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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루드베키아-72화 (72/87)

72화

세르미네가 줄곧 기다려왔던 말이었다. 그는 리슈아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는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듣고 싶어서, 폴라로이아나 루아의 입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제 입으로 묻는 것을 꾹꾹 참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세르미네나 마이데 등 다른 사람과는 달리 가연은 폴라로이아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준비라뇨? 무엇을 준비해야 하죠?”

그러자 폴라로이아에게서 즉각 대답이 돌아왔다.

“각성 시 외부와의 연결고리 차단, 아틀란티스 출입 가능.”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가연은 일단 믿을만한 루아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루아는 가연의 마음을 상처입히지 않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세르미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세르미네는 이 순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예행연습만 마음속으로 수백 번을 해왔었다. 마이데가 자신이 설명하겠다는 것을 제지하고, 세르미네는 입을 열었다.

“예전에 아틀란티스는 폐하를 따라온 이주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했었지?”

세르미네의 물음에 가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억하고 있군. 그들 모두가 인간 세계에 대한 기억을 잃은 건 아니지만 남은 자와의 연은 끊어졌지. 게다가 기사가 되는 자들은 인간과의 유대를 막기 위해 인간 세계에 대한 기억까지 지웠다. 후대에 아틀란티스에서 태어난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반대로 아틀란티스를 떠나는 자들은 그들의 기억을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설 속의 이야기로 남겨는 놓되, 만에 하나를 대비해 자세한 아틀란티스의 정보를 밖으로 가져가지 못하도록 말이죠. 물론 예외로 인간 세계의 정보를 넘겨줄 자들의 기억은 남겼습니다.”

루아가 세르미네의 말에 부연 설명했다. 아마 그 대표적인 예가 이전에 마이데에게 들었던 나흐딘의 조상일 거라고 가연은 추측했다.

“리슈아는 우라노스 폐하가 어디선가 데려온 후계자이기 때문에 기사도 아니었고, 어쨌든 우리에겐 처음부터 아틀란티스인이었다. 그러므로 기억을 지울 필요도 없었지만, 가연이 너는 다르지. 각성을 하게 되면 기억이 지워질지도 모른다.”

“기억이… 지워진다고요?”

가연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라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세르미네에게 들은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현실로 다가오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현재 가족들, 친구들과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겁니다. 그럴 바에는 서로 기억이 없어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루아의 말에 가연은 큰 충격을 받았다. 루아 또한 가연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물론 그녀가 틀린 말은 한 것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한 모양이군요.”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마이데가 급히 말을 돌렸다.

“그래.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잖아. 후대에 아틀란티스의 기사가 된 나나 리레시아 같은 경우는 물론 인간 세계와의 연은 전부 끊어졌어. 하지만 기억은 남아있단 말이지. 내가 인간이었을 때 누구였고, 무얼 했으며 누구와 어떤 관계였는지 전부 알고 있어.”

“인간들도 그를 기억은 한다만, 후대의 기사들은 워낙 사정이 안 좋아서… 거의 잊힌 거나 다름이 없긴 하지. 하지만 가연이 너는 다르지 않나. 가족도 있고….”

가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들은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다는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확실한 답은 하나도 없었다.

“그, 그럼 대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틀란티스의 시스템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을 기존의 기사로 생각할지, 후대의 기사로 생각할지, 혹은 예외의 경우로 생각할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건, 시스템은 당신을 우선으로 최선의 선택을 내릴 겁니다.”

루아가 조금 더 다정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모른 채, 기억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연은 안게 되었다.

세르미네로서는 상상도 못할 감정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아틀란티스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기억이 지워지거나, 인간과의 유대가 사라지는 일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가연이 겪는 불안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는 화제를 돌려 좋은 쪽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려 했다.

“그래도 아틀란티스는 꽤 볼만한 곳이다. 네 기억이 돌아오고, 그곳으로 갈 수 있게 되면 꼭 나쁜 것도 아니지.”

“맞아. 네가 가꿨던 정원을 유지한다고 모두가 얼마나 애를 썼는데, 와서 한 번 봐야 하지 않겠어?”

마이데까지 합세하자 가연의 기분도 조금 누그러졌다. 그 서툰 세르미네와 루아, 그리고 마이데까지 모두가 가연을 위로하고 달래주려 하고 있었다. 폴라로이아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가연은 알 수 있었다.

“그럼 이 이야기는 일단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마이데, 또 다른 할 말이 있지요?”

루아가 이번에는 마이데를 보았다. 그러자 마이데는 집에 돌아와 밀폐된 봉투 안에 잘 넣어둔, 톱니바퀴 모양의 망가진 열쇠고리를 꺼냈다.

“이게 조금 전 말한 그거야. 폴라로이아도 말했지만 외부의 개입이 있었다고 했지? 그자가 가연에게 준거래.”

“으음….”

여전히 투명한 봉투 위에 올려진 채 마이데가 조심스럽게 들고있는 열쇠고리를 루아가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지팡이를 들어 열쇠고리 위에 가져다 대보았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위험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런 자가 준 물건이라면 보통 물건은 아니겠군요.”

“나는 최소한 그 물건에 상징적인 의미 정도는 있을 거라 본다. 안 그래, 폴라로이아?”

세르미네의 물음에 폴라로이아는 다시 한번 태블릿PC를 두드리더니 대답했다.

“톱니바퀴의 의미 불명. 이 별에서 나는 재질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진 물건.”

“아무래도 이건 아틀란티스의 고서를 찾아보는 게 좋겠군요. 하지만 거긴….”

루아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가연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린 후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뇨. 고서가 있는 곳은 왕과 후계자, 그리고 옛 기사단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금서고라서…, 리슈아의 힘이 없으면 찾아보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아틀란티스의 서고에는 세상의 모든 지식에 대해 쓰여있는 책이 모여있었다. 그중에서도 자격이 있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금서고, 그 존재는 세르미네도 알고 있었지만 그조차 가본 적은 없었다.

“리슈아. 앞으로 조금이라도 몸이나 기억에 이상이 있다면 바로 보고해주세요. 그리고 그 애쉬라는 자… 그자를 보게 되더라도 말이죠.”

루아가 가연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유래 없던 일들, 앞으로도 일어나기 힘든 일들이기에 그녀 또한 신중히 대처하고 싶은 것이었다. 가연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알겠어요.”

루아는 가연의 대답을 만족스럽게 듣고는, 마이데가 들고 있던 톱니바퀴 열쇠고리를 가리켰다.

“이것은 아틀란티스에서 맡아 보관하겠습니다. 폴라로이아가 조사도 겸할 겁니다.”

“알겠어. 혹시 모르니 아까처럼 다시 봉투에 넣어 줄게.”

마이데는 손수건에 꺼내 올려둔 열쇠고리를 조심스럽게 봉투에 집어넣어 밀폐하고는 루아에게 건넸다. 루아는 그것을 폴라로이아에게 다시 주었고, 그는 특수한 문자가 여럿 쓰인 녹색 주머니를 꺼내 다시 한번 열쇠고리를 봉인했다.

“그렇게까지 철저히 해야 하는 거야?”

세르미네의 물음에 루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신일지도 모르는 자가 준 물건입니다. 매사에는 조심해야 뒤탈이 없는 법이지요.”

“그건 맞는 말이군.”

세르미네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가연이 끼어들었다.

“아니야. 애쉬는 마신 같은 게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모두의 이목이 가연에게 쏠렸다. 하지만 가연은 굴하지 않고 열심히 애쉬를 변호했다.

“그가 마신이었다면 나를 도와줬을 리 없잖아. 게다가… 어쩐지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애쉬는 절대로 마신이 아니라고 말이야.”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래도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워낙 가연이 이렇게 의견을 강하게 말하는 일이 드물어 무어라 반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애쉬가 마신이라는 근거 역시 없었다.

“그럼 그 사안에 대해서는 당분간 말을 아끼도록 하지요. 폴라로이아, 이젠 가야 할 시간입니다.”

루아의 말이 끝나자, 폴라로이아는 기기들을 정리하고 그녀의 옆에 섰다. 두 사람은 간단한 작별 인사를 한 후 아틀란티스로 떠났고, 다시 세 사람만이 넓은 집에 남았다.

“자, 그럼 이제 가연이의 몸에 이상이 없다고 하니 안심이네. 그럼 늦은 저녁 식사를 해 볼까?”

마이데가 애써 밝게 말했다. 그러나 가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자신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굳게 닫힌 문을 세르미네는 감히 열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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