.’
세르미네는 대검을 카스토르의 팔에 내리치며 그의 공격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가연은 힘이 다한 세 사람을 보호하며 간간이 보조 능력을 사용해 세르미네를 위험에서 구했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알 것 같아요! 신기해요!”
세르미네를 덮치려던 카스토르의 왼팔을 속박한 가연이 놀란 듯 외쳤다. 그 외침을 희미하게나마 들으며 세르미네 또한 이 기분이 무엇인지 점차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기에 실린 힘은 자신과 빛의 수호룡이 가진 힘만이 아니었다. 세르미네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익숙한 힘 외에도 자신을 이끄는 힘이 분명 있었다.
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존재감, 분명 리슈아와 마이데의 힘이었다.
아마도 가연을 이끄는 것 또한 자신과 마이데의 힘일 터였다. 그리고 아마도 마이데 또한 자신과 리슈아의 힘을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처음으로 느낀 유대감이었다.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튼튼한 결속력이 그들을 이어주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어쩌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지면에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앞선 세 사람의 마법진과는 다르지만, 분명 삼위일체의 힘을 발하는 마법진이었다.
카스토르를 중심으로 여덟 장의 얇은 꽃잎을 가진 꽃문양이 맹렬히 타올랐다. 어둠인 듯 검고, 빛인 듯 하얀 오묘한 색을 지니고 있었다.
마이데는 무기를 들어 올리는 대신 땅에 푹 내리꽂았다. 중앙의 뾰족한 장식이 콘크리트를 뚫고 박히자, 수호석이 푸르게 빛났다.
“물의 수호룡이여! 네 저력을 보일 때가 왔다!”
그 말과 함께 마이데의 수호룡이 무기에서 빠져나와 카스토르의 몸을 뒤덮고 하늘까지 뻗어 올랐다. 상반신은 용, 하반신은 물고기인 특이한 생김새를 가진 수호룡은 물의 감옥처럼 마족을 단단히 옭아맸다.
“리슈아, 당신 차례입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루아가 가연을 지목했다. 가연은 어깨를 움찔하며 루아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대, 대체 뭐라고 외치면 좋죠?”
부끄러움에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가연을 루아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말을 외치면 됩니다.”
“아, 저기…”
가연이 계속 머뭇거리자 보다 못한 리레시아가 한 마디 나섰다.
“이봐. 겨우 삼위일체의 힘을 끌어냈는데, 너 때문에 망쳐야겠어?”
“뭐, 뭐라고?!”
가연은 화가 났지만, 리레시아의 말이 맞았다. 고작 부끄러움 때문에 이런 기회를 놓치면 큰일이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최대한 멋있게 외쳐주겠어!”
리레시아 때문에 부아가 치민 탓인지, 가연은 힘껏 낫을 들고 소리를 지르다시피 수호룡을 불렀다.
“어둠의 수호룡이여! 마음껏 날뛸 시간이다!”
‘정말로 떠오른 게 그게 맞는 건지….’
세르미네는 황당했지만, 어쨌든 가연의 무기에서는 익숙한 모습의 검은 수호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의 수호룡은 물의 감옥을 빙글빙글 돌며 카스토르의 힘을 역이용했다. 차츰 꽁꽁 얼어붙는 물을 지켜보던 세르미네는 자신의 때가 왔음을 알았다.
“빛의 수호룡이여! 삼위일체의 힘으로 적을 섬멸하라!”
검에서 하얀빛이 번쩍이더니 세르미네의 등 뒤로 빛의 수호룡이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얼어붙은 물의 감옥에 갇힌 카스토르를 향해 수호룡은 한 번 크게 포효했다.
얼음 속에서 카스토르를 붙잡아둔 채 힘을 유지하고 있는 물의 수호룡과 마족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바꾸고 있는 어둠의 수호룡, 그리고 세르미네의 수호룡 사이에 수많은 빛의 선이 생겨났다. 검은색, 푸른색, 그리고 하얀색의 빛나는 선은 마치 빛의 포처럼 끊임없이 폭발하며 주변을 환하게 비췄다.
[이놈들, 이놈들, 잊지 않겠다! 오늘의 원한을!]
깨지는 얼음과 함께 몸이 산산이 조각나면서 카스토르가 마지막 절규를 남겼다.
‘고위 마족이라도 죽기 전 단말마는 하위 마족 놈들과 다를 바가 없군.’
그리 생각하면서도 세르미네는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는 고위 마족이었다. 아무리 삼위일체의 힘으로 승산을 잡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마이데와 가연 또한 같은 생각인지 힘은 끝까지 그 위력을 잃지 않았다. 세르미네는 아직 기사로서의 경험이 부족한 가연을 걱정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적을 섣불리 얕보지 않고 신중히 대했다.
포격의 빛줄기가 점차 약해지자, 마법진을 이루던 여덟 장의 꽃잎이 지면에서 서서히 일어섰다. 그리고 마치 꽃봉오리가 닫히는 것처럼, 마족의 몸을 가둔 채 갈라진 얼음 파편을 덮었다.
팟, 하고 빛줄기가 한 가닥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그리고 일대에는 마족의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저 여느 때보다 서늘한 공기가 서서히 제 온도를 찾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끝난 건가요?”
세 수호룡의 모습도 희미하게 사라지자 가연이 루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예. 잘하셨습니다.”
루아는 보기 드물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연을 칭찬했다. 그러자 가연은 긴장이 완전히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더니 이제는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진짜로 무서웠어….”
“그래. 그래도 잘 싸웠다.”
가연의 중얼거림을 들은 세르미네가 옆에 내려온 뒤 날개를 접으며 대답했다. 내려다본 가연의 표정은 그리 개운하지만은 않아 보였다. 세르미네는 그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았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그저 언제나처럼 잘했다며 가연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세르미네는 루아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전에는 이런 일이 없지 않았나? 갑자기 삼위일체의 힘이 발동된 이유가 뭔가?”
세르미네의 질문에 루아는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바로 대답했다.
“특별한 건 없습니다. 강한 적을 상대로 서로 마음을 맞추고, 수호룡이 공명하며 연결되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계기가 없었던 것뿐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폴라로이아가 루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틀란티스의 방어체계 40% 약화. 황신호에서 적신호까지 앞으로 5분.”
아마도 루아는 사태의 중요함과 더불어 그들에게 삼위일체의 힘에 대해 깨우쳐주기 위해 일부러 대륙을 나왔을 거라고 세르미네는 짐작했다. 무녀가 기도실에서 결계를 지키지 않으면 대륙의 방어체계는 차츰 약해졌다. 적신호가 되기 전에 루아는 돌아가야만 했다.
“그래. 잘 알았다.”
세르미네는 루아를 보내기 위해 일단 그녀의 말을 수긍했다. 아직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은 많았지만, 자세한 것은 나중에 물어봐도 충분했다.
“폴라로이아, 사람들의 기억 소거와 수리 정령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루아가 이번엔 폴라로이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폴라로이아는 태블릿 PC를 몇 번 톡톡 두드린 후 작게 대답했다.
“20분 후 기억 소거 완료, 뒤이어 수리 정령 도착 예정.”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돌아가도록 하지요. 리레시아.”
마지막으로 루아가 리레시아를 부르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일어섰다.
“기껏 인간 세상까지 나와서 맛있는 케이크 하나 즐길 여유가 없다니, 무녀님도 참 큰일이야.”
익살맞게 농담을 던진 리레시아는 세르미네를 돌아보더니 갑자기 몹시 서운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르미네 님과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러면서 애처롭게 손을 흔드는데, 세르미네가 그 모습을 보고 가연을 흘긋 보니 아니나 다를까, 서서히 그의 눈이 도끼눈으로 변해갔다.
“그래. 나중에 또 보자.”
세르미네는 얼버무리며 리레시아를 향해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전투력이 약한 폴라로이아와 무녀 루아만으로는 아틀란티스를 온전히 방어할 수 없었다. 때문에 리레시아는 대부분의 시간을 대륙에 상주하며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습격에 대비해야 했다.
물론 그의 성격에 늘 대륙 안에 갇혀있는 것은 맞지 않았다. 때문에 이따금 인간 세계에 놀러 오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가연과 세르미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한숨 돌린 후 찾아온 마이데와 인사를 나눈 후, 세 사람은 순간 이동을 사용해 차례로 아틀란티스를 향했다. 마지막으로 리레시아의 모습이 사라지자, 세르미네는 마이데를 한 번 흘긋 보더니 가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우리도 돌아갈까?”
“잠깐.”
마이데가 세르미네를 멈춰 세웠다. 또다시 자신과 가연 사이를 견제하는가 싶어 세르미네는 짜증스럽게 마이데를 돌아보았다.
“뭐지?”
“저기 누가 있어.”
마이데가 손으로 가리킨 방향에서 구두 소리가 또각거리며 점차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아직은 옥상으로 올라오는 계단 아래에 있어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세르미네는 이 구두 소리가 어딘가 익숙하게 들렸다.
“설마 그 힘을 사용할 줄은 몰랐네요.”
그리고 다음 순간, 박수를 치며 등장한 것은 다름 아닌 치르티티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