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수호룡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그 자리의 모두가 입을 모아 폴라로이아에게 물었다. 그런 일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사로 각성할 때 들리는 수호룡의 목소리 때문에 각각의 수호룡이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호룡은 그저 전투에 도움을 주는 존재일 뿐이었다. 인격체로서 마족과의 싸움에 개입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세르미네조차 본인의 수호룡을 직접 만난 적은 기사 서품을 받을 때뿐이었다. 상당히 거만한 말투를 사용하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기에 기억에 강하게 박혀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자신의 수호룡에게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도 세르미네는 몰랐다.
게다가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잠깐, 잠깐만요. 그렇게 큰 용이 이 아파트에 나타나면 다 무너질 거라고요!”
집이 무너져 반강제로 이사를 해야 했던 쓰린 기억을 가진 가연이 당황하며 외쳤다. 그러고 보면 그것도 상당히 문제였다. 이전의 집이야 어떻게든 변상을 했다지만, 이렇게 고급 아파트가 무너지면 아틀란티스의 재정에 큰 타격이 올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이 수호석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마치 산들바람 같은 나긋나긋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원지는 바로 수호석 안이었다.
“자, 잠깐만….”
가연이 말렸지만, 이미 수호룡은 바람을 일으켜 나올 준비를 했다. 그는 집안이 쑥대밭이 될 것을 우려했으나 바람은 굉장히 부드럽고 따뜻했다. 마치 봄날의 햇살이 그대로 바람이 되어 온 집을 감싼 느낌이었다. 물론 물건이 깨지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세르미네도 이런 일은 처음인지라 반은 걱정하는 마음으로, 반은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볼을 간질이던 바람이 멎고, 그 자리에 한 소년이 나타났다.
가연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소년은 길고 검은 머리카락에 옛 느낌이 나는 도포를 입고 있었다. 짙은 회색의 도포를 하얀 허리띠로 감싸고, 초록색의 끈을 매듭지어 만든 옥노리개를 차고 있는 소년은 한눈에 봐도 굉장히 온화한 인상이었다.
약간 내려간 눈매와 긴 속눈썹, 그리고 그 아래에서 빛나는 녹색 눈동자는 수호석의 색과 똑같았다. 입꼬리를 조금 올려 웃던 소년은 바람이 멎자 그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 모습으로는 처음 뵙는군요. 바람의 수호룡, 이아니아입니다.”
아마도 그곳의 모두가 그랬겠지만, 세르미네는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수호룡이 바깥세상으로 나온다고 하기에 조그맣게 몸 크기를 줄인 용이 나타날 줄 알았다. 하지만 나타난 것은 자신들과 별반 생김새가 다를 것 없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수호룡에 이름이 있다는 것 또한 금시초문이었다.
“제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놀라셨나 보군요.”
이아니아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폴라로이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호룡도 기나긴 세월을 살면 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다. 서방에서는 폴리모프라고 하고, 제가 살던 동방에서는 둔갑술이라고도 했죠. 아무튼, 길게 현신하지는 못하지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폴라로이아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아니아의 이야기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다못해 루아가 나서서 이아니아의 말을 잘 풀어 해석해주었다.
“저도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선배 무녀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수호룡들도 각각 고유의 이름과 인격이 있으며, 살아온 세월도 천차만별이니 긴 세월을 산 수호룡은 특별한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가령, 제 수호룡에는 LX-011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그래? 그럼 내 수호룡은 이름이 뭔데?”
호기심이 잔뜩 어린 목소리로 리레시아가 물었다. 그러나 루아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때가 되면 직접 수호룡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은 이아니아의 이야기가 우선입니다.”
“그래. 그건 맞는 말이다. 이아니아,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잠자코 듣고 있던 세르미네가 물었다. 이아니아는 말을 꺼내기 전에 가연이 내온 차로 목을 축였다.
“감사합니다. 차가 참 맛있군요.”
컵을 탁자에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은 이아니아는 모두의 얼굴을 한 번씩 돌아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나타난 마족, 그리고 언급된 마신의 존재. 이것들은 분명 당신들이 지금까지 싸워온 적과는 다릅니다. 그건 아시겠지요.”
“그래. 우리가 판단하는 마족의 등급이 더 이상 맞지 않아. 예상보다 힘이 훨씬 강력하고, 또 변형됐어.”
마이데가 조금 전 상대했던 마족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본래 기사들은 쌓아온 경험에 의해 나타난 마족의 등급을 추측하곤 했고, 대부분은 전부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마족은 달랐다.
“모든 게 마신이라는 존재가 부각되면서 바뀌었지. 우리는 그 마신이 누구인지, 목적이 뭔지 알아내야 해. 그리고 결국은 싸워야겠지.”
세르미네도 눈을 찌푸리며 다소 딱딱하게 말했다. 그를 사이에 두고 가연과 리레시아는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가연은 아직 기억이 온전치 못했기 때문이었고, 리레시아는 문제의 마족을 보지 못했기에 상황을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아니아는 그런 그들의 심정을 안다는 듯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지피지기 백전백승입니다. 적을 아는 것 또한 전술의 일부이지요.”
“하지만 마신의 존재는 지금껏 아틀란티스에서도 알지 못했던 사실입니다. 그에 대해 알 방법이 있겠습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루아의 질문이었다. 물론 이아니아를 추궁하는 것이 아닌, 그라면 해답을 알고 이런 말을 꺼냈을 거란 전제에서 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아니아는 그 해답을 알고 있었다.
“여러분은 ‘봉래도’라는 섬을 아십니까?”
처음 듣는 이름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서로 눈빛만 교환할 뿐, 말을 하지 않자 이아니아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었다.
“봉래도 한가운데 솟은 봉래산. 그곳은 먼바다 끝에 있다는 전설의 땅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 실체는… 아틀란티스가 생기기 이전에 마족과 싸우던 자들이 살던 곳입니다.”
“뭐?”
이아니아의 말에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다. 아틀란티스 이전 세대의 기사들이라니…,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또한 근거 없는 말도 아니었다. 마족의 정확한 출현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아틀란티스가 생기고 나서부터 갑자기 나온 것 또한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마족들이 계속 나타났었다면, 그들을 상대하는 자들도 분명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때에도 마신이 나타났었다면, 적어도 언급이라도 됐었다면….
“그 봉래산에는 어떻게 갈 수 있지?”
마음이 급해진 세르미네가 이아니아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순간이동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굉장히 강한 결계로 보호받는 곳이니까요. 출입구 또한 막혀버려 아마 정공법으로는 갈 수 없을 겁니다.”
“아니, 그럼 지금 이야기는 아무 소용없잖아.”
리레시아가 투덜거렸다. 가뜩이나 어려운 이야기들에 머릿속이 복잡한데, 갈 수 없다는 이야기에 실망이 큰 모양이었다.
“딱 하나 방법이 있습니다.”
이아니아는 잠시 몸을 돌려 창문 너머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봄 하늘이 지평선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이아니아의 시선은 그보다 훨씬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봉래산은 본디 삼선산 중 하나. 그런 상서로운 산과 섬을 관리하던 곳이 있었지요. 곤륜이라는 곳입니다.”
“곤륜이라면 옛 중국의 전설이잖아요. 요즘엔 무협지에서나 볼 수 있는 이름인데….”
그나마 아는 단어가 나오자 가연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사학과였기에 역사나 전설에 관해서라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곤륜에 대해서도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전설이 반드시 허구는 아니지요. 아틀란티스 또한 인간들 사이에서는 전설이지만, 엄연히 실존하지 않습니까.”
이아니아의 말에 가연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건 전설로 남아야만 했던 이유가 있는 건가요?”
이번에는 루아가 예리하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워낙 오래된 곳이기도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있지요. 자세한 것은 그곳에서 들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곤륜에 가라는 말인가요? 그, 그, 막 엄청 험한 산을 타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요?”
겁먹은 가연이 세르미네의 한쪽 팔을 꽉 붙잡고 이아니아를 바라보았다. 제발 아니라고 부정을 해달라는 눈빛을 가득 담아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곤륜 역시 순간이동을 쓸 수 없는 곳. 하지만 중턱까지는 제가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그 산의 꼭대기에 서왕모의 사당이 있으니 우선 그곳을 목표로 하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서로의 눈치만 보는 가운데, 침묵을 깬 것은 세르미네였다.
“그래. 갈 수밖에 없겠군. 그 곤륜인가 뭔가 하는 곳에 말이야.”