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아흐 푸치? 네 녀석, 설마 전부 지옥 끝까지 몰고 갈 셈인가?”
보기 드물게 세르미네가 거친 호통을 쳤다. 하지만 치르티티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몸을 녹여 검은 비를 조금씩 지상에 흩뿌렸다.
“세르미네! 저기 봐요! 건물이…, 건물이 지워지고 있어요!”
가연의 표현은 정확했다. 건물은 무너지거나 하지 않았다. 마치 검은 비가 지우개라도 되는 것처럼, 쓸려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정적, 무(無)로의 회귀. 치르티티샤가 원하는 지옥은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존재를 없애고 그 자리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그가 가진 단 하나의 바람이었다.
달이 뜨지 않는 지옥의 밤에 세르미네는 서 있었다. 치르티티샤가 가진 원한과 분노가 공기 중에 녹아들어 살갗을 저리게 했다. 하지만 세르미네가 가진 역동의 빛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세르미네. 치르티티샤 씨가 괴로워하고 있어요. 어떡하면 좋죠?”
옆으로 다가온 가연이 세르미네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세르미네 또한 치르티티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긴 세월 분노에 사로잡혀 산다는 것, 자신을 책망하고 타인을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세르미네는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리슈아가 환생하지 않았다면, 지금 저 모습이 된 것은 자신일지도 몰랐다.
치르티티샤가 내뱉었던 말 또한 사실이었다. 선의는 항상 좋은 결과만을 낳지 않았다. 기사들과 마족의 싸움처럼 피치 못할 악도 있는 법이었다. 리슈아는 결코 차쿤탈 왕국의 멸망을 원하진 않았겠지만, 그의 한 마디가 나비효과처럼 퍼져나가 결국 한 나라의 멸망이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이해할 수 있었고, 이해할 수 있어도 용서는 할 수 없었다. 리슈아의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습지만 치르티티샤의 평안을 위해서라도 끝을 내야 했다.
[아아…. 나의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치르티티샤의 노란 눈동자 아래에 검은 눈물이 맺혔다. 녹아버린 감정을 토해내는 그의 탄식은 지상의 모든 것을 더욱 빠르게 지워나갔다. 산도, 바다도, 하늘도, 대지도….
치르티티샤 본인을 제외하면 검은 공간 속에 남은 것은 세 사람과, 그들이 디디고 선 주택가의 일부인 콘크리트 파편뿐이었다.
“환상인가?”
마침 발밑을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를 발견한 세르미네는 어둠 속으로 돌멩이를 던져보았다. 만일 환상이라면 돌멩이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분명 들릴 터였다.
하지만 공기를 가르고 어둠 속으로 빠져든 돌멩이는 바닥을 울리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도 소리가 들리지 않자, 세르미네는 이것이 환상이 아님을 알았다.
‘치르티티샤에게 이런 힘이 있다니…. 이건 말도 안 돼!’
아직 치르티티샤는 공격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었지만, 아주 조금 생각할 시간은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하던 세르미네는 기억 속에서 한 단어를 끄집어냈다.
‘그분.’
치르티티샤는 분명히 그분이라는 존재를 언급했었다. 치르티티샤를 없애기 전에 그 존재에 대해 밝혀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갑자기 세르미네를 휘감았다.
“네가 어떻게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거지, 치르티티샤? 세계를 지울 정도의 힘이면 힘들이지 않고 네 복수를 달성할 수 있지 않았나?”
세르미네는 치르티티샤를 자극하지 않고,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기 위해 신중히 말을 골랐다. 그리고 방법이 통했는지 치르티티샤는 예의 냉소를 비치지 않았다. 그저 먼 곳을 바라보며 내뱉듯 그는 세르미네의 물음에 대답했다.
[물론 이건 내 힘이 아니다. 위대한 마신…, 나는 감히 이름조차 여쭙지 못한 그분께서 내가 가진 수호석에 힘을 내리셨다. 마지막 기회라면서 말이야.]
“뭐라고?!”
세르미네는 깜짝 놀랐다. 아틀란티스 기사들이 가진 힘의 근원, 수호석을 마음대로 변형하는 존재가 있다니. 이것은 혼자서 독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마지막 기회. 그래…, 나에게 미래는 없다. 내 몸을 불살라 원하는 바를 이루는 공멸(共滅)의 힘. 전부 다 리슈아, 너를 향한 나의 원한이다!]
치르티티샤의 외침과 함께 그들의 주변에 아홉 마리의 갈색 올빼미가 나타났다. 동그란 열여덟 개의 눈이 그들을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자, 명계의 화신이 보내는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니 세르미네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마이데, 아틀란티스에 연락해! 이건 우리끼리 해결할 문제가 아니야!”
세르미네는 자신과 가연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마이데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나 마이데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고개를 젓더니 손에 쥐고 있던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이미 해봤지. 연락이 안 돼. 아예 휴대폰이 먹통이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틀란티스의 연락망은 각 나라의 협력을 받아 폴라로이아가 설계한 뒤 아틀란티스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범세계적인 재난이 일어나도 아틀란티스와는 언제나 연락이 됐었고, 그것을 상식처럼 여겨왔었다.
결국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아틀란티스도 사라진 건가? 말도 안 돼….”
세르미네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좌절과 절망이 밀려와 뼛속까지 시리도록 사무쳤다.
아무리 모든 것이 사라져도 굳건할 거라 믿었던 아틀란티스였다. 아니 자신이 있는 한 아틀란티스는 늘 건재하고, 번영해야만 했다. 두 번은 잃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견고한 아틀란티스의 결계마저 뚫고 소멸하게 하다니, 치르티티샤의 배후에 있는 마신의 존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두 번이나 느꼈으면 이제 이해하겠지, 당신도? 소중한 것, 지켜야 할 것을 잃어버린 고통을 말이야…!]
“아니야, 치르티티샤 씨가 바라는 건 이게 아닐 거예요!”
잠자코 듣고 있던 가연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세르미네는 굉장히 익숙한 느낌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가연의 옆모습에서 옛날의 리슈아가 보였다. 항상 웃고는 있지만, 자기주장 하나만큼은 강했던 리슈아였다. 눈치 없고, 화를 내면 금세 위축되긴 했어도 그는 결코 자기가 뜻하는 바를 접지는 않았다.
“치르티티샤 씨가 정말 이걸 바랐다면 리슈아가 죽기 전에도 그를 혼자 꾀어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그러지 않았다는 건, 사실 리슈아에게 하는 복수가 무의미한 것을 알고 있는 거잖아요!”
[또 그 입만 살아서 누구를 현혹하려 하는 것이냐. 나는 리슈아를 죽이고 싶었고, 그래서 너희에게 접근했다. 단지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야. 가장 교묘하게, 고통을 안기면서 죽일 수 있을 때를 말이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치르티티샤의 눈에서는 여전히 검은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자신의 일을 후회하는 것인지, 업을 달성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너를 죽였을 때, 나는 모든 걸 다 가진 기분이었다. 나의 신께서도 몹시 기뻐하셨지. 하지만 네가 다시 살아나자, 그분은 분노하셨다. 그리고 나는…, 점차 자포자기했다. 나는 그저 싸우고, 다스리는 일밖에 하지 못했지만, 목적을 위해 가식을 뒤집어쓰고 너희 사이를 이간질해야 했다. 지쳤어…. 조금만 더 큰 힘이 있었더라면, 그분과 같은 힘이 있었더라면…!]
치르티티샤의 한탄에 세르미네는 그의 수상했던 행동과 말들을 전부 이해했다. 어딘가 어설프게 짜인 말들과, 갑작스레 태세를 전환해 자신의 목적을 밝힌 것들. 그 모두가 지쳐버린 치르티티샤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너를 저승의 길동무로 데려가마…!]
"잠깐만,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것이…!"
세르미네가 황급히 치르티티샤를 막으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치르티티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을 지켜보던 아홉 마리의 올빼미가 거센 날갯짓을 했다. 마치 태산도 움직일 것만 같은, 거센 바람이 세 사람에게 불어닥쳤다. 세르미네는 가연의 손을 꼭 잡고 어둠 속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무딘 애를 썼다.
[망자의 군대, 옥수수 인간이여! 사신의 적이 여기 있나니, 지옥의 길동무를 데려가라!]
바람이 강한 파동을 남기고 휙, 사라졌다. 동시에 아홉 마리의 올빼미도 모습을 감췄다.
찰나의 적막 후, 쿵쿵거리는 소리가 아득한 너머에서부터 들려왔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것은 발소리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수십, 아니 수백이 넘는 자들이 소리를 내며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세르미네, 저기를 봐. 엄청난 숫자의 군대야!"
강풍 속에서 겨우 떨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은 마이데 또한 발소리를 들었다. 그는 소리의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르미네 또한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는 마이데의 반대편을 살펴보았고, 멀리서 다가오는 기이한 형상의 무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실로 옥수수 인간에 걸맞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옥수수 잎과 줄기를 얽어 만든 몸통과 팔, 다리에 머리는 달려있지 않았다. 언뜻 보면 허수아비와도 같았지만, 그들의 손에는 낫과 긴 작대, 날카롭게 벼렸지만 매우 단촐한 모양새의 창 등 아주 옛날에 쓰던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그런 자들이 세 사람을 에워싸고 사방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위력은 그리 커 보이지 않았지만, 말도 안 되는 숫자였다.
말 그대로 망자의 군대였다. 세르미네와 마이데만 있었다면 어떻게든 해치울 수 있었지만, 옆에는 가연도 있었다. 소수의 적과 싸우는 것이라면야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이런 대다수의 적을 가연은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세르미네 또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충분히 시간을 끈 덕분에 세르미네의 힘은 거의 평소만큼 돌아와 있었다.
'이제 또다시 삼위일체의 힘을 쓸 때가 왔군.'
치르티티샤와 마지막 결판을 지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