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정말! 언제는 학교를 그만두라더니 이제는 학교가 재밌어서 약속도 깨고 말이야!”
계단을 내려가며 가연은 분통을 터뜨렸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 비상계단에서 그의 화를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아래까지 이어진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겨우 쇼핑몰 위층까지 와서야 가연은 비상 출입구를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 내려가 쇼핑몰에 도착한 가연은 사람들이 보이자 마음을 조금 놓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투덜거리면서 성큼성큼 보폭 크게 걸었고,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를 흘긋거리며 보다 제 갈 길을 갔다.
어디로 갈까 배회하던 가연은 쇼핑몰 가운데에 위치한 원형 광장의 벤치에 앉았다. 손에는 근처 가게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채였다.
‘오늘은 여기를 좀 돌아다니다가 친구 집에 가서 하룻밤 보내야겠다.’
가연은 이렇게 화가 나본 적이 없었다.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세르미네와 마이데가 약속을 깬 것이 그렇게 크게 화를 낼 일인지, 약속 하나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도 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 때문에 가연은 이렇게 화가 밀려올 때 어찌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내심 세르미네가 잡으러 와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얼굴도 보기 싫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어지러운 마음을 가연은 주체할 길이 없어 애꿎은 아이스크림만 거칠게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제아무리 맛있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가연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마 전 용돈을 받은 터라 지갑은 꽤 두둑했다. 가연은 쇼핑을 하며 화를 풀기로 마음먹었다.
가연은 쇼핑몰 구석구석을 전부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것을 용돈이 허락하는 한 모조리 사들였다. 조그만 인형에서부터 마음에 드는 필기도구, 노트까지 사고 났더니 지갑은 홀쭉해졌지만, 기분은 상당히 풀어졌다.
“역시 스트레스를 푸는 데는 쇼핑이 최고야!”
딸기 크레이프를 입에 물고 옥상 공원에 앉아서 오늘 처음으로 가연은 웃었다. 달콤한 크레이프만큼이나 마음도 제법 부드럽게 녹았지만, 그렇다고 세르미네와 마이데를 용서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이 왜 이런 마음을 품었는지 조금씩 의구심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두 사람이 즐겁게 놀든, 누구와 어울리든 나와는 상관없잖아!’
약속을 깬 것이 고의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제아무리 마족이 나타나도 빠르게 해치우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두 사람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따라와서 약간 성가시긴 해도, 이렇게 화가 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왜 이러는 건지, 어째서 마음이 쓰린 건지 가연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고작 우정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연은 도리질을 치며 애써 밝은 목소리를 입 밖에 냈다.
“아니야. 역시 학교까지 두 사람이 따라오니까 성가셔서 그런 것뿐이야!”
“그래?”
갑자기 코앞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가연은 우왓, 하고 놀라 하마터면 크레이프를 손에서 떨어뜨릴 뻔했다.
그의 앞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두꺼운 회색 티셔츠를 입고 후드를 머리 깊이 눌러쓴 소년은 가연의 또래쯤 되어 보였다. 어딘지 가연과 비슷해 보이는 외모를 가졌지만,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특이하게 세르미네와 같은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르미네처럼 찬란히 빛나는 눈동자가 아니었다. 어딘가 탁하고 음울한 기운을 가진 눈과 일자로 다문 입술, 분명 꽤나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가까이 가기 힘든 인상이었다.
그러나 가연이 그런 것을 신경 쓸 리가 없었다. 눈치 없는 것도 때론 도움이 된다고, 가연은 소년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넌 누구야? 길을 잃었어?”
그러나 바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약간의 뜸을 들인 후, 소년은 작은 목소리로 단 두 음절만을 내뱉었다.
“애쉬.”
하마터면 소리를 놓칠 뻔했지만, 가연은 용케도 그 단어를 알아들었다. 그리고는 해맑게 웃으며 소년에게 되물었다.
“네 이름이 애쉬야?”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가연은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애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어? 혹시 길을 잃은 거야? 출구 정도는 안내해줄 수 있는데….”
그러나 애쉬는 묵묵부답이었다. 가연은 더 이을 말을 찾다가 불쑥 먹고 있던 크레이프를 내밀었다.
“이거 맛있는데, 같이 먹을래?”
말해놓고 가연은 화들짝 놀랐다. ‘먹던 걸 주다니, 이런 실수를!’ 싶었던 가연은 애쉬의 손을 잡고 크레이프 가게로 데려갔다.
크레이프 가게는 옥상 공원 밖에 있는 노천카페였다. 가연은 선심이라도 쓰는 듯 엣헴, 하더니 진열장 속의 크레이프를 가리켰다.
“애쉬는 길도 잃었고, 내 실수도 있으니 뭐든 한가지 사줄게. 골라봐!”
그러나 애쉬는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난 네가 아니야. 커피 하나면 돼.”
“어? 응. 그, 그래.”
가연은 약간 무안해졌지만, 그의 말대로 따뜻한 커피 두 잔을 주문해 야외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애쉬는 따뜻한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두 손으로 잡으며 한참 컵 뚜껑을 노려보았다. 보다 못한 가연이 애쉬에게 물었다.
“커피가 입에 안 맞아?”
“이 정도 온기로는 부족해….”
“무슨 뜻이야?”
가연에게는 커피가 따뜻하다 못해 약간 뜨겁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런데도 온기가 부족하다니, 애쉬는 추위를 굉장히 잘 타는구나 싶어 가연은 목도리를 벗어 내밀었다.
“이거라도 할래?”
가연은 애쉬가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애쉬는 의외로 얌전히 가연의 목도리를 받았다. 그제야 가연은 마음을 조금 놓았고, 마치 오랜 친구였던 것처럼 애쉬에게 수다를 늘어놓았다.
“아니, 그래서 말이야. 세르미네도 마이데도 언제는 ‘학교에 안 가면 안돼?’ 이러더니, 이제와서 자기들이 더 즐기고 있잖아. 영화 보러 가잔 약속도 잊어버리고 말이야!”
가연은 분통을 터뜨리다 하마터면 크레이프를 쥔 손에 힘을 실을 뻔했다. 내용물이 쏟아져나오는 참사를 면한 크레이프를 가연은 얌전히 접시 위에 올려놓았고, 그 모습을 애쉬는 말없이 지켜보다 한마디 툭 던졌다.
“그들은 즐거우면 안 되는 건가?”
“아, 아니. 즐거워도 되지만…, 아니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스스로가 1순위가 아니라서 화가 난 것이군.”
가연은 뜨끔했다. 자신도 몰랐던, 아니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만난 지 30분도 되지 않은 사람이 간파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세르미네는 자신만을 바라봐주었다. 가연은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었다.
그런 세르미네가 단 한 번 자신의 약속을 어겼다고, 딱 한 번 그 스스로를 우선시했다고 이토록 화가 나다니, 자신의 속이란 어떻게 이렇게 좁을 수가 있는지!
당장 가서 사과해야만 했다. 제멋대로 집을 뛰쳐나온 것을 사과해야만 했는데, 발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 그래. 애쉬랑 조금 놀다가 집에 들어가지 뭐.’
결국 그리 마음먹은 가연은 애쉬와 노는 것에 더욱 집중하기로 했다. 애쉬는 그런 가연을 빤히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냈다.
“이거 받아.”
“응?”
애쉬가 짤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열쇠고리였다. 단순한 톱니바퀴 모양이었지만, 어딘가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광택이 나는 은색의 톱니바퀴를 가연은 계속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도 하고, 굉장히 낯익은 기분이 들었다.
“애쉬, 이게 뭐야?”
그러나 애쉬는 대답이 없었다. 가연은 뭐, 좋은 거겠지 싶어서 자신의 휴대폰에 달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고마워. 잘 어울린다!”
“그래. 너와 참 잘 어울린다.”
“그, 그래?”
가연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칭찬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크레이프와 와플 등을 주문해 먹으며 한창 수다를 떨었다. 물론 말을 하는 쪽은 대부분 가연이었고, 애쉬는 적당히 고개만 끄덕이며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애쉬가 난데없이 입을 열었다.
“온다.”
“응? 오긴 뭐가 와?”
가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쿵, 하고 옥상 정원으로 내려왔다. 다행히 사람이 많이 없어 인명피해는 나지 않았지만, 간간이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족, 마족이…!”
해파리처럼 물컹하게 생긴, 촉수를 여럿 가진 마족이 흐늘거리며 서 있었다. 크기 때문에 겁먹기 십상이었지만, 사실은 하급 마족이었다. 하지만 아직 가연의 눈썰미로는 거기까지 알아낼 수 없었다.
“애쉬, 대피해! 여긴 내가 맡을게!”
“네가?”
애쉬는 묘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가연은 그 사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휴대폰을 열어 그는 세르미네에게 연락을 하려 했다.
“아앗!”
하지만 마족의 긴 촉수가 뻗어와 가연의 몸을 돌돌 말아 자신 가까이로 끌고 갔다. 덕분에 휴대폰을 놓친 가연은 애쉬에게 외쳤다.
“도망쳐, 애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