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의 루드베키아-66화 (66/87)

66화

“그렇게 된 거야.”

마이데의 말에 세르미네는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그의 긴 이야기에 세르미네 또한 추억에 빠져 꿈을 꾼 기분이었다. 시간은 벌써 두 시간이 넘게 지나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분명 마이데의 기억 속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는 그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마이데가 가진 리슈아와의 기억을 자신은 하나도 알지 못했다. 분명 자신은 리슈아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르미네를 통해 그는 기억을 잃은 쪽도 답답하고 괴롭지만, 기억을 안고 있는 쪽도 마음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인지 마이데의 괴로움을 가연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 모든 마음을 가연은 표정에, 목소리에 담고 있었다. 세르미네는 작게 열린 문틈으로 가연을 보면서 속이 탔다.

‘아니야. 그래도 마이데가 널 보는 시선은 틀렸어.’

그가 차라리 ‘리슈아’라는 사람을 사랑했었더라면, 세르미네는 화는 났을지언정 그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더욱 리슈아의 사랑을 갈구하는 방향을 택했을 터였다. 하지만 세르미네가 보는 마이데는 리슈아를 자신의 아내 ‘세타’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건 완전히 리슈아를 기만하는 일이었다.

리슈아는 어디까지나 리슈아였다.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제 막 아내를 잃은 슬픔에 착각했을 거라고 이해해 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세르미네는 더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지금 일어난 척 연기하며 슬쩍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어? 세르미네, 일어났어?”

가연이 자신을 향한 친근한 인사에 세르미네는 우월감을 느꼈다. 적어도 마이데에게는 이런 인사를 해 주지 않는 가연이었다.

역시나 마이데를 보니 세르미네가 중대사를 방해하기라도 한 듯 몹시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세르미네는 그런 마이데를 무시하고 가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다음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향했다.

“너, 사실 다 듣고 있었지?”

마이데가 날카롭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세르미네는 미지근한 물을 마시다 말고 마이데를 바라보았다.

“뭘 말인가?”

세르미네는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그것이 마이데를 더욱 화나게 했는지 그는 안경 너머로 눈을 날카롭게 뜨고는 세르미네를 노려보았다.

“마이데? 무슨 일 있어요?”

가연이 그리 물으며 마이데에게도 물 한잔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창문 너머 아직 어둑어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이 참 길군.”

*

시간은 흐르고, 몇 번의 밤이 찾아와도 그때마다 아침 역시 어김없이 밝아왔다. 늦은 겨울의 부드러운 햇살이 곧 봄이 온다고 알리고 있었다. 옥상 정원의 나무들도, 길거리의 화단과 가로수들도 잊어버린 생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생기를 찾지 못한 것은 마이데와 세르미네였다. 가연은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마이데에게 가급적 편히 말을 하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세르미네가 어디서인가 나타나서는 가연의 시선을 마이데에게서 돌리곤 했다.

세르미네도, 마이데도 가연의 말에 일희일비하며 천국과 지옥을 매일 넘나들고 있었다. 그 저울의 추를 쥐고 있는 것은 가연이었지만, 본인은 자각을 하지 못했다.

세르미네는 평소에 본인이 인내심이 얕은 편은 아니라고 여겨왔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가연을 자신에게 묶어두고 싶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연은 곧 새 학기였다. 다음 주면 학교에 다시 나가야 하는 가연은 그 사실을 저녁 식사 시간에 두 사람에게 알렸다.

“학교라면 뭐, 하는 수 없지. 마족이 나오면 바로 연락해야 한다, 알았지?”

마이데는 이렇게 말을 하고 넘어갔지만, 그 역시 탐탁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세르미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가연이 휴학이나 자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마이데 하나만으로도 귀찮은데, 그 학교라는 곳에서 행여나 이상한 자들이 꼬이기라도 하면….’

이제는 마족보다 그 사실이 더욱 걱정이었다. 세르미네는 가연이 휴학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자신이 대학교에 입학하겠다고 나서려 했다. 서류 조작은 폴라로이아에게 부탁하면 간단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루아 앞에서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사심을 위해 서류를 조작할 수는 없습니다. 세르미네, 당신의 편입은 마족 퇴치에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군요.]

그러면서 심지어 루아는 마이데 역시 같은 일을 청하러 왔다 전했다.

‘마이데, 이 녀석!’

세르미네는 이를 갈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루아는 완고했고, 세르미네는 그 앞에서 억지를 부릴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가연과 있는 시간을 더욱 늘리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책을 읽으려는 가연을 세르미네는 일으켜 세웠다.

“세르미네? 어디 가?”

가연이 묻자, 세르미네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앞으로 학교에 가면 시간이 없을 테니, 지금이라도 훈련을 더욱 강하게 해야 하지 않겠나.”

“뭐? 이제 막 밥 먹고 쉬려는 참인데?!”

가연은 싫다는 의사를 완곡히 돌려 계속 표현했지만, 세르미네는 막무가내였다.

“지금 달리 할 일이 있나?”

결국 계속된 물음과 재촉에 가연은 지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세르미네와 함께 공원을 찾았다.

“그럼 딱 다섯 바퀴만 도는 걸로 하자. 그건 괜찮지?”

가연이 딱 잘라 말하자, 세르미네도 하는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열 바퀴 이상을 돌며 같이 있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가연이 진심으로 화를 낼 수 있었다.

발을 가볍게 떼고 달리기를 시작하자, 세르미네는 금세 상념에 빠져들었다. 가연이 옆에서 보조를 맞추다 앞질러 간 것도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리슈아가 각성을 할지, 어찌해야 다시 나만을 바라보고 생각해줄지….’

마음 같아서는 다리라도 부러뜨려 강제로 집에 가두고 싶었다. 마이데를 내쫓고 계속 옛이야기를 들려주어 자신에 관한 기억만 찾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단단히 붙잡고 있는 이성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괴리감이 세르미네를 더욱 괴롭게 했다.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은 또 있었다. 자신은 모르는 리슈아가 있다는 것, 치르티티샤와 마지막 전투를 치렀을 때 보여준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세르미네는 뱃속에 공허함이 꽉 들어찬 느낌이었다.

마치 리슈아가 다른 존재가 되어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사실 리슈아는 자신이 알던 그 리슈아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 두려움이 밤마다 침대 밑의 괴물처럼 그의 온몸을 짓누르고 허상을 속삭였다.

[리슈아를 네 것으로 만들어. 날개를 뺏고, 목소리를 뺏고, 네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

그런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세르미네는 몸을 떨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자신의 마음이었다. 아주 깊은 곳에 숨겨진 추악한 욕망, 자신 또한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스스로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이 멀어 리슈아의 목을 조르고, 그 연약한 몸에 사슬을 감아버릴 것 같았다. 그런 충동과 안 된다는 마음, 결국 세르미네의 행동은 안절부절 이상한 방향으로 튀기 일쑤였다.

“세르미네? 벌써 다섯 바퀴가 넘었는데?”

가연의 목소리에 세르미네는 정신을 차렸다. 페이스 조절에 실패했는지 다리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자각하니 통증이 몰려와 세르미네는 근처의 벤치에 걸터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불러도 대답을 안 하길래 걱정했잖아. 무슨 일 있어?”

세르미네는 가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멍하니 초점을 잃은 금색 눈동자는 이제 막 재가 되어 사그라드는 별의 말로같이 보였다. 가연은 그 막연한 느낌, 두려움에 뒷걸음질 쳤다.

“세르미네?”

“응?”

혼돈은 아주 잠깐이었다. 가연은 스스로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평소의 세르미네였다.

“아니, 아니야. 이제 들어가자. 조금 춥다.”

아직 겨울의 여파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밤에는 꽤 쌀쌀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기분도 몽롱하고 이상했기에, 세르미네는 가연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그날 밤, 세르미네는 또다시 악몽을 꾸었다. 그러나 늘 꾸던 뱀 마족, 듀믈레와 리슈아에 관한 악몽이 아니었다. 그 악몽은 치르티티샤를 없애고 난 이후 완전히 그에게서 사라졌다.

주체는 다름 아닌 리슈아였다. 그가 자신 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고 있었다. 잔뜩 눈물을 머금은 채 세르미네를 내려다보며, 작은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하고 있었다.

“리…슈아?”

꿈이었기에 목이 졸리는 가운데서도 목소리가 생생히 나왔다. 그 덕분에 세르미네는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충격이었다.

“리슈아, 왜….”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갑자기 리슈아의 표정이 휙 바뀌었다. 순식간이었다. 마치 가면을 바꿔 쓴 것처럼, 그는 입 끝을 귀까지 걸치고 웃고 있었다.

다음 순간, 세르미네는 잠에서 깼다. 마치 손의 느낌이 현실처럼 느껴져 세르미네는 목에 손을 대 보았다.

“이게 무슨….”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당연히 목에는 손자국 따위는 남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에 보여준 리슈아의 섬뜩한 웃음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세르미네는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가연이 무얼 하고 있는지, 혹시 그도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지 싶어 걱정이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가연이, 리슈아가 변해버린 것은 아닌지 그것이 걱정이었다.

가연의 방문을 조금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새근거리며 잠든 가연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언제나처럼 그대로였다. 안심한 세르미네는 문을 닫고 발을 돌리려 했다.

- 딸랑….

그의 귓가에 종소리가 들렸다. 세르미네는 유난히 크게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그의 귓가에 숨결 같은 바람과 함께 속삭임이 들려왔다.

[네가 본 것, 꿈일까, 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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