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의 루드베키아-56화 (56/87)

56화

“마이데,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이지?”

두 사람이 동시에 외치며 부엌으로 가니,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프라이팬을 들고 마이데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태워버렸네…. 하핫, 초보자니까 그럴 수도 있지!”

“흐음….”

가연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마이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마이데는 과장된 몸짓으로 뒤로 물러서더니 처량한 목소리로 가연에게 말했다.

“미안해. 재료 여분은 있으니까 다시 도전해볼게.”

“아니, 음식 태운 정도로 제가 화를 낼 리가 없잖아요. 그보다 마이데도 그렇고, 세르미네도 그렇고.”

갑자기 자신까지 호명하자 세르미네는 마음을 바늘로 찔린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등골에 날카롭게 느껴지는 한기를 애써 무시하며 세르미네는 태연하게 물었다.

“왜 그러나?”

가연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 이내 걱정스럽게 말했다.

“치르티티샤 씨와 싸운 이후로 생각에 빠져 있는 시간이 너무 많은 것 아니에요?”

“….”

마이데도, 세르미네도 할 말이 없었다. 눈치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할 가연이 이런 말을 꺼낼 정도면, 아마 제발 알아달라고 온몸으로 티를 낸 모양이었다.

마이데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아마 세르미네 자신과 그리 다를 바는 없을 터였다. 그는 가연, 즉 리슈아의 정체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리레시아는 생각 없이 말을 꺼냈겠지만, 세르미네는 줄곧 그 말이 신경 쓰였다.

[저 녀석 위험한 존재는 아니지?]

당연히 리슈아가 위험할 리 없었다. 이렇게 무해하고, 순진한 사람이 또 있냐고 물으면 세르미네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나 마이데가 리슈아를 신뢰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 또한 이유 없는 신뢰를 보내줄 거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 폴라로이아나 루아는 내색하지는 않아도, 리슈아가 무해하다는 근거를 원할 거라 세르미네는 짐작했다. 리레시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쩌면 마신의 힘과 필적할 만한 힘을 갖고 있는 존재라니….’

그는 이따금씩 들리는 목소리도 신경 쓰였다. ‘회색의 순례자’. 리슈아와 얼핏 닮은 목소리를 가진 그는 대체 누구일까.

세르미네는 또다시 스스로 생각에 빠진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마이데가 태운 검고 바삭거리는 고기들을 정리하는 가연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가연을 내려다보는 마이데가 있었다.

‘…!’

세르미네는 깨달았다. 마이데의 표정은 자신과 닮아있으면서도, 회색의 눈동자만큼은 더욱 멀고 깊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그 종착지가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이데의 죽은 아내, 세타.

저 녀석은 또다시 리슈아에게서 자신의 아내를 겹쳐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이데는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리슈아를 향한 애정이 사실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를,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도.

“마이데,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마이데의 시선을 가연 역시 느꼈는지 음식물 쓰레기를 정리하다가 그를 바라보고 물었다. 그러자 마이데 역시 생각에서 빠져나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한 번 더 요리에 도전해볼까?”

마이데가 냉장고에서 숙주나물 봉지와 얼린 고기를 꺼내며 과장되게 웃어 보였다. 세르미네는 그를 한 번 흘겨보고는 몸을 홱 돌렸다.

*

다행히 두 번째에는 성공한 마이데의 요리 덕분에 그들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세 사람이 둘러앉은 식사 자리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치르티티샤가 없어 더욱 편안한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세르미네는 조금 전 본 마이데의 눈빛을 잊지 못했다. 그동안 고위 마족이며 치르티티샤까지, 거대한 적들을 상대하느라 잠시 잊고 있던 감정이 스멀스멀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났다.

분노, 경멸, 그리고 그 속에 섞인 질투심.

세르미네는 그 마음의 정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일차원적으로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분출하는 것을 삭힐 뿐이었다.

‘역시 저 녀석은 리슈아와 함께 있을 자격이 없어.’

이전에는 둘만의 동거를 위해 어떻게 해서든 마이데를 때어놓으려 했지만, 그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르미네는 깨달았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가연을 어서 리슈아로 각성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자신과의 과거, 연인이었던 옛 기억들이 떠오르면 더 이상 마이데따위는 적수가 못될 터였다.

게다가 세르미네가 노리는 것은 또 있었다.

‘어쩌면…, 마신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리슈아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우라노스는 밝힌 적이 없었다. 하지만 리슈아가 사라진 지구를 다시 살릴 정도의 힘을 가진 자라면, 아무 이유 없이 우라노스가 그를 전선에 세우지 않고 뒤에서 보호만 했을 리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리슈아가 세르미네에게 말해야 할 의무 또한 없었다. 과거의 리슈아가 홀로 알고 있던 것, 그것을 알아내면 마신과도 대적할 수 있을 거라 세르미네는 생각했다.

식사가 끝나고 마이데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자, 세르미네는 가연을 불렀다.

“세르미네? 왜 그래요?”

설거지를 끝내고 자신의 방으로 가려던 가연은 세르미네의 손짓에 그와 함께 거실의 소파에 자리 잡았다.

“가연아, 요즘 무언가 이상한 일이나…, 떠오르는 건 없지?”

가연은 잠시 검지를 턱에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세르미네를 바라보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뭔가…, 특별한 건 없어요.”

“그런가….”

세르미네는 속이 타들어 갔다. 조바심이 나 억지로라도 가연의 머릿속을 열고 제 기억을 넣어주고 싶었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어떤 말들을 나눴고, 어떤 행동을 함께했는지….

차라리 동화책처럼 입맞춤으로 모든 기억이 돌아온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텐데.

하지만 기억도 없는 가연에게 손잡는 것 이상의 일은 할 수 없었다. 폭력은 휘두르고 싶지 않았고, 거기다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애정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자신에 대한 감정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하다못해 마신에 관한 실마리라도 찾아야 했다. 세르미네는 혹시나 싶어 가연에게 넌지시 물었다.

“혹시 너도 ‘회색의 순례자’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나? 환청처럼 말이야.”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가연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뇨. 그런 말은 들어본 적 없어요.”

“…그래.”

세르미네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자신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지 가연의 표정이 점차 시무룩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을 안겨줄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

밤이 깊고, 세르미네는 여느 때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위해 잠에 든 시간이었다. 꿈에서 모처럼 옛 아틀란티스가 나온 덕에 그는 한창 기쁨을 맛보는 중이었다.

“세르미네, 세르미네.”

갑자기 그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확 열리고, 세르미네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문가에는 가연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 무슨 일이 있나, 가연아. 왜 그래?”

그러나 가연은 대답 대신 세르미네에게 달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연신 흐느끼는 가연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있지만, 세르미네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한참 뒤, 겨우 진정한 가연이 딸꾹질을 하며 세르미네를 올려다보았다.

“또, 또 나왔어요. 그 남자…, 뱀 같은 그 남자요.”

“뭐?”

세르미네는 또다시 정신 계열 마족이 나타났나 싶어 황급히 가연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소동을 눈치채고 나온 마이데도 함께 있었다.

“왜 그래, 가연이가 악몽이라도 꿨대?”

마이데의 물음을 세르미네는 어깨 너머로 무시하고는 가연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단정히 정리된 방 안을 구석구석 살펴보아도 정신 계열 마족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세르미네는 밖으로 나와 마이데에게 말을 건넸다.

“아틀란티스에 연락할 수 있나? 폴라로이아에게 혹시 이곳에 정신 계열 마족이 있는지 조사를 해 달라고 해줘.”

“그런 일이라면야 얼마든지.”

그리 말하면서도 마이데는 세르미네의 방에서 초조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가연을 흘긋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마지못해 자신의 휴대폰을 열고 폴라로이아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세르미네는 아직도 표정을 못 펴고 안절부절못하는 가연을 우선 부엌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를 식탁 앞에 앉히고는 우유 한 팩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따뜻하게 데운 뒤, 꿀을 넣고 잘 섞어 가연의 앞에 내밀었다.

“잘 마실게요.”

가연이 두 손으로 머그컵을 잡고 우유를 홀짝이는 사이, 마이데가 돌아와 빈 자리에 앉았다. 그는 가연을 한 번 보고, 세르미네를 보더니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저었다.

“아니래. 정신 계열 마족이 여기 근처에 나타난 흔적은 없다더군.”

“그런가. 그럼 단순한 악몽일 테니, 큰 걱정은 덜었군.”

말은 이렇게 했지만, 치르티티샤까지 죽은 지금 어째서 가연이 계속 그 마족의 꿈을 꾸는지 알 수 없었다. 세르미네는 리슈아를 괴롭게 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배제하고 싶었다. 게다가 그 마족은 자신까지 계속 괴롭혀왔다.

어떻게 해야 이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을 것인가.

“세르미네.”

침묵을 깨고 가연이 그를 불렀다.

“그 마족은 대체 누구예요? 대체 누구기에 세르미네도 힘들어하고, 저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거죠?”

기억이 없는 가연은 그와 자신이 얽힌 일들을 하나도 알 리 없었다. 세르미네는 아주 단편적으로, 상처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이야기했었고, 얼마 전 모두가 모여 이야기를 나눈 자리에 가연은 없었다.

“그건….”

“세르미네. 이제는 이야기를 해도 된다고 생각해. 가연이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장했고, 아픈 기억이라고 언제까지 감춘다면 각성은 영원히 불가능할 거야.”

잠자코 듣고 있던 마이데가 모처럼 적절한 조언을 했다. 세르미네 역시 그것을 알기에 불쾌했지만, 그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이젠 이야기를 해야겠지.”

가연이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세르미네와 마이데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세르미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네게 이제 알려주마. 그 마족… 듀믈레와 나, 리슈아, 그리고 이 녀석까지 얽힌 옛날이야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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